〈 56화 〉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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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시즌도 아닌데, 관악산 입구가 알록달록하다.
형형색색의 등산복을 입은 행렬이 등산로로 끊임없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온과 단비는 간편한 복장을 하고 건설환경종합연구소 들머리에서 신지균을 기다렸다.
한국대 공대 쪽에서도 관악산 등산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럼에도 건설환경종합연구소 쪽에서 시작하기로 한 것은 이쪽 등산로가 초등학생도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쉬운 난이도이기 때문이다.
휴일이라 그런지 정말 많은 등산객들이 버스에서 내려 등산로로 사라졌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10시 30분 즈음에 신지균이 모습을 드러냈다.
혼자가 아니었다.
함께 공연하는 배우들이 그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이온과 단비는 신지균의 일행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가자!”
워밍업 따위 없다.
곧바로 등산이 시작됐다.
지도앱으로 연주대와의 거리를 확인해보니 대략 2Km다.
숨이 깔딱깔딱 넘어간다고 해서 깔딱고개.
이온은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유유자적했다.
무지막지했던 액션캠프를 수료한 단비 역시 술에 절여졌음에도 제법 잘 따라왔다.
문제는 신지균의 연극팀 배우들.
“이온아, 저기 돌탑에 돌 하나 얹어놓자.”
뒤쳐진 연극팀과 보조도 맞출 겸 이온은 돌탑 구간에서 잠시 쉬어갔다.
“안 숨차?”
“그 미친 액션캠프 체력훈련도 버틴 나야. 겨우 초보자 코스 쯤이야!”
단비는 깔딱고개를 씩씩하게 오르는 와중에도 틈틈이 스마트폰으로 셀카를 찍는 여유를 보였다.
햇살도 좋고 하늘도 맑고 푸르러서 절로 기분이 좋았다.
연극팀이 힘들어하긴 했지만, 비교적 수월하게 정상에 오를 수가 있었다.
관악산 글자가 새겨진 커다란 바위 주변으로 인증샷을 찍으려는 인파가 바글바글했다.
이온과 단비 역시 연극팀과 함께 인증샷을 찍었다.
그런 후, 연주암을 구경했다.
연극팀 막내들이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왔다.
신지균이 커피를 받아 들고 요사채 툇마루에 자리를 잡았다.
단비와 연극팀은 뿔뿔이 흩어져 연주암을 구경하거나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온이 슬그머니 신지균 옆에 자리를 잡았다.
“선생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데?”
“메소드 연기를 구별하는 법이 있습니까?”
“쉽지.”
이온이 기대 가득한 눈망울로 신지균을 쳐다봤다.
신지균은 이온에게 눈길로 주지 않고 커피를 호로로 마시며 말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영화 속 캐릭터가 기억에 남는지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가 기억에 남는지 생각해보면 돼.”
“......?”
“메소드 연기라는 것은 배우보다 영화 속 캐릭터가 더욱 선명하게 보이게 마련이거든.”
이온이 신지균의 말을 곱씹었다.
전통적인 접근방식에서 배우의 유형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캐릭터를 창조하기 위한 연기접근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내부적으로 접근하는 유형과 외부적으로 접근하는 유형이다.
복잡한 설명 대신 아주 단순하게 예를 들자면 내부적 접근을 선호하는 미국 배우들과 외부적 접근 방식의 영국 배우로 구분할 수 있다.
미국식 연기 방법론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메소드 연기(method acting)’다.
스타니 슬라브스키에서 영향을 받은 미국의 리 스트라스버그 등이 확립시킨 연기법으로 배역에 가장 가까운 자신의 경험이나 정서적 기억, 감각을 떠올려서 연기하는 방법이다.
가령 배우가 극 중에서 누군가 살해하는 장면을 연기해야 한다고 치자.
배우는 실제로 자신이 겪어보지 않은 경험을 진실하게 연기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따라서 배우는 살면서 본인이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그 때의 감각을 떠올리고 그 상태에 일체화 되도록 접근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극단적인 예일 뿐이고, 보통 영화나 드라마의 배역의 실제 케이스를 배우가 직접 체험해보거나 일체화하는 과정 등을 거치면서 캐릭터를 구축하게 된다.
그래서 미국배우들은 대체로 배우 개인의 개성(personality)을 이용해 자신만의 특징을 그대로 자연스럽게 연기하려고 한다.
다만 이러한 스타일의 배우들은 자신의 개성을 이용하기 때문에 출연작품마다 캐릭터가 비슷비슷하게 보일 수가 있다.
이런 배우들은 대체로 성대모사, 태도나 버릇 모사 같은 것을 많이 하지 않는다.
최대한 자연스럽고 실제와 가까운 편이 좋다고 믿는 연기접근법이다.
반면에 유럽 특히 영국 쪽 배우들은 본인의 심리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신체나 외형을 캐릭터에 맞게 변형시킨다.
어떤 대배우들은 작품마다 누군지 아예 몰라볼 정도로 자세, 제스처, 말투, 억양, 목소리, 외모 등 전체적으로 배우 자신을 지우고 완전히 캐릭터로 변화시켜버린다.
그들은 신체적 또는 외부적인 특징을 만들어내면 내면적인 부분은 저절로 따라온다고 믿는다.
과거 뉴욕을 중심으로 한 메소드 연기 추종자들은 개인적 심리를 이용한 훈련을 많이 했고, 유럽 쪽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무용을 비롯해 신체훈련을 꽤 공들여 한다.
과거에는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스타일을 기본으로 하는 영화나 사실주의 연극에서는 심리적인 미국식 메소드 연기가 더 널리 활용되었고, 표현적이고 비사실적인 연극에는 신체를 통해 접근하는 외부적 접근법이 더 많이 쓰였다.
미국식 방식은 매우 자연스럽다는 장점이 있지만, 배우 그 자신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 배우가 출연한 작품마다 기본적으로 비슷하게 보이는 편이고, 영국식 방식은 배우의 기술이 아주 탁월한 수준에 이르지 않으면 인위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 너무 비슷하게 흉내 내려고 하다 보니 어색한데?
- 캐릭터 성이 강한 인물을 만들어내려는 강박이 불편해.
영국식 접근의 연기는 때로 그와 같은 인상을 관객에게 심어줄 수가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학교에서 배우는 것일 뿐.
실전에서 그런 구분은 의미가 없다.
“그런 내용들을 알아두면 좋아. 아니 알아둘 필요는 있어. 그런데 명백히 현재에 와서는 그런 구분은 무의미해. 이젠 사실주의, 자연주의, 표현주의 그 외 기타등등 다양한 방법론을 복합적으로 사용하니까. 메소드 연기를 기본으로 하는 배우들도 역할마다 신체나 분위기를 완전히 변형시키기도 하니까.”
흔히 뛰어난 연기력의 배우를 ‘성격파’ 배우라고 뭉뚱그려서 표현한다.
주로 메소드 연기법으로 접근하는 배우들에게 하는 말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전통적인 영국식 연기접근법을 사용하는 배우들에게 그런 표현을 하는 것은 실례가 될 수도 있다.
영국이나 프랑스의 대배우 가운데 미국식 연기법을 좋아하지 않는 이도 많기 때문이다.
“저거 한 번 읽어봐라.”
신지균이 요사채 앞에 놓여 있는 안내문을 가르켰다.
이온은 직감적으로 발성과 발음을 테스트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기도도량이오니, 조용히 해주세요.”
“화났어.”
“기도도량이오니, 조용히 해주세요!”
“온화하고 친절해.”
“기도도량이오니, 조용히 해주세요~”
“음색은 나쁘지 않네.”
매력적인 음색.
듣기 편한 소리.
안정적인 소리.
내기 편한 소리.
음색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바꾸기 위해서는 정말 오랜 시간 자기와의 싸움을 거쳐야 한다.
발성 연습을 하는 이유다.
“복식호흡하냐?”
“중학교 때부터 비보이를 해서 복식호흡을 해오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이야기 했지만, 매체연기만 할 거라면 복식호흡도 중요하지 않아.”
“제가 알고 있는 것과 너무 달라서 혼란스럽습니다.”
“무대 연기는 실시간이자 육성으로 장시간 대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복식호흡, 발성이 기본 중에 기본이겠지만, 매체연기는 동시녹음시스템이나 후시녹음 기술이거나 테크놀로지의 도움을 받을 수가 있어.”
“그렇다고 아예 무시하기에는 조금 불안합니다.”
“왜?” “발성과 호흡이 받쳐주지 않으면 힘 있는 대사처리가 힘들지 않습니까? 제 아무리 영화나 드라마 연기라고 하더라도요.”
“발성과 호흡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야. 왕도도 없고.”
“꾸준함만큼은 자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
호흡이야 연습량으로 극복할 수 있다.
그런데 발성은 하루 종일 연습할 수도 없었다.
“목은 많이 쓰면 고장이 날 수 있어. 자칫 성대 결절이나 다른 문제들이 생길 수 있지.”
“입술, 혀, 턱 운동뿐만 아니라, 씹는 훈련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발성의 기본이 뭐라고 생각해?”
“명확한 전달성과 표현력입니다.”
“자기 목소리를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첫 출발점이야.”
배우의 생명은 무엇보다 전달성이다.
화술, 신체, 표정.
그중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화술이다.
또 좋은 화술의 밑바탕에는 반드시 발성의 기초가 탄탄해야 한다.
안정적이고 밀도 있는 소리를 만들기 위해서다.
“어쭙잖은 놈들이 입에 볼펜 물고 발음 연습해라, 간장공장공장장 어쩌고저쩌고 주접들을 떨고 있는데, 절대 그런 거 따라하지 마.”
“......?”
“아나운서의 발성과 화술은 또박또박 문장을 귀에 꽂아줘야 해. 배우는 대사가 관객에게 명확하게 들리지 않아도 되는 경우도 있어. 어떤 경우에는 일부러 대사를 흐리게 연기할 때도 있고. 왜? 감정이나 무드가 언어보다 더 표현력에서 폭발력을 발휘할 수가 있으니까.”
“아......”
이온의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미국의 예술영화를 보다보면 대사가 흐릿하게 들리거나 배우가 지나치게 낮게 읊조리는 대사처리를 하는 경우가 많다.
영어만큼은 원어민 못지않다고 자부하는 이온의 귀에 정확한 문장으로 안 들릴 정도면 뭔가 이유가 있었던 것.
대사가 아닌 배우의 표정, 태도, 분위기로 더 많은 걸 전달했던 것 같다.
“발성, 발음, 호흡. 그것들 연습을 따로 떨어뜨려 놓고 연습하지 마.”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닥치는 대로 대본을 구해서 읽어. 또박또박 읽는 건 중요하지 않아. 연기를 해야 돼.”
“연기를 못 하는데요?”
“어떤 천재도 연기 트레이닝을 받지 않았는데 연기를 잘 할 순 없어.”
신지균은 연습 만능주의자다.
꾸준히 오랜 시간 훈련만이 연기의 경지를 끌어올리는 절대 답안이고 여긴다.
“그저 읽는 것에 그치는 건 연기 훈련이 아니야. 말 하는 연습을 해야 해. 매일매일 꾸준히 그렇게 읽고 녹음을 해서 너 스스로 모니터하고, 때론 가족이나 연인에게 녹음한 것을 들려줘. 그리고 어떠냐고 물어봐.”
“무엇에 관해서 말입니까?”
“단어가 잘 들리는지 또 말하는 것 같은지.”
“예.”
“다음 주에는 북한산 산행을 할 거야. 오려면 오고 아니면 말고.”
“예. 선생님!”
다음 번 등산에서도 가르침을 주겠다는 말이다.
툭툭.
신지균이 툇마루에서 엉덩이를 뗐다.
“오디션은?”
“연기 오디션을 본 적은 없습니다.”
“기회 될 때마다 오디션 봐.”
뭔가 도제 시스템인 듯 아닌 듯 알쏭달쏭 교습법이다.
기본도 안 잡혔는데 무작정 오디션을 보라니.
“당연히 망신을 당하겠지. 처음에는 잘 못할 거야. 오디션을 한 백 번 쯤 보면 잘하게 돼 있어. 탈락도 해보고 거절도 당해봐야 공부가 되는 거야. 오디션을 그저 일감을 따는 걸로만 보면 지긋지긋한 무명의 시간일 뿐. 시행착오를 통해 성장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어.”
“예. 선생님.”
“뭔가 하려는 사람은 방법을 찾고, 안주하려는 사람은 이유를 찾는 법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오디션을 배우들에게 정말 큰 기회다.
기회를 잡으면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것이고, 비록 잡지 못했다고 해도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것이 아니다.
신지균은 후배들에게 오디션에 대한 정보를 주고 때로 판도 깔아주고 있다.
한 번만 그렇게 알려주면 알아서 자신의 길을 찾는 후배들이 많다.
그럴 때마다 뿌듯함을 느낀다.
스턴트맨도 그런 후배 녀석들처럼 자기 길을 찾길 바랐다.
“하산해서 도토리묵에 막걸리 한 사발 해야지. 가자!”
✻ ✻ ✻
26기 액션캠프 기수생 훈련이 한창이다.
계절은 봄을 지나 여름으로 향하고 있다.
이온은 <태왕 광개토>를 비롯해 몇몇 대규모 액션 장면 촬영에 다녀왔다.
이렇게 일을 해서 과연 먹고 살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알바 안 해도 괜찮겠어?”
“고민이야.”
“등록금 다 까먹는 거 아니냐?”
“아직은 괜찮긴 한데......”
“8월 열리는 협회 트릭킹 대회 한 번 안 나가볼래? 상금이 500만 원이더라.”
“3라인과 5라인이지?”
“응.”
상금이 걸린 트릭킹 국내 경기에는 1VS1 배틀은 없다.
상금도 비보이 대회보다 훨씬 적다.
심지어 참가비도 받는다.
한국에서 트릭킹은 비주류이기 때문에 스폰서를 잡지 못한다.
에너지 음료 회사가 주최하는 대회가 아닌 이상 대회를 열기 위해서는 출전 선수들에게 참가비를 받을 수밖에 없다.
안타깝지만 형민은 아직 상금이나 국제대회 출전권이 달린 이벤트에 나갈 정도는 아니다.
“정렬이형과 상의 해봐.”
“팀이 있는데 날 끼워줄까?”
개인적으로 트릭킹 기술의 감이 잃지 않으려고 훈련은 하고 있다.
하지만 카나한 게더링에서 카이사르와 붙었던 때만큼의 폼이 유지되고 있는지 자신 할 순 없었다.
“조만간 정렬이형 보러 갈게.”
“그래라. 이번 주에도 신지균과 등산 가냐?”
“형도 같이 갈래?”
“어차피 축구할 때 만나는데 뭘.”
매주 일요일에는 신지균 배우를 만났다.
주로 등산을 갔다.
때로 영화인 축구팀이나 야구팀 경기에 따라가기도 했다.
신지균을 만나는 날은 일종의 숙제검사를 받았다.
그런 후에는 여지없이 술자리까지 이어졌다.
이온은 술을 마시지 못했지만, 술자리 마다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매니저 형 말 들어보니까 책이 많이 들어온다고 하시던데, 이렇게 오래 영화에서 떨어져 계셔도 돼요?”
“음... 나는 아주 잘할 수 있으면 좋겠어.”
“......?”
“그런데 오래 한다고 해서 잘하는 건 아니야.”
신지균이 항상 하는 말이었다.
“작년에 영화를 하나 했는데...... 신인이 한 순간에 몰입해서 생생하게 표현하는 연기를 당해낼 수가 없겠더라. 나더러 영화를 할 때마다 파격 도전을 한다고 하는데 난 그냥 할 수 있어서 한 거야. 그간 너무 많이 나와서 새로운 시도를 할 게 없어. 상투적인 연기가 몸에 배었겠지.”
이 부분은 신지균의 잘못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거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에게 원하는 캐릭터가 있고 역할이 있으니까.
매체 배우는 끊임없이 이미지를 소비당할 수밖에 없다.
연기력이나 인격과 상관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