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물 들어올 때 모터 달아야지! (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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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문경에는 유명한 사극세트장이 두 곳 있다.
바로 문경새재오픈세트장과 가은오픈세트장이다.
문경새재오픈세트장은 조선 시대 세트장이다.
경복궁 23동, 동궁 5동, 궐내 각사 7동, 사대부 집 68동, 성문 1동, 일지매 산채와 저잣거리(초가 22동, 기와 4동) 등이 조선을 배경으로 조성돼 있다.
반면에 삼국시대 배경으로 조성된 세트장이 가은오픈세트장이다.
고구려와 신라궁궐 각 1동씩, 성곽 3개소(평양성, 안시성, 요동성), 귀족 집 42동, 초가 37동, 성내 마을 등이 배치돼 있다.
요동성 세트장에 이온 일행이 도착했다.
황매산 촬영과 달리 <태왕 광개토> 배우진과 스태프들이 단출했다.
그럼에도 장비차(크레인), 제작부차, 조명차, 밥차, 발전차가 여러 대가 움직였고, 현장 편집-녹음-미술-조명-소품-특수효과-CG-분장-헤어-의상 등 50명 넘는 제작진이 세트장으로 모였다.
“선배님, 여기서 자주 찍습니까?”
조현동이 석현 선배에게 물었다.
“많을 때는 20편도 찍었던 것 같고, 일 년에 최소 5편은 찍을걸.”
“여기 빌려서 촬영할 때 얼마 내야 합니까?”
“영화가 200만원인가 그렇고, 드라마는 그 절반 가격이야. 왜 여기 빌려서 영화 찍게?”
“그냥 궁금해서요.”
“황매산 세트장은 특이한 케이스였고, 여기는 너희가 액션배우 그만두지 않은 한 지겹게 오게 될 거다.”
이온이 스턴트맨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요동성 성벽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서는 특수효과팀이 공기안전매트를 설치하고 있었다.
일반인들은 아파트나 고층건물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나 볼 수 있는 것이 공기안전매트다.
스턴트맨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물건 중에 하나다.
“수고가 많으시네요.”
이온이 특수효과팀장 오세찬에게 인사했다.
“어, 이온아~”
“좀 주무셨어요?”
“말도 마. 죽겠어.”
“갈비탕 나쁘지 않던데, 해장도 할 겸 아침식사는 하고 넘어오시지.”
“그 시간에 잠을 좀 더 자는 게 나아.”
술을 마시지 않는 이온은 회식이 끝나자마자 숙소로 돌아왔다.
반면에 일부 스태프들은 숙소로 돌아와서까지 술판을 벌였다.
그 일부 스태프에 특수효과팀장과 무술팀 퍼스트 석현 선배도 포함된다.
“세찬이형, 와이어는 언제 걸어줄 거야?
어느새 석현 선배가 다가와 물었다.
“와이어부터 촬영하게?”
“배우 먼저 찍고 보내고. 우리끼리 사부작 사부작 촬영합시다.”
“그럼 매트는?”
“혹시 모르니까 와이어 먼저 설치해 놓고 바람 넣어둬요.”
“오케바리~”
석현 선배가 옆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이온을 향해 입을 열었다.
“몸 안 풀고 여기서 뭐해?”
“오기사님한테 아침인사도 하고, 공기안전매트도 구경할 겸 왔습니다.”
“매트 처음 봐?”
“체육관에서 보긴 봤습니다.”
“안 써 봤어?”
“공박스와 스펀지매트만 써봤습니다.”
이온이 특수효과팀에게 인사했다.
“그럼 수고들 하세요.”
“너도 고생해라.”
지난 황매산 촬영 때 특수효과팀과 안면을 익힌 이후로 이온은 인사도 싹싹하게 잘하고, 먼저 다가가서 말도 걸고 궁금한 것이 생기면 곧바로 묻기도 했다.
<태왕 광개토>의 특수효과팀 D-Lines는 한국 드라마 특수효과의 70% 정도를 점유할 정도로 잘 나가는 업체다.
무술팀은 특수효과팀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액션배우 일을 하다보면 함께 작업을 할 수밖에 없다.
친해져서 나쁠 것이 전혀 없다.
참고로 영화·드라마 특수효과는 실제로 장면을 연출하는 'SFX(Special Effects)'와 컴퓨터 그래픽으로 표현하는 'VFX(Visual effect)' 두 분야로 나뉜다.
SFX는 눈·비·바람 같은 기상효과, 자동차 액션, 폭파 효과, 불 효과 등을 만들어 내는데, 와이어액션이나 안전매트리스 같은 장비 또한 특효팀이 책임진다.
“이온아.”
“응 누나, 왜 요?”
동료들에게 가다가 제작부가 이온의 발길을 붙잡았다.
“너 보험계약서에 사인했었나?”
“산청에 있을 때 했잖아요.”
“근데 왜 네 것만 없지?”
“잘 찾아봐요. 어디 흘렸나보죠.”
“미안. 내가 다시 확인해볼게.”
다른 무술팀원들은 스태프들 사이에서 겉돌았다.
반면에 이온은 <태왕 광개토>에 참여하는 젊은 조수급 스태프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눴다.
일단 이온의 인상이 다른 스턴트맨들과 비교해 선량해(?) 보이는데다가 말투에서도 교양(?)이 느껴지고, 성격까지 수더분해서 스태프들과 금방 친해졌다.
동기들은 촬영현장에 도착해 열심히 인사를 다니는 이온을 이상하게 봤다.
나대기 좋아하는 조현동조차 촬영장에서 꿰다놓은 보릿자루였다.
암튼 스턴트맨이 촬영장에 도착하면 보험을 들어야한다.
안전을 중요시해야 하기에 위험하거나 다소 작은 액션이어도 필수다.
일반적으로 영화·드라마에서 생명보험과 상해보험은 ‘스텝 보험’으로 가입한다.
이 보험에 스턴트맨은 해당이 안 된다.
스턴트맨 직업군은 보험협회가 정한 최고 위험등급이기 때문에 1인당보험료가 비싼 보험 상품이 따로 존재했다.
그리고 스텝 보험은 크랭크인부터 촬영종료를 기간으로 해서 보험료과 보장금액이 책정되는데 반해서 스턴트맨들은 위험한 장면을 촬영할 때마다 건당으로 보험을 들어야 했다.
보험료가 비싼 것도 문제지만 보상 수준이 낮은 것도 문제다.
보험사의 횡포 같지만 이조차도 황송할 따름이다.
아예 보험 상품 자체를 없애버리면 스턴트맨들만 더 곤란해지니까.
“당겨!”
최창민 감독의 구령에 맞춰 무술팀이 와이어를 당겼다.
그럴 때마다 와이어를 차고 있는 단역배우가 성벽 여장에서 위태롭게 허우적거렸다.
오전 11시.
이온과 동기들은 열심히 와이어 줄을 당겼다.
특수효과팀과 함께 줄을 당겨 단역배우를 지상 3층 높이의 성벽 여장 너머로 띄우는 ‘단순한’ 일이지만, 와이어 연기가 어색하지 않게 해야 하고, 배우의 안전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이온과 동기들은 바짝 긴장했다.
단역배우의 대사가 있는 장면이라 대역을 쓸 수도 없었다.
와이어 경험이 없는 단역배우와 스턴트맨의 조합이라고 할까.
“슛 간다!”
“레디!”
“당겨!”
“지금이야. 풀어!”
“커트!”
최창민 감독의 구호에 맞춰 와이어를 당기고 풀고를 몇 번 반복했다.
대략 여섯 번 정도 반복하고 나서야 ‘오케이’ 사인을 받을 수 있었다.
요동성 세트 촬영에서는 대형 블루스크린이 계속해서 자리를 옮겼다.
그것 말고는 ‘슛 들어갑니다’라는 말만 가끔씩 들릴 뿐, 비교적 조용히 그리고 차분하게 촬영이 진행됐다.
“무술팀! 모두 성벽으로 올라와!”
최창민 무술감독이 25기를 불러 모았다.
이온과 동기들이 얼른 성벽으로 올라가서 도열했다.
“성벽에서 뛰어내릴 사람!”
“......”
난데없는 제안에 25기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자신 없어? 겨우 3층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게 무서워?”
이온이 손을 번쩍 들었다.
“뛰어내는 겁니까? 아니면 와이어 차고 떨어지는 액션만 취하는 겁니까?”
“내가 말을 잘못했다.”
최창민이 잠시 뜸을 들였다.
“뛰어내리는 게 아니라. 떨어지는 거다. 와이어 안 차고!”
“......”
25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석현 선배가 나섰다.
“형, 와이어 안 차고 떨어지는 걸 애들한테 맡긴다고요?”
“뭘 와이어까지 달고 뛰어? 겨우 이 정도 높이를.”
당연히 자신이나 세컨드 어시스턴트들은 아무 상관없다.
온갖 묘기를 부리며 공기안전매트로 다이빙하는 것도 아니고, 겨우 성벽 여장에서 아래로 고꾸라지는 액션연기는 지금까지 수백 번 경험했기에 막말로 누워서 떡먹기다.
그런데 막내 기수는 다르다.
“왜 못해?”
“아직 이놈들 심화교육 이수도 못 했어요.”
“파주에서는 잘 만 뛰어내리던데?”
파주 액션아카데미 체육관보다 현재 요동성 성벽 세트가 1m 정도 더 높다.
고작 1m 차이가 아니다.
심리적으로 상당히 멀고 높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체육관에서는 스펀지매트 놓고 잘만 뛰잖아. 공박스도 아니고 공기매트까지 깔아놨구만. 세찬이네 회사 못 믿어? 아까 보니까 오늘은 A급 매트 가지고 나왔더구만.”
“그래도 2년 차도 아니고, 지금은 무리지 싶은데요.”
“이 정도 못하겠다면 스턴트맨 때려치워야지. 애들 데리고 MT 왔어?”
석현 선배는 대답할 말이 궁색했다.
촬영현장은 스턴트맨들이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으니까.
사실 실전만한 연습도 없다.
연습이 실전이고 실전이 연습인 것이 스턴트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25기가 성벽 여장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어 3m가 조금 넘어 보이는 저 아래 안전공기매트를 내려다 봤다.
후우.
한숨을 쉬는 녀석도 있고.
달달달.
떠는 녀석도 있다.
“과연 여기서 뛰어내릴 수 있을까?”
“와이어를 달면 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말이지......”
몸에 안전장구를 착용하지 않고 뛰어야 한다.
스턴트 기술 문제 이전에 배짱이 필요하다.
“......!”
이온의 표정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투다.
사실 어릴 때부터 아스팔트나 시멘트 바닥에서도 온갖 덤블링이며 비보잉 난리를 쳤었다.
크지는 않지만 자주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환경이나 여건이 달랐다.
소방관이나 사용할 법한 공기안전매트가 바닥에 깔려있다.
고층건물 4~5층 높이에서 일반인들도 뛰어내린다.
명색이 스턴트맨이 이 정도 높이에서 고꾸라지든 뛰어내리든 못할 이유가 없다.
성벽 너머 아래를 내려다보던 이온이 다시 원래 서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최창민 감독에게 물었다.
“감독님. 한 사람만 떨어지는 겁니까?”
“세 명.”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하고 싶습니다. 아니 할 수 있습니다.”
이온이 제일 먼저 지원했다.
그리고 남은 다섯 명의 동기들은 선뜻 나서지 못하고 망설였다.
“오후에 촬영할 거야. 점심 먹고, 의상 갈아입기 전까지 결정 해.”
“......예.”
“만약 이온이 말고 지원자 없으면, 석현이가 뛰고.”
황매산 야외세트촬영 때까지 ‘막내’ 아니면 ‘한국대’ 아니면 ‘비보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오늘 아침 식당에서부터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최창민 감독이다.
물론 이온에게만 특별히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아니다.
25기 모두에게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슬슬 액션아카데미 정식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았다.
성벽을 내려가는 이온 옆으로 형민이 따라붙었다.
“진짜 괜찮겠어?”
“형, 감독님이 위험한 걸 우리 시키겠어? 할 만 하니까 시키겠지.”
“그건 그렇지만......”
사실 높은 곳에서 안전매트로 고꾸라지는 액션 연기, 가볍게 보면 절대 안 된다.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는 얼굴이 땅 쪽을 향하다가 공기안전매트에 처박히기 직전에 몸을 돌려 등으로 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베테랑일수록 안전매트 코앞에서 몸을 뒤집고, 숙련도가 떨어질수록 일찍 몸을 뒤집게 된다.
“솔직히 형이나 나한테는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그렇지.”
기계체조 선수출신이 형민은 말할 것도 없고, 트릭커인 이온 역시 공중에서 몸을 뒤집고 비틀고 회전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벽에서 몸을 날렸을 때의 속도와 거리감만 파악되면 안전하게 안전공기매트에 떨어질 수가 있다.
물론 파주의 체육관에서도 그와 관련한 훈련을 꽤나 힘들게 받기도 했고.
“그리고 이건 순전히 내 추측인데 말이야.”
“뭔데?”
“오늘 와이어만 당기고 철수하면 우린 일당을 못 받을 거야.”
“말도 안 돼.”
“우리는 스태프로 계약한 것이 아니라, 배우 일당으로 계약하잖아. 오늘 출연을 하지 못하면 일당을 못 받게 돼.”
“그런 거야?”
“응. 아마 최 감독님이 교통비하고 출장비 정도는 챙겨주시겠지만.”
“그게 그거 아냐?”
“당연히 아니지. 고구려병사나 후연 병사 갑옷 입고 스턴트를 하면 6등급 케라를 전부 받을 수 있는 것이고, 와이어만 당기고 말면 내일 오후에 철수할 때 무술감독이 계약한 금액에서 출장비 조로 조금 받고 말 걸.”
그런 고충이 있기 때문에 베테랑 스턴트맨들이 황매산 촬영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간 것이다.
반면에 25기는 이번 문경세트장 촬영이 심화교육의 연장선이었다.
액션아카데미 입장에서는 먹여주고 재워주고 교통비 조금 챙겨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아마 최 감독님이 몇 명이라도 출연료를 챙겨주고 싶으신가봐.”
“그런 속 깊은 배려가......”
“겸사겸사 우리 기수가 깡이 있나 테스트도 해 보는 걸지도.”
이온의 추측은 어느 정도 맞았다.
영화나 드라마 업계에도 성수기가 있고, 비수기가 있다.
드라마의 경우 OTT로 인해 비수기 개념이 많이 흐려졌지만, 방송 편성에 따라서 여전히 비수기가 존재했다.
25기가 심화교육을 끝내고 새로운 기수를 받을 즈음, 영화나 방송 드라마의 비수기와 맞물릴 가능성이 높다.
액션아카데미에 들어온 의뢰가 계약이 완료되어 무술팀 티오가 모두 찼거나 전반적으로 새로운 일감이 줄어들 수 있단 의미다.
당연히 현장에 나가기 시작해야 하는 25기의 기회가 줄거나 없을 수 있다.
최창민 감독으로서는 비록 큰돈은 아닐지라도 그때 가서 조금의 보탬이라도 되라고 나름 챙겨주고 싶은 것이다.
방송출연 개런티는 보통 3개월 후에 입금이 되니까.
“에휴, 스턴트맨 생활로 먹고 살려면,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하는 모양이구나.”
형민은 나이가 있다 보니 경제적인 문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심화교육을 마치면 당장 여기저기 촬영현장을 종횡무진하며 돈을 벌기 시작할 것으로 기대한 것도 사실.
그것이 아니라면 아르바이트자리를 알아봐야 할 수도 있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을 게 아니라. 모터를 달아야지. 이 형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