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할 만하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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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 광개토> 촬영팀은 황매산 촬영을 마무리하고 문경으로 이동했다.
액션아카데미 팀도 함께 옮겨갔다.
모든 스턴트맨들이 문경으로 함께 간 것은 아니다.
최창민 무술팀과 막내 기수만 이동했다.
선배들은 서울로 철수했다.
경험이 일천한 막내 기수만으로 촬영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정오가 되기 전에 문경에 도착했다.
영화·드라마 촬영팀의 단골 숙소인 관광호텔에 짐을 풀었다.
이온을 비롯해 막내 기수들은 점심도 건너뛰고 곧장 잠을 청했다.
그 만큼 피로가 극심했고, 수면이 부족했다.
해가 막 지기 시작할 무렵 이온이 잠에 깼다.
하암.
형민의 단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이온은 관광호텔을 빠져나와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았다.
건물 뒤편의 야외연회장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보이는 잔디밭을 찾아냈다.
최근에 눈이라도 내린 모양이다.
듬성듬성 눈이 남아 있다.
이온은 넓은 잔디밭 중앙으로 걸어 들어가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었다.
그러다가 뭔가를 빼먹었는지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생각해보니 목검을 챙겨오지 않았던 것.
“나도 이제 스턴트맨 다 됐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스트레칭이 끝나면 물구나무서기부터 했다.
그것이 수년 동안 이어진 루틴이었으니까.
하지만 요 며칠 동안은 손에서 목검을 놓은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틈만 나면 목검을 휘두르고 액션검술을 수련했다.
비보이로서의 정체성이 희미해지는 것은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었다.
트릭커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만은 달갑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
획.
이온이 가볍게 핸드스프링을 돌았다.
손을 짚고 앞으로 넘으면 핸드스프링, 뒤로 넘으면 백핸드스프링이라고 한다.
이어서 앞공중돌기를 돌았다.
굳어 있는 관절이 삐걱거렸다.
몸을 충분히 풀어주고 예열시켰다 생각했지만, 추운 날씨로 인해 부자연스럽다.
너무 과격하게 움직이면 탈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이온의 얼굴에는 걱정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다.
도리어 미소가 걸렸다.
휘익!
땅을 차며 이온의 몸이 회전했다.
일명 석고, 정식 명칭은 에어리얼.
손을 바닥에 짚지 않고 허공에서 풍차돌기를 하는 동작이다.
이어서 찡코, 정식 명칭은 사이드플립을 연속해서 돌았다.
듬성듬성 남아 있던 눈들이 이온의 공중제비로 인해 흩날리며 주변을 어지럽혔다.
공중제비에 발차기를 가미하면 태권도시범에서 지겹게 볼 수 있는 서머솔트 킥이 된다.
태권도나 기계체조 좀 한다는 이들이 어렵게 할 수 있을 법한 동작이지만, 잘못하면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휙.
작정하고 몸을 움직이지는 않았다.
토끼발과 회복력만 믿고 까불다가 부상이라도 당하면 본인만 손해다.
나중에 후회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
그걸 망각할 정도로 어리석은 이온이 아니다.
징가도 밟아보고.
윈드밀도 몇 바퀴 돌아보고.
비보잉 풋워크도 밟았다.
마음이 평온해졌다.
확실히 주특기를 연습하면 집중이나 몰입이 잘된다.
부스럭.
인기척이 느껴져 이온이 뒤를 바라보았다.
권용찬 무술감독이 팔짱을 끼고 훈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너 정도 하면 어느 정도 레벨인거야?”
“작은 공연에서 뛸 정도에요.”
“공군 군악대에 비보이로 뽑힐 정도면 잘 한다는 거 아냐?”
“운이 좋았어요.”
“몇 명이나 뽑는데?”
“일곱 명이요. 가끔 여덟 명까지 정원을 늘리기도 하더라구요.”
“경호가 공군 나오지 않았나?”
한국의 대표적인 미남 배우 중에 한 명인 이경호.
당연히 권용찬과 매우 친하다.
한국에서 액션 영화를 단 한 편이라도 찍어본 배우 중에 안 그런 이가 있겠냐마는.
“군악대는 아니시고 일반 공군 만기전역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비보이 병사 인원수가 적어서 가족 같았겠네.”
“가, 좆 같이 지냈죠.”
“......?”
“선임 중에 상꼴통이 있었어요. 걔 제대할 때까지 후임들이 많이 힘들어 했죠.”
“꼭 그런 놈들이 있지. 그래도 비보이 판이 좁지 않냐?”
“저는 메이저 크루 소속이 아니어서...... 그리고 트릭커로 갈아탔잖아요.”
비보잉, 파쿠르, 트릭킹, 마샬 아츠가 다 그 판이 그 판 같다.
서로 영역이 다르다.
트릭커들은 파쿠르나 마샬 아츠와 교류한다.
비보이들은 힙합 영역에서 주로 논다.
군악대 소속 비보이 전역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사회 나와 끈끈한 유대감을 가질 것 같지만, 실제 그렇지도 않다.
더군다나 군 전역 후 계속해서 비보이 활동하는 이도 그리 많지도 않고.
“비보이에 대해 너 만큼은 몰라도. 내가 보기에 꽤 하는 것 같던데. 국가대표 선발전에 못 나가냐?”
“양궁 생각하시면 되요.”
국내 선발전 뚫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여전히 한국 비보이가 세계적으로 먹어주는 모양이지?”
“클래스가 어디 가는 건 아니니까요.”
“다음 올림픽인가에서 비보이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지 않았어?”
“그 전에 아시안게임부터 금메달 두 개가 걸릴 것 같아요.”
“메달 가능성은 있냐?”
“당장은 최소 동메달 확보라고 보면 되고, 당일 컨디션에 따라 금메달도 충분히 가능한데요. 이번이 아니라 다음 대회부터가 문제에요.”
“후계자가 없어?”
“초등학생 비보이가 별로 없어요. 저변이 확 줄어서.”
“거기도 저출산이 문제인가 보구나?”
“그냥 어린애들에게 비보이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나 봐요. 다들 얼반댄스나 KPOP 안무 스타일의 댄스를 배우려고 하니까요. 비보이 협회나 문체부도 딱히 그와 관련해 대책도 없고요.”
“암튼 비보이 입장에서 올림픽 종목 추가가 좋은 현상이겠네. 야구가 탈락한 것은 심히 유감이지만.”
“그렇죠. 김예나 선수를 통해서 피겨에 대해 국민들이 많이 알게 된 것처럼 비보이 배틀도 대중들에게 좀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어요.”
“피겨와 비교가 돼?”
“대중적인 인기를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 김예나 선수 이전에 대중들은 피겨의 예술점수니 기술 난이도니 일도 몰랐잖아요. 일반 대중들은 저 기술은 어떤 난이도고, 기술의 의미는 뭐고, 판정단이 왜 점수를 높게 주거나 낮게 주는지 전혀 몰라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서 형들이 결승전에 올라 외국 선수와 배틀을 벌이게 되면 전문가가 해설을 해주게 되잖아요. 그러면 일반인들이 전에는 몰랐던 비보이 배틀의 세계에서 대해서 알게 되고. 전문가 해설을 들으면서 배틀을 보게 되니까 좀 더 재미를 느낄 수 있지 않겠어요?”
권용찬 감독이 이온의 설명을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힙합 뽕이 충만한 비보이들 중에는 올림픽 정식종목에 들어간 걸 싫어하는 애들도 있어요.”
“왜? 자기들만의 잔치가 될까봐?”
“올림픽 태권도가 지나치게 스포츠를 강조하다보니 격투기는 사라지고 발펜싱이란 조롱을 듣잖아요. 비보이 배틀도 스포츠 정신에 맞게 상대방을 도발하는 행위나 힙합 문화인 핸드사인을 금지하기 때문에 스트리트댄스만의 야성을 잃어버릴 거라고 걱정하는 거죠.”
일부 비보이들이 주장하는 힙합 스피릿 어쩌구 떠들어봐야 일반인들 납득 못한다.
대신 시합태권도의 변질을 예로 들면 곧바로 이해가 된다.
하지만 비보이의 대중화를 위해 올림픽 정식종목은 잘 된 결정임에는 틀림없다.
“아마 트릭킹은 시범종목에도 못 들겠지?”
“오리지널리티가 없어서 힘들지 않을까요?”
“하긴, 좋은 말하면 마샬아츠의 종합판이고 나쁘게 말하면 그냥 잡탕이니까.”
이온은 동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딱히 틀렸다고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감독님?”
“왜.”
“뭐 하나 여쭤봐도 돼요?”
“뭔데?”
“이제 연기는 안 하세요?”
“안 해.”
“왜 요?”
“다들 배우하고 싶다고 하고 좋은 배우도 많고. 한 명 정도는 뒤치다꺼리도 해야지.”
“아쉽지 않으세요?”
“글쎄다. 난 지금도 충분히 재미있어서. 넌?”
“저요?”
“그래. 너 정도면 얼굴도 잘생긴 편에 속하고 신체 스펙 좋고 학벌 좋고 운동신경 좋고. 뭐야? 따지고 보니까 이놈이 여기서 스턴트맨으로 썩을 놈이 아니었네?”
“스턴트맨 할 놈이 따로 있나요? 끈기와 근성만 있으면 된다면서요?”
“그게 말처럼 쉬우면 스턴트맨이 500명은 넘어야지.”
“어떤 무술감독님은 지금이 딱 좋다고 하던데요? 사람만 많아지면 일감이 그 만큼 줄어든다나......?”
“누가? 어떤 정신 나간 새끼가 그 딴 말을 해?”
“홍대에서 친구들하고 술 먹다가 우연히 옆자리에서 하는 말 들었어요.”
거짓말이다.
이온이 말한 무술감독은 임대한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고자질할 순 없지 않나.
‘스턴트맨 풀이 더 커지고 더 다양해져야 하는데...... 하여간 이기적인 새끼들이.’
권용찬 감독은 정치질 혹은 높은 양반들에게 아부 떠는 것, 못한다.
안한다.
환갑을 바라보고 있지만 여전히 상남자다.
여전히 현역이기도 하다.
좋은 것, 싫은 것, 맺고, 끊는 것.
아닌 건 죽어도 아니다.
남들은 액션아카데미로 영화, 드라마, 광고, 뮤지컬, 이벤트 등 일감이 수도 없이 밀려들어서 좋겠다고 하겠지만.
천만에.
언제나 가슴에 고구마 백 개가 얹힌 것처럼 답답하다.
한국의 스턴트, 많이 발전했다.
그것에 만족하고 있다면 자신부터 당장 은퇴해야 한다.
아직 갈 길이 너무나 멀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에서도 몇 작품 해보니, 이젠 거기서 배울 것 별로 없다.
스턴트맨에 대한 금전 및 처우 개선.
최첨단 고가의 장비.
프리프로덕션 비용 문제.
그 정도 빼곤 적어도 기술적으로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파이트 액션.
한국 스턴트가 세계 최고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개선하고 싸워서 얻어내야 할 것이 수두룩하다.
일부 후배들이 밥그릇 싸움을 한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270여 명 정도의 스턴트맨들이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실제 밥벌이 할 정도로 꾸준히 일하는 이들은 그 절반 수준이다.
턱없이 부족한 숫자다.
더 전문적이고 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는 후배들이 들어와 줘야 한다.
그런데 당장의 수익에 매몰되어 아직도 계약금 후려치기를 하고, 자신의 전문분야도 아닌 일감을 탐을 내고, 가로채기까지 한다.
외환위기 때 그런 짓하다가 한국 스턴트맨 업계가 다 함께 망할 뻔한 걸 뻔히 보고서도 그런다.
당시에 중국에서 일감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끔찍했다.
완전히 고사하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액션아카데미를 제외하고 스턴트 전문 팀이 몇 개 남아있지 않았을지 몰랐다.
“현장 나와 보니까 어때?”
“굉장했어요.”
“힘들어서 때려 칠 생각은 쥐똥만큼도 안 들고?”
“선배들이 그러더라구요. 이 일이 뭣같이 힘들지만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한다고. 그럴 것 같아요.”
“할 만하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때 관광호텔건물 코너에서 형민이 모습을 드러냈다.
“......!”
권용찬을 발견하고 움찔했던 형민이 얼른 허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냐?”
“옛! 감독님!”
“가자.”
권용찬 감독이 먼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형민이 이온의 옆으로 바짝 붙어서 속삭였다.
“무슨 이야기 했어?”
“그냥...... 비보이 얘기.”
“생긴 것만 보면 귀하게 자랐을 것 같은데, 알고 보면 버린 자식이었다니까.”
“비보이였던 것이 탈선은 아닙니다요.”
“전에 영화 공부하는 것 때문에 혼났다며?”
“혼난 건 아니고...... 아직 때가 아니라는 충고를 해주셨지.”
“내 말이. 오바 좀 하지마.”
“멀티태스킹이야.”
“잘났다.”
“형도 가능해.”
“됐어. 운동 쫒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차.”
“근데 회식한다고 하지 않았어?”
“응. 이오니소스야.”
“왜?”
“술은 가까이 할수록 친해지고, 멀리 할수록 멀리 달아나.”
“뭔 개소리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단 말이야.”
“나는 그냥 체질적으로 안 맞아. 술이랑.”
“운동 끝나고 땀이 줄줄 흐를 때, 땀 절대 닦으면 안 돼. 그때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 캔. 크아~”
“......”
“생맥주도 좋고!”
술 마실 생각에 한껏 고무된 형민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문경에서는 이틀에 걸쳐 낮촬영이 예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하루의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고생한 스태프들을 위로하기 위해 제작사에서 회식을 열었다.
“감독님, 안 들어가십니까!”
“먼저 들어가 있어.”
“넵!”
권용찬의 시선이 삼겹살집으로 들어가는 이온의 등에 잠시 머물렀다.
“......”
엔터테인먼트 판에서 오래 있다 보니 딴따라에 있어서는 반무당이 되었다.
소위 싹수가 있는 녀석들을 골라낼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런 녀석 중에 하나가 비보이녀석이다.
남들은 바짝 긴장해서 오디션에서 헤맬 때 홀로 당당했던 아니 뻔뻔했던 녀석.
머리가 좋아서 그런지 궁금한 것도 많고 의심도 많은 녀석.
일일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배워가는 녀석.
충분히 잘난 것이 많은 녀석이다.
그런데 모난 데가 없다.
의외로 싹싹하고 예의도 바르다.
뭘 하든 나중에 크게 될 녀석이다.
스턴트맨으로 만족할 녀석이 아니란 확신이 든다.
심동혁이 그러지 않았나.
언젠가 배신할 거라고.
스턴트맨을 그만 둔다고 해서 배신하는 건 아니다.
자기 적성을 찾아 어울리는 자리에 가는 것일 뿐.
다만 액션아카데미에서의 경험이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면 바랄 것이 없다.
액션배우의 길에 들어선지 30년이다.
액션아카데미를 설립해 운영한지도 20년이 넘었다.
그 동안 거쳐 간 스턴트맨 지망생이 수백 명에 이른다.
대부분의 후배들은 어떻게 사는지 모른다.
기억하는 후배들 대부분은 스턴트맨으로 남은 녀석이다.
배우로 성공한 녀석도 있고.
체육관 관장을 하며 그럭저럭 먹고 사는 녀석도 있다.
아주 가끔 스턴트맨으로 한정할 수 없는 그릇이 아카데미에 들어오긴 한다.
매 기수에서 꼭 그런 녀석이 한 명 정도 있다.
스턴트맨을 그만 두겠다면 붙잡을 수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권용찬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스턴트맨 풀을 키워야 하는 숙제를 수십 년간 안고 있다.
인재를 붙잡아 둘 수 있는 방안이 안 보인다.
지금 활동하는 후배들이 조기 은퇴하거나 업계를 떠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인 마당에서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