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쟤는 얼마나 더 재밌을까?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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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턴트맨은 낮밤이 뒤바뀐 생활을 한다는 선배들의 말을 실감했다.
이온은 산청군으로 내려온 첫날부터 내리 삼일 간 낮에 잠을 자고 밤에 촬영을 하는 일정을 소화했다.
촬영 현장의 규모는 크지만 스턴트맨이 50여명 밖에 동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병사들과 도적떼의 전투장면이 스펙터클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뭘 모르고 한 생각이었다.
액션연기가 되지 않는 보조출연자들이라지만, 그들이 소품용 칼이나 창을 들고 넓게 퍼져서 우왕좌왕 대는 것만으로도 액션 장면이 굉장히 풍부해졌다.
와아아아!
[죽어라! XXX!]
[네 놈이나 목을 내놓아라!]
담덕의 편에 선 병사와 도적이 서로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합을 겨뤘다.
다소 오그라드는 대사를 주고받는 이들은 액션아카데미 선배들이었다.
베테랑 선배들은 카메라를 등지고 있을 때는 대본에도 없는 대사를 만들어서 쳤다.
“일재 형?”
“왜.”
“카메라 돌아갈 때 말을 해도 됩니까?”
“당연히 안 되지.”
“선배님들이 대본에 없는 대사를 치던데요?”
“날도 춥고 액션 씬이 계속 딜레이 돼서 짜증이 나서 그러는 거야.”
“녹음되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이런 장면에서는 후시녹음이야.”
“동시녹음 기사가 엄청 큰 마이크를 대고 있던데요?”
“왈라 따는 거야?”
“그게 뭔데요?”
이런 용어는 영화 이론서적에는 나오지 않는다.
“왈라왈라.”
“......?”
“웅성웅성.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왈라라고 하나봐.”
특정한 대사가 아니라 군중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왈라라고 하고, 현장에서 미리 녹음을 할 때도 있지만 보통은 후반작업을 할 때 단역배우 수십 명을 따로 스튜디오로 모아서 녹음을 한다.
"너도 무뚝뚝하고 진지하게 칼질만 하지 말고. 연기를 해.“
“연기를 해봤어야죠.”
“현장에서 리허설을 하거나, 카메라에 직접적으로 잡히지 않을 때 연기를 하는 버릇을 들여놔. 그때 아니면 언제 연기 연습을 하겠냐?”
연기를 배워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연기를 하라는 것인지.
눈치를 보아하니 배우들 연기하는 것을 어깨 너머로 배우라는 말 같았다.
“내가 전에 말했지? 우리나라 액션연기의 포인트는 생동감이라고. 그냥 칼질하고 합 맞추는데만 급급하지 말고 진짜 죽일 듯이 사력을 다하는 것 같은 그런 표정을 짓는 훈련을 해두란 말이야.”
“옙!”
씩씩하게 대답은 했지만, 사력을 다하고 죽일 듯한 표정이 뭔지 알 리가 없는 이온이다.
자신의 표정을 거울을 보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 치이익. 다시 한 번 갑니다. 슈우우웃! 스탠바이!
다소 중구난방이던 촬영현장이 시간이 정지한 듯 멈췄다.
콜록.
에헴.
정적을 뚫고 누군가의 기침소리가 들렸다.
산채 세트장 마당에는 스턴트맨 50명, 조단역 배우 십여 명, 보조출연자 백여 명이 정해진 동선에 따라 위치해있다.
그들은 숨소리까지 죽인 채 PD의 사인을 기다렸다.
- 큐!
와아아아아!
보조출연자들이 함성을 지르며 소란을 피웠다.
카메라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조단역 배우와 그들을 상대하는 베테랑 스턴트맨들이 실감나는 액션 연기를 펼쳤다.
그들의 주변 역시 액션아카데미 선배들이 위치했다.
화면 안에서 빈 공간이 생기는 돌발상황이 벌어졌을 때 임기응변을 발휘해야 하기 때문에 노련한 액션배우들이 카메라와 가까운 곳에 주로 위치한다.
그 다음으로 전문분야에 특화된 스턴트맨들은 산채 건물 지붕에서 떨어지거나, 옷에 불을 붙이거나, 몸을 공중에 띄운 후 날아가 처박히는 등의 매우 위험한 액션연기를 했다.
이온을 포함한 막내 기수들은 화면에서 스쳐지나가는 위치와 눈에는 잘 띠진 않지만 공간을 비워둘 수 없는 곳에서 주로 액션연기를 펼쳤다.
컴퓨터 그래픽이 첨가되지 않은 200여명이 어울리는 리얼 액션이다.
과연 현장의 박력이 영상에 온전히 담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장관이네!”
<태왕 광개토>에는 경험이 많은 스태프들가 많았다.
그들조차 매번 사극의 대규모 전투 장면을 촬영할 때는 신기하고 재밌다.
반면에 연출·제작 파트는 혹시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을지 초조하게 지켜봤다.
경험이 없는 액션아카데미 막내 기수들은 이런 어마어마한 분위기 속에서 극도로 시야가 좁아져 있었다.
장관이든 뭐든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온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오직 일재 선배만 눈에 들어왔다.
“합!”
다닥.
“얍!”
틱.
연습했던 합의 리듬이 아니다.
한국의 스턴트맨들은 어깨의 움직임으로 리듬과 호흡을 맞춘다.
어깨를 앞뒤 혹은 좌우로 하나둘, 하나둘셋 흔들어 공수의 박자를 맞춘다.
방어 쪽이 어깨를 흔드는 행위는 리듬을 타는 효과와 함께 상대의 공격을 기다리는 느낌을 줄여준다.
소위 ‘마’가 뜨는 것을 방지해 주는 것이다.
이온은 약속대로 하나둘 박자에 일재 선배에게 공격을 했다.
그런데 일재 선배는 반박자 빠르게 움직였다.
“......젠장!”
이온의 호흡이 깨졌다.
그러자 엉성한 자세에서 엉뚱한 방향으로 가검이 나갔다.
한 번 합이 어긋나기 시작하자 허둥댈 수밖에 없다.
이온은 이를 악물고 박자를 회복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합이 엉클어지는 것으로 끝나면 다행이다.
자칫 이온의 칼질이 일재 선배를 다치게 할 수도 있다.
“형! 아니 선배님! 왜 연습한 대로 안 합니까!”
PD의 커트 사인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온이 일재 선배에게 화를 냈다.
일재 선배는 이온이 화를 내든 말든 한 곳만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최창민 무술감독에게 머물러 있었다.
“흠, 아무 말도 없단 말이지?”
일재 선배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형!”
“이온아, 지금처럼 해. 너무 허우적거리는지는 말고. 동작 좀 더 크게 해도 되겠다. 딱 지금처럼만 해. 너무 허우적거리지 말고. 알겠어?”
“......?”
이온이 설명을 바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네가 아무리 난리를 쳐도 나 안 다쳐 인마.”
“합이 깨지면 안 된다면서요? 약속된 그대로 해야 된다면서요?”
“자식이...... 쫄아서는. 우리가 화면에 어느 정도까지 잡히나 한 번 본 거야.”
“미리 말을 해주던가요. 그런 건 모니터 보고 확인하면 되잖아요.”
“내가 이 드라마 퍼스트도 아니고, 스테이션 가서 모니터 보여 달라고 할 수 있겠냐? 실례야 실례.”
로드매니저도 자유롭게 보는 현장 모니터를 무술팀 스태프가 볼 수 없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
이온이 보기에 일재 선배는 모니터스테이션을 왔다갔다하는 것이 그냥 귀찮은 것이다.
“무열이는 쉬고 더블 들어가.”
담덕을 연기하는 송무열 대신 대역이 촬영에 투입됐다.
높은 몸값을 받고 출연하는 영화배우나 탤런트들이 위험천만한 스턴트를 몸소 실행할 경우 찬사를 받는다.
반대로 대역 배우 태가 너무 많이 날 경우 고액 출연료를 받는 배우는 무성의하게 몸을 사리며 연기한다고 욕을 먹는다.
그러나 주연배우가 액션신의 100%를 소화했다가 부상이라도 입게 되면 제작진에게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촬영 일정이 연기되고 그로 인해 시간적·경제적 손해를 본다.
그런 피해를 사전에 막기 위해 전문적인 스턴트맨을 쓰는 것이다.
스턴트맨의 도움을 받은 배우를 비하할 이유는 없다.
차라리 백퍼센트 액션을 소화한 배우들의 공을 칭찬해주는 게 더 빛이 난다.
“이온아, 좀 더 크게 들어와 봐!”
휙.
이온이 동작을 과장해서 가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대번에 최창민 감독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야! 누가 칼춤 추래! 절도 있게 못해!”
얼른 이온이 허리를 숙였다.
“넵!”
그리고 일재 선배를 째려봤다.
“절도 있게. 절도 몰라?”
일재 선배가 얄밉게 최창민 무술감독의 말을 되풀이 했다.
동이 뜰 때까지 이온의 칼이 매섭게 일재 선배를 노렸다.
“살살해! 누구 잡을 일 있어!”
“이 정도로는 안 다친다면서요? 잘 피해보세요.”
이온이 제 아무리 용을 써본 들 일재 선배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다만 발악하면 할수록 이온의 실력이 는다는 사실.
공자가 말하길.
[知之者는 不如好之者요, 好之者는 不如樂之者니라.]
알기만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보다 못하다.
이 말을 현대적으로 바꾼 말이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유명한 말을 실리콘밸리 식의 표현으로 바꾼다면.
[타고난 능력은 바꿀 없으니까 닥치고 노력해라. 억지로 하는 노력은 소용이 없고, 노력하는 과정을 즐겨라.]
쯤이 될 것이다.
이 시대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즐기는 것만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타고난 재능도 있어야 하고, 노력을 해서 상당한 실력을 갖춰야 하며, 적성에 맞는 분야에서 스트레스 없이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그 삼박자가 맞지 않으면 성공, 어림도 없다.
✻ ✻ ✻
“자, 조금만 더 힘들 냅시다! 몇 커트 안 남았어요!”
연출·제작팀이 배우들과 스태프를 격려했다.
권용찬을 비롯해 최고참 스턴트맨들은 추위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다행히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경미한 부상을 입은 스턴트맨들이 몇 명 발생했다.
다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멀쩡하게 촬영에 임했다.
약 바르고, 압박붕대로 둘둘 말고 촬영 현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저런 모습이 프로라는 것일까......?’
베테랑 스턴트맨들은 화살에 맞는 스턴트를 하기도 하고, 지붕에서 굴러 떨어지고, 화로에 넘어져 불을 뒤집어쓰기도 하고, 산채 가옥 벽에 처박히는 등 온갖 고생을 다 했다.
합을 맞출 때 공격하는 쪽보다 방어하는 쪽이 훨씬 체력소모가 심하다.
방어 쪽은 주로 경험 많은 베테랑들이 맡았다.
후배들보다 몇 배는 힘이 들 수밖에.
그냥 바닥에 풀썩 쓰러지는 것도 아니고, 주변의 지형지물을 타고 넘어지거나 공중으로 날아올라 바닥에 처박힐 때면 가슴이 철렁하기도 한다.
안쓰럽다.
분명 몸에 문제가 생겼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한다.
화려한 액션 스턴트를 보고 있으면 동료로서 조마조마하다.
그런데 구경꾼 입장에서 보면 전혀 다르다.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멋있다.
액션연기를 펼친 당사자는 고생들이 화면에 고스란히 담긴 걸 확인할 때 쾌감은 이루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 것에 중독되어 스턴트에 미치는 모양이다.
후우.
3일 연달아 밤샘 촬영을 하는 막내 기수는 죽을 맛이었다.
추위와 싸워야 하고, 졸음과도 사투를 벌여야 했다.
유일하게 이온만 쌩쌩했다.
“겉으로는 영락없는 약골인데 체력하나는 진짜 끝내준다니까.”
동기들이 저마다 부러움을 드러냈다.
이온은 처음으로 겪게된 대규모 전투 씬에서 꽤나 흥이 돋았다.
몇 주 동안 수천 번 목검을 휘두르고, 공격을 피하고, 흙바닥을 구르며 연습했던 액션을 일거에 쏟아냈다.
추위 때문에 만족할 만한 움직임은 나오지 않다.
그렇지만 한 명의 스턴트맨 몫은 충분히 해냈다.
새벽 4시가 막 넘어가는 시점.
촬영 막바지다.
첫날 촬영 일정이 꼬여버렸지만, 다행히도 다음날부터는 촬영 속도가 빨라졌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이온은 병사 복장과 도적 복장 심지어 화전민 복장 수시로 갈아입었다.
어제는 병사 갑옷을 입고 죽었는데, 오늘은 도적 의상을 입고 또 죽었다.
이온이 칼에 찔려 죽은 위치에는 보조출연자가 대신 누웠다.
무기도 처음 칼을 잡은 이후로 창도 들었다.
망나니칼 같이 생긴 대도를 휘두르기도 했다.
시키는 대로 했다.
워낙 정신없이 돌아가는 현장이다 보니 ‘왜’ 라는 질문을 할 틈도 없었다.
하하하.
이온이 활짝 웃었다.
“왜 웃어 미친놈처럼.”
“그냥요.”
“실없는 자식.”
재밌다.
체감온도가 20도에 육박하고 뭐 하나 찍으려면 수십 분씩 기다려야 하고, 모든 촬영에서 배우가 우선시되고, 막상 촬영에 투입되면 뭐가 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돌아가지만, 지루하지가 않았다.
사실 대기하는 시간조차도 심심하지 않았다.
사극 촬영 현장은 꽤나 신기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는 것만으로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산채 마당에서 200명이 어울려 액션 장면을 찍을 때는 마치 390년대 고구려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 만큼 분위기에 압도되고, 상황에 몰입했다.
이온의 눈에 청소년 담덕 배역을 연기하는 송무열이 눈에 들어왔다.
“쟤는 얼마나 더 재밌을까.”
이름 없는 병사 10번을 연기하는 것도 이렇게 재밌는데, 드라마에서 중요한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는 도대체 어떤 기분일까.
이온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PD의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철수!”
드디어 길고 긴 황매산에서의 촬영이 끝났다.
‘첫 날은 헤매기도 했지만 나름 좋은 경험이었어.’
3일 동안 바짝 긴장했던 이온은 비로소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사극 액션 종합판이랄 수 있는 공성전은 아닐지라도 규모가 큰 편에 속하는 몹씬을 찍어보니 스턴트맨의 역할과 임무를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지난 번 현대극을 촬영할 때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드라마 매커니즘도 좀 더 알게 되었다.
최고의 액션배우나 무술감독까지의 길은 멀고도 멀었다.
꾸준히 캐스팅 될 수 있는 수준의 스턴트맨이 되는 것이 먼저다.
지금은 일단 그것을 목표로 잡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