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창피하니까 소문 내지마!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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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끝나고 선배들과 해장국을 먹고 헤어진 시간은 7시.
현재 시각 오전 11시.
이온이 수면을 취한 시간은 세 시간.
일반적으로 피로가 채 풀리지 않을 시간이다.
우우우웃!
이온이 기지개를 크게 켜며 방을 나왔다.
약간의 피로가 남아있긴 하지만, 푸석푸석한 몰골은 아니다.
어릴 때부터 그래왔다.
어지간한 피로나 상처는 금방 회복된다.
그러니 공부든 운동이든 효율이 좋을 수밖에.
단 술·담배 같은 것들은 몸에서 잘 안 받는다.
토끼발이 독극물로 분류하는 것 같다.
순전히 이온의 추측일 뿐.
체질적으로 그런 것들이 안 받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꼭 토끼발 효과라고 단정할 순 없다.
어쨌든 토끼발을 착용하지 않았던 군복무 시절에는 회복력이 그렇게 뛰어나진 않았다.
비보잉을 하다 다쳤을 때가 몇 번 있었다.
그 당시에는 눈에 띠는 회복속도를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군 병원의 의료적인 조치가 취약해서 그랬을 수도 있지......‘
야옹.
잘 울지 않던 클로이가 울면서 이온에게 다가왔다.
이온이 클로이를 품에 안았다.
녀석이 이온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비벼댄다.
“얀마, 밥 때만 친한 척이냐? 밤새고 들어왔을 때는 매정하게 생 까더니.”
이온이 짐짓 투정을 부려봤다.
야옹.
클로이가 낮게 울었다.
왠지 닥치고 밥이나 내놓으라고 하는 것 같다.
이온이 클로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주방으로 향했다.
“누나가 항상 말했지. 먹는데 돈 아끼는 거 아니지. 잘 먹어야 잘 살어. 야옹. 클로이 우리 잘 먹고 잘 살자. 라면에는 계란. 빠지면 팥소 없는 찐빵. 춥 츳 큭 츳.”
이온이 되도 않는 랩과 비트박스를 흥얼거리며 라면을 끓였다.
깨톡!
고등학교 친구 단체채팅방에서 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 케토레기! 드라마 출연했다며?
- 올~
- 뭔데? 무슨 드라마?
- TV 드라마 나온대. ㅋ
- 드라마 제목이 뭐임?
- 언제 방영함?
- 스턴트맨도 드라마 출연해?
- ㅋㅋ 투명인간이냐? 출연 안 하고 어떻게 스턴트를 해. ㄷㅅㅇ
- 게토레기 왜 말이 없음?
- 부끄러워서? ㅋ
클로이에게 사료를 챙겨주고, 이온 자신도 후루룩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 출연 안 했.
이온이 성의 없는 답글을 달았다.
- 웃기시네. 형민 오빠가 너 촬영 갔다고 분명 그랫거등!
- 대역. 얼굴 안 나옴.
- 무슨 대역? 누구 대역? 배우가 누구야? 유명한 사람? 혹시 류빈?
- 다들 입 다물.
- 도련님을 부탁해.
- ㅋ 주인공의 발연기로 연일 화제를 몰고 다닌다는 그 문제작?
- SBC 금토드라마?
- ㅇㅇ
- 짱개 PPL 졸라 떡칠한다는 드라마 아님?
- 발연기든 짱개든. 누구 대역인데!!
- 돼지야~ 액션캠프 수료했으면서 자꾸 뭘 물어봐.
- 주인공 대역?
이온은 정신없이 쏟아지는 문자 폭탄을 무시하고 라면을 먹는데 집중했다.
드르륵.
폰이 진동했다.
“여보세요.”
- 야!
어지간히 궁금했던 모양이다.
이온이 문자를 씹자, 전화를 건 단비다.
“밥 먹고 있어. 끊는다.”
- 잠깐! 언제 방영하는지만.
“나도 몰라. 박충원선배님께 물어봐야 돼.”
- 쪽대본으로 찍어?
“대본 있던데?”
- 쪽대본이라고 A4 용지에 출력해서 돌리는 줄 알았냐?
“......”
- 빠르면 이번 주 금토 방영이고 늦으면 다음 주겠다 그치?
“모른다니까.”
- 누구 대역인지만 말해 봐.
“여자주인공 남동생. 배우가 이진훈인가 그랬어. 박충원 선배가 다 하고 난 그냥 마네킹처럼 스쿠터에 앉아있기만 해서, 드라마 봐도 모를 거야.”
- 오~ 병풍도 아니고 나름 조연급 대역이네. 울 게토레기 마이 출세했다. 이제 꽃길만 걷자!
“......”
- 내가 모니터링 확실하게 해 줄게.
모니터링 해 줄 것도 없다.
괜히 아까운 시간만 버릴 가능성이 매우 농후했다.
“편집에서 날라갔을 수도 있고, 들어갔다고 해도 나 인줄도 모를걸? 콩알만 하게 보여서. 쪽팔리니까, 동네방네 소문 내지마.”
- 앞으로 이런 일 있으면 바로바로 보고해. 형민 오빠 통해 듣게 하지 말고. 알겠어?
“다음에 또 언제 현장 나갈지 몰라. 괜히 설레발치지 마.”
- 근데, 6개월 심화교육 받아야 현장 나갈 수 있는 거 아니었어?
“몰라. 어쩌다 그렇게 됐어.”
- 오늘도 출근해?
“밥 먹고 나가 보려고.”
- 수고하고. 드라마 본방 사수하께. 나중에 보아.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온이 통화를 종료해버렸다.
친구들이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축하해주는 것이 싫을 리가 없다.
그런데 스턴트를 할 때마다 이런다면 성가실 것 같다.
‘처음이니까 신기하겠지.’
이온은 라면 국물에 밥까지 말아 뚝딱 해치웠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들이 마치 꿈만 같다.
이제 겨우 첫발을 내딛었을 뿐이지만.
스턴트맨으로써 경력의 첫 스타트를 끊은 것이다.
사실 경력 아니다.
경험이다.
선배들이 모두 거쳐 갔던.
노련한 액션배우로 가는 아주 작은 과정에 일부분일 뿐.
‘다음부터 덜 긴장되고 덜 두려울까......?’
어쩌면 더 심해질지도 모른다.
더 어렵고 더 위험하고 더 부담스러운 것들을 맡게 될 테니까.
그래도 즐겁다.
이온은 왠지 그 어떤 날보다 살아있음을 느꼈다.
✻ ✻ ✻
동기들이 액션아카데미 밖에 나와서 액션 합을 맞추고 있다.
이온이 동기들에게 인사를 하고, 체육관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영상콘티를 촬영하는 모양이다.
종이박스로 각종 지형지물을 만들어 놓았고, 탁자 의자 같은 대도구들도 배치해놓았다.
길태석 무술감독 지휘 하에 스턴트맨 선배들이 액션연기를 하고,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노트북으로 옮겨 즉석에서 편집까지 해보고 있다.
하루도 조용하고 한적한 날이 없는 액션아카데미 체육관이다.
“안녕하십니까!”
이온이 선배들을 향해 우렁차게 인사했다.
선배들이 건성으로 인사를 받았다.
이온은 영상콘티를 촬영하는 선배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얼른 라커로 가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운동화도 갈아 신었다.
체육관 밖으로 나가다가, 체육관 한편에서 운동하는 낯익은 이들을 발견했다.
‘오, 오랜만에 영화배우가 왔네?’
BS그룹 계열 케이블채널 드라마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후 나란히 영화로 진출한 배우 안형식과 김재혁이 임대한 무술감독으로부터 트레이닝을 받고 있다.
액션아카데미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다.
주연급 배우들이 영화나 드라마에서 액션연기를 소화해야 할 경우 짧게는 3개월, 길게는 6개월 정도 몸을 만들고 액션 트레이닝을 받는다.
어제는 보지 못했다.
오늘부터 시작한 모양이다.
촌스럽게 사인을 받을 생각은 없다.
어차피 이온이 스턴트맨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저들과 동료가 되면 되었지, 팬이 될 일은 없을 테니까.
이온이 체육관을 빠져나와 가장 친한 동기 형민에게 다가갔다.
이온을 바라보는 동기들의 시선은 미묘했다.
부러움.
시기.
질투.
심화교육 마지막에서나 경험해 볼 수 있는 촬영현장.
교육기간 중에 무술감독에게 캐스팅 된다는 것은 쉽게 찾아오는 기회가 아니다.
아직까지 현장 근처에도 가본 적도 없고, 기약도 없는 동기들로서는 부러워할 만 했다.
물론 조현동을 비롯해 격투기 엘리트코스를 밟아왔던 동기들은 눈빛으로 욕을 하는 것 같았다.
‘네 주제에 우리 중에서 가장 먼저 현장을 나가?’
그런 의미를 담은 시선이랄까.
어차피 이온은 저들과 잘 지낼 수가 없는 입장이다.
저들은 정통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이들이라 이온에 대한 생각이나 태도를 바꿀 리가 없다.
이온 역시 숙이고 들어가서 친하게 지낼 생각이 없다.
비록 이치열 감독이 함께 합을 맞출 이들끼리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지만.
“태권도도 그렇고 요즘은 유도시합도 보면 다리잡기 기술도 금지시켜서 화려하고 실전성 있는 기술이 예전처럼 많이 나오지 않아. 뭐하자는 것인지 모르겠어.”
“무도란 게 뭐야? 결국에는 싸우는 기술을 수련하는 격투종목이잖아. 격투기는 격투기다워야지.”
“요즘 넷튜브에서 KPOP 태권안무 동영상 조회수 존나 쩔더라.”
“그게 쇼지 무슨 운동이야.”
“크크. 댄스지 댄스.”
“트릭킹? 요새 태권도 하는 애들도 그저 덤블링하고 뺑뺑이 도는 것에만 미쳐서 아주. 그럴 거면 태권도를 왜 해? 비보이를 하든가 기계체조를 해야지.”
“정말 투기종목에서는 죽으라고 때리고 맞는데, 걔들은 한 발 들고 껑충껑충 뛰기만 하더라. 체조도 아마 그렇게 안 할 걸?”
명백히 이온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발끈해서 대거리 하면 이온만 손해다.
조현동은 임대한 무술감독이 나온 대학교 출신 라인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아직은 어떤 무술감독도 사수로 모시지 않는 이온이 불리했다.
바로 한 단계 윗 기수들에게 싸가지 없다고 찍힌 것도 있었고.
‘한심한 놈들. 겨우 점수 따기에만 집중하는 경기태권도를 한 주제에......’
우물 안 개구리들.
아니 그냥 굼벵이다.
할 줄 아는 것이 구르는 것 밖에 없는.
세계적인 트릭커 가운데 저 세 사람보다 더한 정통 코스의 무술을 어린 시절부터 익힌 고수가 수두룩했다.
당장 국가대표 태권도시범단 출신 김정렬은 카포에라와 무에타이까지 높은 수준으로 수련했으며, 줄넘기와 외발자전거 고수가 인천에 거주한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찾아가 배우기까지 했다.
사실 한 발로 껑충껑충 뛰면서 발차기 하는 것은 명백히 지금의 경기태권도다.
트릭킹은 그 보다 훨씬 다채롭고 역동적이며 풍부한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전혀 다른 운동이다.
트릭킹은 예술장르에 더 가까울지도 몰랐다.
진짜 고수는 타 무술이나 운동, 혹은 분야를 폄하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수련한 자의 되먹지 못한 인격과 태도를 무시할 뿐이다.
꼼꼼하고 차분하게 몸을 풀어준 이온이 형민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형, 혹시 말이야.”
목검으로 내려치기와 베기를 수련하고 있던 형민이 고개를 돌렸다.
“응, 뭐?”
“쟤들 세 명 다 국대 출신이래?”
“국대는 무슨...... 그냥 격투기과 나왔다고 허세부리는 거나. 원래 재들 나온 학교가 좀 그렇잖아.”
그럴 줄 알았다.
역시 입으로 운동하는 놈들.
그런 이들을 흔히 ‘꼴통‘이라고 한다.
“오늘은 합 맞추는 것만 하는 거야?”
“응. 넌?”
“현장 나간 거?”
“어땠어?”
“운동 끝나고 자세히 이야기 해줄 게.”
“궁금한 거 많아.”
“내가 직접 경험한 건 다 말해 줄게.”
그렇게 몸이 달아 있는 형민을 다독인 이온이 목검을 잡았다
당장 형민과 합을 맞추지 않았다.
일단 기본 동작부터 천천히 몸을 예열시켰다.
수평 베기.
찌르기.
회전 베기.
상단 막기.
각각 200회씩 가볍게 시작했다.
액션캠프에서 처음으로 검술을 수련할 때, 하루가 멀다 하고 손바닥에 물집이 박히고 터지기를 반복했다.
나중에는 굳은살이 박혔다.
한 동작 당 기본 2천 회씩을 휘두르고 막고 찔렀다.
허리와 허벅지에 엄청난 무리가 갔다.
당시에는 수련이 아니라 얼차려인 줄 알았다.
그 정도로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토끼발로 인해 월등히 회복이 빠른 이온조차 매주 목·금 이틀 간 진행되는 사극 액션검술 기본기훈련에서 낙오할 뻔했다.
실제 촬영현장에서 사용한다는 가검도 쥐어봤다.
당연히 목검보다 훨씬 무겁다.
그걸 들고 몇 시간 동안 액션연기를 반복하기 위해서는 체력과 함께 검을 다루는 기술이 필요했다.
정통의 검도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가짜를 진짜처럼.
검을 휘두르거나 막을 때, 진짜 고수처럼 관객이 믿을 수 있게.
화면에서 그렇게 보이도록 하는 소위 ‘액션검술’을 숙달시켜야 했다.
물론 특정 작품에 캐스팅되면, 그 시대와 무기에 맞는 다양한 검술을 따로 배우긴 한다.
막내 시절에는 기본기만 죽어라 파는 단계다.
“가볍게 열 합만 해볼까?”
“좋아!”
이온과 형민이 기초적인 검술 합을 맞추는데, 박충원과 송관효가 모습들 드러냈다.
“얀마! 막내!”
25기는 물론이고 막내급 기수들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고생이 많아요. 다들.”
후배 기수 스턴트맨들 가운데는 박충원보다 한두 살 나이가 많은 이도 있었다.
때문에 반말을 쓰진 않았다.
“오늘 하루 푹 쉬라니까. 왜 나왔어?”
그러는 박충원 역시 몇 시간 쉬지도 않았음에도 액션아카데미에 출근했다.
“제가 회복력이 남다른 편이라서. 선배님은 잘 쉬셨습니까?”
“나야 만날 이렇게 사니까. 우리는 준비하고 현장 나가는 것 말고도 쉬는 것도 일이야. 진짜 잘 쉬어야 돼. 피로가 누적되면 나중에 반드시 탈난다.”
“조심하겠습니다. 선배님.”
그때 대화에 끼지 않고 있던 송관효과 입을 열었다.
“막내 너, 어릴 때 미국 살았다고 했지 아마?”
“예.”
“혹시 간난 아기 때 아팠냐?”
“......네.”
“잠깐 나 따라와봐.”
“예?”
“잠깐이면 돼.”
이온이 송관효를 따라 주차장으로 향했다.
박충원은 두 사람 일에는 관심 없다는 듯 체육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송관효는 주차장에서 세워놓은 자신의 RV를 뒤지기 시작했다.
피난민의 차 같다.
RV 안에 온갖 잡동사니가 한 가득 들어있었다.
“내가 파주로 이사를 왔거든. 이삿짐을 집에 풀어놔야 하는데, 요새 계속 지방촬영이 있어서 집엘 못 들어갔어.”
굳이 변명할 필요까지 있을까 싶지만.
송관효 입장에서는 후배 보기 창피했다.
차 안에 몸을 반쯤 들이밀고 이삿짐 속을 헤집던 송관효가 잡지 몇 권을 들고 빠져나왔다.
한 눈에 보기에 상당히 오래된 잡지다.
“내가 너 옷 갈아입을 때 목걸이를 봤거든. 우연인지 모르겠는데...... 혹시 미국 이름 있지 않냐?”
“영문 이름은 따로 없습니다.”
“없어? 진짜?“
“미국의 지인들이 부르는 애칭은 있습니다.”
이온과 송관효가 동시에 말했다.
“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