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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군벌가 망나니-131화 (131/134)

131화.

드래곤족의 수장, 제국의 수호신, 별을 보는 자, 영원의 현자 등등.

화려한 이명이 증명하듯 천년공은 지난 수천 년 동안, 제국을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기둥이었다.

그와 마주하는 모든 귀족은 절로 고갤 숙였으며 역대 황제들도 그의 조언에 귀를 기울일 정도였다.

그런 천년공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환으로 기약 없는 칩거에 들었으니, 제국이 흔들린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일는지도 몰랐다.

‘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를 둘러싼 무수한 소문들을 떠올리며 나는 서둘러 레하반 타워로 향했다.

이미 공녀로부터 출입허가를 받은 나는 별다른 제재 없이 천년공이 있을 타워 지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처음 내부를 마주했을 때, 내가 본 것은 지하 공동을 타고 유영하는 마나의 흐름이었다.

‘물고기?’

마치 반짝이는 고기처럼 빛나는 마력이 공간 전체를 부드럽게 휘감아 돌고 있었으며 그 중심엔 긴 잠에서 눈을 뜬 현자가 공동 한가운데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진짜 더럽게 크군.

지하 공동이 왜 그렇게 큰가 했더니 그건 전부 드래곤의 크기 때문이었다.

천년공.

현존하는 드래곤 중 가장 오래 살았다는 그의 몸집은 수킬로미터에 달하는 지하 공동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의 몸에 달린 비늘은 하나하나가 성인 남성보다도 컸으며 그가 옅은 숨을 내쉴 땐 콧구멍 쪽에서 돌개바람이 일 정도였다.

‘저거 독 아니야?’

-맞는데?

‘윽.’

천년공이 한 번 호흡할 때마다 그의 몸에서 검은 안개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소량만 흡입해도 생명이 끊어지는 극독.

나는 과거 엘리베이터에서의 일이 생각나 더는 접근하지 못하고 부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진은 거리가 멀어 잘 들리지 않는, 부녀가 나누는 대화를 내 머릿속에 직접 들려주었다.

공녀는 눈만 깜빡거리는 천년공에게 그간 제국에서 있었던 크고 작은 사건들, 북부에서 어비스데몬을 격퇴한 일, 화폐개혁으로 귀족들이 뿔이 났던 일, 비밀리에 일어난 황제의 학살과 대원수의 반란 등을 설명해 주었다.

황성에 핵폭발이 터져 불타올랐다는 대목에선 천년공이 눈을 찡그리기도 했다.

그렇게 이야기가 다 끝나갈 즈음, 천년공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그의 목소릴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저 친구는 누구더냐.”

“존 메이어야. 아까 말했지? 아빠 치료를 도와준 사람.”

“인간 아니냐?”

“맞아. 근데 인간치고는 똑똑해!”

굳이 인간치고는 이런 말을 붙여야 하나 싶었지만 사소한 문제이긴 했다.

지금 중요한 건 나에 대한 천년공의 평가였으니까.

“가까이 오게.”

천년공의 부름에 나는 천천히 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그를 둘러싼 독 안개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말이다.

“군인이라고?”

“그렇습니다.”

“일단, 우리 딸을 도와 나를 치료해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지.”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빨리 감사의 대가를 달라고 말해!

물론 나도 그런 기대를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상대가 무려 천년공 아닌가.

하지만 이제 막 눈을 뜬 환자에게 그런 이야기를 꺼낼 순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기분이 상하는 날엔 나만 손해 보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나야 여기서 더 할 말이 없기도 했지만 천년공도 딱히 말할 게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공녀는 뭐 하는 거야. 불렀으면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주던가.

진이 멀뚱멀뚱 천년공과 나를 번갈아 보는 공녀를 두고 뭐라고 하던 때였다.

천년공이 내게 넌지시 물었다.

“대충 사정은 들었네. 그래. 이젠 앞으로 뭘 하며 살아갈 참이지.”

앞으로요?

쳐들어오는 중앙도 막아야 하고 운카라도 신경 써야 하고 생각보다 할 게 많습니다.

머릿속엔 그러한 생각이 한가득하였으나 정작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상당히 간결했다.

“일단은 남부를 잘 지키는 데만 집중할 생각입니다.”

“독립을 원하나?”

순간 천년공의 눈이 반짝인 것 같았다.

나는 떨떠름하게 그렇다고 답했다.

왜냐하면 지금껏 천년공은 수천 년 동안 제국의 평화를, 중앙의 위치에서 지킨 존재였기 때문이다.

설마 기분 나쁘다고 앞발로 날 깔아뭉개진 않겠지 생각하고 있을 때, 그가 알겠다며 다시 시선을 공녀에게로 돌렸다.

“세리스, 중앙으로 돌아가고 싶으냐?”

“별로 생각 없는데…. 왜? 삼촌 원수 갚아주게?”

“원수?”

공녀의 말에 천년공이 작게 코웃음을 쳤다.

“예전부터 헬리오스 그놈은 황위에 앉히면 나라 말아먹을 놈이라고 누누이 이야기했다. 다 업보인 게지.”

천년공은 과거를 회상하며 제국에 망조가 든 건 순전히 황실 탓이라며 자신이 알 바 아니라고 말했다.

나는 왠지 공녀의 성격이 어디에서 온 건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좋아. 이런 이야기는 천천히 하기로 하고, 존 메이어.”

“예.”

“원하는 것이 있다면 편하게 말해보게. 힘닿는 대로 도와주지.”

-이거지.

천년공이 마침내 내가 가장 듣고 싶던 말을 해주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국의 수호신이라고 불리는 천년공이 날 도와준다면 더는 남부 운영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천년공이란 존재는 비단 중앙뿐만이 아니라 제국 전역에서 그 명성이 자자한 존재였다.

이런 이가 내 편을 들어준다는 것 자체로도 우리는 큰 힘을 얻는 셈이었다.

“단, 우리 딸은 안 돼.”

“…예?”

“아! 무슨 이상한 소릴 해!”

옆에 있던 공녀가 빼액 소리쳤다.

“너, 저 친구 좋아하는 거 아니냐?”

“아니야! 그런 말 한 적도 없잖아!”

-공녀가 널 좋아하진 않나 보다.

공녀의 안색을 살핀 진이 말했다.

실제로 공녀의 얼굴색엔 딱히 변화가 없었다.

얼굴을 붉힌다거나 당황했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딸이 화를 내자 천년공은 앞발을 살짝 움직였는데 그와 동시에 공녀의 이마에서 녹색 실이 뽑혀 나와 공녀를 당황케 했다.

“아! 하지 마!”

전에도 보았던 기억 공유 마법이었다.

천년공은 그렇게 딸의 기억을 홀랑 뽑아 공유했는데 남의 기억을 쉽게 훑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솔직히 좀 무섭기도 했다.

‘난 뭐 잘못 생각한 거 없었지…?’

-없긴 왜 없어. 가끔 공녀가 지랄하면 한 대 쥐어 패고 싶었던 적은 있잖아.

‘지금 꼭 그 이야길 해야 해?’

이러다 내 기억도 뽑아 가는 게 아닌가 걱정하던 그때, 천년공이 흐음 소릴 냈다.

“정말 모호하긴 하구나.”

“뭘 모호해. 아니라고 했잖아!”

“그래. 아니라니까 됐다. 인간이랑 우린 시간의 개념이 다른 생물이란다. 시작도 않는 게 좋은 거야.”

씩씩거리는 딸을 놔둔 채 천년공은 잠시 이야기가 샜다며 화제를 돌렸다.

“내게 원하는 것이 있나?”

“예. 괜찮으시다면 꼭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바로 떠올리다니 의외로군. 편히 말해보게.”

천년공에게 무엇을 부탁할까.

나를 둘러싼 문제야 한두 개가 아니라지만 지금 당장 급한 건 역시 황금콩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오크의 식량을 책임진 뒤로 쌍둥이 행성의 인구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었다.

내가 북부 원정을 다녀오는 사이에 이미 오크의 인구는 그 당시로부터 200억 명 가까이 추가로 늘어난 상태였다.

식량 문제로 억제되어 있던 출산율이 아예 지붕을 뚫은 것이다.

“콩…? 보기보다 소박한 친구로군.”

자신에게 식물 키우는 걸 도와달라는 게 의외였던 걸까?

천년공은 오히려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분수에 맞지 않게 야심만 큰 녀석들보단 낫다며 말이다.

“그 문제는 내일 도와주지. 오늘은 나도 몸을 좀 추슬러야 할 것 같으니.”

* * *

그날 저녁, 나는 모리더스 원수와 통신을 주고받으며 천년공의 소식을 알렸다.

그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수뇌부가 좋아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역대 제국 황제들이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겠는가.

그런 천년공이 남부에 정착하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힘이 되는 소식도 드물 터였다.

<중앙 사정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더군.>

“어떻습니까?”

수뇌부가 역량을 총동원해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중앙에선 다시 파벌싸움이 번져 연일 시끄러운 상태라고 했다.

왜 아니겠는가.

탐욕 하나로 대원수와 함께 판을 뒤집어엎은 놈들이었다.

그런 놈들이 서로 공(公)을 주장하며 자리싸움을 할 거란 건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다.

게다가 엘다란.

서부에선 자신들의 턱밑으로 꾸준히 칼을 밀어 넣고 있는 적들까지 있었으니 중앙의 혼란이 극에 달할 만도 했다.

“그럼 우리가 이 상황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말인가?>

“중앙 귀족은 민생은 뒷전이고 자신들 밥그릇만 챙기기에 바쁘다. 괜히 천년공께서 남부에 정착했겠나 라는 식으로 말이죠.”

한마디로 천년공 이름을 팔아 중앙에 한 방 먹여 주자는 건데 의견을 들은 모리더스 원수는 역시 자네는 대단하다며 나를 치켜세웠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천년공께서 조금… 그렇지 않겠나?>

“당연히 허락을 받아야지요. 저도 어디 목숨 몇 개 놔두고 다니는 건 아닙니다.”

<그렇지.>

-드래곤이 터트리는 브레스가 제법 매섭다더라.

아무리 간땡이가 배 밖으로 나왔어도 허락도 없이 그런 짓을 했다간 밤중에 떨어지는 불벼락에 뼛가루도 건지지 못하는 수가 있었다.

원수 다음엔 공녀와의 통신이었다.

내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그녀는 계속 천년공과 대화를 주고받았던 모양이다.

공녀의 말에 따르면 천년공이 중독된 이유는 제국의 비밀과 관계가 있다는데 아직 정확한 이유는 듣지 못했다고 했다.

<아빠가 아직 때가 아니래. 나중에 알려준다고.>

“그랬군요. 저 그런데 공녀님. 혹시 저희가 선전을 좀 하려는데 천년공의 이름을 좀 올려도 되겠습니까?”

<기사에 이름을 쓰겠단 거야?>

천년공의 쾌차 소식, 그리고 남부에 정착했다는 소식을 잘 포장해서 제국 전역에 알리고 싶다는 내용을 전하자 공녀는 의외로 흔쾌히 허락을 해주었다.

<아빤 그런 거 신경 안 쓸걸? 뭐 욕을 하는 것만 아니면 말이지.>

“그럼 저는 공녀님만 믿고 진행합니다?”

<잠깐.>

무언가 생각난 듯 통신 화면을 향해 공녀가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도와주면 뭘 해줄 건데?>

“예?”

<이제 아빠 치료도 끝났겠다. 이제 계산을 새로 해야지. 맨입으로 도와달라는 거야?>

“저기요. 공녀님? 대가는 제가 받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치료만 무사히 끝내면 보물도 얼마든지 주겠다고 하셨던 게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요?”

분명 공녀가 보물전을 구경시켜 주며 천년 공의 치료만 잘되면 보물을 내주겠다고 이야기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러자 공녀는 그걸 기억하네라는 얼굴로 대꾸했다.

<정확히 말하면 얼마든지가 아니라 보물 두 개라도 줄 수 있다고 했지. 날조하지 마.>

“아무튼요. 주긴 준다고 하셨잖아요.”

<좋아. 그럼 보물 두 개 중에 하나 깎는 거로. 어때. 콜?>

“와.”

-와.

진짜 치졸하네.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 다르다더니 뭐 그런 건가?

내가 그런 감정을 담아 빤히 바라보자 공녀가 버럭 성을 냈다.

자기도 조금 부끄럽긴 했는지 헛기침을 곁들이며 말이다.

<어차피 아빠가 소원 들어준다고 했잖아!>

“이렇게 치사한 분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알았어. 이번까진 공짜로 해줄게. 아빠 이름 팔아도 안 죽게만 해주면 되잖아.>

“기왕이면 멀쩡하게 좀 해주세요. 진짜 이러깁니까?”

그렇게 공녀와 줄다리기를 좀 더 한 끝에 나는 천년공의 이름을 팔아도 된다는 허락을 손에 넣었다.

‘이럼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지.’

나는 즉시 아크팩토리의 홍보 부서 및 직원들을 소집해 대대적으로 남부 전역에 알릴 기사를 작성케 했다.

「제국의 정신적 지주, 천년공. 남부에서 깨어나다.」

같은 타이틀로 시작하는 내용을 담도록 해서 말이다.

당연히 여기엔 중앙 귀족들의 탐욕과 고통받는 시민의 삶이 적나라하게 들어갈 예정이었다.

‘니들만 언플할 줄 아는 거 아니다.’

그리하여 그날 밤, 천년공의 부활 소식이 메이어 행성으로부터 시작해 남부 전체, 더 나아가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독립을 원하는 남부 부흥의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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