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그라프를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마력의 파동을 버틸 수 있는 인재로 한정된다.
앞서 수많은 지원자가 못 볼 꼴로 퇴장했던지라 우리는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테스트를 포기해도 좋다고 말했다.
실제로 압박을 느낀 지원자들 일부는 테스트를 보지 않은 채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아무리 몸이 좋고 정신력이 강해도 마력을 견뎌내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러나 지크의 눈빛엔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테스트 장치 안에 들어가 조종간을 잡았다.
<그럼 테스트를 시작하겠습니다.>
마치 실제와 같은 부하를 주는 시뮬레이션 훈련.
블루코어를 이용해 구현한 마력 파동은 실제 기동과 흡사하다는 걸 이미 검증한 상태였다.
테스트가 시작되자 우린 지크가 보고 있을 화면을 함께 공유했다.
테스트 주 내용은 그라프를 탄 채로 어느 정도의 퍼포먼스를 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단계는 전, 후 2단계로 되어 있었으며 첫 번째는 그라프의 고속 기동, 그리고 두 번째로는 다수의 전투기가 얽힌 전장을 통해 자신의 실력발휘를 해야 했다.
“오.”
“조종 하나는 지크가 끝내줬지….”
조종간을 당기며 급속 기동에 들어간 지크를 보며 면접관들이 작은 감탄사를 내기 시작했다.
전투기와는 비교도 안 되는 압력이 그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앞서 테스트를 치른 지원자 대부분은 이 기동 단계를 견디지 못하고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다.
이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라프 조종사가 받는 기동 충격은 전투기의 몇 배에 달했다.
여기에 마력 파동까지 겹쳐지면 말 그대로 조종사의 몸을 갈가리 찢어놓는 수준이었다.
아마 나도 탑승 때마다 진이 마법으로 몸을 보호해 주지 않았더라면 버티지 못하고 기절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러나 강골(强骨)로는 엘프와 쌍벽을 이룬다는 라다만.
지크는 그라프의 최대 출력을 악으로 버티며 멋진 기동을 펼쳤다.
“1단계에선 제일 완벽했네요.”
카린은 고갤 끄덕이며 지크의 기동 점수에 만점을 부여했다.
누가 봐도 흠잡을 데 없는 비행이었다.
그렇게 곧장 이어진 2단계 테스트.
진짜 시험은 이제부터였다.
융족 전투기와 연방군 전투기 수천 척이 어지럽게 얽히며 하늘을 수놓는 우주전.
이는 정확히 실제 전투를 데이터로 삼아 만든 전장이었다.
그라프 파일럿이 되면 이런 조건 속에서 앞으로 수백 번의 전투를 수행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냥 버티기만 해도 어려운 그라프 조종을 아군 오인 사격까지 주의해 가며 실력을 선보여야 하는 자리.
간신히 1단계를 넘겼던 지원자들도 통곡의 벽을 맛보며 나가떨어진 이유였다.
그라프의 속도가 더욱 오르고, 마력이 담긴 검을 뽑아 든 지크가 속도로 적을 앞지르며 삽시간에 스코어를 올리기 시작했다.
마력검을 사용하는 순간 몸에 가해지는 부하가 더욱 심해지는 건 당연한 일.
그러나 지크는 무너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적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아마 나와 카린을 제외하면 우주에서 제일 그라프를 잘 다룰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매티스나 헨리, 다른 면접관들도 지크의 활약에 적지 않은 감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이를 악문 지크가 2단계까지 테스트를 끝냈을 때,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모두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이게 테스트를 한 건지, 아니면 사우나를 하고 온 사람인지.
지크는 땀에 흠뻑 젖어 체력을 몽땅 소진한 듯 보였지만 그래도 충분한 결과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이렇게 되면 지크 준장이 테스트 최초 성공이군요.”
“장성을… 다시 파일럿을 시켜야 한다는 거 아닙니까? 이래도 되나? 아, 물론 그라프가 일반 전투기는 아니지만요.”
박수를 치던 사람들은 새삼 지크의 계급이 준장이라는 사실을 깨닫고선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남부뿐만 아니라 제국 전역에선 중령만 달아도 조종사직을 내려놓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쯤이면 순양함급으로 이동해 대형함의 함장이 되는 루트를 밟기 때문이었다.
중령도 이러할진대 그 윗계급은 어떻겠는가.
애초에 대령까지 비행대대장을 맡으며 계속 실전 기동을 펼쳤던 내 동기들이 특이케이스인 셈이었다.
그런데 지크는 대령도 아니고 무려 준장이었다.
일부 관계자는 연방군 불문율을 들며 문제의 소지가 있음을 거론했지만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쪽이었다.
당장 테스트 내내 테스트 평가를 도운 카린도 엄연히 별을 달고 있지 않은가.
그라프 파일럿을 일반 전투기 조종사와 동일선상에 놓으면 안 된다는 게 내 결론이었다.
“그냥 지크로 확정하셔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라다만도 헉헉대는 걸 인간보고 하라는 것 자체가 무리였습니다.”
입술을 비죽 내민 헨리가 중얼거렸다.
어느덧 테스트를 시작한 여섯 시간째였다.
지크 이후 테스트를 시도하는 지원자들이 하나같이 죽을 쑤자 슬슬 지친 기색이었다.
심지어 탈락한 지원자 중엔 마법사도 있었다.
나는 마법사라고 하면 다들 마력 엔진이 내는 파동쯤은 우습게 넘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마법을 좀 한다는 친구들도 전투 상황에서의 엔진 파동을 견디기 어려워했고 정작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조종 실력에서는 평균에서 한참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마력에 어느 정도 내성이 있으면 뭐 하겠나.
조종 실력이 형편없는데.
헨리가 더 볼 필요 없겠다고 말한 이유였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테스트를 지켜봐야 했다.
아직 기대 중인 후보가 남아 있었다.
바로 오리온 백작이었다.
“충성.”
얼마 만에 입은 군복이었을까.
현역 복귀를 갈망하며 테스트 무대에 오른 오리온 백작이 칼 같은 각도로 우릴 향해 경례했다.
“오리온 비란텔, 조종사 테스트를 시작하겠습니다.”
“올 게 왔구만….”
이미 지원자들 사이에서도 백작에 대한 소문이 제법 파다했다.
그가 제국의 비밀 요원이었다든가, 맨손으로 괴수를 상대할 수 있는 대마법사라는 다소 허무맹랑한 이야기까지 돌고 있었다.
그렇게 모두의 관심 속에 시작된 오리온 백작의 테스트.
자릴 떠나지 않고 한쪽 구석에 남아 지원자들의 시험을 쭉 지켜보던 지크는 그답지 않게 감정을 드러내며 인상을 썼다.
아마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모두가 볼 수 있는 스크린 속에서, 오리온 백작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융족 전투기를 도륙하고 있었다.
이를 간단히 표현하면 종횡무진, 마치 그라프 조종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같았다.
* * *
제국에서 우주 괴수가 사라진 지 수백 년.
마침내 토벌대가 재창설되었다.
목적은 남부의 안전을 위협하는 우주 괴수를 쓸어버리는 것.
이를 위해 작전을 위한 전함 사양의 특수함이 건조될 예정이었으며 마력엔진이 양산되기까지 두 대의 그라프가 작전에 참여하기로 했다.
신형 그라프 2호기의 이름은 바너드로 정해졌다.
이를 정한 건 현역 복귀에 성공한 오리온 준장이었다.
그가 몰게 될 기체이니 이름도 그에게 정하게끔 해준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바너드엔 엘프의 옛 현자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정령술사이며 동시에 마법사인 그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었다.
2호기 파일럿이 정식으로 정해지자 무척 아쉬워한 건 지크였다.
만약 오리온 준장이 아니었더라면 반드시 그가 파일럿이 됐을 터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따로 불러 왜 위험한 그라프 파일럿이 되고 싶었는지 그 이유를 물었다.
-음. 생각보다 야망이 큰 친구였구만.
‘나도 몰랐네.’
지크.
자신의 고향을 더 살기 좋게 만들고 싶다며 장교가 되었던 녀석.
지크가 좀 돌려 말하긴 했지만 이야기를 천천히 듣고 있노라니 결국 그가 원하는 건 더 빠른 출세였다.
전투기도 아니고 그라프쯤 되면 전함급 함장보다 더 커다란 군공을 세울 수 있을 거란 게 그의 예측이었다.
그간 카린이 실피드를 통해 보여준 모습을 떠올리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다만 여기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전제가 붙지만 말이다.
“나는 그라프가 반드시 연방군 메인 전략자산이 될 거라고 생각해.”
지크는 그라프가 시대의 흐름을 주도하는 병기로써 자리매김하게 될 거라 말했다.
융족과의 전쟁 당시, 백기사가 보여주었던 퍼포먼스를 언급하며 말이다.
확실히 그 정도의 위력을 가진 기체가 일선에 추가된다면 앞으로 우주전 양상은 함대전이 아니라 그라프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시대가 될지도 몰랐다.
그렇게 다가올 흐름을 미리 예측한 지크는 좀 더 안정적으로 자신이 주류에 들어가고자 했다.
목표는 대장.
나의 뒤를 이어 군 수뇌부 꼭대기에 오르고 싶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원수는?”
굳이 정점을 노린다면 대장이 아니라 원수가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렇게 묻자 지크는 씩 웃더니 고갤 흔들었다.
“존. 혹시 황제를 꿈꾸고 있나?”
“어허. 큰일 날 소리.”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모리더스 원수의 뒤를 이어 원수가 될 남자는 너뿐일 거다. 네가 스스로 황제에 오르지 않는 이상은 말이지. 나는 너를 보좌하는 거로 만족한다.”
지크는 가능성 없는 일엔 매달리지 않는 주의라며 웃었고 이후엔 향후 계획을 논의했다.
토벌대가 본격적으로 움직인다면 3번, 4번째 그라프가 만들어지는 건 기정사실.
지크는 그때라도 자신을 불러달라며 계속해서 그라프 조종사를 준비하고 있겠다고 했다.
그에게서 강한 의지를 읽은 나는 알겠다고 답했다.
“아 그리고 이거.”
“뭐야?”
지크가 건넨 곱게 접힌 종이.
그것은 놀랍게도 청첩장이었다.
-이야. 전쟁 중에도 애는 생긴다더니.
상대는 예상했던 대로 아이스 소령이었다.
북부 때까지만 해도 대위였던 그녀지만 실피드 개발, 북부 파일럿들의 마약 중독 완화를 위한 치료제 개발에 대한 공, 그리고 엔터프라이즈호를 따르며 각종 연구를 수행한 점 등을 인정받아 지금은 그 힘들다는 연구 특기 영관 장교가 된 참이었다.
“진심으로 축하한다. 네가 동기 중에 제일 먼저 장가를 갈 줄이야.”
사실 그랬다.
라다만 친구들은 감정 표현이란 걸 잘 하지 않아서 왠지 모르게 결혼도 늦게 할 거란 선입견이 있던 게 사실이다.
보름 후면 새신랑이 될 지크에게 그래도 그라프 파일럿을 해야겠냐고 물으니 아이스 소령도 다 이해해 주었다며 깔끔하게 답하는 녀석이었다.
-지크가 너보다 훨씬 낫네.
‘갑자기 또 왜.’
-몰라서 물어?
아니, 사실 알고 있었다.
진이 저렇게 말하는 이유를 말이다.
-카린 말이야! 카린! 너한테 부담 주기 싫어서 말 안 하는 게 뻔히 보이더라.
‘으음.’
이건 눈치가 절벽에 처박혀도 알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연락해 안부를 묻고, 귀찮은 부관 일을 도맡으며 도시락까지 챙겨주는 그녀.
자치령뿐만 아니라 어지간한 남부군 장교 중엔 카린이 내 연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조금 웃프게도 우린 메이어 행성에서 잠시 이별을 고했던 그때로부터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진도를 나가란 말이다. 진도를!
‘왜 네가 더 난린데….’
-너 고자야? 아니면 어장 관리인가 뭔가 하는 그거냐!
손잡고 포옹, 가벼운 키스.
내가 카린과 해본 건 이게 전부였다.
남부에 다시 돌아오기까지 숱한 역경이 있지 않았던가.
분위기상 더 뭔가를 해보기가 쉽지 않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엘프에겐 그들만의 관습이 있었다.
한번 알아본 적이 있는데 엘프는 연인 사이의 진도를 더 나가려면 결혼을 하지 않고선 곤란한 부분이 있었다.
물론 카린의 성격상 내가 밀어붙이면 꼭 그렇지 않더라도 받아줄 것 같긴 했지만 나도 억지로 그녀를 곤란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좋아. 결심했다!’
-왔냐? 드디어 큰 거 오냐?
‘그래. 언제까지고 우유부단하게 굴 수만은 없지.’
직접 물어본 적은 없지만 거의 확실하게, 카린은 내가 청혼해 주길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됐다.
그렇다면 그 적기가 언제일까.
나는 지크의 결혼식을 다녀온 뒤가 괜찮지 않을까 하는 판단이 섰다.
2주 뒤, 시기적으로 얼마 남지 않기도 했고 나도 뭔가 준비를 해야 했다.
말로만 대뜸 우리 결혼하자! 할 게 아니라면 말이다.
-좋아. 이래야 내 계약자지!
나 존 메이어.
비록 전생엔 실패했지만 이번 생엔 예쁜 여자친구를 만나서 결혼에 성공할 운명인 듯싶었다.
비록 우주 괴수의 등장과 언제 시작될지 모를 융족과의 전쟁 재개 등의 문제로 살짝 시기가 흉흉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 거 다 따지면 결혼 평생 못 한다.
맞는 말이었다.
사방에 적을 두고 있는 인류 제국이 평화로워지는 날은 내 생엔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괴수 토벌대를 운영할 준비를 하고, 신형 순양함의 설계도 제작 참여, 시즈 일족의 거래 진행까지.
진짜 눈썹 휘날리게 바쁜 시간을 보내면서도 틈틈이 카린에게 해줄 프러포즈 준비를 하던 그때, 생각지도 못한 진짜 ‘큰 거’가 터지고 말았다.
<존! 빨리 튀어 와! 빨리!>
지크의 결혼식을 사흘 앞둔 때였다.
통신이 들어왔기에 연결했더니 귀청이 터질 것 같은 목소리로 공녀가 소리쳤다.
내가 대체 무슨 일이냐고 차분하게 묻자 그녀는 흥분이 가시지 않은 기색으로 계속 외쳤다.
그리고 뒤이어 나온 말은 그녀의 상태가 아주 명확하게 이해되는 것이었다.
<빨리 와! 우리 아빠 눈 떴어!!!>
“예?”
내 치료술식 개선이 그렇게도 효과가 있었단 말인가?
독을 뿜으며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천년공이 눈을 떴다는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