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우주 군벌가 망나니-127화 (127/134)

127화.

갑자기 엘프 손님이 찾아왔다고?

제국 전체를 헤아려 엘프의 숫자는 그리 적은 편이 아니었지만 나는 카린을 빼면 엘프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들의 주 활동무대가 중앙이었기 때문이다.

“그자의 이름은?”

<오리온 비란텔 백작. 서쪽에서 넘어온 피난민 출신이고 과거 서부군 복부 경험이 있어. 한 400년 전에…?>

400년이라고?

그 말인즉 엘프 손님의 나이가 400살을 한참 넘었단 뜻 아닌가.

인간과 사회로 나가는 시기가 다른 점을 고려하면 500살이 넘었을 수도 있었다.

나는 약속 장소로 이동하며 카린에게 계속해서 그에 대한 정보를 물었다.

그들은 이제야 막 검문을 마치고 지상 착륙장 근처의 한 카페로 이동 중이었다.

아무리 할아버지의 손님이라고 해도 검문 절차를 생략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손님은 서부 출신 피난민이라고 하지 않던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곳에 온 건지 알 수 없으니 주의가 필요했다.

“할아버지!”

나는 카페에 들어서서 윌리엄 백작을 발견하고선 미소를 보였다.

카린은 할아버지의 말동무를 해드리고 있었고 할아버지의 옆자리로는 엘프 손님이 나란히 앉아 도넛을 먹고 있었다.

-존, 느껴지지?

‘그래.’

엘프 손님을 보자마자 진은 내게 느껴지냐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은발의 머리칼에 길게 기른 수염, 나이 지긋해 보이는 이 엘프 손님은 틀림없는 마법사였다.

그의 주변에선 정제된 마력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보통의 실력이 아니면 엄두도 못 낼 그런 정교한 흐름.

어쩌면 나나 카린보다도 훨씬 뛰어난 무력을 지니고 있을 것 같단 생각에 조금 긴장이 됐다.

중앙에서 날 죽이려고 보낸 암살자는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잠깐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엘프 마법사는 자신은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는 듯 나를 보며 씩 웃더니 대뜸 한마디를 꺼냈다.

“이렇게 살아있는 걸 보니 내 치료가 잘되긴 한 모양이군.”

‘치료…?’

무슨 뜻인지 고민하고 있을 때 윌리엄 백작이 어서 인사드리라며 마법사에 대한 소개를 해주었다.

“어서 인사드려라. 이분이 오리온 백작님, 네 목숨을 살려주신 분이다. 지난 추락사고 말이다.”

“아!”

“인사는 무슨. 저 친구가 나보다 신분도 높은데 뭘.”

“아닙니다. 어르신. 그래도 목숨을 구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윌리엄 백작의 말에 그제야 이 마법사가 누구인질 알 수 있었다.

어이없이 트럭에 치여 완전히 다른 세계로 오고 말았던 몇 년 전.

식물인간이 되어 죽은 듯 누워있던 존 메이어의 몸에 나를 부른 것이 바로 눈앞의 엘프 마법사였다.

* * *

엘프 마법사, 오리온 비란텔.

지금으로부터 350년 전, 남부까지 왔다가 우연한 계기로 메이어 가문과 연을 맺게 된 남자였다.

당시 남부는 영토 확장에 있어 우주 괴물을 처치하는 데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중앙은 문제 해결을 위해 토벌대를 파견했고 오리온은 이때 남부에 들렀다고 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엔 특수 토벌대라고 해서 중앙군 휘하로 우주 괴물을 처리하는 부서가 따로 있었네.”

당시를 회상하던 오리온은 눈썹을 찌푸렸다.

지금이야 제국 영토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지만 당시의 우주 괴물은 걸핏하면 항로에 나타나 연방군을 괴롭히는 가장 큰 위협요소였다.

그리고 그런 괴물 중엔 특히나 더 많은 피해를 끼쳐 군 수뇌부로부터 코드네임을 받은 ‘강적’들도 있었다.

몸집만 수 킬로미터에 이르는 대형 우주 괴물을 잡는 일이 어디 쉬웠겠는가.

심지어 그 당시엔 그라프도 없었고 전투기와 함선만으로 상대해야 했기에 그 어려움이 상상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때 내가 남부에 온 건 세위드라는 웜홀 벌레 군주를 잡기 위해서였네. 놈이 한번 떴다 하면 연방군은 물론이고 인근 자치령까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됐지.”

수백 년 전, 남부 경계를 휘젓던 괴물을 잡기 위해 중앙은 토벌대를 파견했다.

무려 천여 척의 특수 전투함으로 이루어진 괴물 사냥의 스페셜리스트였다.

그러나 결과는 대패.

세위드는 토벌대와의 격전에서 치명상을 입었으나 끝내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그날 토벌대 인원의 반 이상이 죽었네. 나도 사실 죽은 목숨이었지. 자네들 할아버지가 날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말이야.”

폭발하는 전투함 속에서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던 오리온은 당시 메이어가(家) 가주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그때 이어진 인연은 망나니였던 존에게 닿게 되었다.

내가 고갤 꾸벅 숙여 감사함을 표하자 그는 별거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뭘, 나도 목숨 빚을 졌으니 약속을 다한 것뿐이네. 치료를 부탁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하루가 멀다고 죽어 나가는 토벌대 생활에 신물이 난 그는 대귀족 최소 조건인 준장을 달자마자 군을 박차고 나와 영주 생활을 시작했다고 했다.

비록 자치령은 하나였지만 부의 축적도 순조로웠다며 말이다.

당연한 것이 엘프는 워낙 오래 살기에 재산을 불리기가 인간보다 수월한 면이 있었다.

“대개 가문이라는 게 말이지. 자식놈들에게 물려주고 하다 보면 부가 찢어지며 그 성세가 줄어들곤 하기 마련이거든.”

“그렇지요.”

그의 말에 윌리엄 백작이 맞장구를 쳤다.

메이어 가문만 해도 이미 수백 년에 달하는 역사를 지니고 있었지만 내가 정신을 차리기까지, 자치령의 숫자는 고작 하나였다.

명문가가 되기 위해 세를 불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우리 가문이 비록 자치령은 하나여도 돈은 어디 부족하지 않을 만큼 모았거든. 해서 도움이라고 하면 당연히 물질적인 게 아닐까 생각했지 뭔가.”

오리온 백작은 메이어 가문에 진 빚을 갚을 기회가 있으면 언제든 도우려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고 했다.

다만 그 부탁을 350년이 지나서야 들어주게 될 줄은 몰랐다나?

이에 윌리엄 백작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메이어 가문도 오리온에게 부탁할 기회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거대한 부를 이룬 엘프 마법사 아닌가.

그 때문에 역대 가주들은 멸문의 위기가 아니면 허투루 연락을 넣지 말라며 기회를 아낄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기회를 윌리엄 백작 대에 이르러 고작 망나니 한 명 살리기 위해 쓴 것이었다.

뭐, 결과적으론 가문에 있어 최선의 선택이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나는 자네들이 그 부탁을 잊어버린 줄 알았네. 인간이 원래 그렇잖나. 잘 잊어버리고. 수백 년이란 시간은 나한테도 제법 긴 시간이었거든.”

“오리온 백작님이 아니었으면 아마 아직도 이 아이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현대 의술로 답이 보이지 않을 땐 마법이 최고지. 보아하니 손주 치료는 무척 잘된 모양이군. 어디 아픈 덴 없나?”

“예. 무척 건강합니다. 힘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고갤 꾸벅 숙이자 그는 잘 됐다며 껄껄 웃었다.

“사실 자네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네. 남부를 구하고 북부까지 구해낸 영웅의 소문은 서부에서도 유명하거든. 그런데 하나 궁금한 점이 있네.”

“편히 말씀해 주시지요.”

뭐든 답해드리겠다고 말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표정은 살짝 굳고 말았다.

다년간 풍파를 겪으며 표정관리에 상당히 자신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자네 주변에서 느껴지는 그 정령 말이네. 희한하게 아무 냄새도 나지가 않거든. 속성계열 정령은 아닌 것 같고 혹시 무슨 정령인지 말해줄 수 있겠나?”

“……!”

* * *

오리온 백작에겐 할아버지와 함께 행성에서 가장 좋은 방을 내어드렸다.

아직 건물이 한창 건축 중이라 그렇지 이미 완공된 빌딩의 수준도 제법 괜찮은 편이었다.

만남을 마치고 돌아오던 때, 진은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이 좋은 노인네였어. 틀림없이 정령술사일 거다.

‘정령술사?’

-정령과 계약해 그 힘을 빌리는 녀석들이야.

‘그런데 왜 비밀로 하라고 한 거야?’

-기억 안 나? 난 원래 처음부터 내 존재를 알리지 않는 게 좋을 거 같다고 했어.

생각해 보니 그랬다.

내가 이 세계에서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진은 자신의 존재를 누군가에게 알리길 꺼렸다.

덕분에 나는 생명의 은인에게도 대충 둘러대며 비밀을 숨겨야 했지만.

‘너 설마 나랑 계약하기 전에 무슨 범죄 저지르고 다닌 건 아니지?’

-어허. 날 뭘로 보고….

‘목소리가 작네? 점점 더 수상한데?’

-아, 아니라니까.

평소답지 않게 말끝을 흐리는 진.

켕기는 게 있는 건 분명한데 지금으로선 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나중에 따로 마법의 정령에 대해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생각해.”

-군 시스템에 대해선 너나 나나 아는 정보가 같은데 나한테 물어봐도 딱히….

오리온 백작이 이 먼 변방 행성까지 찾아온 이유는 단순히 내 상태를 보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그의 또 다른 속내는 바로 현역 복귀, 이를 위해 내 의견을 듣고자 함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나이가 너무 많단 말이지.’

실제로 서부 피난민 중엔 장교로 지냈거나 예비역 신분인 인원이 수두룩했고 그들 중 상당수는 남부군에 편입해 재배치되길 희망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이유야 간단했다.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

피난민 대부분은 게이트를 넘으며 재산을 챙기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제국에서 가장 대우를 받는 직업은 역시 군인이었고 먹고 살기 위해선 당장 재입대만 한 게 없는 셈이었다.

실제로 연방군 규정엔 예비군 장교에 대한 재입대 규정이 존재했는데 문제는 대상이 어느 정도 나이가 젊은 인원에 한정되어 있다는 거였다.

장성이면 그 기준이 조금 여유롭긴 하지만 오리온 백작은 이미 나이가 400살도 훌쩍 넘은 양반이었다.

다시 현역 입대 요청을 하면 군 수뇌부가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하기 어려웠다.

-재입대를 원하는 이유는 자치령 때문인가?

‘음. 서부로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 남부에서 다시 전공을 쌓고 싶은 모양이야.’

서부 피난민 중에 상당수 섞여 온 대귀족들.

그들은 남부에서 다시 자치령을 관리하길 원했다.

비록 전쟁을 피해 도망쳤지만 귀족으로서의 지위를 계속해서 누리고 싶은 것이었다.

군 수뇌부는 이러한 귀족들의 요청을 마냥 무시하진 않았다.

어차피 융족과의 전쟁 승리로 얻은 수많은 행성들이 있었다.

충분히 군공을 쌓은 남부군 장성들에게 행성을 배정하고도 이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을 만큼 말이다.

-뭐야. 그럼 왜 굳이 군공을 쌓으려고 하는 거지. 그냥 편하게 자치령만 배정받으면 되는 거 아닌가?

‘모든 행성이 풍요로운 게 아니잖아.’

제국이 예비 자치령 후보군을 정하는 기준은 그리 까다롭지 않았다.

일단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이어야 한다는 것, 이게 가장 중요한 절대 조건이었다.

달리 말하면 사람이 살 수만 있으면 그 외의 조건은 개판이 나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단 뜻이었다.

메이어 행성은 각종 자원광산이 존재하며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인근 행성에까지 광산이 박힌 역대급 꿀땅이었다.

그러나 이런 보물급 행성은 은하를 통째로 뒤져봐도 손에 꼽을 정도다.

누구나 이런 행성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 좋은 행성을 받으려면 군공을 세워 남들보다 점수를 높이는 수밖에 없었는데 서부에서 피난해 온 대귀족의 경우, 남부의 모든 장성보다도 순서가 밀리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도 생명의 은인이 부탁하는 데 가만있을 수는 없던지라 모리더스 원수에게 이 부분에 대해 따로 문의를 해보기로 했다.

<음. 피난민들의 재입대 문제 말인가. 실제로 그런 요청이 적지 않았네. 귀족이며 명예시민 가릴 것 없이 말이지. 문제는 서부의 군단 규모가 겨우 5개밖에 안 되었단 거야. 이게 무슨 뜻인지 아나? 재배치를 희망하는 인원 태반이 비전투 요원이란 뜻이네.>

“아….”

<그 많은 비전투 인력을 재배치하는 건 우리로서도 별 영양가가 없는 일이지.>

“그럼 전투 특기라면 상관없겠습니까?”

<물론이지. 베테랑 조종사나 함장의 편입은 언제든 환영 아니겠나.>

“나이가 있어도 괜찮다면 추천하고 싶은 인물이 있습니다.”

<그래? 누군가.>

모리더스 원수는 내가 사람을 추천하겠단 말에 큰 관심을 보였다.

“오리온 비란텔 백작입니다. 엘프이고 400년 전부터 특수 토벌대로 활약한 인물입니다.”

<사, 사백 년? 아무리 엘프여도 나이가 너무 많지 않나. 게다가 토벌대라니. 그거 혹시 우주 괴물 잡던 부대 아닌가?>

“맞습니다.”

<존, 엘프에서도 고령인 분을 다시 현역 장성으로 재배치하는 건 좀 무리인 듯싶군. 심지어 토벌대는 완전히 사라진 부대 아닌가. 남부엔 그의 경험을 살릴만 한 환경이 마땅치 않네.>

융족의 영토를 차지하며 남부군은 크라켄이라는 대형 괴물과 마주쳤지만 피해는 아주 잠깐뿐이었다.

괴물에 충분한 타격을 줄 수 있는 미사일도 개발된 데다 전쟁 이후엔 크라켄이 목격되었다는 보고도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방군이 강하다는 걸 깨달은 괴물들이 지레 겁을 먹고 다 숨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나로선 무척 아쉬운 일이었다.

우주 괴물의 핵을 얻어야 실피드의 후속기를 생산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현역 복귀는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을 들은 나는 어떻게 이야기를 전해야 할지 고민했다.

잠깐 이야기를 나눠본 것뿐이지만 오리온 백작의 현역 복귀 열망은 제법 강해 보였다.

‘말해주면 실망할 텐데.’

-뭐 어쩔 수 있나. 애초에 엘프가 오래 살아도 그 나이면 윌리엄 백작 연배인데 집에서 쉬는 게 맞지.

‘그분은 집을 잃었잖아.’

-그냥 자치령 하나 더 구해주면 어때. 자치령 배정 때문에 현역 복귀를 원하는 거면 우리가 그 정돈 해줄 수 있지 않나?

‘우리가? 어떻게?’

-거 내가 제국 영웅인데 행성 하나만 더 주십쇼- 하면 알아서 평의회에서 새 자치령을 갖다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미친 소리.’

최대한 오리온 백작이 상처받지 않게 이야기를 잘 전해주고자 고민하던 어느 날, 전혀 예상치 못한 소식이 들려왔다.

“그게 사실인가?”

<전선 쪽 피해가 상당하다고 합니다.>

잠잠했던 우주 괴물이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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