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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군벌가 망나니-124화 (124/134)

124화.

체스판처럼 백과 흑이 규칙적으로 깔린 바닥.

하늘 위엔 거대한 은하수가 흐르는 공간인 이곳에, 원형의 테이블을 둘러싼 열두 존재가 모여 있었다.

이들은 전원 얼굴에 특이한 헬멧을 쓰고 있었는데 그 모양새는 매우 단단한 금속에 짙은 묵빛을 띠고 있었다.

눈코입이 있어야 할 자리엔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자가 붉은빛, 혹은 푸른빛을 내며 변화무쌍한 움직임을 보였다.

또한 이들의 등 뒤엔 천사와 같은 거대한 깃털 날개가 여럿 달려 있었는데 아마 이들을 처음 보는 이들이라면 십중팔구 같은 말을 할 터였다.

뾰족한 바이크 헬멧을 쓴 이상한 천사들이 있었다고 말이다.

이들의 이름은 운카라.

자신들의 영토와 맞닿은 모든 종족을 무릎 꿇렸으며 현 우주에서 가장 높은 문명 레벨을 달성한 최고위 종족이었다.

“인류 제국을 가리던 장막이 걷혔습니다. 아마 황제의 수명이 다한 모양입니다.”

누군가의 선언에 나머지의 고개가 잠시 흔들렸다.

“이제는 좀 더 자세한 관찰이 가능하겠군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운카라는 어떤 종족도 따라 하기 쉽지 않은 마법 실력과 신물을 갖추고 있었다.

이를 적절히 이용하면 자리를 떠나지 않고도 아득히 먼 거리까지 시야를 넓힐 수 있었으니 다른 종족과 격이 다르다고 표현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오늘 회의를 연 건 제국에 남아있을 아르고스의 진혈(眞血)을 어떻게 할지 논의하기 위함입니다.”

“아르고스의 진혈! 확실히 다른 종족의 손에 들어가게 놔두기엔 위험한 물건이군요.”

아르고스의 진혈이란 태고괴수 아르고스가 죽으며 남긴 피다.

보통 생물이 죽으며 피를 흘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썩어 없어지지만 특이하게도 태고괴수들의 피는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스스로 정화의 시간을 가진 뒤 특수한 능력을 선보이는 보물이 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여러 개의 눈을 가지고 우주를 떠돌았다는 아르고스는 제국 초창기, 초대 황제에 의해 토벌되었는데 그 피는 고스란히 황궁의 지하로 옮겨져 연못의 물이 되었다.

태고괴수의 진혈이 황제가 제국 바깥의 수많은 적으로부터 감시를 막아낸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그쪽의 동향은 어떻습니까.”

“엘다란이 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엘다란…폭력적이고 컨트롤이 안 되는 녀석들이죠.”

“문제는 제국의 힘이 여러 요소로 인해 급격히 떨어져 있다는 겁니다. 개입하지 않으면 아르고스의 진혈이 엘다란에게 갈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그것만은 막아야 합니다. 놈들은 이미 진혈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벼락의 태고괴수 노토스의 것이었죠.”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한 이들은 어떻게 엘다란을 견제할지 의논하기 시작했다.

“직접적인 개입은 여전히 어머니께서 꺼리시니…이번에도 다른 종족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융족을 이용하면 어떨까요. 그들은 영토 확장 욕심도 상당하고 얼마 전에도 제국과 충돌을 일으켰던 거로 압니다. 비록 패하긴 했지만요.”

“과연 그들이 다시 전쟁하려 할까요?”

“이쪽에서 지원하겠다고 하면 그들도 받아들일 겁니다. 복수하고 싶을 테니까요.”

“그럼 이 안건은 바로 찬반 투표에 부치도록 하죠. 융족을 이용해 진혈 회수작업을 진행하는데 반대하는 분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잠시 적막이 흐르고, 아무도 손을 들지 않자 운카라 한 명이 일어서서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반대표가 없으므로 투표는 이것으로 마칩니다. 융족에게 어느 정도 지원을 제공할진 기술부의 의견을 참고토록 하겠습니다. 해산.”

* * *

“1차 선단을 통해 들어오는 시민들의 숫자는 총 2천만 명 규모입니다.”

“주거지역 개발과 식량 수급 문제는?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나?”

“문제없습니다. 회장님.”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선 안 돼. 앞으로도 계속 시민 숫자가 늘어날 테니까.”

자치령의 인구수는 곧 행성의 노동력과 직결된다.

여유가 된다면 최대한 많은 시민을 끌어오는 게 유리했는데 이주민들이 원하는 수준의 의식주를 갖추는 건 생각만큼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주거지역을 건설하고, 식량을 위한 농작지 개간을 하는 일이 하루아침에 뚝딱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내가 북부로 가 있는 동안 오크 친구들이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지는 황금 들판을 마련해 놓았다는 점이고, 훈련소 공식 건설을 통한 각종 지원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돈을 아낌없이 풀었고 남부에서 이름 있다는 유명 건설기업들과 접촉했다.

하루라도 더 빨리 수천만 명의 시민을 수용할 수 있는 계획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1차 선단에만 이미 2천만 명의 시민이 탑승하고 있지 않던가.

여전히 많은 서부 시민들이 게이트 외곽지역의 임시 대피소에서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만약 도시를 더 빨리 건설할 수만 있다면 신음하는 피난민 사이에서 수억, 수십억에 달하는 시민들을 데려오는 것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다만 이 프로젝트엔 쉬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자본이 필요했다.

건설 자재며 건축, 토목 기술자들의 비용이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한 탓이었다.

돈 좀 있다는 대귀족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새 도시를 짓고 피난민 수용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다시 나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일기 시작했다.

평의회와 수뇌부가 작심하고 밀어주는 행성과 어떻게 정당한 유치 경쟁을 할 수 있겠느냔 논리였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은 금방 여론의 몰매를 맞고 사그라들었다.

<존 메이어가 곧 민심이다!>

<제국을 구한 영웅을 시기하는 모리배가 대체 누구냐! 불만 있으면 당당히 앞으로 나와서 말해라!>

<꼬우면 니들도 나가서 발로 뛰던가! 방구석에만 앉아서 불평불만 하는 주제에 말이 많아!>

수많은 남부 시민의 응원은 내게 엄청난 힘이 되었다.

아무리 제국이 신분제 사회여도 귀족이 민중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 덕에 나를 욕하는 사람들은 모두 반란 주동자, 대역 죄인과 같은 취급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든든하긴 하지만 때로는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내가 곧 민심이라니….

황제가 멀쩡히 살아있었으면 이단심문관들에게 양팔이 붙들려 감옥으로 끌려가고도 남을 이야기들이었다.

-그래도 기분 좋지? 이러다 신황제도 가능하겠어.

‘거참, 황제는 욕심 없다니까 그러네.’

황제는 됐고.

늘 귀족들을 압박하며 걸핏하면 피로 목욕을 해대는 자리에 무슨 욕심이 나겠는가.

많이 양보해도 딱 대원수까지였다.

나는 적당히 노력하고 최대한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꿀보직이 좋았다.

아무튼, 다시 현실로 돌아온 나는 내게 쌓이는 불만을 해소할 방법을 마련하기로 했다.

애초에 왜 불만이 생기는가.

수뇌부가 내게 지원을 퍼붓는걸 아니꼽게 보는 인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에 대한 해결방법은 무엇인가.

-불만이 있는 귀족들을 다 죽인다?

‘…너 사탄 들렸어?’

북부에 다녀오는 사이 어비스데몬의 악마가 진에게 들러붙기라도 한 걸까?

어떻게 저런 끔찍한 소릴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헛소리 집어치우라며 내가 떠올린 정답을 이야기했다.

‘내가 지원을 받기에 정당한 업적을 추가 달성하면 되는 거야.’

-오호라.

그럼 모두가 인정할만한 공로엔 뭐가 있을까.

지금 남부는 막 전쟁이 끝난 참이었고 반란과 긴 전쟁으로 피폐해진 자치령들이 낑낑대며 여전히 복구에 매달리는 참이었다.

이 과정에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나타났는데 나는 이 중에 국방력 증진 항목에 초점을 맞췄다.

일단 휴전 상황이 되었으니 전투로 군공을 쌓을 순 없고, 그렇다면 각종 무기 개발로 나의 가치를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밀어주는 만큼 그 값을 하는 인물이다라는 걸 만천하에 보여주는 것.

신형 이클립스 미사일로 기업연합체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준 게 불과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나는 더 나아가 신형 장갑판, 최신형 실드 방호기술, 최종적으로 전투함 건조까지 영역을 확장할 계획에 있었다.

남부군이 사용하게 될 1티어 전략 자산을 모두 내 손으로 만들어 보급하는 것.

이 원대한 계획은 내 가치를 무한대로 높여줄뿐더러 당장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는 데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렇게만 되면 엄청난 명예가 따르겠군. 적어도 군 수뇌부는 네 말에 꼼짝도 못하게 될 테지.

제국 역사상 최고의 천재 과학자로 명성을 떨칠지도 모를 일.

진은 프로젝트 이름은 정했냐고 물었다.

-그래서. 프로젝트 이름은 뭔데? 설마 또 이클립스를 갖다 붙일 건 아니겠지?

‘그럴까도 했는데 말이야.’

-오 쉣.

‘그래도 워낙 대형 프로젝트이니 만큼 새로운 이름을 짓기로 했어.’

-불행 중 다행이군.

진은 이름을 통일하는 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나는 새로 작성한 프로젝트 초안을 진에게 보여주었다.

「프로메테우스」

남부의 기술력을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격상시켜줄 신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 * *

신규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선 몇 가지 통과해야 할 사항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바로 세리스 공녀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내가 중앙에서 진행된 전략 자산 프로젝트 중 그 일부만을 파악하고 있다면 중앙의 기술고문을 역임했던 공녀는 아주 자세한 부분까지, 중앙의 사정을 속속들이 꿰고 있는 인물이었다.

즉, 공녀가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면 제국의 드래곤들이 우리와 함께한다는 느낌을 심어줌과 동시에 무궁무진한 기술 보따리를 들여오는 격이었다.

다만 이를 위해선 공녀가 내게 바라는 것.

천년공의 치료를 위한 마법진 연구를 좀 더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마법 연구에 몰두하던 때, 군 수뇌부를 통해서 서부의 어두운 소식들이 전해져왔다.

여전히 대피하지 못한 시민들.

그리고 그들을 유린하는 엘다란의 전쟁 범죄에 관한 것들이었다.

모든 군단을 잃어버린 서부는 더 이상 반격할 힘이 없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시민들이 피를 뿌리고 있었다.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는 무리를 해서라도 서부를 도왔어야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하지만 이쪽 사정도 녹록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당장 코앞을 볼 게 아니라 더 먼 미래를 내다봐야 했다.

대원수와 황제가 완전히 공멸하지 않는 이상 중앙의 혼돈은 곧 정리될 터였다.

누가 이기든 남부는 곧 전쟁에 뛰어들어야 했다.

이미 군 수뇌부는 황제를 떠나 내 편에 서기로 한 상황이었다.

한 번 칼을 뽑았으니 반드시 이기는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피로 쓰인 역사를 생각하면 패배하는 쪽은 죽음뿐이었다.

이 사실을 잘 아는 수뇌부는 연일 내게 보내는 지원의 규모를 확대 중이었다.

이제는 슬슬 귀족들도 눈치를 챌 수밖에 없었다.

곧 엄청난 일이 벌어지겠구나- 라는 사실을 말이다.

황성을 지켜야 할 수도방위사령관이 조용히 남부로 돌아와 자치령을 관리 중인 요상한 상황.

심지어 중앙은 대규모 반란으로 소식을 알 길도 없었다.

상황 자체만 놓고 보면 군 수뇌부는 내게 지원을 할 게 아니라 헌병대를 불러다 체포를 해야 했다.

수도방위사령관이 임무를 내팽개치고 반란 중에 빤스런을 했으니 사형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다.

그런데도 전폭적인 지원을 보낸다?

이거야말로 남부가 대놓고 중앙과 한판 벌이겠다는 강력한 신호였다.

이러한 사실을 모두가 알았으니 이제는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설령 내가 목숨을 대가로 평화를 제안한다 해도 중앙은 받아들이지 않을 터였다.

나를 지원한 군 수뇌부, 남부평의회, 그리고 귀족들까지.

존 메이어라는 이름과 그 흔적을 모두 말살하기 위해 남부를 피로 덮고도 남을 놈들이었다.

‘내가 지는 순간 남부는 서부보다 더 심한 꼴을 겪을 수도 있다.’

그러한 압박감 속에 잠을 줄여가며 프로젝트와 연구에 매달리던 때였다.

마침내 중앙의 승자가 정해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내가 중앙에서 탈출을 감행한 지 40일 만의 일이었다.

<5527년, 4월 10일. 나 마크 딜런은 제국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음을 선포한다. 기존의 왕조는 끊어졌으며 곧 새 제국에 걸맞은 후계자가 정해질 것이다. 그간 제국에 수많은 혼란이 발생했음을 익히 알고 있다. 걱정하지 말라. 제국은 원래의 성세를 되찾게 될 것이다. 나는 옥좌를 탐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으며 끝까지 이 자리에서! 제국의 수호와 번영을 위해 노력하겠노라.>

끝까지 자릴 지킬 것이며 옥좌엔 조금의 미련도 없다는 대원수의 발언.

당연히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목숨을 걸고 반란에 성공했으니 설령 자리엔 다른 놈을 앉히더라도 꼭두각시에 불과할 거란 사실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중앙의 타락이 시작됐군.

진은 중앙의 부패도가 역대 최고점을 갱신할 거라며 혀를 찼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대원수의 탐욕은 아마도 중앙에만 국한되지 않을 거라는 게 내 판단이었다.

화폐개혁 때문에 황제를 끌어내린 놈들 아닌가.

그런 놈들이 권력을 잡게 되었으니….

제국은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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