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오전.
그간 손대지 못한 회사 일을 처리하며 앞으로 있을 공격에 어떻게 대응할지 임원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듣던 중이었다.
<대장님. 잠시 이쪽에 한번 와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군용 통신으로 카린이 나를 찾았다.
한동안 내 전속부관으로 서류 업무를 담당했던 그녀는 최근 새로운 임무를 맡게 되었다.
바로 파일럿 교육이었다.
아직 중앙에서의 상황은 아무것도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난 언제든 다가올 수 있는 불운한 미래를 마냥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진의 조언을 받아들여 내 몸을 지킬 수 있는 병력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대규모 오크들이 VV5610으로 건너오기 시작했다.
오크는 본래 육체 능력이 뛰어나고 단합이 잘되는 종족이었다.
특히 식량난을 해결해 준 내게 오크들은 무척이나 고마워했다.
내 이름을 걸고 병력 육성을 시작할 거란 이야기가 쌍둥이 행성에 전해지자 첫날에만 80억 명에 달하는 오크 전사들이 입대를 희망했다.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직 이곳엔 그만한 인원을 수용할 기반시설이 아무것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부랴부랴 라이언을 통해 건설업자들을 불러들일 것을 지시했다.
기존에 진행되고 있던 공사며 계획들의 규모를 모두 수십 배 이상 늘려야 했다.
나는 차근차근 범위를 확대해 나가기로 하고 일단은 부하들에게 1차 훈련소 육성인원을 50만 명으로 잡을 것을 지시했다.
말이 50만 명이지.
제대로 된 훈련소가 없던 VV5610에선 이것도 엄청난 인원이었다.
그렇게 내 밑에 있던 장교들은 모두 이들의 전투 훈련을 위해 바삐 움직여야 했다.
이 때문에 카린도 오크 파일럿 양성에 힘을 보태고 있었던 것.
그랬던 그녀가 날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회의를 빠르게 마치고 카린에게 갔을 때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과거, 융족과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시절에 지반을 다지고 연방군 착륙장과 부대시설이 들어섰던 자리에 거대한 마천루가 들어서고 있던 것이다.
“누가 허가도 없이….”
VV5610은 곧 이름이 바뀔 예정이었다.
애초 VV5610은 임시로 부여된 코드네임이고 정식 명칭은 자치령의 영주가 정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결정한 이름은 메이어.
이곳은 이제 메이어 가문을 대표하는, 내가 다스리는 행성이 될 예정이었다.
당연히 이런 대형 공사는 모두 내 허락하에 진행되어야 하는데 마구잡이로 건물이 올라가는 상황이었던 것.
잠시 뒤, 나는 누가 범인인지 알게 되었다.
건물을 올리는 인력이 죄다 드론에 골렘이었기 때문이다.
불법 건축물을 빠르게 올리고 있던 범인은 다름 아닌 세리스 공녀였다.
“불만 있어?”
“…아닙니다.”
현장 감독 겸 건물이 올라가는 광경을 지켜보던 공녀가 나를 검지로 콕 찍어 가리켰다.
“그리고 요즘 왜 이렇게 게을러?”
“예?”
“마법진 말이야! 언제까지 놀기만 할 거야. 일하라고!”
공녀는 중앙 탈출도 도와주고 중앙 기술도 실컷 견학시켜 줬는데 왜 깜깜무소식이냐며 마법진 개조에 관한 추가 작업을 닦달했다.
나는 땀을 흘리며 해드려야죠. 하고 답한 뒤 화제를 돌렸다.
“레하반 타워를 새로 짓는 겁니까?”
“응.”
공녀는 완공까지 일주일이면 된다고 했고 내가 어떻게 그렇게 빠를 수가 있냐고 묻자 마법을 이용하면 충분하다고 답했다.
레하반 가문 비장의 건설 마법을 이용하면 금방 대피소가 완성된다는 거였다.
“그러고 보니 지하에 있던 많은 보물은 다 수거하셨습니까?”
“당연하지. 그걸 어떻게 그냥 두고 와?”
공녀는 컬렉션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임시로 파둔 지하로 나를 안내했고 그곳에 마법을 이용해 보물을 쏟아내는 놀라운 광경을 보여주었다.
지팡이를 매개로 한 아공간 마법이었다.
생물은 집어넣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는데 쏟아져 나오는 보물의 양을 보니 그건 단점이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잘하면 전함도 하나 구겨 넣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지하 공동의 규모는 내가 황성에서 보았던 그것과 거의 동일했고 전함 격납고를 개조해 무사히 운반에 성공한 진귀한 식물원도 다시 꾸며지는 중이었다.
그녀는 이곳에 새롭게 둥지를 틀 모양으로 보였다.
새로 짓는 타워를 둘러보던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꼭 여기여야 하나?
그녀 정도면 얼마든지 평의회에 자치령을 하나 통째로 요구해도 될 수준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다 통째로 달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행성을 통째로 달라고 부탁하면 나로서는 굉장히 난감한 일이 될 터였다.
공사가 문제가 아니라 통째로 자치령을 도둑맞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나는 입을 꾹 다물기로 했다.
행성만 빼앗아 가지 않는다고 하면 썩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제국의 가장 든든한 일원인 드래곤이 거주하는 행성.
타이틀만 보아도 안전한 곳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기지 않는가.
그렇게 타워를 둘러보고 난 다음 나는 다시 함선으로 향해 부하들을 독려했다.
이들 대다수는 평생 우주에서 전투만 치른 이들이었다.
갑자기 엄청난 규모의 병력을 훈련시키라고 덜컥 일을 맡겼으니 익숙지 않은 일에 얼마나 피곤했겠는가.
다행히 그동안 라이언이 아크팩토리를 단단하게 운영해 온 덕분에 내가 쓸 수 있는 여유자금은 제법 넉넉한 편이었다.
나는 훈련병과 장교들이 먹고 지낼 시설에 돈을 아낌없이 투자할 것을 지시했다.
그렇게 단숨에 2천억 크레딧에 달하는 사업 진행비가 지출되었다.
구화폐로는 200조 크레딧에 상응하는 거금이었다.
‘슬슬 때가 됐군.’
-무슨 때가 됐다는 거지?
나는 훈련 중이던 카린을 호출해 그녀와 함께 실피드를 타고 잠시 자치령의 하늘을 거닐기로 했다.
카린은 데이트를 하는 줄 알고 싱글벙글했지만 비행의 목적은 빠른 장소 선정을 위한 측량이었다.
현재 운영되는 자금에서 가장 많은 지출을 차지하는 건 단연 식량 부문이었다.
1,200억 오크를 먹여 살리기 위한 비용.
이에 비하면 크릭이나 자치령 관리를 위한 돈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제 행성 자치 권한이 내게 넘어왔으니 경작 규모를 대폭 확장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다른 해결책을 쓰기로 했다.
시즈 일족의 선물.
한동안 금고에 넣어놓고 잊고 지냈던 황금 콩을 쓰기로 한 거였다.
“저쪽으로도 한 번 가줄래?”
“알겠어.”
“미안해. 쉬어야 할 시간인데 내가 귀찮게 했지.”
“아니야! 내일도 비행하자. 나는 좋으니까….”
-후. 이쯤 되면 그냥 결혼해 줘라!
실피드 아래로 스쳐 지나가는 대삼림.
본래 융족이 주인이었던 메이어 행성은 자연 그대로의 경관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도 광활한 수림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저긴 대도시를 지으면 좋겠는데. 경작지랑 도로를 깔기도 편하겠고.’
상공에서 자치령의 도시계획도 겸사겸사 헤아리던 나는 마침내 맘에 드는 장소를 찾아냈다.
산맥에 둘러싸여 있어 쉽게 눈에 띄지 않는 분지였다.
-왜 굳이 외진 곳을 찾은 거야?
이유는 간단했다.
황금콩이 제대로 열매를 맺기만 한다면 누구나 원하는 식물이 될 테니까.
이 신비의 식물은 기존 작물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에너지와 포만감을 제공한다고 했다.
경작에 성공하는 순간 나는 제국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사기적인 식량 아이템을 손에 넣는 셈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것을 반길 거로 생각하긴 어려웠다.
당연히 오크들은 좋아하겠지.
하지만 기업들은?
식량은 군수 사업과 더불어 대규모 사업 중 하나다.
수십 수백 년에 걸쳐 이룩한 유통망과 상품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릴 걸 알게 되면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뻔했다.
여차하면 이곳에 불이라도 지르려 달려들 터였다.
‘가진 것들을 전부 지킬 힘을 갖추기 전까진 뭐든 안전하게 진행하는 게 최고다.’
그렇게 분지에 경작지 마련을 위한 공사가 착수되었다.
지대가 높았고 기후는 생각보다 차가웠다.
콩이 어떤 환경을 좋아하는진 알 수 없으나 냉기가 식물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은 상식이었고 나는 거대한 온실을 비롯해 콩을 재배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조성하기로 했다.
“라이언, 돈을 얼마를 들여도 좋으니 최고의 식물학자를 데려와.”
<식물학자요? 알겠습니다.>
내내 군수 사업에만 집중하던 찰나에 갑자기 식물학자라니.
라이언은 충분히 나의 의도를 궁금해할 법했지만 되묻지 않고 일에 착수했다.
내가 라이언을 믿고 좋아하는 이유였다.
남부로 돌아왔기 때문일까.
나는 최근 느낌이 좋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황성에선 아무리 좋은 침대에 누워 자도 가시방석 위에 앉은 것처럼 불편한 구석이 있었는데 이곳은 달랐다.
모든 일이 잘 될 것만 같은 기분.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또 하나의 희소식이 들려왔다.
군 수뇌부가 적극적으로 지원에 나서겠다는 연락이었다.
모리더스 원수가 직접 이를 전했고 나는 무척 홀가분한 마음이 되었다.
‘군부가 나와 함께하기로 했다…!’
적어도 군이 내 편을 들어준 만큼 무력하게 중앙에 끌려갈 일은 없어진 셈이었다.
다만 아직 완전히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존, 자네는 당분간 그곳에서 전선 방어를 맡아주게.>
“전선 방어입니까?”
융족은 남부 경계 일대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현재 남부엔 우릴 적대하는 세력이 없는 상황.
그런데도 모리더스 원수는 방어를 위해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그리고 이번 지원엔 연구비 명목으로 대량의 자금이 포함됐네. 자네라면 남부의 낙후된 기술을 크게 끌어 올려줄 수 있으리라 믿네. 앞으로 미사일뿐만 아니라 전투기, 전투함, 모든 분야에서 대규모 국방력 강화 계획이 추진될걸세. 자네 기업의 이름이 자주 보이면 좋겠군.>
“최선을 다해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각하.”
짧은 통신이었지만 원수의 속뜻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남부의 기술력을 크게 높여 달라는 것.
다시 말해 이미 노선을 정했으니 중앙 눈치 보지 말고 실력발휘를 해달라는 이야기였다.
-존, 이래도 되는 거냐?
통신이 끝나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진은 머릴 긁적였다.
-이러면 방법만 다르지 결국 반란이잖냐.
진은 오스카 원수 때의 반란과 지금의 흐름이 무엇이 다른지 이해 못 하는 눈치였다.
‘상황이 달라.’
-어떻게?
오스카 원수가 반란을 일으켰을 땐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
남부가 중앙의 번영을 위해 일방적으로 착취를 당했으며 그 결과, 무고한 시민들이 전장으로 몰려 떼죽음을 당했다는 것.
그 의견에 남부 인원 상당수가 동의한 건 사실이었다.
다만 당시의 반란은 그 방식이 너무 과격했고 힘이 부족했다.
군부가 하나로 똘똘 뭉쳐 일을 추진한 것도 아니었으며 평의회 테러 당시 남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귀족 수백 명이 죽음을 맞이했다.
당시 사망한 의원들의 가문들은 모두 남부의 지배세력이었으니 사방에서 오스카 원수에게 저항하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변했다.
이후 남부의 권력과 질서는 신진 세력들, 특히 반란을 제압한 장성들이 몸담은 가문들로 상당수 이동했으며 당장 황제에겐 대량학살을 저질렀다는 의혹 거리가 남아있었다.
게다가 기계 병사로도 채울 수 없었던 기술의 격차를 이번엔 따라잡을 수 있겠다고 군 수뇌부가 판단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남부가 다시 반란을 계획한 게 너 때문이란 거지?
‘결론적으론 그렇지.’
-할 수밖에 없네.
어차피 내겐 선택지가 없었다.
황제가 살아남든 반란군이 살아남든 저들이 정비를 마치고 나면 언제든 나를 잡아들이려 할 테니까.
살아남으려면 이쪽도 그에 걸맞은 힘을 길러야 했다.
군 수뇌부의 지원이 결정된 그 날, 나는 계획을 정리해 다시 모리더스 원수에게 통신을 넣었다.
병력을 육성할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
이곳에 남부 훈련소를 운영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요청이었다.
이에 모리더스 원수는 얼마든지 인력을 보내주겠다 했지만 한 가지를 우려했다.
행성 메이어 주변엔 아직 남부 시민이 그리 많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융족의 영토였기도 하고 이제 막 자치령으로서 주변 행성들이 하나둘 개발되는 단계였기 때문이다.
<훈련소를 세워도 충분한 인원을 모집할 수 있겠나?>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원수에게 이종족들, 오크와 크릭을 집중적으로 연방군 일원으로 육성할 것이라 밝혔다.
<오크를? 그들의 용맹함이야 이미 북부를 통해 증명이 되었다고 들었네. 다만 식량 문제가 남아있질 않나.>
인간 병사와는 비교도 안 될 그들의 식량 문제가 관건이었다.
나는 이 부분을 책임지고 해결하겠노라 장담했고 원수는 알겠다며 속전속결로 훈련소 개설 허가를 내주었다.
기술 개발과 병력 육성.
중앙으로의 반격에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동시에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