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오랜만에 만난 라이언 코멧.
나는 그와 간단히 근황을 나누었다.
중앙에서 있었던 위험천만한 일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주로 그동안 남부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VV5610과 사업 진행엔 별문제가 없는지 알아보는 시간이었다.
“사업은 여전히 성장세입니다. 다만….”
전쟁이 끝나고 최고의 군수기업 중 하나로 성장한 아크팩토리.
하지만 후발주자들의 추격이 무섭다는 이야기에 나는 걱정할 것 없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저쪽이 신제품을 내면 이쪽도 신제품을 내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 아닌가.
게다가 내 머릿속엔 중앙본부에서 근무하며 보았던 각종 정보가 들어있었다.
이를테면 중앙연구소에서 성능시험에 들어간 신형 전투기 엔진 설계도라든가.
1급 기밀로 취급되는 광물 배합법 같은 것들이었다.
중앙군 대장은 정말 어지간한 정보에는 다 접근이 가능했고 그중에서도 찾기 어려운 게 있으면 공녀에게 슬쩍 찔러보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공녀가 중앙 특수 연구부 기술고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시 말해 지금 이곳엔 나와 공녀를 합쳐 중앙군 핵심 비밀 대다수가 옮겨진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황제와 반란군.
둘 중에 어느 쪽이 이기든 남부가 단숨에 기술 격차를 따라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터였다.
‘그냥 한 번에 다 풀어서 전쟁에 대비할까?’
-좋은 생각인데? 병력 충원도 문제없잖아. 우리에겐 1,200억 오크가 버티고 있다고!
기술을 조금씩 풀어 단계별로 출시를 하는 것이 사업 운영에 있어선 정석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업만 생각할 수 있는 여유로운 형편이 아니지 않은가.
언제고 중앙에서 나를 붙잡으려 토벌대가 들이닥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오크 무장병력이라….’
엔터프라이즈호 세대의 하이엔드 함선을 대거 양산해 무장시켜 중앙에 맞서는 것.
광물과 각종 자원만 뒷받침되면 충분히 현실성 있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되면 남부는 단숨에 제국 판도를 송두리째 바꿔버릴 거대한 힘을 손에 넣게 되는 셈이었다.
-남부 황제! 아니, 신제국 황제가 되는 거다! 존!!!
‘헛소린 거기까지.’
짧은 황성 생활이었지만 나는 옥좌가 얼마나 머리 아픈 자리인지를 여실히 느꼈다.
그 고통을 굳이 자발적으로 받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잠시 뒤, 나는 라이언에게 개발 중인 아크팩토리의 신제품 설계도를 가지고 오라고 말했다.
슬쩍 손을 보고 적당한 수준에서 시장 우위를 점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사내 최고의 연구자들이 머릴 맞대고 작업했다는 설계도를 본 순간 나는 절로 눈썹을 찌푸렸다.
“이딴 게… 설계도?”
내 중얼거림을 들은 라이언과 병풍처럼 서 있던 연구진들은 사색이 되어 몸을 떨었다.
중앙과 북부를 거치며 내 지식과 마법 실력이 높아진 것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우리 연구원들이 월급 도둑이라 그런 건진 몰라도 참을 수 없는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나는 적당히 손을 봐주겠다는 기존의 생각은 훌쩍 날려버렸다.
복귀 기념으로 살짝 진심을 비추는 정도는 아무래도 괜찮을 거 같단 판단에서였다.
“작업 패널 가져와.”
* * *
존 메이어가 간만에 신무기 설계에 몰두한 그 시각, 남부의 수도 행성 니케아에선 비밀리에 대장급 이상 최고 회의가 진행 중이었다.
인원은 모리더스 원수를 포함해 16명.
다들 조종 특기로 대장이 된 군단 사령관들이었다.
그리 많지 않은 인원이지만 이들이 뜻을 뭉치면 남부의 모든 군권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였다.
“의제가 무엇이기에 이리 급작스레 회의를 잡으셨습니까?”
의수를 달면서도 살아남아 기어이 대장직에 오른 흑표범.
오스카 원수를 상대로 하콘 방어전을 펼쳤던 맹장, 헥터 로메로가 물었다.
“친애하는 동지들이여. 오늘은 남부의 앞날을 의논코자 이 자리를 마련했소. 그러니 오늘만큼은 계급장을 떼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
모든 대장들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떴다.
최근 남부의 사정은 그리 나쁠 것도 없는 평온한 상태였다.
대체 무슨 이야길 하려고 잔뜩 분위기를 잡은 걸까.
다들 궁금해하고 있을 때, 모리더스 원수가 회의장에 폭탄을 던졌다.
“얼마 전에 존 메이어 대장이 남부로 돌아왔소.”
짧은 말이었으나 그것이 몰고 온 충격은 실로 대단했다.
존이 남부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고, 이는 곧 비밀리에 건너왔다는 뜻이 되니 불길한 예감이 전신을 지배했다.
“먼저 편히 대화하자고 이야길 꺼냈으니 친구로서 묻겠소. 존이 남부에 온 이유가 뭔가?”
모리더스 원수와 같은 세대인 제임스 대장이 물었다.
“중앙에서 사고가 있었네. 대원수가 중앙군을 모두 집결해 황성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켰다더군.”
“이런 미친…!”
“그게 사실이야?”
“제국에 망조가 들었어. 망조가!”
오스카 원수가 일으킨 반란의 여파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남부였다.
그 와중에 중앙에서 역대급 규모의 반란이 터졌다고 하니 분위기는 혼란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이겼는지는 아직인가?”
“몇 번 중앙에 연락을 취해봤는데 황성 상황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네.”
“허어….”
“이유가 뭔가.”
“대원수는 피의 숙청에서도 살아남지 않았나. 미치지 않고서야 갑자기 반란을 계획하진 않았을 텐데.”
모리더스 원수는 화폐개혁에서 일어난 중앙귀족의 분노, 그리고 연구를 위해 벌어진 대량학살 등을 거론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대장들은 모두 침묵에 잠겼다.
뭐라 선뜻 말을 꺼내기가 어려울 정도로 무거운 사안이었다.
“존은 뭐라던가. 아무 말 없었나?”
“자신이 남부에 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걱정하더군.”
“그게 무슨 소린가?”
“어느 쪽이 이기든 향후 자신에게 칼날이 돌아올 걸 알고 있는 거지.”
“그렇군…. 승자가 누구든지 간에 존을 가만 놔둘 리 없을 테니까.”
상황을 파악한 대장들은 각자 생각 정리에 들어갔다.
그리고 먼저 침묵을 깬 건 라다만 장군, 라함 도미니우스였다.
“그래서 우리 원수께선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이 듣고 싶은데.”
“뭘 말인가.”
“존을 지킬 건가?”
“솔직히 말하면…. 반란군이 승기를 잡는다면 그리하고 싶네.”
“그럼 황제가 이긴다면 존을 내주겠다는 거군?”
“이봐. 라함!”
대화를 듣고 있던 3군단장, 콜린 프리먼이 외쳤다.
“아무리 그래도 존칭을 사용하게! 황제라니!”
“황제를 황제라고 부른 게 문제가 되나?”
“어허! 이 사람이 그래도!”
“그는 죄 없는 시민 100만 명을 자신의 야욕을 위해 희생시켰다. 그래도 충성심이 넘치는 모양이군.”
“으음….”
“인간은 라다만을 감정이 없다며 비난하곤 하지만 그런 우리가 보아도 이번 황제의 행동은 용납할 수 없는 영역에 있다.”
다시 찾아온 정적, 회의실을 슥 한번 둘러본 라함 장군이 말을 이었다.
“오스카 원수는 성공 가능성이 없는 반란을 일으켜 결국 실패했지. 하지만 나는 그의 생각에 일부 동의하는 바가 있었다. 중앙은 자신의 잇속을 위해서라면 타 경계의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단 사실 말이다.”
라함의 말에 모두가 오스카 원수의 연설을 떠올렸다.
더는 중앙의 이익을 위해 희생당하지 않겠다던 그의 외침을 말이다.
그러자 콜린 장군이 다시 대꾸했다.
“마치 오스카 원수에게 승산이 있었으면 반란에 동조했을 거란 뜻으로 들리는데?”
“그렇다.”
“뭐라고? 이 반동분자 새끼!”
얼굴이 벌게진 콜린 장군이 벌떡 일어나자 주변에 있던 장군들이 어어! 소릴 내며 그를 말렸다.
“왜 열을 내는 거지?”
“강한 쪽이면 아무 상관 없이 빌붙겠다는 말 따윌 하니까 그런 거다!”
“다시 잘 생각해 봐라. 오스카 원수에겐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 중앙에 일방적으로 착취당하는 남부의 운명을 바꾸겠다는 것. 나는 남부에서 태어났다. 우리는 서로 종족은 다르지만 남부를 위하는 마음만큼은 같을 것이다. 그런데 자넨 여전히 중앙 편을 드는군. 혹시 부모가 중앙 출신인가?”
“이런 개새끼가…! 우리 부모님을 들먹여!”
“워워! 진정하게!”
순식간에 시장바닥으로 변한 회의실을 보며 모리더스 원수가 진정에 나섰다.
“라함! 괜히 더 자극하지 말게.”
“모리더스, 이건 자극이 아니다. 엄연한 현실이지. 심지어 황제는 이제 미치광이가 되어버렸지 않나.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이 잘못되었단 생각은 조금도 없는 건가?”
라함의 말에 콜린은 여전히 씩씩거렸으나 다른 대장들은 생각이 많아진 눈치였다.
그의 말이 꼭 틀린 것도 아니었다.
미친 황제를 계속 섬기다간 제국이 통째로 무너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라함. 상대는 중앙이다. 어느 쪽이 이기든 우리와는 전력 차가 압도적이란 말이다.”
헥터 장군이 입을 열자 라함이 고갤 끄덕였다.
“그렇지. 하지만 이쪽엔 명분이 있다.”
“명분?”
헥터 장군이 고갤 갸웃거렸다.
존 메이어가 영웅이라곤 하나 일단은 도망쳐 온 입장, 그것도 황성 방어를 포기하고 탈출한 도망자였다.
그런데도 어떤 명분이 있다는 건지, 헥터는 선뜻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까 원수가 말하지 않았나. 존 메이어가 누구랑 같이 왔는지를.”
“아!”
“이쪽엔 공녀가 있다. 초대 황제조차도 대등한 동맹으로 여긴 드래곤족의 수장, 천년공의 유일한 핏줄이지.”
“드래곤족….”
“제국군이 연방군으로 불리는 이유지. 그녀가 존과 동행해 남부까지 왔다는 건 그의 탈출이 정당했음을 뜻하는 증거가 될 수 있지 않겠나?”
황실의 가장 강력한 동맹이었던 드래곤이 존의 손을 들어주었다.
포장하기에 따라 확실한 명분이 될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어디 전쟁이 명분만 가지고 할 수 있던가? 남부 전력이 중앙에 상대가 안 되는 게 가장 큰 문제 아닌가.”
“맞습니다. 누가 이기든 남은 중앙 병력이 우리 전체 병력을 압도할 겁니다.”
“그건 시간이 조금만 있으면 해결이 되지 않을까 싶네.”
헥터는 아군의 전투력 부족을 우려했고 비교적 젊은 대장들은 이에 동조했다.
이들의 웅성거림에 답한 건 모리더스 원수였다.
“어떻게 말입니까?”
“우리에겐 존 대장이 있지 않나. 우린 감시기지에서 심도 있는 이야길 나누었지. 그는 이미 중앙의 신문물을 상당수 받아들였네. 다들 그가 누군지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
존 메이어.
제국 역사상 가장 빠른 진급을 달성한 이 시대의 영웅.
화려한 일화를 달고 다니는 인물답게 그에겐 여러 특기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바로 연구였다.
융족과의 전쟁에선 놈들의 실드를 효과적으로 관통하는 신형 미사일로 전세를 뒤집었고, 그보다 상황이 더 암울했던 북부에선 어비스데몬 전용의 뇌파교란장치를 개발하여 기어이 주 경계를 살린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그가 마음먹고 리미터를 해제하면 남부가… 중앙의 기술력을 따라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단 뜻이네.”
모리더스 원수의 선언에 장군들은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비밀에 싸여있던 제국 중앙의 기술력.
그것을 손에 넣는다면 이제 남부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뜻을 펼칠 수 있을 터였다.
장군들의 표정을 본 모리더스 원수는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지금 이 순간, 존 메이어의 남부 잔류를 이들이 받아들였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오늘 자리를 가지며 나도 느낀 바가 많았네. 확실히 지금의 황제는 정상이 아니야. 뭐든 처음이 어렵지 않나. 다음엔 수천, 수억 명에 달하는 시민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일이야.”
모리더스 원수는 중앙에서의 승자가 누가 되든지 간에 존 메이어를 중앙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싶다며 공개적으로 의견을 밝혔고 장군들은 고갤 끄덕거리며 동의했다.
마지막까지 장고를 거듭한 건 콜린 프리먼이었는데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쏟아지자 그는 결국 두 손을 들며 말했다.
“내가 걱정한 건 남부의 안전이지. 별 게 아니야. 만약 존을 필두로 중앙에 맞설 힘을 갖추지 못했을 땐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을지 알 수 없으니까.”
오스카 원수 때와는 상황이 또 달랐다.
그땐 남부가 자발적으로 반란을 잠재워 엄청난 피가 흐르는 걸 막았지만, 만약 남부 전체가 하나로 뭉쳐 반기를 들었다 실패한다면.
그간의 역사로 미루어볼 때 남부가 아예 제국 지도에서 지워질지도 몰랐다.
“다들 합의를 본 것 같으니 지금부터 좀 바삐 움직이도록 하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뭔가.”
“지원. 평의회를 설득하고 하루라도 빨리 존을 지원해야지 않겠나.”
힘을 모아 중앙에 맞서 싸운다는 거대하고도 위험한 계획.
평범하게 생각하면 다들 며칠쯤 고민의 시간을 가질 법도 했으나 이들에겐 망설임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전선을 구르며 살아남은 백전노장들이라 그런지 추진력이 아주 확실했다.
그렇게 남부군 수뇌부가 만장일치로 존을 지원하기로 힘을 모았다.
도면을 펼치고 미사일 설계를 조정하던 존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제국 역사가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을, 그리고 자신이 그 국면의 주연으로 발탁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