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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군벌가 망나니-113화 (113/134)

113화.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모쪼록, 황성의 안위를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해주게.”

“예.”

마크 딜런 대원수와의 대담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났다.

그는 곧 수도방위사령관으로서 일하게 될 내게 황성을 잘 지키라는 말만을 남기고선 자리를 끝냈다.

비록 짧은 대화였지만 그는 나를 싫어한다기보단 왠지 모르게 세상사에 영 관심이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대원수는 올해 일흔둘의 나이로, 제국의 과학기술력을 생각하면 아직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였다.

의자에 앉아 차를 홀짝이고 있던 모습은 영락없이 백 세 할아버지라고 해도 믿을 법했지만 말이다.

-어째 중앙군 장교들은 극과극이 심하군.

‘너무 평화로우면 이런 문제가 생기는 모양이지.’

하나같이 힘이 없거나, 아니면 눈을 부라리며 날 잡아먹으려 들거나.

이곳 연방군 본부에서 만난 장교 대다수가 그런 이들이었으니 진의 말도 딱히 틀린 건 없었다.

그렇게 다음 날, 방위사령관으로서의 첫 공식 업무가 시작됐다.

궁중백이 힘을 써주었음에도 여전히 인선엔 문제가 많았다.

엔터프라이즈호에 있던 인원을 임시로 사령부 건물에 박아뒀는데도 한참 손이 모자랐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곳에서의 일은 외근이 아닌 내근직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방위사령부가 하는 일은 황성의 적을 막는 것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서류 처리 좀 밀린다고 병사들이 갈려나갈 일은 없으니 심적으로 편한 곳이었다.

그래도 만성적인 인원 부족을 계속 감당할 순 없기에 나는 이번에도 인맥을 좀 여기저기서 끌어올 요량으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인맥이야 뻔한 거 아닌가.

남부 아니면 북부.

그리고 이 인원을 중앙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데려오려면 그쪽의 허락 이외에도 황제의 허가가 필요했다.

다들 바쁜 와중에 고개를 흘깃 들어보니 한쪽 구석에선 매티스에게서 일을 배우는 카린의 모습이 보였다.

평생 검을 잡고, 파일럿으로 살아온 그녀에게 사령부 행정 업무는 영 익숙지 않은 일이었다.

딱 봐도 헤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는 매티스에게도 상당히 괴로운 일이었다.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카린을 끼고 일을 새로 가르쳐주려니 얼마나 바쁘겠는가.

다만 카린은 이를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단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나랑 같은 공간을 쓰고 싶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당장은 자신이 할 일이 전혀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황성은 제국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

그라프를 움직일 일 따윈 눈을 씻고 찾아도 없었다.

대장이 되고, 방위사령관이 접할 수 있는 자료를 확인한 나는 새삼 이곳이 얼마나 철옹성인지를 깨달았다.

황성의 방어는 수도방위사령관의 몫이지만 위구 지역을 포함한 중앙 방어의 총책임자는 대원수였다.

자료에 따르면 대원수 휘하의 5만여 척에 달하는 전함 전력이 이곳 위구 지역에 항시 대기 중이었다.

전투함 5만이 아니라 ‘전함만’ 5만이었다.

호휘 순양함과 구축함, 보급함을 헤아리면 근 백만여 척에 이르는 전투함이 좁은 황성 우주를 지키고 있는 셈이었다.

아마 우주 전역에 어비스데몬 같은 적이 창궐한다 한들 이곳만큼은 멀쩡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령관님. 정례회의 시간입니다.”

서류를 챙긴 매티스는 회의 시간이 되었음을 알렸다.

정례회의.

중앙 연방군 본부에서 한 달에 한 번 주기적으로 열리는 회의로 황성의 고위 장교들이 모두 참여하는 자리였다.

본부 회의실엔 나와 매티스, 그리고 카린까지 단 세 명만이 향했다.

회의에 보좌관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다른 장성에 비하면 조촐한 인원이었다.

-중앙이 넓긴 하네.

황성엔 연방군 중앙본부 이외에도 이단심문소와 중앙평의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상징성을 표현하듯 모든 건물이 크고 웅장했는데 본부 회의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곳은 내가 익히 알고 있던 회의실이 아니라 마치 커다란 국회의사당을 방불케 하는 곳이었다.

이미 많은 이들이 모여 북적이는 가운데 나는 정해진 자리로 향했다.

어쩌다 다른 장교들과 시선을 마주치면 그들은 마지못해 내게 인사를 건네 왔다.

아무리 내가 어리고 아니꼬워도 일단 상급자인 이상 대놓고 무시를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오늘 회의에 참석하는 이들 중 대장 이상급 계급은 대원수와 나를 포함해 모두 네 명이었다.

-존. 저기 3시 방향에 갈색 머리 보이지? 저자가 군수사령관이다.

중앙 참모부 군수사령관 로버트 켈리.

참모부 군수사령관은 중앙군의 모든 보급을 책임지는 매우 책임이 막중한 자리였다.

나는 그와 초면이었으나 감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

북부에서 무수한 지원 요청을 했을 때, 사사건건 어깃장을 놓은 인물이 바로 저 군수사령관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대장은 중앙 작전사령관 토드 클레이튼이었다.

내가 수도방위사령관으로 오직 황성 방어를 책임지는 역할을 맡고 있다면 그는 위구 지역 방어를 총괄하는 위치로 나보다 훨씬 큰 책임을 지고 있었다.

내가 그를 슥 살필 때 우연하게도 그 역시 나를 흘깃 쳐다보았는데 순간 그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불쾌함이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유야 뻔했다.

본래 내 자리로 왔어야 할 이가 바로 작전사령관이었기 때문이다.

대원수로 가는 엘리트 진급 코스를 웬 젊은 놈이 새치기 한 상황.

그는 두고 보자는 듯 시선을 거두었고 그렇게 찜찜한 채로 회의가 시작됐다.

정례회의에선 단순히 중앙에서 일어나는 일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제국 전역에서 일어나는 각종 굵직한 현안들이 올라왔다.

대장급이 딱히 발언하거나 의견을 내야 할 구석은 없었고 그저 잠자코 제국 돌아가는 상황이 이렇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원수는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네.

라이키니르 대장이 발에 땀나도록 뛰며 북방 전선을 지키고 있다는 보고가 지나가는 사이 상석에 앉은 대원수는 고갤 꾸벅거리는 중이었고 이제 보고는 서부 경계 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서부 전선 부대에서 우주 흰고래가 건너오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우주 흰고래.

우주를 떠다니는 고래들이다.

이름과는 다르게 썩 고래를 닮은 건 아니었다.

너덜거리는 촉수에 반짝이는 우주고래는 어비스데몬의 생체전투함과 비슷한 측면이 있었다.

우주를 돌며 퍼플옵테늄을 먹고, 체내에서 자체 정제하여 소통하는 이 고래들은 제국 문명의 발전으로 각종 자원이 채굴되기 시작하며 그 수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선에서 대거 등장하다니, 그 이유를 궁금해 하고 있을 때 단상 위 준장이 발표를 이어나갔다.

“고래들은 엘다란 전투함이 내는 소음과 통신을 피해 서부 경계면으로 넘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전쟁이 임박했단 말인가?”

“전선 정찰 부대의 보고에 따르면 엘다란의 움직임이 전년도 같은 시기와 비교해 열 배 이상 늘었으며 아무래도 대규모 병력 집결이 의심된다고 합니다.”

엘다란.

융족과 어비스데몬에 이어 이번엔 무서운 우주엘프였다.

그들은 겉보기엔 엘프와 비슷하지만 유전적으론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일단 엘다란은 찌르면 피 대신 녹색의 연기가 흘러나왔다.

생물이라기보단 정령에 더 가까운 것으로 만약 엘다란의 크기가 드래곤만 했더라면 마법의 종족은 드래곤이 아닌 엘다란이 됐을 거란 이야기도 있었다.

그만큼 마법을 잘 다루는 종족이란 뜻인데 문제는 엘다란의 마법함선이 지닌 전투력이었다.

제국 최신형 전투함으로도 상대하기 까다로운 상대.

게다가 그 세력 또한 지금껏 제국이 마주한 그 어느 적보다도 크고 강했다.

저들 역시 인류와 비슷한 시기에, 혹은 더 일찍 우주로 진출하여 대제국을 이룬 것이었다.

그런 상대가 마음먹고 우릴 향해 칼을 겨눈다?

이건 북부 이상으로 심각한 문제가 될 확률이 다분했다.

특히 서부는 북부와 달리 광물과 인적 자원 모두 어느 정도 받쳐주는 곳인지라 이곳을 내줄 경우, 제국 전체가 충격에 얼어붙을 수밖에 없는 그림이었다.

-이번엔 누가 가서 막나?

‘알아서 하겠지. 제국에 인재가 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설마 수도방위사령관으로 앉히자마자 날 또 전선에 보내진 않을 테고….

그러한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새 대원수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정례회의가 끝날 시간이 다 돼서였다.

* * *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방위사령관 부임 한 달이 지나자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익숙하게 업무처리를 한 뒤 남는 시간에 차 한 잔의 여유를 부릴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당연한 것처럼 카린이 건네준 머그잔을 받아들었는데 그녀는 내가 원하는 것을 기가 막히게 알아채 먼저 움직이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독심술이라도 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카린은 호위 임무를 하다 보면 자연스레 그러한 능력들이 생긴다는 답변을 들려주었다.

“카린. 이제 슬슬 현장으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어?”

“…갑자기요? 제 업무 능력이 부족한가요?”

그녀는 주변에 보는 눈이 있어 존대했지만 ‘왜 나랑 떨어지려고 해?’라며 강렬한 눈빛을 쏘았다.

“아니 그게 아니고…. 말이 나올까봐 그렇지. 장성을 전속부관으로 두는 사람이 어딨냐고.”

근위기사였던 카린의 연방군 계급은 준장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본래 장성들의 업무를 서포트하는 전속부관은 보통 영관장교를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모시는 이의 모든 일을 뒷바라지하는 전속부관은 체력적으로 굉장히 힘들 때가 많았다.

상사보다 먼저 일어나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부대 방문객의 접대, 상사의 안전과 신변을 보호하고 온갖 서류를 처리 접수하는 일이니 고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이런 격무를 장성급 인원에게 맡긴다는 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인 셈.

이번에 준장으로 진급한 지크가 마침내 엔터프라이즈호를 떠나 함장이 된 것처럼, 군에는 계급에 맞는 포지션이란 게 정해져 있었다.

계속 내 곁에 남아 부관 업무를 수행하면 나는 물론이고 그녀까지 이상한 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 상황.

이러한 이유로 나는 카린이 현장에 돌아가 그라프 파일럿으로 있어 주길 바랐지만 그녀는 이상한 소릴 하는 사람은 절대 없을 거라며 호언장담했다.

“어떻게 장담하는 거야?”

“최근에 사령관님을 비방하는 인터넷 글이나 댓글을 보신 적 있나요?”

“…아니.”

그러고 보니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존 메이어는 파렴치하다느니 능력도 없이 들어온 낙하산이라느니 하는 글들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대체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비밀이라며 씩 웃을 뿐이었는데 조용히 듣고만 있던 진이 낄낄거리며 정답을 알려주었다.

-일전에 카린이 제퍼슨을 찾아갔거든.

‘제퍼슨을? 왜?’

-악의적으로 수도방위사령군을 모함하여 황성의 안전을 해치는 반동분자들을 모조리 소탕해야지 않겠냐고 말이야.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여기서 놀라운 건 제퍼슨이 나를 위해 그런 귀찮은 일을 대신 처리해 주었다는 거였다.

확실히 북부를 다녀온 이후로 나에 대한 제퍼슨의 평가는 전과 비교해 상당히 바뀐 모양이었다.

예전엔 나를 어떻게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면 지금은 어느 정도 제국 충신으로서 인정해 주는 분위기라고 할까?

이단심문소는 고위 장성도 영 꺼림칙해 하는 기관이었기에 제퍼슨의 지원은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되었다.

결국, 카린을 돌려보내는 건 힘들어 보였기에 나는 당분간 그녀의 서포트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솔직히 나야 편했다.

주변 시선만 신경 쓰지 않으면 그녀만한 전속부관은 달리 없다고 봐도 좋았으니까.

부관으로서의 카린의 역량은 나날이 훌륭해지고 있었다.

* * *

2월이 되자 전쟁을 치렀던 게 아주 오래전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전선을 누비며 날카롭던 파일럿들 복부엔 기름이 끼기 시작했고 처음으로 우리 부대가 통합훈련에서 에이스를 놓치는 일이 발생했다.

이는 황성 방어부대가 모두 참여하는 정기 전투 훈련으로 이렇다 할 전쟁이 없는 중앙에선 중요한 진급 요소 중의 하나였다.

이번에 우리를 제치고 에이스 칭호를 빼앗아간 부대는 토드 클레이튼 직속의 지휘관함 파일럿들이었다.

에이스 타이틀을 빼앗기자 지크의 뒤를 이어 엔터프라이즈호의 비행대대장을 맡게 된 헨리는 그야말로 불같이 분노했다.

“이 버러지 새끼들이…! 완전히 나사가 빠져버렸어! 다들 일어나! 이제부터 무한 훈련이다!”

정작 헨리도 배에 지방이 살짝 끼어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라 할 수 있었으나 나는 그 부분은 조용히 넘어가 주었다.

안 그래도 파일럿들의 기강을 한번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도 함께 훈련을 참관한 입장에서, 우리 파일럿들의 기량이 완전히 바닥을 친 수준은 아니었다.

여전히 어디에 내놔도 제 몫은 할 수 있는 녀석들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남부와 북부에서 그 아수라장을 겪고 처절한 생존의 시간을 보내지 않았던가.

시뮬레이션 훈련만으로 성장한 중앙군에게 에이스 자릴 내준다는 건 자존심상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날뛰는 헨리에게 파일럿 관리를 맡긴 사이,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차례로 날아들었다.

좋은 소식은 천년공의 병세에 차도가 있다는 거였다.

북부에서 개발한 치료술식 접목이 성과를 낸 것인데 이를 위해 공녀는 제국을 통틀어 가장 귀하다는 보물들을 아낌없이 갈아 넣었다고 했다.

천년공은 그 존재만으로도 중앙 귀족의 뜻을 모을 수 있는 대단한 인물이다.

그가 병환을 털고 일어난다면 제국 안정에 큰 도움이 될 것이기에 이는 수도방위사령관인 내게도 무척 기쁜 소식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함께 찾아온 나쁜 소식의 정도는 이보다 훨씬 심각했다.

저녁을 먹고 마법 공부를 위해 서적을 연구하던 늦은 밤.

은밀히 방위사령부를 찾아온 전령이 궁중백의 서신을 내게 전해주었다.

헬리오스 황제가 쓰러졌다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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