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근 1년 만에 돌아온 황성은 여전히 고요했다.
숙청으로부터 제법 시간이 흘렀음에도 중앙은 여전히 절대자의 영향력 아래 짓눌려있는 듯했다.
생기 없는 거릴 바라보며 나는 어서 이곳을 떠나 남부로 돌아갈 수 있길 소망했다.
존 메이어로 태어난 이후로 그런 생각을 통 해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진심으로 남부가 내 고향인 것만 같았다.
다만 공녀는 조금 의견이 다른 모양이었다.
북부에서 지내는 내내 피곤해 보였던 세리스 공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기지개를 쭉 켜더니 일 보고 나면 타워에 들르라며 바람처럼 사라졌다.
마치 기운찬 고양이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녀야 여기가 고향이니 충분히 이해되는 반응이었다.
타워로 돌아가 천년공의 상태도 확인해봐야 할 테고 말이다.
공녀와 헤어진 뒤 나는 황성에서 보낸 차량에 올라탔다.
내 옆엔 카린이 함께였다.
성엔 허가받은 이만 출입할 수 있었고 다른 장교들은 얌전히 함선에서 대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엔터프라이즈호에서 황성에 출입할 수 있는 인원은 황제의 호출을 받은 나와, 한때 근위 기사로 황제의 곁을 지켰던 카린 뿐이었다.
유일하게 무장을 한 채로 황제에게 다가가는 것을 허락받은 존재, 근위 기사.
지금은 명분상으로만 남아 있다곤 하나 그녀는 여전히 기사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알현실.
처음 이곳에 들렀을 땐 주변에 나를 신기한 생물 바라보듯 하는 귀족들도 몇 명 있었는데 오늘은 이 커다란 알현실이 상당히 공허하게 느껴졌다.
드넓은 알현실에 모인 인원은 다섯.
나와 카린, 로만 궁중백과 황제.
그리고 황제 옆으로 처음 보는 인원이 한 명 더 있었다.
‘누구지?’
열 살이 채 안 된 듯한 나이.
깔끔한 귀족용 예식 복장을 갖춰 입은 아이는 제법 똘똘해 보였다.
녀석의 정체를 궁금해하고 있을 때 친절한 정보수집꾼이 곧바로 내게 그 답을 알려주었다.
-아딘이다. 디아나 공주가 나은 황제의 손자.
공주 얼굴은 본 적도 없고 황제의 핏줄을 보는 건 실제로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나는 그 설명을 듣는 순간 아이에게서 뿜어지는 기운이 단숨이 이해가 되었다.
아딘이라는 꼬마 아이.
녀석에게선 나이에 걸맞지 않은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체내에 마력을 갈무리하며 생긴 힘이 틀림없었다.
‘꼬마 주제에 제법 실력이 좋은 모양인데?’
-자질은 우리 계약자보다 훨씬 나아 보이는군.
‘그럼 저 녀석하고 새로 계약하시던가.’
진이 그래도 우리 존이 사람은 참 착해. 하는 소릴 들으며 나는 앞쪽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고갤 숙였다.
“소장 존 메이어, 부르심을 받고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내 인사를 받으며 황제는 고개를 까딱거렸다.
사실 전함을 타고 이동하는 것은 생각만큼 힘든 일은 아니지만, 본래 이런 장거리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면 여독을 풀게끔 배려하는 차원에서 하루 뒤에 호출한다든지 하는 관례가 있었다.
그런데도 황성에 도착하자마자 쉴 틈도 없이 성으로 불려왔으니….
이는 둘 중 하나를 의미했다.
황제가 내 안위는 눈곱만큼도 배려할 생각이 없거나, 그게 아니면 내가 모르는 어떤 다급한 이유가 있거나.
내 인사를 받은 황제는 짤막하게나마 내가 북부에서 이뤘던 전투와 업적에 대한 노고를 치하했다.
‘그래 사람이면 응당 그래야지.’
이번 업적을 이루는 덴 많은 사람의 도움이 있었지만 아무튼 내가 일을 잘 해낸 건 사실이었다.
내가 아니었으면 지금쯤 북부는 이미 저 럭비공 괴물놈들 손에 떨어졌을 테니까.
황제의 표정을 보니 적어도 날 이 자리에서 팽할 것 같진 않다는 생각에 조금 안심이 되는 부분이었다.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자네를 이렇게 급히 부른 것은 먼저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다.”
황제의 말에 난 다시 한번 그의 옆에 있던 꼬마와 눈이 맞았다.
“이 아이가 누군지 알고 있나?”
“황손 아딘님이 아닌지요.”
황제의 입술이 비죽였다.
아마 내가 답을 맞출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허나 누가 봐도 답을 맞혀서 좋아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특무함 사령관이 황실 돌아가는 일에 제법 관심이 많은 모양이구나.”
‘왜 또 이래?’
미친 영감탱이 같으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중앙 귀족 사이에선 일 년 전, 피의 숙청 이후로 황제가 걸핏하면 자신들을 의심하며 목을 칠 기회만 엿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오죽했으면 귀족들이 황제와는 눈도 마주치지 말라는 소릴 하고 다녔겠는가.
실제로 별 것 아닌 일로 꼬투릴 잡혀 작위를 박탈당한 귀족도 있었다.
조금 전 대답으로 황제는 나를 어지간히 권력을 탐하는 인간으로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바쁜 원정 중에도 황실 가계도를 소상히 외우는 그런 남자로 말이다.
어떻게 알았냐고 하면 뭐라고 하지?
머릿속의 정령이 알려줬다고 해야 하나?
잡스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황제가 흥! 하더니 내게 더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불안하구만.’
-걱정하지 마라. 너도 이제 강해졌다. 황제가 맘먹고 달려들어도 십 초 정돈 발악할 수 있을 거다.
‘퍽이나 안심되네.’
진은 아주 조금만 버텨도 카린이 검을 들고 도와주지 않겠느냐고 했고 내가 더 앞으로 나아가자 황제가 어린 손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공석이었던 후계자를 다시 정할 것이다.”
“……?”
-황제가 저 꼬마를 차기 황제로 점 찍은 모양이군.
나는 순간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속내를 감추고자 고갤 살짝 숙였다.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표정에서 내 속을 드러낼지도 모르겠단 생각에서였다.
척 보기에도 황태자의 나이는 무척 어려 보였다.
황제의 거짓 병환을 둘러싸고 후손들이 아귀다툼을 벌여 중앙에 피바람이 분 것이 고작 일 년.
지금도 여전히 많은 황족이 황위를 노리고 있었으니 아마 공식적으로 황태자 책봉 발표가 나면 중앙이 시끄러워질 듯했다.
그렇지 않은가.
나이도 한참 어린 동생이, 혹은 조카가.
자신을 제치고 황제가 된다는데 이를 반길 황족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어쩌면 헬리오스 황제 사후에 다시 한번 제국이 뒤집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 새 후계자를 논하는 황제 앞에서 새 황태자께서 너무 나이가 어려 제국의 안위가 걱정되옵니다- 라고 할 순 없었으니 나는 적당한 답변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경축드립니다. 폐하. 제국의 기틀이 더욱 안정을 찾게 될 것 같아 신의 마음도 벅차올랐습니다.”
-경축? 마음이 벅차…? 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워오는 거냐?
‘조금 과했나?’
-조금은 무슨, 아주 헐겠더만.
‘어허. 나쁜 말.’
살기 위해 조금 립서비스 좀 한 거 가지고….
정령이 그렇게 민망한 말 써도 되는 거냐고 따졌지만 정작 황제의 표정은 미동 없이 편안해 보였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귀족이 이 알현실에 드나들며 입에 발린 말을 고했겠는가.
내가 한 말들은 황제에게 아무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터였다.
“존 메이어.”
“예. 폐하.”
“먼저 그대가 돌아오면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어떤 질문이든 성심껏 답하겠습니다.”
“화폐개혁 말이다.”
“예.”
“내가 자넬 방패막이로 앞세워 시선을 돌렸는데 억울하진 않던가?”
“…….”
그걸 말이라고 하나?
이 순간, 나는 다시 한번 표정이 흐트러질 뻔한 것을 강한 인내심으로 참고 견디었다.
“억울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습니다.”
“귀족들로부터 견제도 많이 받았을 텐데?”
“저는 제국을 지키는 장교로서 맡은 소임을 다했을 뿐입니다. 또한, 그러한 일들은 전부 폐하의 다른 뜻이 있을 거라 생각하여 제가 판단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이다.
불순한 마음을 품은 적은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이 순간, 북부에서 겪었던 모든 거지 같은 일들을 잊고 오직 황제의 명을 따르는 참군인 연기에 혼을 담았다.
그리고…그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황제가 드물게도 웃어 보인 것이다.
오죽하면 옆에 서 있던 로만 궁중백이 고갤 끄덕이며 박수를 쳤겠는가.
궁중백의 표정을 보니 내 답변이 최소 만점에 가까웠던 것임엔 틀림없었다.
“존 메이어.”
“예. 폐하!”
“그대는 보기 드문 충신이다.”
“감사합니다! 폐하.”
“지난날, 무수한 영웅들이 자신의 힘과 능력에 취해 교만해지고 실수를 저질렀다. 허나 자네라면 그러한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
“소신! 뼈가 가루가 될 때까지 충성할 것입니다!”
-우욱.
“나에게 보여준 그 충성심을 훗날 어린 황제에게도 똑같이 다할 수 있겠는가.”
어?
잠깐만.
지금 뭐라고?
한껏 참군인 연기에 취해있던 나는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어떤 가능성을 떠올렸다.
어린 황제에게 충성할 수 있겠냐고?
물론 정답은 정해져 있었다.
여기선 YES뿐이라고.
NO를 외쳤다간 황제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지는 광경과 함께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문제는 여기서 어린 황태자와 엮여버리면 내가 남부로 돌아가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단 거였다.
모름지기 권력자라면 충신을 바로 옆에 두고 싶어할 테니까 말이다.
잠시간의 침묵.
아마 일 초쯤 됐을 거다.
0.5초가 지났을 때 황제는 여전히 웃고 있었고 1초가 지났을 땐 눈가에서 웃음기가 말라가는 것이 확연히 보였다.
나는 단련된 감각으로 곧 위기가 찾아오리란 것을 느꼈고 모아둔 힘을 터트리듯 다급히 외쳤다.
“물론입니다. 폐하. 제 충성심은 제국이 유지되는 한 변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좋다. 아딘, 존 메이어 사령관과 인사해라. 그는 내가 네게 붙여주는 첫 번째 충신이다.”
“예. 폐하.”
냉큼 답한 아딘이 계단을 종종걸음으로 내려와 내게로 다가왔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존 메이어 사령관.”
-꼬마가 현 황제보단 귀엽네.
그 말엔 나도 동감이었다.
아딘이 내민 작은 손을 나는 두 손으로 맞잡으며 답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 아닌가.
남부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야긴 나중에 기회가 다시 왔을 때 해도 될 터였다.
“소신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 * *
그로부터 일주일 뒤, 황성엔 구름 같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그 커다란 황성 정거장이 가득 차서 궤도 위에 함선을 올려둬야 할 정도였다.
이렇게나 많은 인원이 몰린 건 바로 황제가 발표한 새 후계자 책봉식 때문이었다.
중앙의 귀족이란 귀족은 싹 다 찾아온 것으로 모자라 각 경계에서도 거물급 인사들이 자릴 참석한 마당이었다.
당연히 남부에서도 사람을 보내왔는데 자릴 비울 수 없는 원수를 제외하면 고위 장성들과 평의회 의장, 의원들이 있었고 그 중엔 반가운 얼굴들도 함께였다.
“할아버지. 그간 건강하셨습니까.”
“존…! 이게 얼마 만이더냐.”
먼 길을 달려온 윌리엄 백작.
워낙 많은 귀족이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기에 타 경계 백작에게까지 초대장이 갈 리 없지만 그는 메이어 가문의 가주 자격으로서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오늘은 새 황태자가 얼굴을 알리는 날이기도 하지만 나, 존 메이어의 수여식이 있는 날이기도 했다.
하나의 주 경계를 멸망에서 지켜낸 영웅.
군인으로서는 거의 최대치의 업적을 이뤄냈기에 궁중백은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며 내게 기대해도 좋다는 말을 건넸었다.
-중장 진급은 당연하고, 설마 대장 진급인가? 아니면 원수?
‘원수는 너무 나갔지.’
지금 중앙 원수도 나이가 적잖이 많긴 했지만 그를 밀어내고 내가 새 원수가 될 확률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일단 영관 계급을 벗어나 장성이 되는 것도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장성 계급에선 계단 하나 오르기가 더욱 어려운 탓이었다.
그렇게 윌리엄 백작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대기실엔 날 만나고 싶어 찾아온 사람이 빠르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존 소장!”
“중장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나야 항상 잘 지내고 있네. 원수 각하께서 안부 전해달라셨지 뭔가.”
“남부엔 별일 없지요?”
“다행히도 그렇네. 요즘은 융족 놈들도 잠잠하고, 요즘만 같으면 살기 정말 편하지.”
마이클 중장.
오딘에 있을 적부터 신세를 졌던 그는 이제 중장이 되어 있었다.
만약 모리더스 대장이 원수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소장으로 제대했을 확률이 높지만 라인을 잘 탄 덕에 어려운 진급에 성공한 것이었다.
그렇게 중장과 안부를 나누는데 뒤편에서 헛기침으로 흠흠! 하는 소리가 일었다.
슬쩍 시선을 주니 반짝이는 배지를 단 노인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이전에도 지나가듯 본 적 있는 남부 평의회 의원들이었다.
“알피온 의장이네.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이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의장님.”
남부 평의회를 이끄는 의장.
평의회 의장은 공식적으로 준 공작 대우를 받으며 명문가 중에서도 손에 꼽는 최상위 가문이 아니면 감히 도전할 엄두도 못 낼 만큼 높은 자리였다.
회색빛 머리칼에 수염을 깔끔하게 다듬은 알피온 의장은 내 기억 속에도 또렷한 인물이었다.
내 예비 자치령으로 VV5610을 확정 지어주는데 의장의 입김이 다분히 작용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감사로 나는 아크팩토리를 통해 적지 않은 선물을 그에게 안겨다 주었고 지금도 신경을 쓰는 상태였으니 나를 만난 그의 표정이 환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밖에도 얼굴이 쉬이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이 나를 만나러 와 악수를 청했는데 나중엔 북부 장성들까지 몰려들어 대기실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여기엔 곧 진급하게 될 거 같다며 직접 좋은 소식을 전하러 온 세릴다 중장도 있었다.
그렇게 많은 이들과 악수를 하며 나는 알현실로 향했다.
이미 황성에 무수한 귀족이 찾아왔으나 알현실엔 그중에서도 정말 고위 귀족, 대귀족 중에서도 명문가의 가주와 그에 걸맞은 명성을 지닌 자들만 자리하고 있었다.
한 명 한 명이 각 지역을 책임지는 거물급 인사들인 셈이었다.
“옷이 번쩍번쩍하네?”
“잘 어울립니까?”
“봐줄만 해.”
그리고 내 옆엔 익숙한 얼굴의 여성이 심드렁한 얼굴로 턱을 괴고 있었다.
역시 피곤한 자리라며 투덜거리는 세리스 공녀였다.
그녀는 원래 올 생각이 없었지만 오늘만큼은 직접 황제가 참석을 부탁했다는 이야기를 곁들였다.
“오늘 너도 진급이지?”
“글쎄요. 전해 들은 건 없습니다만.”
“그 정도로 일했으면 상은 받아야지. 나는 뭐 없나?”
천년공은 지난 삶 동안, 자신의 힘으로 공작 위에 걸맞은 공적을 제국에 세웠다.
천년공의 무남독녀인 세리스는 그에 따라 세습 귀족으로 손가락 까딱하지 않고도 공작위를 물려받게 된 것.
아직 천년공이 죽지 않았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준귀족인 셈이지만 세상 사람 모두가 그녀를 이미 공작으로 대하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그렇게 귀족 중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 그녀지만 그녀는 더 높은 자리가 있었으면 하는 모양이었다.
“대공작 같은 게 있으면 좋을 텐데.”
“대공작이요?”
“응.”
그렇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그녀가 물었다.
“엘프는 안 왔어?”
“자리가 부족하다고 해서요. 폐하께서 오늘 알현실에 들어오고 싶으면 다시 근위 기사로 복귀하라고 하셨다는군요.”
“아하. 복귀하면 너랑 같이 일 못 하니까 거절했을 테고?”
“예.”
“삼촌이 좀 쪼잔해? 그렇지?”
“그럴 리가요.”
황제의 성격이 어떤지는 아직 잘 알지 못하지만, 분명 대인배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다만 황제가 코앞에 앉아있는데 거기에 대고 쪼잔한 양반 맞다며 고갤 끄덕일 수도 없지 않은가.
나는 재빨리 고갤 저으며 눈을 부라렸다.
더 이상 날 곤란하게 하지 말라는 뜻을 담아서 말이다.
그렇게 행사가 시작됐다.
정식 후계자로 아딘의 이름이 울리는 건 가장 마지막이었고 그 앞쪽엔 진급이 밀려 있거나 해야 할, 장성들이 그 앞 시간을 채우고 있었다.
최소 중장 이상 진급을 하게 되는 인원들.
한 명 한 명 이름이 호명되어 나선 장성들이 목이 터져라 황제에게 충성을 고하고 있었다.
제국 행사쯤 되자 그 수가 어지간히 많았고 대체 내 이름은 언제 불리는 걸까 생각할 때였다.
세 시간이 지나도록 지치지도 않고 박수만 치던 와중에 마침내 내 이름이 불렸다.
“특무함 사령관, 존 메이어 소장은 앞으로!”
평소 입던 군복이 아닌, 예식용 백색 귀족 의상을 차려입은 나는 단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지금 이 순간, 모두의 시선이 내 등 뒤로 날아들었다.
그 속엔 많은 시기와 질투의 감정도 섞여 있었다.
행사가 시작된 지 벌써 세 시간째였다.
이제 진급 축하를 받을 인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그것은 내 업적이 오늘 자리에 모인 이들 중 단연 손에 꼽을 만큼 뛰어나단 뜻이기도 했다.
올해 나이 스물여섯.
나이를 생각하면 현 제국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진급 중인 연방군 장교가 바로 나였다.
목이 상당히 아파 보이는 로만 궁중백이 눈썹에 힘을 가득 주고 말했다.
“존 트라카 메이어 소장은 특무함 사령관으로서 위기에 빠진 북부를 구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수십 년간 이어진 어비스데몬의 공세를 분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기술 발전으로 수많은 시민의 목숨을 구한 바이다!”
이후에도 쭉 이어진 업적 칭찬.
화폐개혁에도 힘을 보탰다는 대목에선 장내의 분위기가 조금 살벌해졌으나 황제가 스윽 한번 둘러보는 것으로 다시 잔잔한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궁중백으로부터 내 진급 소식이 발표되었다.
“이에 존 메이어 특무함 소장에게 1급 명예 훈장인 금색 훈장을 수여할 것이며 동시에 중앙군 대장으로! 진급을 명하는 바이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