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본격적인 북부군의 반격이 시작되기까지.
나는 적극 몸을 사렸고 그사이 일어난 전투는 고작 한 번뿐이었다.
약 천여 척의 적 전투함을 잡아내는, 앞서 있던 전투에 비하면 비교적 소규모 전투였다.
-천여 척 전투함을 박살 내고도 소규모 전투를 떠올리다니. 우리 계약자도 엄청나게 출세했군.
진의 말대로였다.
융족 전투함 몇 대만 나타나도 벌벌 떨었던 시절이 엊그제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천 척의 적함을 갈아버리고도 당연한 일을 했다는 반응이었다.
물론 최신 기술로 무장한 데다 병력 우위를 점하고 있으니 전투가 손쉬울 수밖에 없는 건 사실이었다.
그렇게 임관 이후 손에 꼽을 만큼 평화로운 시간 속에 나는 오늘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마법사는 보통 체력 단련을 게을리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큰 오산이지.
진의 조언에 따라 나는 꾸준한 운동으로 체력을 길렀다.
이때 카린에게서 상당히 도움을 받았는데 그녀는 검술을 알려줄 수 있겠냐는 나의 제안에 언제든 좋다며 훈련용 목검을 건네주었다.
사실 마력을 나만큼, 그러니까 마법사로 인정받을 수준으로 다루는 이가 검술을 배우는 이는 거의 없었다.
투자 시간 대비 나오는 결과값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마법과 검술은 전혀 다른 학문이다.
마법을 잘한다고 검술을 잘 할 거란 보장은 없었다.
그건 카린을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몸에서 뿜어지는 마력으로 주변 사람들을 쫓아낼 정도의 마력을 지니고 있지만 정작 마법은 거의 쓰질 못했다.
아마 내가 알려준다고 해도 손끝에서 바람이나 뿜는 정도의 흉내나 낼 수 있으려나?
그리고 이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카린처럼 검으로 모든 것을 베어버리는 경지에 도달할 순 없을 터였다.
그랬기에 처음엔 단순히 체력단련 겸, 카린과 함께 보내는 시간 정도로 생각했는데 진이 마법사에게 언제든 닥칠 수 있는 위기 상황에 대해 거론한 거였다.
-생각해봐라.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체력이 떨어진 상황에서 과연 마법을 쓰기 쉬울 것인가를.
진은 인간이 본래 마력 생물이 아니기에 원초적인 방어법이 쓸모 있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가령 어떤 특별한 장소에선 마법을 쓰는 게 거의 불가능해지는 때도 있어 호신기술을 미리 준비해두는 게 바람직하단 이야기였다.
그렇게 시작한 검술 훈련.
문제는 이게 내 생각처럼 그리 말랑한 수준이 아니란 거였다.
“카린! 살, 살살 좀 하자….”
“살살하면 실력 안 늘어!”
카린에게 지도를 받고 나면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매우 잘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내 하루 스케쥴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저녁을 먹고 난 이후엔 마법 연구를 위해 책상에 붙어 있어야 했다.
최근의 연구 과제는 어비스데몬의 지하 플랜트에서 보았던 마법 문자와 어비스코어의 문자를 해석해 새로운 기능을 만드는 것이었다.
해석이라고 해봤자 결국 진에게 도움을 구하는 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진이 아니면 대체 어비스데몬의 마법 문자를 누가 알아보겠는가.
그렇게 놈들의 마법을 익히고 있노라면 자주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곤 했다.
진은 인간과 성향이 맞지 않는 문자라 그렇다고 했는데 그럼에도 공부를 계속한 건 천년공의 회복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였다.
세리스 공녀는 자주 툴툴거리긴 해도 뭔가 부탁하면 어지간하면 들어주는 편이었고 만약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북부는 이미 멸망을 고했을지도 몰랐다.
어비스데몬을 상대로 한 교란 장치가 제때 개발되지 않았더라면 중앙이 지원 결정을 내리지도 않았을 테고 그 전에 후방이 싹 다 무너졌을 테니 말이다.
‘어비스코어의 에너지를 빨아들여 정제하는 기능을 이용하면 더 많은 치유 에너지를 환자에게 전해줄 수 있지 않을까…?’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다.
세리스 공녀와는 상부상조하는 관계였기에 차근차근 연구를 진행하여 그녀와 자료를 공유하던 어느 날, 그녀가 불쑥 내게 물었다.
“삼촌이 어비스코어에 관심을 보였다고?”
“예.”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공녀의 표정은 왠지 모르게 진지해 보였다.
“설마 그걸 쓰려는 건 아니겠지….”
“그걸 쓴다고요? 어비스코어를?”
어비스코어를 활용하는 법은 어비스데몬이 그랬던 것처럼 대량의 에너지를 흡수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뿐이다.
만약 황제가 코어의 기능을 활용한다면 그건 필연적으로 엄청난 희생을 동반한다는 뜻이 된다.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싶었지만 내 의문에 공녀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인간의 수명 욕심은 끝이 없으며 특히 황제란 작자들은 하나 같이 불로장생을 꿈꿨다는 이야기였다.
“핏값으로 수명을 늘릴 수 있다면 진지하게 염두에 두고 있을지도 몰라.”
공녀의 말에 나는 영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며 다가올 작전 준비에 나섰다.
후방에서 북부군과 중앙군의 합동으로 반격이 시작되면 어비스데몬의 시선은 모두 저쪽으로 돌려질 테고 우린 그사이에 근처 플랜트를 모조리 타격, 군공을 싹 쓸어 담는 것이 내가 그린 계획 중 하나였다.
여기에 추가로 계획을 위해 공을 들인 연구가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실드버스터였다.
실드를 타격하기 위한 전략 무기인 셈인데 이 무기는 어비스코어를 둘러싼 플랜트 중추 시설을 날려버릴 목적으로 설계되었다.
플랜트 공략 당시 핵폭발에도 버티고 섰던 괴물의 둥지를 박살 내기 위해서 말이다.
어비스코어에 모인 거대한 에너지 원천으로 펼친 실드를 고작 미사일로 무력화한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잠시 병력이 그 안으로 넘어갈 수 있는 틈을 만드는 일은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일이었다.
우리가 플랜트의 실드를 공략할 땐 공녀가 용언을 써서 실피드가 지나갈 틈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어비스데몬이 어떤 식으로 마법을 굴렸는지 그 문자며 에너지 활용방식을 소상히 알게 된 터라 대처하기 훨씬 수월한 면이 있었다.
내가 슥슥 미사일 안쪽에 들어갈 각인용 마법 회로를 설계하는 모습을 보며 진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반응을 보니 내가 기획한 방향이 맞긴 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대규모 작전 준비를 하며 시간을 보낸 지 정확히 한 달이 지났을 때, 정말로 감쪽같이 우주에서 어비스데몬이 사라졌다.
전쟁이 끝난 게 아니고 엔터프라이즈호 휘하에 속해 있는 전투함들이 감시하는 영역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다.
드디어 후방의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된 거였다.
적들의 시선이 다른 쪽으로 쏠린 틈을 타 우리 역시 작전 재개에 나섰다.
빈집이 된 어비스데몬의 플랜트를 최대한 많이 제거하여 북부에서 놈들의 그림자를 뿌리뽑는 것.
공적은 쏠쏠히 챙기면서 그 위험성은 다소 높지 않은, 소위 ‘꿀’에 속하는 작전이었다.
* * *
「제국의 희망, 북중연합군. 파죽지세의 진격!」
「어비스데몬 완전 격파. 15년 만에 1차 광산 라인 회복.」
「잿더미가 된 판테라 성계. 그러나 광물의 매장량엔 문제없음을 확인.」
중앙에서 라이키니르 대장을 필두로 한 지원군이 도착한 지도 어느덧 5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이 기간에 북부는 본래 염두에 두었던 최대의 블루옵테늄 산지, 판테라 성계까지 영토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침식당한 플랜트는 모두 초토화를 시켜 어비스데몬의 손에서 해방되었고 놈들은 더는 아군의 공세를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순순히 판테라 성계 바깥으로 물러나 자취를 감추었다.
이는 실로 오래간만에 찾아온 북부의 봄이었다.
물론 불안 요소가 모두 사라진 건 아니었다.
판테라 성계에 이르러 자원 지대를 다시 차지했을 즈음, 연방군 사이에선 교란 장치가 더는 전처럼 쉽게 먹히지 않는다는 보고가 쏟아졌다.
어비스데몬은 생체전투함.
제국이 신무기를 만들 듯 놈들도 이쪽에 맞춰 진화를 거듭하고 있었다.
불과 5개월 만에 이쪽의 히든카드가 무력화된 것은 슬픈 일이었지만 그래도 후방 깊숙이 침투해 온 적 수십만 전투함을 모조리 격침해버렸으니 당분간은 저것들도 북부를 쉬이 넘보진 못할 터였다.
세르톤을 넘어 아주 멀리까지 다시 영토를 복구하자 많은 귀족과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반쯤 침식당해 완전히 망해버린 베르데V에도 사람들이 돌아와 도시 재건을 위한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할 정도였다.
다만 세르톤엔 여전히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았다.
사람이 꽤 많이 빠져나갔는데도 3억이 넘는 인구가 여전히 이곳에 머물러 있었다.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가장 큰 건 역시 불안함이었다.
언제 다시 전선이 밀릴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 이들은 차라리 일거리도 많은 이곳에 정착하길 원했다.
넓어진 영토를 지키기 위해 북부는 더 많은 전투함을 필요로 했고 이제 세르톤은 눈코 뜰 새 없이 공장을 가동해야 했다.
내가 세르톤으로 돌아온 게 딱 이맘때였다.
북중연합군이 세르톤을 지나 쭉쭉 전선을 넓히면서 자연스레 우리도 그들과 합류해 계속 어비스데몬을 격퇴하며 북부 영토 회복에 동참하다 이제야 휴가를 받고 세르톤으로 돌아온 거였다.
그리고 이날은 나와 특무부대 휘하 3천여 척 전투함 인원이 다 함께 하는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새파란 사령관 밑에서 함께 하느라 고생 많으셨지요.”
“아닙니다!”
나는 장성들과 악수를 했고 이 모습은 각 전투함 휴게실이며 함교에 생중계되고 있었다.
그랬다.
북부 전쟁이 일단락된 것이다.
완전 종식은 아니고, 적의 진화에 대비하고자 우리도 재정비의 시간을 가지게 된 참이었다.
세릴다 중장을 비롯한 장성들은 그들이 본래 근무했던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다시 흩어질 예정이었다.
지난 5개월간, 연승에 연승을 거듭.
단 한 번의 부침도 없이 모든 작전을 성공한 덕분이었을까.
전선 장군들은 하나 같이 나와 헤어지는 걸 아쉬워했다.
내가 내민 손을 잡는 북부 장성 중엔 눈가가 촉촉한 이들도 더러 있었다.
“언제든 불러만 주십시오. 사령관님 호출이면 저 남부까지 기어서라도 가겠습니다!”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기왕이면 제가 이곳에 다시 들르는 일이 없는 게 북부의 평화를 위해선 더 나을 겁니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아닙니다. 제가 여기 또 온다는 건 아마 어비스데몬이 또 날뛸 때일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여유가 되면 꼭 다시 한번 들러주십쇼.”
“알겠습니다.”
헤어지는 북부 장군들은 다시 본래 방어 지역으로 향하지만 엔터프라이즈호는 이대로 네오아르곤을 경유해 메인게이트를 타게 될 예정이었다.
얼마 전 라이키니르 대장으로부터 온 연락 때문이었다.
<폐하께서 자네를 호출하셨네. 북부 전선은 내게 맡기고 자넨 즉시 황성으로 향하게.>
북부는 이제 겨우 안정화 단계에 들어선 참인데….
갑작스러운 중앙으로부터의 호출이었다.
토사구팽이란 말도 있는데 설마 나를?
다소 불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북부에서의 임무는 성공적이었다.
지난 5개월간, 중앙에서의 지원으로 전선을 밀기 시작하자 움츠리고 있던 북부의 귀족들은 나를 두고 온갖 선동을 해댔다.
특무함 사령관 존 메이어가 세르톤과 주변 영주로부터 뒷돈을 받았다느니 부당한 청탁으로 장교 자릴 팔았다느니 하는 조잡한 모함이었다.
물론 내가 돈을 받은 건 사실이나 혹시나 나중에 문제가 생길 것을 대비해 그 부분은 제퍼슨에게 자문하기도 했고 아울러 황제에게 보내는 편지에 따로 적어두기까지 했다.
여기에 돈을 받고 자릴 팔았단 소리는 더더욱 어이가 없었다.
애초에 내겐 북부 장교를 이래라저래라 할 권한이 없었다.
어차피 장교의 진급이야 평의회나 북부 수뇌부가 주관할 일 아닌가.
세릴다 중장을 비롯한 전선 장군들의 계급이 높은 건 사실이지만 이들은 소위 비주류, 서로 밀고 당기며 끈끈한 라인을 만드는 일과는 거리가 아주 먼 사람들이었다.
이러니 내가 억울할 수밖에.
오죽하면 각종 모함에 화가 난 제퍼슨이 헛소리하는 놈들의 입을 꿰매놓겠다며 거짓 선동을 일삼은 귀족이나 신문사를 압수 수색해 박살 낼 정도였다.
이런 견제 속에서 북부를 이만큼이나 살려냈으니 황제도 사람이면 나를 팽해서는 안 되었다.
차라리 상을 주려면 줘야지.
-근데 말이다. 황제는 좀 조심해야겠던데.
‘뭐를?’
진은 원래 깜냥도 안 되는 애들이 마법을 익히면 종종 맛이 가더란 이야기로 내 마음을 더욱 심란하게 했다.
그 말인즉 황제가 이미 미쳐서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중앙으로 떠나기 전, 나는 네오아르곤에 들러 칼 원수와 얼굴을 마주했고 함께 전선에서 싸운 장성들의 전공을 인정해줄 것을 정중히 부탁했다.
어느 정도 북부가 안정세에 접어들며 세릴다 중장을 비롯한 장성들에겐 몇 가지 크고 작은 문제가 걸려 있었다.
첫째로 보고 없이 세르톤에 합류하여 나와 함께 군사 작전을 도모했다는 것.
두 번째로는 허가 없이 훈련소를 개설해 군 인력을 양성한 것에 대한 등등의 문제였다.
물론 이 모든 건 오로지 북부를 위한 마음에서 행한 일이었으나 네오아르곤엔 전선 장성들의 꼿꼿함을 아니꼽게 보는 이들이 무척 많았다.
너희는 뭔데 홀로 고고한 척을 하느냐.
뭐 이런 인식이었다.
부패 장교들이 보기엔 눈엣가시라는 소린데 이러한 이유로, 나는 이들의 공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상황을 우려했다.
막말로 세릴다 중장의 결단력이 아니었으면 북부는 지금보다 훨씬 더 시궁창 상황이었을 게 뻔했다.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도 압도적 물량 앞에선 제대로 된 작전을 펴지조차 못했을 테니 말이다.
‘내 뜻이 잘 전해질지 모르겠군.’
특별 대우를 해달라는 게 아니다.
다만 정당한 평가를 해주길 원한다.
이런 이야기를 다른 이도 아니고 소장이 와서 원수에게 한다는 것 자체가 조금 우스운 일이었다.
니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패로 엉망이잖아.
그러니까 이번 일만큼은 꼭 투명하게 처리해주세요~. 하고 비웃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그림이었다.
성격 있는 원수였으면 어디 소장 따위가 내 앞에서 입을 터냐며 언성을 높일 수도 있었다.
다만, 칼 원수는 북부의 마지막 남은 양심을 보여주듯 내게 고갤 끄덕여주었다.
“자네가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네. 그들이 꼭 정당한 평가를 받게 하겠네.”
“감사합니다.”
“이제 바로 중앙으로 가는가?”
“그렇습니다.”
“폐하에게 대신 말씀 좀 전해주시게.”
칼 원수는 북부가 이제 막 위기에서 벗어난 것은 사실이나 자원이며 식량, 각종 구호 물품까지 모든 게 다 부족한 실정이라며 더 많은 중앙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가 원하는 건 내가 황제에게 북부의 어려운 사정을 간단하게나마 전하는 것이리라.
“폐하를 뵙는 즉시 바로 북부 사정을 전하겠습니다.”
“고맙군.”
그렇게 칼 원수와 악수를 하는 것으로 북부에서의 일을 정리한 나는 메인게이트를 타고 다시 중앙으로 이동했다.
이는 9월 27일, 내가 특무함 사령관으로 임명받은 지 361일째 되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