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적을 무력화하는 기술이란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칼 원수는 그게 무슨 큰 도움이 되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부관이 전해준 자료를 파악하던 그는 눈이 휘둥그레졌고 마지막에 가서는 아주 진지한 얼굴이 되어있었다.
“이런 무기를 불과 수개월 만에 만들어내다니.”
특무함 사령관 존 메이어가 북방에 도착한 지는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신무기를 발명할 줄이야.
그것도 아주 파괴적인 위력을 가진 놈이었다.
북방의 사정이 전쟁으로 어려워진 것은 이미 수십 년은 되었기에 미리 이쪽의 사정을 알고 준비한 것일 수도 있었으나 그럴 확률은 희박했다.
“…진짜 천재란 말인가?”
그렇다면 정말 소문대로 화폐개혁을 주도한 자가 존 메이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칼 원수는 떠올렸다.
생각을 정리한 그는 즉시 휘하 연구단을 소집해 설계대로 뇌파 교란 장치 제조를 시작할 것을 명령했고, 즉시 은하 간 통신망을 열어 중앙으로의 연락을 꾀했다.
존 메이어가 보내온 보고서 마지막엔 신무기 설계도뿐만 아니라 중앙으로의 지원을 요청하는, 황제에게 보내는 메시지 또한 담겨 있었던 것.
칼 원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북부의 지원 요청을 황제가 칼같이 끊어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중앙에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이번엔 왠지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지원 요청을 하는 주체가 북부 장교가 아닌 중앙에서 파견한 인물이라는 점이 주효했다.
여기에 존 메이어는 지원의 필요성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는 무기 체계 개발, 이미 2개의 적 플랜트 공장 무력화 작전의 성공을 피력했다.
지원만 받으면 승기를 확실히 잡을 수 있다는 설명이니 이전과는 그 뉘앙스가 많이 달라진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존 메이어의 이름으로 지원을 요청하는 메시지가 즉시 메인게이트를 타고 넘어가 중앙으로 들어갔다.
이는 존이 건국기념일 행사를 통해 소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특무함 사령관으로 임명된 지 반년이 좀 더 지난 시점의 일이었다.
* * *
수리를 받으면 다시 운용 가능한 함선은 계산에서 제외.
대파 판정을 받아 완전히 못쓰게 된 함선은 전함 3척, 순양함 9척, 구축함 15척으로 총 27척의 손해가 발생했다.
3천여 척 전투함 중 1퍼센트 미만의 손상.
이것이 어비스데몬의 만이천 척 군단급 적을 격파하며 얻은 아군 전투부대의 피해 전부였다.
최근 북부에서 있었던 전투를 고려하면 그야말로 기록적인 압승이지만 나는 차마 웃음기를 보일 수 없었다.
중파 함선에서 있던 피해까지 고려하면 수만 명 이상의 연방군 군인이 목숨을 잃었다.
나는 잊지 않고 합동 장례를 치르며 그들의 희생을 시민들과 함께 기억했다.
물론 내가 엄숙한 분위기를 유지해도 행성에선 전에 없던 희망의 불씨가 크게 피어나고 있었다.
유례없는 기록적 승리에 시민들이 크게 환호했고 군인들도 나를 믿고 따르면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단 기대를 품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흐름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세릴다 중장은 전투가 끝난 지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직접 날 찾아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세르톤의 옛 공장 터를 철거하고 임시 훈련소를 세울까 하네.”
“훈련소 말입니까?”
체계적 훈련을 통해 연방군 양성을 목표로 하는 훈련 기관.
그것을 세르톤에 세우겠다는 뜻이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북부는 전쟁의 황폐화로 입대를 희망하는 젊은이들의 숫자가 바닥을 친 지 오래야. 하지만 희망이 넘치는 지금이라면 분명 적지 않은 수의 인원을 모을 수 있을 테지.”
군 인력 수급을 위해 징병까지 실시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던 북부.
만약 승리를 단발로 끝낼 게 아니라 전쟁의 완전 종식을 위한다면 반드시 인력을 충원할 필요가 있었고 중장은 승리로 인한 이번 기회를 살리고 싶어 했다.
모두가 승리의 분위기를 만끽 중인 지금이라면 입대희망자도 조금은 늘어나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그럼 제가 한번 네오아르곤에 의견을 전해볼까요.”
중장의 말을 충분히 이해했기에 나는 허가를 구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연방군 훈련소는 아무렇게나 만들 수 있는 시설이 아니었다.
훈련을 위한 교관이야 현역 장교들 중에서 추리면 될 일이라지만 훈련소 설립은 반드시 평의회와 원수의 허가가 필요했다.
이는 자치령의 영주들이 멋대로 훈련소를 만들어 병력을 개인 사병화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됐네. 책임은 내가 질 테니 그냥 진행하지.”
“그래도 되겠습니까?”
“북부에선 절차를 다 지키면서 일할 수 없네. 그랬다간 늙어 죽을 때쯤에나 안 된다는 답변을 받을 뿐이야.”
막무가내식 돌파.
세릴다 중장은 이것이 북부 스탠다드라 주장했고 나는 하는 수 없이 알겠다고 답했다.
그리하여 항성풍 이후 다시 한번 건설의 바람이 세르톤에 불기 시작했고 각종 중장비가 동원되어 막사와 훈련장, 각종 시설을 초고속으로 올리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세릴다 중장은 새 훈련소 입교를 희망하는 인원에게 서류지원을 받기 시작했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자살의 여러 가지 방식 중 하나라고까지 불리었던 북부군 입대에 무려 60만 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린 것이다.
북부 전선 훈련소를 만든다는 발표가 난지 불과 12시간 만의 일이었다.
이는 북부군 장성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엄청난 인기였다.
함박웃음을 띤 세릴다 중장은 내친김에 훈련소 1차 양성 인원은 특무부대 휘하에 배치되어 내 지휘를 받게 될 거라고 대대적 광고를 기획하기까지 했는데 그 사실을 제때 들은 내가 말린 덕분에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만은 막을 수 있었다.
나는 이 북부에 전쟁 정리를 위해 임시직으로 건너온 입장이었다.
일만 정리되면 언제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텐데 그때가 되면 내 밑에서 일하고자 군에 들어온 친구들이 상처를 받지 않겠는가.
그러한 배려 속에 나는 추가로 기획해두었던 일 또한 착실히 준비해나갔다.
가장 우선한 일은 전쟁 장기화에 대비하여 제2 거점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이러면 안 그래도 적은 병력을 쪼개야 하는 문제가 생기지만 현재 북부 안쪽을 휘젓고 다니는 수십만 척의 어비스데몬 전투함을 상대하려면 좀 더 확실한 전선 기지가 필요했다.
거주자가 이미 수억 명 이상 된 세르톤을 끼고 계속 연전을 치르기엔 우리도 부담이 많이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단 한 척의 적함이라도 포위망을 피해 행성에 떨어지는 순간 지옥도가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기존 전투함 중 세르톤 방어를 위한 전투 병력, 전투함 500척을 세릴다 중장에게 맡기고 나머지 함선을 대동해 베르데V로 이동하기로 했다.
여전히 독기가 가득해 마스크 없이는 숨을 쉴 수 없는 죽음의 행성.
다만 어비스코어를 뽑아낸 뒤로 행성 정화작업이 착실하게 진행 중이었고 칼 원수나 평의회와도 연락이 쉬운 편이었기에 이보다 더 거점 건설에 안성맞춤인 곳은 없었다.
다소 생활 환경이 엉망이라는 점만 빼면 이곳은 오랫동안 군단 거점 기지로 이용되었기에 전략 물자 생산라인과 방어 기반, 대량의 수리 도크를 이용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북반구는 그야말로 초토화가 됐지만, 행성 남반구엔 여전히 쓸만한 시설이 다수 남아 있었다.
그렇게 다시 한번 적과의 전투를 준비하던 때에 고대하던 소식이 들려왔다.
무려 중앙에서 2개 군단과 전략 물자.
남부에 파견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큰 규모의 병력을 북부에 지원해주겠단 소식이었다.
* * *
<오랜만에 얘기를 나누게 되는군. 존 메이어 소장. 그땐 이 정도로 출세할 줄 몰랐는데 말이야.>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장님.”
중앙의 군을 이끌고 총사령관 역할을 받아 북부까지 올라온 대장은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라이키니르 대장.
그는 지난 남부 융족 전쟁에서도 중앙군을 통솔하여 혁혁한 전공을 올린 바 있는 원정 작전의 대가였다.
황제의 거짓 사망설에 휩쓸렸을 당시, 중앙군 장성 상당수도 줄을 잘못 서서 옷을 벗었다고 들었는데 라이키니르 대장은 용케 직을 보전했다.
내가 오크들을 데리고 대규모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뒤를 봐준 것도 그였기에 나와는 상당히 인연이 깊다 할 수 있었다.
화상 통신으로 내 얼굴을 마주한 대장은 씩 웃음을 짓더니 조금만 더 버티라고 당부하였다.
곧 신무기를 장착한 중앙군과 북부 후방의 원수군이 일시에 전선을 올려 반격할 거라는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자네가 특별히 군공을 더 올리고자 무리할 게 아니라면 그대로 방어를 굳히고 기다릴 것을 추천하지.>
“제가 군공 욕심을 더 낼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하. 그건 그렇지. 이미 차고 넘치는 공을 세우지 않았나. 폐하께서도 아마 흡족해하실 걸세.>
북부군 반격의 동기가 되어준 신형 전략 무기 개발.
물론 이 연구엔 수많은 사람이 함께했다.
특히 세리스 공녀, 그리고 우수한 연구원들이 참여했음을 기록해 두었지만 그렇다고 내 공이 줄어들거나 빛이 바래는 것은 아니었다.
훌륭한 지휘관의 덕목 중 하나는 올바른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결과를 끌어내는 것이었으니까.
‘진급하면 세리스 공녀한테 감사의 선물이라도 준비해야겠군.’
일전에 보았던 보물전의 규모와 크기를 생각하면 어지간한 선물로는 만족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이번 연구로 내가 큰 이득을 보게 되었으니 그 정도 지출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본격적인 반격은 아마 모든 전함에 신무기가 장착되는 한 달 뒤쯤이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궁금한 게 있는가?>
“혹시 폐하께서 어디까지 전선을 회복하라고 따로 남기신 말씀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폐하께선 일단 판테라 성계까지의 영토 회복을 원하고 계시네.>
판테라 성계.
내가 북부에 도착하기 한참 전에 이미 어비스데몬의 수중에 떨어진 곳이며 북부에선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초대형 블루옵테늄 광산이 자리 잡은 곳이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보다 영토가 최소 3배는 더 늘겠군.’
내가 북부에 갓 도착했을 적엔 북부 최전선이 카일론 성계였으나 판테라 성계까지 진출하려면 보급로와 더불어 수많은 전투가 예상되었다.
<그리고 자네가 보낸 연구 결과물에 대해선 폐하께서도 상당히 관심을 보이셨다네. 혹시 어비스코어에 대해선 더 알아낸 사실이 없나?>
제국 자치령을 폐허로 만들고 그 에너지로 생체전투함을 생산해내는 에너지 흡수 장치 어비스코어.
나는 꾸준히 이 검은 코어의 활용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으나 도덕적, 윤리적 문제가 생기지 않는 범위 내에선 이렇다 할 결과물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애초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 에너지를 흡수하는 광기 어린 물건이다.
나는 오히려 이 어비스코어에 대해 황제가 관심을 보였다는 데서 왠지 모를 찜찜함을 느꼈다.
“보고드린 내용이 최신이었던 지라 특별히 더 연구된 것은 없었습니다.”
<그런가? 알겠네. 그럼 조만간 다시 연락하지.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무운을 빌겠네.>
내가 고갤 꾸벅 숙여 인사하는 것으로 화상 통신이 종료됐다.
그렇게 통신이 끝나자 주변에선 잘됐다며 장교 여럿이 손뼉을 쳐댔는데 다들 전쟁이 끝나기라도 한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 신중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나로선 부하들에게 적당히 쓴소릴 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전쟁이 끝난 것도 아닌데 긴장을 늦추면 안 되지 않겠나.”
“…죄송합니다.”
“주변 경계에 더욱 힘쓰도록.”
“예!”
괜히 좋은 분위기에 초를 친 것 같아 미안했지만, 차라리 풀이 좀 죽고 정신을 차리는 게 일 터지고 후회하는 것보단 나았다.
지금 우리가 위치한 베르데V와 네오아르곤 사이엔 여전히 수십만 척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의 적함이 떠다니고 있었다.
적에 비하면 우린 여전히 소수.
자칫 놈들이 머릴 돌려 이쪽으로 전부 들이닥치기라도 하는 날엔 단숨에 지옥을 맛보게 될 터였다.
‘적어도 한 달은 조용히 지내야겠군.’
라이키니르 대장에겐 다소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중앙군이 도착했다는 이야길 듣자마자 플랜트화 된 행성들을 대상으로 한 추가 타격 작전을 완전히 접어버렸다.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3천 척의 전투함은 저 수십만 대군 앞에서 바람 앞 촛불이었다.
황제도 그랬다.
승기가 보이지 않을 땐 아무 움직임도 취하지 않고 있다가 이제야 슬그머니 지원을 보내주지 않았던가.
이번엔 나도 내 이익을 우선시해 움직일 참이었다.
“그러니 계획했던 모든 작전을 한 달 뒤로 미루겠습니다.”
나는 장성들을 데리고 연 화상 회의에서 대놓고 선포했다.
어비스데몬의 어그로가 수도 후방에 쏠리면 다시 작전을 재개하겠다고 말이다.
회의를 진행하면서도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지금 회의를 함께하는 이들은 가장 험한 북부 전선에서 평생을 바친 장군들.
이들이 볼 땐 내가 기회를 탐하는 소인배나 아군의 희생을 기회로 삼는 이기주의자로 비칠 수도 있었다.
어쩌면 신뢰를 조금 잃을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지더니 장성들이 환하게 웃는 게 아닌가.
-뭐야 이 사람들?
‘글, 글쎄?’
진도 영문을 모르겠단 반응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외쳤다.
“저 평의회 밑에서 딸랑이나 흔드는 놈들! 전선 지원엔 그렇게 인색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고말고! 저놈들도 한번 당해봐야 정신을 차릴 놈들이지!”
“도와줄 필요 없습니다! 어디 자기들끼리 자알- 해 보라고 하지요!”
장성들은 껄껄 웃으며 적들의 시선이 후방에 완전히 쏠리면 그때 다시 플랜트 타격을 해도 충분하다며 알맹이만 쏙쏙 빼먹자고 말했다.
깜빡 잊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북부 평의회와 후방에 맺힌 게 많은 이들이 바로 전선의 장성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쨌거나 다행인 점은 모든 상황이 우리 모두에게 좋게 흘러가고 있단 사실이었다.
중앙의 지원과 대대적인 역습 준비까지.
드디어 이 북부에도 조금씩 희망의 훈풍이 불기 시작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