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잠시 동안 말이 없던 함교에선 정신을 차린 미하일이 다 태워버릴까요? 하고 명령을 기다렸다.
어비스데몬의 생체전투함 생산구역.
전술핵 몇 개 섞어주면 이곳을 완벽히 날려버릴 수 있었다.
내가 그리하라고 오케이 사인을 내리려는 순간, 진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존. 날릴 때 날리더라도 이곳을 한번 살펴봐라.
‘조사?’
-벽면 말이다.
진의 말에 나는 생산구역 벽에 조명을 비출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조명탄이 솟아올랐고 둥지 안에 새카맣게 깔린 작은 괴물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이 침범당해 잔뜩 화가 난 기색이었다.
“사령관님…? 어서 부수고 탈출하지 않으면 여기서 뼈를 묻을 겁니다.”
미하일은 진지하게 목숨이 걱정되는 투였다.
워커호의 스텔스는 여전히 유효했지만 이곳에 조명탄이 터진 것으로 정체불명의 세력이 침투했다는 걸 들킨 상황이었다.
당장 지상에서부터 수많은 적 전투기가 이곳으로 되돌아오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라? 이 자식들 설마 마법을…? 존, 너 이거 알고 조명탄 쏘라고 한 거야?”
오퍼레이터를 포함한 장교들이 몸을 떨고 있을 때, 이곳의 비밀을 알아챈 사람은 나와 진 그리고 세리스 공녀였다.
우리 셋의 공통점은 다른 이들보다 마법적 지식이 더 많다는 것.
조명탄에 비친 생산구역 벽면엔 정체를 알 수 없는 룬문자가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어비스데몬이 고도화된 마법 체계를 다룰 수 있음을 의미했다.
안 그래도 이기기 힘들었던 상대가 마법의 힘까지 갖추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제 북부는 자력으론 이 위기를 헤쳐 나갈 방도가 없는듯했다.
“영상과 스캐닝으로 자료를 남겨라.”
“예!”
벽면에 새겨진 문자를 기록하는 덴 불과 수초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후 나는 임무 완수를 위해 망설임 없이 미사일 폭격지시를 내렸다.
핵미사일이 장전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워커호의 두터운 실드가 펼쳐졌다.
“발사!”
핵폭발의 충격은 전함급 전투함이 아니면 버티기 어려웠다.
그러나 워커호는 나와 진이 공을 들여 개조를 마친 제국 최강의 순양함.
이윽고 빛이 점멸함과 동시에 거대한 화염이 둥지를 강타했다.
키에엑거리는 소리와 함께 둥지 내부에 있던 어비스데몬의 괴물들이 모조리 쓸려나갔다.
그야말로 불의 바다.
활활 타오르는 생산구역을 눈에 담던 때, 우리 모두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이런 젠장….’
핵폭발에 의해 완전히 날아갔어야 할 적 중심 생산건물이 멀쩡히 버티고 서 있기 때문이었다.
폭발이 터지던 찰나 생산건물을 감싸고 펼쳐진 실드가 원인이었다.
핵미사일을 견딜 정도라니, 엄청난 방어력을 갖춘 게 틀림없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거라곤 미처 예상 못 했는지 장교들은 모두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고 별수 있겠는가.
어비스데몬이 이 정도 마법을 구사하는 건 나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기에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주포를 쏴도 타격을 줄 수 없을 텐데.’
대기 밀도가 높은 지역에서 핵미사일의 위력은 어지간한 전투함의 주포를 뛰어넘는다.
워커호의 출력이 아무리 탈순양함급이라 해도 핵미사일 이상의 위력을 뽑아내긴 어려웠다.
‘진. 저 실드를 해제할 수 없을까?’
-실드 해제를?
‘전함처럼 에너지 융합에 의해 펼치는 실드가 아니라 마법에 의한 것이라면 무효화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겠느냐 이거지.’
제법 마법사다워졌기 때문일까.
나는 조금 전 미사일 공격을 방어한 적 실드 방벽에서 강한 마력을 느꼈다.
마법은 마법으로 대응하는 것이 최선.
게다가 여긴 나 말고도 쓸 만한 마법사가 한 명 더 있지 않은가.
같이 힘을 모으면 저 마법 방어벽을 허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이야기를 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말이다.
‘뭐를?’
-저 거대 플랜트 밑으로 마력을 공급하는 동력원의 존재를 느꼈다.
‘동력원?’
-물리적 타격으로 그것을 드러내게 할 수 없으니 직접 침투를 해야 할 거 같은데….
진의 말에 나는 오싹한 기분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생산 건물 곳곳엔 어비스데몬의 괴물들이 드나들었던 구멍이 수십 개 이상 뚫려 있었다.
핵폭발에도 건물이 무너지지 않았으니 괴물 상당수는 저 내부에 살아있을 거로 짐작됐는데 진은 지금 나보고 저곳에 들어가 동력원을 끊자는 의견을 낸 것이었다.
-큰 통로는 실피드도 충분히 오고 갈 수 있으니 맨몸으로 전투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다.
‘그게 썩 위로가 되진 않는데 말이지.’
큰 통로는 큰 괴물들이 드나들던 곳일 터였다.
물론 방호복 하나 달랑 걸치고 들어가는 것보단 낫겠다마는….
수십 미터에 달하는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실피드가 얼마나 활약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의문이었다.
-걱정된다면 그냥 돌아가는 방법도 있다.
‘그럴 순 없지.’
여기까지 와서 놈들의 생산시설을 그냥 놔두고 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짧은 고민을 마치고 다시 격납고로 향했다.
“미하일!”
“예!”
“입구를 지켜라. 이곳에서의 폭발로 수비 병력이 몰려올 수 있다. 전투기를 배치시키고 최선을 다해 막아라.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다.”
“돌아오시겠다고요? 어딜 가시는 겁니까!”
이 까마득한 지하에서 바깥으로 나서겠다는 말에 미하일은 기겁했으나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1초라도 빨리 핵심 시설을 날려버리고 탈출을 꾀해야 했다.
그렇게 격납고를 향해 달릴 때, 냉큼 카린이 따라붙었다.
“같이 가.”
“나 혼자 가도 충분해.”
“실피드 쓰려는 거 아니야? 조종은 내가 더 잘하잖아.”
-엘프 말대로 하자. 안에서 어떤 위험과 마주하게 될지 모르니까. 동력원에서 느껴지는 파장을 고려하면 힘을 아껴두는 게 좋을 거다.
나는 진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애석하게도 내 몸은 평범한 인간인지라 실피드를 조종하며 생기는 충격을 장시간 버티기 어려웠다.
물론 실피드의 가동 시간은 그리 길지 않지만 그것만으로도 만전의 컨디션을 유지하기엔 다소 어려움이 있는 게 사실이었다.
그렇게 카린에게 조종을 맡기겠다고 할 때, 야야! 하고 외치며 공녀도 나를 쫓아왔다.
“같이 가!”
똑같은 ‘같이 가’인데 어조는 사뭇 달랐다.
마치 자신만 떼어놓고 가는 게 몹시 불만인 것처럼 말이다.
“실드 해체하러 가는 거지! 나도 갈래!”
“저기요. 공녀님. 지금 우리가 놀러 가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나는 계속 뛰며 말했고 공녀는 발을 움직이기가 귀찮았는지 몸을 공중으로 띄워서는 따라붙었다.
“나도 알거든? 저기서 느껴지는 마력 파장이 범상치 않았으니까 하는 소리야. 어쩌면 새로운 마법의 실마리를 찾게 될 수도 있다고!”
그녀는 진이 느꼈던 것처럼 저 아래서 뿜어지는 무언가의 마력을 포착한 모양이었다.
다만 이번엔 격렬한 전투가 예상되는바, 실피드의 좁은 콕핏에 다시 세 명이 들어가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그러나 공녀는 절대 이번 출격을 포기할 맘이 없는 모양이었다.
“좁은 게 문제면 둘이 타면 되잖아!”
“사령관님은 작전을 위해 꼭 함께 가셔야 하는데요?”
카린이 은근슬쩍 이번 작전에서 빠질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는 투로 말하자 공녀가 콧김을 뿜었다.
“조종은 존이 하고! 마법은 내가 쓰면 되니까! 네가 빠지면 되겠네!”
“어?”
그 생각은 못 했는지 카린은 발을 멈추고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하지만 격한 전투가 일어날 수도 있음을 생각하면 역시 제국 최고의 그라프 파일럿인 ‘제가’ 사령관님을 호위하는 게 제일 올바른 선택이겠지요.”
“나도 마법은 제일 잘하거든? 존이 조종 좀 못해도 마법으로 보조해 주면 그만이야~”
‘바빠 죽겠는데 왜 싸우고 그래….’
둘의 언쟁은 격납고에 도착할 때까지 끝나지 않았고 결국 나는 이번에도 셋이 함께 타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뭐야! 존-!!! 어딜 만져!”
“안 만졌습니다….”
“방금 내 가슴 찔렀잖아!”
“아, 거기 제 검 있거든요. 폐하께서 하사하신 보검이니까 막 다루지 말아주세요.”
“아이 씨…. 좁아 죽겠는데 뭔 놈의 검이야!”
“불편하면 내리시든가요.”
“귀쟁이 이거, 말하는 거 봐? 너 내가 누군지 몰라? 나 공녀야! 어딜 건방지게….”
“그만하고 출발해….”
“네.”
차라리 혼자 출격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비행포드를 박차고 나간 실피드가 삽시간에 중심 생산건물을 향해 날았다.
급발진에 다시 한번 공녀가 구겨진 건 덤이었다.
* * *
순식간에 목표 지점에 도착한 나는 어떻게 하면 실피드가 벽을 넘을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워커호의 공격으로 인해 중심 건물 주변엔 실드가 활성화된 상태였다.
실피드의 출력으로 뚫고 들어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던 때, 공녀가 전방을 향해 손가락을 뻗더니 알 수 없는 언어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진은 그것이 드래곤의 힘 중 하나인 용언이라 설명해 주었고 잠시 뒤, 실피드가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 실드 한가운데 열리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이 정도란 말이야. 파일럿이 고위 마법사랑 비교한다는 게 말이 돼?”
-우리 엘프 입술 깨물었다.
내 시야에선 보이지 않는 카린의 표정을 진이 알려주는 사이, 실피드는 실드를 통과해 괴물이 드나들었을 통로 안쪽으로 향했다.
거대한 시설만큼이나 건물의 크기도 굉장했다.
“적입니다. 교전 시작하겠습니다.”
갑작스레 통로 안쪽에서 나타난 수십 미터급 거대 괴물.
털이 수북한 거미처럼 생긴 괴물은 끈적한 액체를 쏘아댔는데 카린은 매끄럽게 검을 뽑더니 단숨에 외피를 뚫고 괴물의 머리통을 박살 냈다.
출력을 높이자 콕핏 내부엔 마력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는데 공녀는 카린의 마력이 거북했는지 살짝 인상을 썼다.
“하여간 세련되지가 못해요.”
공녀가 투덜거렸지만 카린의 조종 실력은 확실히 명불허전이었다.
거대한 괴성을 지르며 튀어나오는 괴물의 숫자가 삽시간에 수십 마리에 달했지만 카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괴물을 처치해 나갔다.
만약 실피드가 없었더라면, 이 거대 괴물의 밭을 어떻게 뚫었을지 생각하니 앞이 캄캄할 정도였다.
그렇게 더 깊이, 더 아래로 내려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마치 사우나에 온 것 같은 열기로 콕핏 내부가 후끈 달아올랐을 때, 우린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저게 뭐야…?”
레하반 타워의 주인이며 우주의 온갖 보물을 다 접해봤을 공녀도 저 밑에 펼쳐진 동력원을 보고선 이맛살을 찌푸렸다.
수백 미터 규모를 훌쩍 넘는 거대 부화방.
생체 전투함을 만드는 안쪽 방에서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검은 상자였다.
크기는 1미터 남짓, 바닥에 딱 붙어 솟아있는 그것은 표면에 룬문자가 새겨져 있었고 척 보기에도 음울한 마력을 드리우고 있었다.
손대면 반드시 해를 입을 것 같은 느낌.
천년공이 뿜어내던 독기에 비할 바는 아니라지만 저것도 위험천만한 물건임은 틀림없었다.
“파괴할까요?”
상자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 실피드의 프레임이 손상 중이라는 경고가 뜨는 상황.
저 불길한 상자를 두고 카린은 어서 검을 휘두르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상자의 비밀만 풀어내면 제국은 어비스데몬의 약점을 또 하나 손에 쥘 수 있게 되는 셈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상자의 마력을 제한해 저것을 뽑아보기로 했다.
-힘들 텐데….
진은 대상의 마력이 너무나 거대해 내가 다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했지만 내 옆엔 아까부터 상자를 뚫어지게 관찰 중인 드래곤도 하나 있었다.
“공녀님도 상자의 파괴보단 회수하는 편이 낫다는 데 동의하십니까?”
“아? 아아. 물론이지. 저건 가져가는 게 낫지.”
“그럼 같이 힘 좀 써주시죠. 제가 마력이 부족해서 혼자 힘으론 좀 버겁습니다.”
“봉인하고 뽑아보자 이거지?”
“예.”
힘 좀 써보겠다며 꼬리에 힘을 잔뜩 준 공녀는 눈을 부릅뜨더니 가공할 마력을 상자 주변에 둘렀다.
그러자 붉은빛이 주변을 가득 채웠고 커다란 진동과 함께 상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금방이라도 뽑힐 것 같았던 상자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이, 이거 힘으론 쉽지 않겠는데?”
공녀가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끙끙대는 와중에도 상자는 꿈쩍도 하질 않았다.
진은 상자에 보급되는 에너지를 차단해야 한다며 내게 조언을 건넸고 공녀가 힘을 쓰는 사이, 나는 또 하나의 마법을 추가해 상자로 흘러 들어가는 마력 흐름을 차단했다.
그러자 곧 엄청난 고통이 내 전신을 엄습했다.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느낌.
누군가 뜨거운 불을 내 몸 안에다 던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생각지 못한 반격에 정신이 흐트러지려는 것을 진이 붙잡아 주었다.
-집중해라, 존. 마력 절단의 반동이다. 상당히 고통스러운 현상이지.
‘씨팔! 그런 건 미리 말해-!!!’
젖먹던 힘까지 짜내 버티고 또 버티자 마침내, 상자 주변의 지반이 깨지며 검은 상자가 뽑혀 나왔다.
* * *
검은 상자.
나는 이것을 어비스 코어로 명명했다.
우리가 지하에서 어비스 코어를 들어 올렸을 때, 지상에선 갑작스레 전투가 끝났다고 했다.
어비스데몬의 잔여 전투기들이 힘을 잃고 땅에 처박혔고 날카롭던 대공포도 작동을 멈춘 것이었다.
아마도 이 작은 상자가 이 베르데V 전체의 어비스데몬 설비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고작해야 크기 1미터 남짓한 상자가 말이다.
코어를 봉인하는 데 모든 힘을 쏟은 공녀는 불만을 늘어놓을 기력도 없었는지 지상으로 올라가는 내내 조용했고 카린 역시 격한 전투로 다소 지친 모습이었다.
그래도 좋은 소식이 있다면 아직 시설이 멀쩡한 베르데V의 남반구 기지에서 하이퍼에테르와 퍼플옵테늄을 비롯한 전략 자원을 획득했다는 점.
그리고 3군단이 비축해 둔 대량의 식량을 확보했다는 것이었다.
“후우.”
초췌한 얼굴.
누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 몰골로 워커호로 돌아온 나는 전군에 귀환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나는 순양함의 의무실 침상 위에서 작전 종료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