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정찰 임무 개시 20시간째.
곧 하루를 다 채우는 시점에서 나는 초조한 기색을 내지 않으려 표정 관리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미 함교 인원의 절반 이상은 교대에 들어간 상태였다.
실시간으로 전투가 일어나는 상황에선 컨디션을 챙겨줄 수 없지만, 평시에는 순환 근무를 통해 체력을 안배해 두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잠시 눈이라도 좀 붙이시지요.”
내가 장시간 자릴 지키고 있자 매티스는 자신이 함교를 지키고 있겠다며 내게 쉴 것을 권유했다.
본래대로라면 나는 이미 몇 시간 전에 그에게 함교를 맡기고 쉬러 갔어야 했다.
하지만 오늘은 전장으로 보낸 부하들이 걱정도 되었거니와 누구보다 먼저 그들의 안전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나는 여전히 함교를 지키고 있었다.
“자네야말로 가서 쉬게나.”
“제가 어떻게 함장님보다 먼저 쉴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누군가는 쉬러 가야 하는데 순서는 상관없지.”
“이러다 쓰러지실까 걱정돼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요즘 좀 무리를 하긴 했지.
연구와 개발, 관리, 그밖에 처리해야 할 수많은 잡무까지.
지난 두 달 동안 세르톤에 모인 장교 중 가장 바빴던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아마 내 이름이 가장 첫 줄에 붙어있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버틸 만해. 그러니 어서 가서 쉬게. 명령이다. 매티스, 자네가 계속 쉬지 않고 있으면 정작 쉬어야 할 때 우리 둘 다 뻗을 수도 있어.”
함장과 부함장이 모두 부재중이면 누구에게 함교를 맡긴단 말인가.
물론 전시 상황엔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차례대로 권한을 인계할 후보가 정해져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비상 상황도 아니었다.
결국, 명령이란 말에 매티스가 먼저 함교를 떠나 잠시 눈을 붙이러 향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기다렸던 소식이 들어왔다.
워커호가 귀환했다는 소식이었다.
* * *
워커호 함장 미하일은 셔틀을 타고 엔터프라이즈호로 건너와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회의실에서 상황을 브리핑했다.
“몸은 좀 괜찮나?”
“다행히 멀쩡합니다.”
미하일은 생각보다 손쉬운 임무였다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피곤이 가득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고작 소식을 기다리느라 함교에서 하루를 대기한 나도 피로함을 느끼는 판에 주변에 적들이 가득한 전장에서 임무를 마친 미하일이 느꼈을 긴장감은 최악이었을 것임이 분명했다.
“베르데V의 상황은 좀 어떻던가.”
“대규모 전투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북부군 전투함과 생체전투함 파편이 즐비했고 살아남은 시민들이나 군인은 모두 다른 곳으로 후퇴한 듯했습니다.”
“적들은? 규모가 상당하던가?”
미하일은 우울한 낯빛으로 고갤 끄덕였다.
상당한 숫자의 적들이 베르데V를 맴돌았으며 정찰을 위해 잔여 스텔스 시간을 꽤 많이 소모했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워커호에 남아있던 잔여 스텔스 가동시간은 2시간 남짓.
그것이 이제는 30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보고였다.
“워커호는 추가 정보를 수집하고자 베르데V의 지표면으로 내려갔습니다.”
미하일이 행성 대기권으로 들어간 이유는 베르데V의 침식 상황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는 예상했던 대로의 장면을 목격했다.
“땅은 검게 변해 있었고 거대한 구멍에선 수백 미터급 생체전투함이 올라오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얼마나 더 자주, 그리고 많이 생산되는지는 스텔스 가동시간 한계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만… 적어도 그곳이 적의 생산 기지화된 것만은 틀림없었습니다.”
일대에선 제일 방어 시설이 탄탄했으며 가장 많은 병력이 집결해 있던 베르데V가 적의 손에 떨어졌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이후 함장들 간엔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의견이 오갔다.
베르데V가 무너졌다면 세르톤 인근에 지원을 요청할 만한 세력은 아예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루빨리 이곳을 떠나 안전한 후방지역으로 이동해야 살길을 도모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세르톤에 남은 시민 숫자가 너무 많았다.
자그마치 3억 명.
3천여 척의 함선으론 이들을 전부 데리고 이동할 수가 없었다.
말은 안 해도 시민들 역시 이 사실을 아주 잘 알았고 혹시라도 예고 없이 우리가 떠날까 봐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시민을 버리고 도주하는 북부군.
북부에선 일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고 시민들은 그런 군인들을 불신했다.
화폐개혁 이후 나는 시민들의 막대한 지지를 얻었으나 나를 따르는 군인 대다수가 북부군 출신이란 것도 시민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적의 주력이 베르데V를 무너트리고 더 깊숙이 후방으로 향했다면 당분간 거점방어엔 문제없을 것이네.>
세릴다 중장은 당분간 세르톤 방어엔 문제가 없을 것이라 말했지만 결국 우린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보급도, 지원도 오지 않을 이곳에서 기약 없이 버티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시민들의 불안은 이해하지만 일단은 병력을 움직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세르톤의 식량이 2주일 치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시민의 불안을 우려하다간 모두 굶어 죽을 판입니다.>
어차피 가만있으면 다 죽을 거란 그들의 의견.
이는 매우 타당했으므로 우린 마침내 병력을 움직이기로 했다.
수중에 남은 전략 자원 중엔 뭐 하나 넘치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리하여 우린 병력을 어디로 움직일 것인지에 대한 토론에 들어갔고 베르데V를 목표로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다.
“베르데V 표면의 저장 창고와 공장과 도시 일부는 아직 쓸 만해 보였습니다.”
<제일 나은 선택인 것 같습니다. 아직 어비스데몬이 인류의 자원을 탐낸다는 이야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미하일의 보고에 장성들이 고갤 끄덕였다.
지금껏 북부를 괴롭힌 어비스데몬들은 수만 개에 달하는 행성을 먹어치웠지만 단 한 번도 자원을 목적으로 침공해 온 적은 없었다.
그 말인즉, 3군단이 장기전을 위해 쌓아둔 전략 무기와 군수 물품, 식량 등을 포함한 자원이 여전히 베르데V의 창고에 남아있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정비 이후 우리의 첫 전장으로 베르데V가 선택됐다.
필요한 물자를 수급하고, 그곳에 깔린 어비스데몬의 플랜트를 뿌리 뽑는 것.
이에 성공한다면 수억 명에 달하는 제국 시민을 살리는 일이 됨과 동시에 적의 생산력에 상당한 타격을 줄 수 있을 터였다.
* * *
준비를 마친 3천여 척의 전투함이 출정을 떠나던 날.
나는 단상 위에 올라 시민들에게 우릴 응원해 달라 부탁했다.
우리는 결코 그대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며, 목숨이 붙어있는 한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 각오를 전하는 자리였다.
그중엔 제발 떠나지 말라 오열하는 시민도 있었고, 떠나려거든 애들만이라도 함선에 실어달라 외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이 평생 봐온 것은 군이 자신들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다시 돌아오겠다 말하는 나의 약속을 믿기 힘든 건 당연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나의 부탁대로 우리의 출정을 응원해 주었다.
저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어차피 함선을 움직이지 않고선 버티는 게 불가능하단 사실을….
두 달간의 배급으로 이미 식량은 크게 줄어들었고 어떤 식으로든 활로를 찾으려면 병력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린 수억 명에 달하는 시민들의 응원을 뒤로하고 엔진 출력을 높이며 세르톤의 대기권을 벗어났다.
“도약 준비.”
“하이퍼에테르 주입 시작.”
“카운트다운 시작. 워프 개시까지 60분 남았습니다.”
연료를 주입한 전투함은 긴장 속에 주변을 경계했다.
도약에 걸리는 시간은 한 시간.
이 사이, 적이 나타나거나 기습을 해오면 우린 꼼짝없이 도약을 멈추고 전투태세에 돌입해야 했다.
문제는 그렇게 했을 경우, 이미 소모된 하이퍼에테르는 돌아오지 않는단 점이었다.
한 줌의 연료가 아까운 상황이었기에 우린 적들이 나타나지 않길 한마음으로 기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도약을 위한 파장이 퍼지며 선단 전체가 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북부 후방 깊숙한 곳을 향해 진격 중인 적들은 뒤쪽에서의 기습 따윈 염두에 두지 않은 모양이었다.
번쩍이는 빛과 함께 워프를 마친 전투함들.
그러나 우린 곧바로 다음 도약 준비에 들어갔다.
북부의 영토는 아주 넓었고, 베르데V까진 도약을 두 번이나 해야 하는 거리였기 때문이었다.
“주변 경계하고, 곧장 다음 도약을 준비한다. 전투기들은 경계를 늦추지 마라.”
<라저.>
* * *
한 달 전, 세상의 모든 불빛이 사라졌다.
그날 하늘에선 녹색 불벼락이 떨어졌고, 북부가 자랑하던 전투함은 대기권에서 굉음을 내며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남자는 그제야 세상에 종말이 닥쳤음을 깨달았다.
믿기 힘들지만 사실이었다.
어비스데몬이 마침내 북부 내륙으로 향하는 관문인 베르데V까지 진격해 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겁에 질린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거실에 모여 TV를 틀었다.
모든 채널에선 정규 방송이 중단되었고 방위군이 보내는 긴급 대피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긴급 상황입니다. 이것은 훈련 상황이 아닙니다. 이 방송을 보고 계신 시민 여러분들께선 서둘러 가까운 대피소로 몸을 피하시기 바랍니다.>
아내는 몸을 떨고 있었다.
그녀는 정신이 나간 듯 보였고 남자는 눈을 질끈 감고 준비해 두었던 짐을 챙긴 뒤 어서 대피소로 가야 한다며 가족들을 일으켜 세웠다.
거리엔 이미 쏟아져 나온 시민들로 인산인해였다.
남자는 이대로 도로 밖으로 몸을 내미는 순간, 누구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 거대한 인간의 파도는 겁에 질린 아내와 힘없는 아이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삼켜버릴 터였다.
사람들은 모두 공포에 질려 있었고, 살기 위해 대피소로 뛰고 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도로 위에서 죽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였다.
하늘에서 벼락 대신 불꽃이 번뜩이며 떨어진 커다란 합금 파편이 일대를 강타했을 때, 남자는 다시 아이들과 아내의 손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갔다.
혼돈만이 가득한 인파에 가족들을 잃느니 집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게 낫겠단 생각에서였다.
그리고는 얼마나 지났을까.
미처 대피소로 피하지 못하고 이동 중이던 시민들 사이에선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진 괴물들.
온갖 고통과 비명으로 가득했던 도시가 잠잠해지기까진 불과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주변 북부군에 집결을 명령했으며, 인근에서 가장 많은 전투함을 모아 요새로 불리었던 베르데V는 그렇게 간단히 멸망하고 말았다.
대피소를 비롯한 도시에 남은 생존자들이 있긴 하나 그들 역시 오래 버티진 못할 운명이었다.
인간의 땅이었던 이곳엔 빌딩보다 거대한 독버섯이 피어올랐으며 매일같이 뿌려대는 포자엔 한 모금만 들이켜도 내장이 썩어버릴 맹독이 담겨 있었다.
대지가 검게 물들고, 여과 장치 없인 호흡할 수도 없는 죽음의 땅.
땅에서는 어비스데몬의 전투함이 매일같이 기어 올라오며 지옥이 된 이곳을 3천 척의 전투 선단이 분노로 겨냥하고 있었다.
* * *
<베르데V 북반구 모두 침식이 진행됐음을 확인!>
<폭격해도 민간인 피해는 없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남반구 쪽엔 아직 생존자가 있겠군.”
<적 발견! 전투함 500척 확인!>
검게 변한 베르데 V를 마주하고 있을 때였다.
오퍼레이터가 대규모 적군의 등장을 알리며 경계경보를 발령했다.
규모 500척, 전함을 필두로 한 어비스데몬의 주둔군이었다.
“적함! 전투기 사출 확인! 몰려옵니다!”
“가소롭군.”
무려 500척이나 되는 전투함이 쏟아내는 전투기의 숫자는 우주의 메뚜기떼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이쪽은 무려 3천여 척.
게다가 스펙도 재건조를 통해 잔뜩 끌어올린 터였으니 이쪽이 두려워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전투 개시.”
<전투 개시!>
“거리를 내주지 않고 후퇴하며 주포 사격전에 돌입하라.”
<알겠습니다.>
“주포 발사준비 완료!”
“발사!”
기민하게 명령을 따라 움직이는 함장들.
융합로의 에너지를 받아 빛을 뿜기 시작한 포신이 이내 번쩍이며 주포를 발사했다.
무려 3천여 척 전투함이 주포를 뿜는 대장관.
“주포 명중!”
<적군 전투불능 규모 7할 이상 확인!>
<와아아!>
단숨에 수백 척 이상의 적함을 격침했다는 소식에 채널엔 흥분한 함장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기존의 낡고 흉물에 가까웠던 구형 전투함으론 흉내 낼 수조차 없던 화력이었으니 말이다.
-이럴 땐 저것들이 융족이 아니라 다행이군!
진은 어비스데몬이 멍청해서 다행이라며 전황을 지켜봤다.
그의 말대로였다.
지능이 높은 융족이었다면 고작 500척으로 3천 척에 달하는 아군에 몸을 부딪쳐 오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우리한텐 잘된 일이지. 성가신 게릴라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없어졌으니.’
나는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통신 채널을 향해 외쳤다.
“다들 흥분을 가라앉혀라! 작전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우리의 목표는 단순히 전투에서의 승리가 아닌, 대기권 강하 이후 생존자를 구출함과 동시에 적 플랜트를 파괴하는 데 있다. 모두 각오를 다지고 작전이 끝날 때까지 최선을 다하도록.”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