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황성(皇城)의 지하에 위치한 대공동.
벽에 걸린 촛불의 희미한 일렁임이 이곳을 비추는 가운데 궁중백 로만이 한 손에 옷을 들고 조용히 서 있었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제국 황제를 모셔온바 로만의 충성심은 성 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수준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런 충신의 눈동자 속엔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원인은 공동 중앙의 연못.
그것이 원래 자연적으로 그곳에 있던 것인지, 아니면 오래전 이곳에 터를 잡았던 존재가 만든 것인지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 연못이 이후 역대 황제에게 매우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는 점이었다.
호수의 표면은 은하수를 담아놓은 듯 반짝였는데 잠시 뒤, 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별을 가르고 황제가 물속에서 천천히 상승해 나타났다.
못 밖으로 나온 황제는 단 한 방울의 물도 묻어 있지 않았고 수면을 밟아 천천히 걸어 나왔다.
마치 무게가 없는 것처럼,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자신을 향해 오는 황제를 보며 궁중백은 더욱 고갤 숙였다.
단순히 물을 걷는 묘기야 숙련된 마법사면 누구나 할 수 있으니 딱히 무서울 것도 없지만 정작 궁중백을 두렵게 하는 건 황제의 몸에 피어난 여러 개의 눈이었다.
상체와 하체, 팔과 다리, 전신에 몇 개의 눈을 더 달고 있는 황제는 마치 신화 속에 등장하는 거인 같았다.
로만은 어딜 보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는 저 눈이 늘 무서웠다.
사람이 커다란 눈을 몸에 달고 있는 것도 이상하거니와 어쩌다 시선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소름이 쫙 돋는 것이었다.
물에서 나온 황제는 피곤했는지 잠시 눈을 감았고 이내 몸에 나타났던 눈들도 마치 당연히 없었던 것처럼 스르륵 자취를 감추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폐하.”
로만이 건넨 옷을 황제는 군말 없이 걸치더니 손에서 불을 피워 몸을 데웠다.
물속에 들어갔다 나온 황제는 매우 지친 기색이었다.
로만은 황제가 저 안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의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가 남긴 발언을 토대로 추측하자면 저 멀리서 제국을 노리는 존재들의 눈을 가리는, 어떤 주술적 의식이 진행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까마득한 거리를 격하고 제국을 들여다보며, 기회를 엿보는 적들.
그들의 정체는 로만이 알 수 있는 게 아니나 적어도 제국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부류에 속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북부의 상황은?”
조금 쉰 목소리로 황제가 묻자 로만은 북부가 항성풍 기간을 맞이했으며 계속 전선이 뒤로 밀리고 있음을 고했다.
이미 북부는 전성기 기준으로 영토가 5분의 1수준으로 줄어 사실상 함락 직전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북부의 어려운 상황을 보고받은 황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렇군- 하고 답할 뿐이었다.
“폐하. 신이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리하라.”
“존 메이어 소장 말입니다. 저는 그가 폐하의 믿음을 얻은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째서 그러한 소문을 내셨는지요.”
황제를 부축해 지하 공동을 빠져나가던 로만은 얼마 전, 특무함 사령관으로 임명돼 북부로 향한 존에 대해 질문했다.
이제 스물여섯 살이 된 그 젊은 장군은 이미 무공훈장을 수차례 받았을뿐더러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여 자신의 능력을 크게 입증한 자였다.
중앙의 젊은 장교 상당수는 그를 시기한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적어도 직접 얼굴을 보고 군공을 평가한 적 있는 궁중백 입장에선 이만한 군인이 또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만큼 그가 임관 이후 쌓아 올린 군공은 실로 혁혁했다.
실제로 황제도 그를 인정했기에 제국 최강의 함선인 특무함 사령관으로 임명했겠거니 생각하고 있던 궁중백이었다.
그러나 북부로의 파견 이후, 헬리오스 황제는 그가 화폐개혁을 주도했다고 소문을 흘려 모든 귀족의 칼날이 그를 향하도록 했다.
이는 어지간한 귀족이 감당할 수 없는 압박이며 특히 자신의 기반이 전무한 북부에서 활동하는 존 메이어에겐 엄청난 시련이 되리란 걸 황제가 모를 리 없었다.
공동 바깥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함께 오르자 황제가 말하였다.
“존 메이어란 사내의 능력은 어떠해 보이던가.”
“훌륭했습니다. 제가 보았던 그 나이대의 젊은 장교 중에선 가히 으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내에게 괜한 일을 한 것 같아 신경 쓰이는가?”
“조금은 그렇습니다.”
로만은 존 메이어가 이 어려운 시기에 제국에 닥친 위기를 해결할 만한 몇 안 되는 인재이지만 이번 일은 제국에 대한 그의 충심을 흔들리게 만들 수도 있는 중대한 사항이라고 생각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자 황제가 답했다.
“그것이 내가 원했던 것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가 내 밑에서 시중을 든 지 얼마나 됐지?”
“삼십오 년이옵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그렇습니다. 폐하.”
“내가 황위에 오른 지도 어느덧 사백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자의 기량은 분명 훌륭하나 나는 그 같은 자질을 지닌 장교를 몇 명 더 보아왔다. 그들 대다수는 죽는 날까지 제국에 충성을 바쳤지.”
“존 소장도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폐하.”
“사람의 성정은 각기 다르다. 앞서 지나간 젊은 천재들이 내게 충성을 바쳤다 한들 그것이 그자의 앞날을 보장하진 않는다. 게다가 지금은 그 시절과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
“무엇이옵니까.”
“나다. 나라는 존재 말이다.”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눈을 깜빡이는 궁중백에게 황제가 덧붙였다.
“나는 곧 죽을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황제에 깜짝 놀란 로만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앞으로 수백 년은 더 거뜬히 사실 것이라 그의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그러나 황제는 이것이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반드시 일어나게 될 일이며 제국이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을 경고했다.
“나의 사후, 제국은 큰 혼란에 빠질 터. 누가 젊은 황제를 위해 충성을 다할 것인지는 지금 알 수 없는 일이다.”
“후계를… 정하셨습니까?”
“자리는 아딘에게 물려줄 것이다.”
아딘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궁중백은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아딘은 황제의 손자로 마흔여섯 번째 공주인 디아나에게서 난 핏줄이었다.
장차 제국을 위해 큰일을 하게 될 것이라며 학사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는 인재였으므로 그가 외손주라는 사실은 황위를 물려받는 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나 중요한 건 그의 나이가 불과 일곱 살밖에 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수백 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제국을 다스린 헬리오스 황제는 백 명이 넘는 자녀가 있었고 손자까지 헤아리면 수백 명에 달하는 핏줄을 두었다.
다시 말해 후계 자격이 주어지는 후보가 그만큼 많다는 뜻인데 아딘은 나이도 너무 어렸고 물 밑에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해 온 다른 황족과 비교하면 그 힘이 약하기 그지없었다.
궁중백은 설령 황제가 어린 손주를 정식 후계자로 발표한다 한들 그의 사후엔 제국이 한바탕 홍역을 치를 것임을 예견했다.
“그 날이 오면 자네는 내 뜻에 따르겠는가?”
“물론입니다. 폐하. 소신, 어떠한 일이 있어도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존 메이어도 그러하겠는가?”
“…….”
로만은 쉬이 답하지 못했다.
어려운 문제였다.
제국이 다시 사분오열하여 황위를 계승하겠다고 서로 싸우기 시작하면 능력 있는 젊은 영웅에게 손을 잡자고 제안하는 자들도 그만큼 늘어날 터였다.
비단 존 메이어뿐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계급이 높은 중장이나 대장급 장성들, 더 나아가 원수들까지도 황위를 둘러싼 계승 전쟁에 휘말리게 될 것이 분명했다.
선뜻 답하지 못하는 궁중백을 보며 황제가 말하였다.
“이번 일을 견디고 그자가 제국과 나에 대한 충성심이 변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를 대원수로 끌어올릴 것이다.”
“폐하. 그것은….”
위구를 지키며 황성의 중앙군을 총괄하는 대원수는 제국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부여받는 장군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자리에 이제 겨우 스물여섯이 된 이를 논하는 것은 아무리 재능이 출중하다 하여도 엄청난 파격임엔 분명했다.
“다른 장군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이옵니다.”
“그들의 반발이 중요한 게 아니다. 향후 제국은 커다란 혼란에 휩싸일 터, 이 위기를 헤쳐 나가자면 번뜩이는 녀석들의 힘이 필요한 법이다.”
황제는 황손 중 가장 자질이 뛰어난 아딘이 황위를 계승하고 존 메이어가 대원수로 충성한다면 앞으로 제국의 이름이 최소 300년은 더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시험을 통과한 존 메이어가, 어린 황제가 힘을 키울 동안만 곁을 지키면 이 땅의 힘이 유지될 거라고 말이다.
“그럼 만약 그가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다른 마음을 품으면 어찌 되는 것이옵니까?”
“그럼 그땐 다른 후보를 찾을 뿐이다. 늘 그러했듯이 말이다.”
* * *
공장에 보호막을 설치한 지도 어느덧 보름의 시간이 흘렀다.
지금 세르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빛을 번쩍이며 공장을 돌리고 있었는데 한쪽에선 전투함을 녹여 나온 쇳물을 모아 신형 전투함의 틀을 잡았고 다른 쪽에선 이 신형함에 실릴 전투기와 미사일을 생산 중이었다.
그리하여 공장을 돌리는 인력과 정밀기계를 다루는 오크들, 전략 자산을 연구하는 연구팀을 제외하면 상당히 한가로운 때를 보내고 있었다.
특히 격전을 치렀던 조종사나 관제 장교들, 함장들은 보기 드물게 여유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는 내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몸이 두 개였으면 좋겠다.
공녀가 연구하던 적 생체전투함 뇌파 간섭 시험을 돕던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치료마법 설계를 마친 이후에도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생활을 이어갔다.
그냥 가만히 앉아 시간을 죽이기엔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당장 공녀의 연구를 돕는 것도 그렇고 한 달 넘는 시간이면 전투기나 전투함의 성능을 끌어올릴 수 있는 신형칩 개조를 시도해 볼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연구에 매달릴수록 몸은 더 피곤해졌지만 그만큼 향후 전투에서의 승률은 더 높아질 것이고 지옥이 될 북부 전장을 견인하려면 지금은 그저 앞만 보고 달려야 할 때였다.
‘그래도 다행인 건 능력 있는 사람들을 많이 모았다는 거지.’
남부 전쟁을 통해 연이 닿았던 연구원들.
그리고 북부 전선에서 이곳으로 모인 장교들까지.
지금 내 곁엔 믿고 연구를 맡길 수 있는 인재들이 차고 넘쳤다.
애초 연구 특기로 고위 영관 계급을 단 이들은 전부 이 시대의 천재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내가 한때 실리콘밸리의 젊은 천재라 불리었던 것처럼 이들도 그에 못지않은 출중한 자질을 갖추고 있던 것.
그러니 기술 개발의 초반부 연구를 맡기는 데는 이만한 인재가 따로 없었다.
다만 마법 역량의 부족으로 후반부 연구는 온전히 내가 힘을 실어야 했지만 말이다.
신형함에 들어갈 칩을 설계하던 나를 지켜보던 진은 이제 기초가 제법 탄탄해진 것 같다며 마법 관련으로는 드물게 나를 칭찬했다.
‘기초를 잡았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되는 거 아니야?’
마법은 깊이 알수록 무한한 힘을 지니게 되는 학문.
기초를 넘어 심화 학습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질문에 진은 아직 때가 아니란 답변을 내놓았다.
-존, 마법의 기초가 뭐라고 생각해.
‘룬 문자를 제대로 외우고 그 효과를 용도에 맞게 다룰 줄 아는 것 아니야?’
-맞다. 그런데 그 문자라는 것이 말이다. 심화 단계에 들어가면 특별한 계기 없이 네게 알려줄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거든.
고차원의 존재들이 만들었다는 룬 문자.
진은 그중 위력이 강한 것들은 특별한 인연이 있어야지만 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진은 마법의 정령이기에 그 문자들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지만, 아무 계기가 없는 내게 그것을 전수해 줄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신기하네. 원리가 뭐야?’
-비밀 엄수 같은 거지. 프로텍터가 걸려있어서 함부로 비밀을 들여다보려 하면 전조도 없이… 가는 거야.
‘죽는다고?’
-그래.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의문이 들었지만 진의 말이 틀릴 리는 없었다.
‘그 정도면 사실상 암살 도구 아니야? 거 재수 없는 놈한테 문자 하나 보여주면 골로 가겠구만.’
-보여준 놈도 함께 가겠지.
‘…….’
조금 들은 것만으로도 상당히 위험한 힘인 것은 분명했다.
그렇지만 그 위험 영역에 관해 상당한 관심이 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마법이란 학문을 조금이라도 익힌 자들이라면 분명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 인간을 초월한, 초인이 되게끔 만들어주는 힘을 싫어할 만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게다가 고작 스물두 살 망나니 몸에 들어와 이만한 업적을 일굴 수 있었던 것 또한 마법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으니 앞으로도 평생 마법을 익히고 연구하는 건 내게 있어 정해진 운명과도 같았다.
그리 생각한 나는 피곤한 눈을 비비며 기력 회복을 입에 담았다.
“기력 회복.”
에너지를 활성화하는 룬 문자의 영향력이 나를 감싸고, 언제 그랬냐는 듯 씻은 듯 피로가 사라졌다.
그렇게 나는 다시 멀쩡한 정신으로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던 진은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졸리면 잠을 자라! 등가교환 모르냐고 등가교환!
진은 기초 마법은 엄연히 한계가 존재한다며 이렇게 기력을 회복해 봐야 후폭풍으로 한 번에 몰아서 후유증이 찾아올 거라 경고했다.
물론 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연구란 것은 무릇 흐름이 중요한 법, 지금 머릿속에 간질거리는 이 영감을 시간 낭비 없이 끄집어내려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래. 이거지. 바로 답이 나오잖아.’
-에휴.
‘연산 속도 10퍼센트 향상이 우스워?’
-아니, 10퍼센트고 나발이고 좀 잠을 자라고….
‘응~ 잠은 몰아서 자면 그만이야.’
막혔던 전투기 회로 설계가 해결되자 나는 손가락을 튕기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 맛이었다.
막힘없이 풀로 시간을 때려 박을 수 있는 능력.
이것 때문에라도 나는 평생 마법을 손에서 놓을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 * *
존 메이어가 열심히 북부군의 무기 체계 수준을 개조하고 있을 무렵, 베르데 안쪽으로의 북부 내륙은 말 그대로 초비상 상황이었다.
“융합로 성능 70퍼센트 다운! 사실상 한계입니다!”
“대공 방어 능력도 완전히 마비됐습니다!”
“젠장! 지원군은 대체 뭘 하는 건가!”
절망에 찬 사령관의 비명.
그러나 오퍼레이터는 끝내 함장이 원하는 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사방으로 쏟아지는 산성탄에 전함이 흔들리며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1… 1, 2사단 전멸입니다. 사령관님. 사방이 적입니다….”
새빨갛다 못해 붉게 칠해진 레이더 스크린.
물경 수십만 척에 이르는 어비스데몬의 주력군이 수백만 대의 전투기를 쏟아내며 일대를 불꽃으로 물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