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
항성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거대한 불의 파도가 북부 우주 일부를 덮치기 시작했다.
이 항성풍이란 것은 위력이 항성에 따라 제각각인지라 어떤 것은 대륙 면적에 달하는 범위에 EMP탄이 터지는 정도로 그치지만 위험한 것은 지표를 불의 파도로 바싹 구워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러한 대재앙은 5년이나 10년 주기로 북부를 덮쳤는데 시민들은 꼼짝없이 집안에 틀어박혀 두 달간 버티거나 그보다 심한 경우엔 지하 깊숙한 곳의 공용 대피소로 이동해 배급 생활로 어려움을 견디곤 했다.
세르톤은 이 중에 후자에 속했다.
물자도 자본도 넉넉지 않은 상황, 주머니가 얄팍한 시민들은 다들 군이 나누어주는 배급 물품만 바라보며 이 혹독한 어둠을 버티는 수밖에는 없었다.
“차례를 지켜 줄을 서십시오.”
도시 지하의 한 벙커.
천오백 명이 몸을 피신한 이곳에 병사들이 국자로 건져 올린 스프를 빵과 함께 나눠주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줄을 늘어선 사람들.
벙커의 조명은 천오백 명이 생활하는 공간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둡고 우울했다.
세르톤을 스치는 항성풍의 영향이 강한 탓에 시스템 보호 차원에서 전력을 제한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광경을 행성 전역의 벙커에서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두 달을 버텨야 한다니,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도 상당히 늘어날 것 같군요.”
“이건 양반이지. 아직도 미처 대피하지 못한 전선 행성에선 이때마다 시민이 수십만 명씩 굶어 죽어.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먹는 지옥을 한 번이라도 보면 나는 운이 좋았다고 하게 되지.”
극히 우울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한 세릴다 중장은 나와 함께 벙커 위쪽, 땅 밖으로 나섰다.
하늘엔 일렁이는 불꽃이 은하수를 이루는 대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멀리서 보기엔 매우 멋있지만, 저기 휩쓸리는 순간 순양함이고 전함이고 남아나지 않을 무서운 폭풍이란 점은 분명했다.
열기로 녹아내릴 듯 이글거리는 도로.
보호복을 입은 우리는 특수 차량을 타고 공장으로 이동했다.
북부의 공장들 상당수는 이러한 항성풍 기간에 장비가 고장나지 않도록 차폐 시스템을 마련해둔 곳이 많았다.
그건 세르톤도 마찬가지였는데 북부 최대의 산업단지 중 하나였던 이곳은 항성풍 기간에도 무려 3할에 달하는 공장을 바깥 상황과 관계없이 가동할 수 있었다.
나와 세릴다 중장이 탄 차량이 제일 먼저 공장 앞에 도착하고, 뒤를 이어 다른 장성들이 탄 차량도 하나둘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본래 방어지역을 이탈해 세르톤에 합류한 함장들로 중장처럼 북부군 수뇌부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이었다.
-북부에 의인이 아직 이렇게나 남아있었군.
진의 말대로였다.
이들이 퇴각 명령을 받지 못하고 죽을 뻔했던 이유는 단 하나.
이들의 평소 소신과 청렴함이 부패한 수뇌부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북부에서 얼마 남지 않은, 양심적이며 믿을 수 있는 아군인 셈이었다.
세릴다 중장을 필두로 모여든 장성이 보유하고 있던 전투함 규모는 모두 합해 3400여 척 규모.
기존에 내가 지휘했던 600여 척의 전투함을 합치면 무려 4천여 척이라는 대규모 선단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저 고물들을 전장에서 나란히 세워야 한다는 게 가슴 아픈 일이긴 하지만.
문제는 전투함들이 너무 낡고 노후화되었다는 것.
북부의 사정이 워낙 열악했으니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왜 그동안 전선의 북부군이 믹서기처럼 갈려 나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진의 말에 따르면 이건 함선이 아니라 걸어 다니는 고물이라는 평이었고 그의 말엔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그리하여 이번에 합류한 장성들을 모아놓고 회의하는 자리에서 나는 그들에게 과감한 제안을 건넸다.
“그게 무슨 소리요. 사령관.”
“함선을 해체하자니.”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지금 저희는 완벽하게 고립됐습니다. 수뇌부의 지원은 기대할 수 없고 항성풍이 끝나면 사방이 온통 적일 테니까요.”
나는 바닥을 친 북부군 전력을 조금이나마 끌어올리고자 구형 함선 상당수를 플라즈마 용광로에 넣어 다시 형성하는 작업을 제안한 것이다.
“그게 가능하겠소?”
“함선을 녹인다고 새 함선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소.”
장군들이 의문을 제기했다.
저들 말마따나 기존의 함선을 녹인다고 다시 새 함선을 만들 수 있는 광물을 온전히 손에 넣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특히 블루옵테늄의 경우 한번 형성 과정이 끝나면 녹았을 때 그 성질이 완전히 변해버리기 때문에 최소한 이를 포함한 몇몇 광물은 새로 구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사령관도 잘 아시겠지만 이미 북부는 만신창이요.”
“신형 함선을 제조할만한 광물을 수급해올 만한 광산을 모조리 빼앗겨버리고 말았지요.”
북부의 전선이 계속해서 뒤로 밀리는 이유.
그것은 북부의 심장이라 할 수 있던 자원 산지를 거의 다 빼앗긴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쉴 새 없이 공장을 돌리고, 신형 함선과 전투기를 찍어내도 싸움이 될까 말까 한데 이미 수십 년째 전투함을 고치고 또 고쳐서 전장에 나섰으니 말이다.
반면 어비스데몬은 제국의 전투력을 경험하며 조금씩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상황이었다.
조금 더 빠른, 조금 더 화력이 강한 생체전투함이 계속해서 전장에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한쪽은 수백년 된 고물 함선을 기워가며 전투하고, 한쪽은 매일 같이 진화를 거듭하는 적.
싸움의 결과야 뻔한 일이었다.
“그럼 이대로 가만히 패배를 기다리시겠습니까? 자료를 공유해 드린 대로 이미 어비스데몬은 이미 신형 전투함에 준하는 개체를 전선에 풀었습니다. 항성풍이 풀리고, 다시 전투를 치른다 한들 아군의 피해는 상상 이상일 겁니다.”
“그럼 일단 용광로를 돌리면 다시 전투함을 뽑아낼 수 있다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확답을 건네자 장군들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는 반응을 보였다.
전투함 합금 생성에 최우선으로 필요한 광물은 블루옵테늄이다.
이것은 지난 수천 년간 제국 전투함 공정에서 변한 적이 없는 진리였다.
그러나 이미 북부에선 블루옵테늄이 씨가 마르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장군들은 이 점을 걱정했고 나는 그에 대한 해답으로 완전히 새로운 타입의 전투함을 굴릴 것이라 답했다.
“새로운···전투함입니까?”
“블루옵테늄이 있다면 좀 더 수월하게 강도 높은 전투함을 만들 수 있겠지만 그건 우리 역량 밖의 일입니다. 광산이 모두 적의 수중에 있으니 말이죠. 그렇기에 저는 블루 옵테늄의 소모를 최소한으로 하여 전투함을 건조할 생각입니다.”
블루옵테늄이 들어가지 않은 전투함이라니.
장성들은 물론이고 이 자리에서 나를 가장 신뢰하는 세릴다 중장조차 그게 가능한가 싶은 반응을 보였다.
“블루옵테늄이 빠진 합금은 주포전이 벌어졌을 때 내구도가 지나치게 약할 텐데···괜찮겠나?”
“괜찮습니다. 아무리 계산을 해도 지금의 함선을 전장에 세우는 것보단 낫습니다.”
그리 말한 나는 뉴타입, 신형 전투함의 설계도를 펼쳐 보였다.
“코어급 전투함입니다. 기존 전투함보다 실드와 마력벽 생성에 중점을 둔 함선입니다.”
실드 강화형 전투함.
그 설계를 본 장성들은 이게 가능한 일이냐며 저마다 수군거렸다.
개요는 간단했다.
본래의 제국 전투함은 실드가 뚫렸을 경우, 합금의 단단함으로 후폭풍을 견디는 방식이었는데 코어급 전투함은 실드 출력을 끌어올려 애초에 실드가 뚫릴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설계가 가능합니까?”
“가능합니다. 충분한 양의 블루 코어와, 미카엘 스톤만 있다면 말이죠.”
내가 두 가지 광물을 언급하자 군수 기업 쪽 생리를 잘 아는 일부 장성은 아! 소릴 내었다.
두 광물 모두 대단위 마력과 고출력 실드 형성에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광물은 1차 화물선을 끌어오며 엄청난 양을 비축해둔 상태였다.
누구나 주인이 되고 싶어하는 신 남부지역 최고의 행성, VV5610.
반란 진압의 공로로 남부 평의회가 내게 반쯤 확정 지어준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 황금의 땅에서 가장 많이 채굴할 수 있는 자원이 바로 이 두 광물이었기 때문이다.
“새로 함선을 건조하면 주포 사거리도 늘어날 테고 실드가 직접 타격받을 만한 일이 더욱 줄어들 겁니다.”
“하지만 전투기 교전도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란 이야기가 있듯이, 신형 전투함엔 신형 전투기를 탑재할 겁니다.”
이미 파이어플라이급 전투기의 역설계 모델, 이클립스형 전투기가 각 공장의 라인에서 조립 중인 상황이었다.
내 말대로만 된다면 전투함을 새로 건조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는지 장성들은 박수를 치며 화답했다.
그때였다.
세릴다 중장이 다시 한번 의문을 제기했다.
항성풍으로 인해 공장을 삼 분의 일밖에 가동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대규모 작업을 전부 두 달 만에 해낼 수 있겠냐는 물음이었다.
“구형 전투함을 녹이겠다면 그 숫자는 적어도 천여 척 이상. 여기에 신형 전투기 제조까지 겸하면서 전투함 건조가 가능하겠냐는 이야기네.”
“가능하도록 해야겠지요.”
“비책이 있다는 말로 들리는군.”
“한 명이 도와준다면 가능합니다.”
“한 명···?”
항성풍이 부는 동안 함대 전력을 업그레이드하는 일은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이런 중차대한 문제를 연구팀이나 어떤 단체도 아닌, 단 한 명이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모두가 조금 놀란 모습이었다.
세릴다 중장은 대체 그게 누구냐고 물었고 나는 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세리스 공녀님입니다.”
*
세르톤의 저녁.
항성으로부터 뿜어진 자기장이 행성 자기장과 충돌하여 하늘에 오로라가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의 눈엔 그저 아름답기만 한 광경일 테지만 항성풍의 세기가 더 세지는 순간 지표면까지 여파가 뚫고 내려와 대참극이 벌어질 거란 걸 아는 어른들은 저 눈부신 오로라를 마냥 편하게 감상할 수 없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뭘 해달라고?”
“방어막 전개를 도와주십시오. 공장을 추가로 가동해야 합니다.”
“지금 나랑 장난해?”
“저는 무척 진지합니다.”
마력 염료가 담긴 통과 칠을 하기 위한 붓.
그것을 한데 묶어 나는 공녀에게 건네듯 팔을 뻗고 있었다.
이 상황이 황당했던 공녀는 당연히 그것들을 받지 않은 채 팔짱을 끼고 있었고 말이다.
“참 내, 한밤중에 불러내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했더니 고작 한다는 게 나보고 잡일을 하라는 거야?”
“잡일이라니요. 우리 군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일입니다.”
“됐어. 나 안 할 거야.”
“공녀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북부에서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한 번만 도와주시지요.”
이건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닌 엄연한 사실이었다.
항성풍의 영향에서 벗어나 세르톤의 공장 가동 개수를 더 늘리는 작업.
이는 블루코어에 마력을 박아 도시 규모로 설치한 마법진에 의해 발동되는 실드로 도시를 완벽하게 보호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개념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제법 실력 있는 마법사라면 시간을 들여 누구나 시도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다만 시간 내에, 최대한 빨리 공장 가동을 위해선 이 압도적 규모의 마법진 설치를 빠르게 끝마칠 수 있어야 했는데 그에 필요한 전제 조건은 바로 마르지 않는 마력이었다.
마법진을 돌리기 위해 처음 필요한 마력을 블루 코어에 저장하는 것도.
마력을 부어가며 공장 지붕과 도시 곳곳에 룬문자를 새기는 것도.
전부 마법사가 심혈을 기울여가며 해야하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나 혼자서는 불가능했다.
지난번 우주 전투에서, 통로를 막고 있던 어비스데몬의 소형 개체를 처리하기 위해 중력장 마법을 연거푸 펼친 영향으로 나는 며칠간 옅은 근육통을 맛봤다.
우주의 수많은 마력 종족 중 인간은 고작 그 정도 위치였다.
진의 도움을 받아 누구보다 빨리 지식을 깨우치고 최선의 수련법으로 연마를 했음에도, 아직 괴물 몇 마리 잡으면 몸이 쑤시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공녀는 달랐다.
그녀는 제국 최강의 마력 생물인 드래곤이었다.
내가 백수십 일에 걸쳐서 해야 할 일을 그녀는 불과 며칠이면 해치울 수 있었다.
물론 공녀 성격에 잠도 안 자고 남의 일을 위해 며칠 밤낮을 돕는다는 게 절대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뭘 착각하는 모양인데. 난 지금 당장이라도 네 목덜미 붙잡고 중앙으로 돌아가도 상관없어. 알아? 그러니 자꾸 멋대로 날 이용하려고 들지 말란 말이야! 그리고 애초에 너! 마법진 완성을 돕겠다고 해놓고서 지금까지 진척된 게 하나도 없잖아! 양심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공녀님. 그 점에 대해서는 저도 무척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폐하의 명령을 어기면 저는 그보다 더 나쁜 꼴을 당할 겁니다.”
나는 중앙 특무함 사령관이며 황제의 명령을 들을 수밖에 없는 약자다.
그 점을 적극 어필하자 그녀는 이마에 손을 짚으며 콧잔등에 주름을 세웠다.
한참 뒤, 한숨을 내쉰 그녀가 내게 물었다.
“도와주면 뭘 해줄 건데. 미리 말해두지만, 이번엔 말로만 하는 약속은 받지 않겠어.”
북부로 넘어와 지내는 동안 보여준 성과가 없었던 탓인지 나에 대한 그녀의 신뢰도는 더 내려갈 곳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 따라 나는 미리 생각해두었던 해결책을 그녀에게 제안했다.
“저는 지금부터 집무실로 돌아가 마법진 개발에만 전념하도록 하겠습니다. 구체적인 개선안이 마련되거든 그때 제 부탁을 들어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내가 맘에 들만한 결과를 가져와 보겠다?”
“그렇습니다.”
공녀는 내 마법적 재능과 통찰력이 인간치고는 우수하다는 것을 인정했으나 그렇다고 해도 단기간에 개선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되리라곤 생각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랬다간 항성풍 기간이 다 끝날지도 모른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시간이 다 지나버리면?”
“그 전에 결과물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