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총알받이라니.
황제는 날 신뢰하고 있던 게 아니었나?
내게 마법을 걸며 충성심을 시험했을 때, 나는 잘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함정에 빠트릴 이유가 없었으니까.
게다가 이건 상당히 독한 함정이었다.
특히 부패가 심각했던 북부에선 이번 일을 주도했다는 게 나라고 알려지면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불 보듯 뻔했다.
당장 행성을 구해달라며 거금을 제안했던 영주들부터 등을 돌리고 내 목숨을 위협할 가능성이 컸다.
해적을 소탕하기 위해 애썼던 정의로운 장교들이 목숨을 잃었던 것처럼 말이다.
‘앞으론 먹을 것도 조심해야겠군.’
독살까지 염려해야 하는 상황 속에 나는 최대한 이번 일을 조용히 처리하고 싶었지만 공녀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그녀는 내가 위기에 처했다며 만나는 장교마다 떠들고 다녔고 사령관이 검은 피를 꾸엑 쏟아내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주변에 호위를 강화하라며 일을 키웠다.
날 걱정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고도의 엿을 먹이려고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후로 내 주변엔 어딜 가든 항상 호위 병력이 붙게 되었다.
그중엔 특수전을 상정하고 각종 침투, 대인전 훈련을 준비 중이던 크릭의 정예 요원들이 있었다.
진저는 크릭용의 작은 권총을 보이지 않게 소지하고 내 곁에 붙어 다녔는데 모르는 일반인이 보면 나는 진저와 같이 동네 산책 나온 사람으로 보일 정도였다.
카린 또한 이번 일을 두고 폐하가 그러실 줄은 몰랐다며 자신이 직접 호위를 맡겠다고 자처하고 나섰다.
황제의 근위기사를 도맡았던 그녀였기에 이는 더할 나위 없는 방패가 되었다.
물론 그녀에겐 그라프 파일럿이란 임무가 있었고 한번은 일반 호위로도 충분하니 가서 일을 보라고 한 적도 있지만 그녀는 위험이 해제되기 전까진 절대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며 강하게 자기 의견을 주장했다.
이렇듯 삽시간에 불안한 분위기가 조성됐지만 좋은 점도 하나쯤은 있었다.
바로 시민의 압도적인 지지였다.
나를 미워하는 것은 돈을 잃게 된 영주들.
하지만 오랜 부패와 가난에 시달리던 시민들은 나를 정의를 실현한 젊은 영웅으로 치켜세웠다.
거리에서 노는 아이들.
부모를 따라 집을 잃고 이 공장 행성에 몸을 의탁한 아이들은 내 이름을 외치며 떠드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내가 탄 차량이 도로를 지날 때마다 열렬히 손을 흔드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황제의 진짜 의도가 궁금해졌다.
이번 사건은 평범한 장교라면 충분히 충성심이 흔들릴 법한 일이었다.
아무리 특무함 사령관이라고 해도 수많은 귀족의 분노를 홀로 감당할 순 없었다.
그런 게 가능한 인물은 이 제국에서 오직 황제뿐이다.
그러니 제국을 위해 누군가 바른 소리와 의견을 내면 황제가 보호를 해주는 그림이 나와야 했다.
충언을 올리기 위해 매번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그 누가 제국을 위해 충성하겠는가.
‘제국에 나만 한 인물은 많으니 배신할 테면 해보라 이건가?’
-황제의 속내는 정말이지 짐작하기 어렵군. 그냥 확 배신해버릴까?
‘아직은.’
이유야 어찌 됐건 당장 등을 돌리고 맡은 바 임무에서 소홀히 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이곳에서 약자였다.
황제에게도, 귀족에게도 모두 등을 돌리고 살아남긴 정말로 쉽지 않았다.
적어도 남부로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만이라도, 좀 더 버텨야 한단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
26년 1월 13일.
항성풍 1차 기간의 마지막 작전이 시작됐다.
이 1차 기간이란 아직 전투함이 우주를 항해할 수 있는 시기로 이미 일대는 전투를 하기 쉽지 않은 형태로 달아올라 있었다.
전투함이야 버틸 수 있지만 일반 전투기는 항성풍이 불시에 불어닥치면 순식간에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위험한 상황.
그럼에도 나는 전함을 이끌고 출격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지난 연패로 인해 드디어 세르톤을 중심으로 한 성계에 어비스데몬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탓이다.
적의 규모가 늘고 있었다.
화폐개혁과 관련해 나를 둘러싼 소문으로 이시오 백작을 비롯한 영주 무리는 최근 연락을 해오지 않았으나, 다시 자치령 방어가 위태로워지자 다급히 나를 찾았다.
<존 메이어 사령관. 당신이 우리 주머닐 거덜 낸 건 잊어버리겠소. 그러니 약속대로 자치령을 지켜주시오. 그럼 우리 관계는 그것으로 끝날 거요.>
-뻔뻔스럽긴, 지들이 잘못해놓고선!
나쁜 놈들이 돈 좀 잃었다고 착해지면 북방의 부패가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을 거다.
영주들에게선 반성의 기미를 찾기 어려웠다.
그저 돈을 잃어 분노한 귀족만 남았을 뿐.
하지만 그들은 그간 마련한 신규 화폐로 내게 약속했던 금액 일부를 전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성의를 표했다.
나에 대한 분노를 잠시 눌러둘 수 있을 만큼 자치령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절실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손에 들어온 금액은 5천억 크레딧.
구화폐로 계산하면 500조 크레딧에 이르는 막대한 돈이었다.
어차피 이 돈이 아니었더라도 공녀의 연구를 위해서라면 한 차례 더 전투에 나섰어야 했지만 말이다.
“항성풍 폭발의 위험 확률은?”
“1시간 이내 폭발할 확률이 50퍼센트를 넘겼습니다.”
“전투기 출격은 최대한 자제한다.”
“예!”
일대에 항성풍이 휘몰아칠 확률이 5할을 넘긴 상황.
몰려오는 폭풍 속에 모든 전투기가 무사히 긴급 착륙을 할 수 없을 테니 이번 전투는 다소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주포 사격을 중심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전장은 지난번에도 전투를 치렀던 아그니Ⅲ.
이시오 백작의 자치령을 뒤에 두고 우리는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주포 충전 상태! 양호!”
언제든 발사 명령을 내려도 좋다는 신호에 따라 나는 조금씩 라인을 올리기 시작했다.
<적 전투함 포착.>
<각 함급이 다수 섞여 있으며 그 숫자는 500척이 넘습니다.>
어비스데몬의 전투함 500척.
이는 세르톤 방어를 위해 집결한 650척의 연방군 전투함 규모에 필적하는 것이었다.
물론 주포 사거리만 놓고 보면 아군이 월등하다곤 하나 이번 전투는 전투기를 자유자재로 쓸 수 없다는 제약이 존재했다.
<특이 사항 보고! 적 외피의 색이 지난번과 조금 다릅니다.>
“어떻게 다르다는 것인가. 좀 더 자세히 보고해주길 바란다.”
정찰 전투기 조종사가 보내오는 통신에 오퍼레이터가 정확한 보고를 요청했다.
<좀 더 검습니다. 짙은 먹빛에 가깝습니다.>
외피의 색 변화는 놈들이 생명체 형태의 전투함이었기에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사람도 인종마다 피부색이 조금씩 다르고 머리칼이나 손발 크기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이번 전투가 조금은 힘들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적 선두 거리 1600! 적 전함급 대형함 다수 포착! 숫자 100척 이상입니다!”
-상황이 좋지 않군.
적들의 숫자는 우리보다 적었으나 전함급의 비중이 예상보다 훨씬 높았다.
일반적으로 연방군의 전함 비중은 5퍼센트.
전함 한 척당 호위함을 비롯한 수행함은 열아홉 척 정도가 된다.
지금 자치령 방어를 위해 진형을 구축한 아군함 650척 중에도 전함은 서른여섯 척뿐이었다.
그런데 적 전함 숫자는 100여 척 이상.
이는 화력에서 우리가 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나마 앞서는 주포전에서 승기를 거머쥐어야 한다고 판단한 나는 재빨리 명령을 내렸고 가장 사거리가 긴 엔터프라이즈호의 포문을 열었다.
-본때를 보여주마. 럭비공 놈들아!
엔터프라이즈의 주포 덮개가 열리고, 푸른 빛과 함께 충전이 시작되자 최근 합류한 북방군 함장들의 놀란 기색이 전해져왔다.
그도 그럴게 지금 적과의 거리는 무려 1600이나 되었다.
이는 중앙제 전함조차도 아직 닿지 않는 교전 거리.
그러나 특무함 엔터프라이즈호는 달랐다.
엔터프라이즈호는 중앙의 최신 특수 전함 답게 처음부터 주포 사거리 1400이란 대단한 스펙을 자랑했고 이는 진과의 개조 이후 무려 1800이란 거리를 손에 넣는 결과로 이어졌다.
각 방면 원수들에게만 지급되는 초중전함의 주포 사거리가 1600이란 점을 고려하면 말도 안 되는 힘을 손에 넣은 셈이었다.
우린 처음부터 적을 1800거리에서 공격할 수 있었지만 이제야 공격을 시도하는 건 좀 더 목표에 유효한 타격을 넣기 위함이었다.
전투함의 주포는 결국 열량 병기.
최대 사거리에 맞춰 적을 타격하면 그 위력은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충분한 위력을 실을 수 있는 거리에 적이 들어온 상황이었다.
“주포 발사!”
발사 신호를 내림과 동시에 엔터프라이즈호의 푸른 섬광이 우주를 갈랐다.
그리고 이어진 거대한 폭발.
공격을 정통으로 맞은 적 전함이 관통당하며 체액을 토해내더니 삽시간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공격 명중! 적함 움직이지 않습니다!”
공격 성공을 확인한 순간 함교엔 환호성이 가득했다.
주포 사격 한 번으로 적 주력함인 전함급을 잡아내었으니 말이다.
“좋아하긴 이르다. 재충전을 시작하라.”
“예? 하지만 아직 포신을 냉각해야···.”
“포신 과열은 전함의 폭발로도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전함 엔터프라이즈호의 함교는 크고 넓다.
당연히 남부 인원뿐만 아니라 중앙의 인원도 섞였는데 이들은 전함의 주포를 연속으로 사용하는 것을 두고 극도로 경계했다.
위력이 강한 만큼 전함에 오는 데미지가 훨씬 심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허나 이들은 이번 엔터프라이즈호의 개조가 화력 증대나 사거리가 아닌, 안정성에 가장 큰 중점을 두고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를 터였다.
만약 안정성을 배제하고 사거리 증가에만 집중했다면 지금도 최대 사거리 2천을 돌파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몸을 찬양하라! 연방의 우매한 기술자들아!
잔뜩 신이 난 진.
진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충분했다.
마법의 강화로 이루어낸 포신 안정성의 강화는 기술자들이 보기엔 기적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게다가 진의 지식을 물려받아 그 작업을 실행한 건 바로 나였다.
지금 내겐 특무함의 주포를 수차례 급속사격한다 해도 결코 붕괴까지 이어지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나를 믿고 따라라! 적이 접근하기 전에 전함을 한 대 더 격추할 것이다.”
“예!”
나와 오랫동안 함께 일한 이들이 군말 없이 주포 냉각을 시도, 재충전 작업에 들어가자 중앙 장교들은 얼굴색이 흙빛이 되었다.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사령관이 군공에 눈이 멀어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고 그리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전투함의 주포의 연속 사격은 우주전 교범에서 엄히 다루는 부분이었다.
오히려 주포 출력이 작은 구축함이나 순양함까진 연속 사격에 걸리는 지연 시간이 짧았지만 전함은 달랐다.
전함의 강력한 출력을 아직 무기 내구도 개발 분야가 온전히 받쳐주질 못하기 때문이었다.
최대 사거리, 최대 출력으로 주포 사격을 시전한 전함은 추가 사격이 필요한 경우 최소 90초 이상의 냉각 대기 시간이 필요했다.
그만큼 강한 위력을 지닌 것이 바로 제국 최강의 전략 병기, 전함급 주포였다.
그러나 안정성 향상에 집중한 엔터프라이즈호는 그야말로 우주의 성채.
소모성 블루코어 팩에서 마력을 받아 활성화된 냉각 마법이 포신을 정상 컨디션으로 돌리고, 융합로에서부터 뿜어진 에너지가 다시금 포문에 푸른 빛을 번뜩였다.
“발사하라!”
“주포 발사!”
눈 깜짝할 사이에 이어진 연속 주포 사격.
당황한 어비스데몬의 소형함들이 부리나케 포격을 피해 흩어지기 시작했는데 어차피 우리의 목표는 적 전함급이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적 전함이 다시 한번 불을 토하며 머리부터 쪼개졌다.
그리고 놈들의 움직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전함이 백 척이 넘게 있어도 이렇게 허무하게 쪼개지기 시작하면 삽시간에 전멸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어비스데몬의 전투함이 속력을 높이는 가운데 나는 재차 함교에 명령했다.
“주포를 발사할 것이다! 재장전 준비하라!”
“예···? 예! 재장전 준비!”
이번에는 노련한 매티스도 잠시 말을 더듬었다.
주포 급속 사격은 정말 어찌할 수 없는 경우, 전투함 붕괴를 각오하고 시도하는 법이지만 지금은 그런 대위기 상황도 아니었다.
하물며 이미 1600 사거리에 달하는 초장거리 사격을 두 번이나 한 상황.
그런데 다시 재사격을 명했으니 함교의 술렁임이 극에 달할 만도 했다.
“모두 명령을 이행하라! 사령관님을 믿고 따르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매티스 중령의 외침에 함교 인원은 분주히 손을 움직였다.
그리하여 뿜어진 세 번째 사격.
그렇게 세 번째 적 전함의 머리가 쪼개지자 어비스데몬은 무수한 전투기를 쏟아냈다.
어느새 양측의 거리는 1200 이하로 줄어들고, 어지러운 교전이 펼쳐지기 직전이었다.
조용히 구석에서 전투 지휘를 지켜보던 제퍼슨이 화들짝 놀라 함교를 빠져나갔다.
내가 네 번째 주포 사격을 지시한 직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