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우주 군벌가 망나니-94화 (94/134)

< 94화 >

중앙의 화폐개혁이 시작됐다.

내가 황제에게 편지를 쓰며 개혁안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 것은 이시오 백작을 비롯한 영주들로부터 2500조 크레딧에 달하는 대가를 제안받은 직후였다.

생각해보면 간단한 일이었다.

저 많은 자금을 정상적인 방법으로 축적하진 않았을 터, 화폐개혁이 시작되면 영주들은 엄청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보석이나 미술품을 통해 세탁해둔 자금은 피해가 덜하겠지만 그조차도 재산 일부에 불과할 확률이 높았다.

중앙이 정한 구화폐의 교환 마감 기한은 한 달.

한 달이 지나면 기존의 크레딧은 모두 쓰레기통에 들어간다는 발표가 떨어지자 제국 전역은 말 그대로 대혼란이 일었다.

일반 시민, 귀족, 너 나 할 것 없이 다들 은행으로 달려가 화폐 교환 신청을 했지만 이들은 모두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제국 중앙은행을 통하지 않고선 신권 교환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제국 중앙은행은 화폐공사와 엮여있으며 직접 황실에서 관리 감독하는 기관으로 그 지점 수가 제국 전역으로 대상을 넓혀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북방 경계에선 평의회가 위치한 네오아르곤의 지점이 가장 유명했는데 이 때문에 네오아르곤은 새해 첫날부터 찾아오는 끝없는 인파에 몸살을 앓았다.

“통장을 가져왔소! 돈을 바꿔주시오!”

“내가 먼저요! 새치기하지 마시오!”

중앙은행은 황실의 위엄을 상징하는 기관 중 하나.

당연히 그에 걸맞게 건물이 크고 웅장했으나 수십만 명씩 인파가 몰려들면 그 어떤 건축물이라도 미어터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일반 시민은 사정이 좀 나은 편이었다.

불법적인 방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한 귀족들은 당장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였다.

“신원이 불분명한 노숙자들을 이용해 환전을 시도해보겠습니다.”

“젠장. 그 정도로 충분히 세탁이 가능하겠나?”

“부족하겠지만 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젠장! 이렇게 급작스레 화폐개혁이라니!”

예고 없이 진행된 발표에 시장의 구권 흐름은 완전히 차단되었고 위와 같은 대화가 제국 각지의 사업체, 귀족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귀족의 피해는 곧 거대 기업의 피해로 직결되는 상황.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번 사건에서 아크팩토리는 별 영향 없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내가 회장을 맡기 전까지, 아크팩토리의 경영 상태는 부실하다는 수준을 넘어 벼랑 끝에 내몰린 상황이었다.

그런 회사에 여유자금 따위가 남아있을 리 없었고 최근 사업이 성공하며 벌어들인 돈에 대해선 라이언 코멧에게 미리 언질을 주어 세금 처리를 확실히 해두라고 해둔 점이 유효하게 작용했다.

그밖에 귀띔을 준 것은 윌리엄 백작과 모리더스 대장 정도였다.

물론 황제가 이 개혁안을 반드시 받아들일지 확신은 없었기에 지나가듯이 조언한 정도였지만.

아무튼, 개혁으로 인해 발생한 충격은 당분간 여진을 남길 모양이었다.

구화폐에 생존 기한이 걸렸단 소식에 시장에선 구형 크레딧의 사용이 뚝 끊기다시피 했다.

당장 시민들은 밥을 사 먹으려 해도 신화폐가 필요한 실정이었다.

다만 중앙에선 이러한 문제를 빠르게 해결해나갔다.

우주 시대의 제국 화폐의 실물 비중은 생각만큼 높지 않았다.

특히 시민들이 사용하는 크레딧은 대부분이 전자 상태로 사용되던 상황.

중앙은 빠르게 전자 화폐로 크레딧의 교환을 해치웠고 시민들의 불편함은 그렇게 해소되는 듯 보였다.

시민 입장에선 단지 7천 크레딧 하던 국밥 한 그릇이 7크레딧이 된 것에 불과했다.

똥줄이 타는 건 오로지 불법 자금을 조성하던 무리들 뿐이었다.

*

화폐개혁 실시 일주일째.

워낙 충격이 심했는지 중앙 귀족들조차 이번 개혁안을 두고 반발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런 갑작스런 개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목소리를 내는 파벌이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자신의 결정에 반기를 드는 이들을 결코 놔둘 생각이 없었다.

피비린내 나는 숙청의 시간이 흐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중앙에선 다시 한번 피바람이 불었다.

그렇게 대귀족 수십 명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후에야 제국은 개혁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충격은 내 주변에도 당연히 영향을 끼쳤는데 당장 2500조 크레딧을 지불하겠다고 했던 영주들은 기한을 조금만 미뤄달라며 내게 통사정을 해왔다.

만약 내가 특무함 사령관이 아니고, 황제의 명을 받아 나온 장군이 아니었으면 구권으로 돈을 받아가라고 억지를 부리고도 남을 위인들이었다.

그러나 차마 내게 그런 짓은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만약 내게 구권을 던졌으면 나는 그대로 돈을 제퍼슨에게 넘겨 영주들의 이름을 대고 그간 있었던 일을 이단심문소가 처리하게 만들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개혁의 흐름 속에 제국 각지에선 본격적으로 이단심문관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 손에 대귀족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기사를 통해 쏟아져 나왔다.

다들 휘하에 소유한 기업의 운영자금을 제때 마련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이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

돈줄이 마르자 선량한 기업까지 여파를 맞이한 상황.

하지만 여기까진 내가 예상한 대로의 흐름이었다.

부패 귀족과 연관된 기업들의 연쇄 부도가 시작되면 나머지 기업도 당연히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도 편지로 황제에게 해결책에 관한 조언을 제공했다.

조사를 통해 부패한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가려 구제책을 발동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기분이 별로 좋질 않아 보이는데.

‘죄 없는 사람들까지 고통받길 원했던 건 아니니까.’

예상했지만 역시 강경한 수단으로 개혁을 추진하다 보니 이곳저곳에서 진통이 나타났다.

그러나 제국의 체질 개선을 위해선 꼭 해야 할 일이었기에 참고 견디는 수밖에는 없었다.

북부군의 거듭된 패배, 귀족들이 줄지어 연행되는 우울한 분위기 속에 간만에 기쁜 소식이 하나 도착했다.

원수 자리가 비어 있던 남부에 드디어 새 원수가 임명됐단 소식이었다.

-이야. 이래서 부하를 잘 둬야 한다니까?

남방 경계의 새 원수로 자리매김한 인물은 바로 모리더스 대장이었다.

후보로 논의된 대장 계급 중 반란 진압에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이 주요인으로 꼽혔다.

그리고 그가 가장 큰 공을 세울 수 있던 결정적 요인은 바로 나였다.

내가 그의 밑에 있었기에 그의 군공도 덩달아 오른 셈이었다.

‘빨리 남부로 돌아가고 싶군.’

평의회는 나를 매우 호의적으로 대했고, 내가 붙잡고 있던 줄은 더욱 튼튼해져 이제 군 수뇌부의 꼭대기에 닿아있었다.

앞으로 남부에서 활동한다면 황제의 간섭이 아니고서야 정말로 거칠 게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모리더스 원수의 편지를 보며 흐뭇해하고 있을 때, 진이 내게 물었다.

-그런데 존.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

‘뭔데?’

-아직도 목표는 유효한가? 예전에 말이야. 절대자가 되고 싶다고 했잖아.

‘내가 그랬었나?’

아마 임관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내 것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그런 존재를 꿈꿨었던 것이 기억났다.

제국은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지킬 수 없는 곳이었으니까.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는지 궁금했거든.

‘갑자기?’

-그렇잖아. 넌 이제 소장이고 대귀족의 신분을 지니고 있지. 황제가 직접 임명한 특무함 사령관이고. 너는 이미 절대 권력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한다.

절대 권력이라···.

내가 딱히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진의 말을 듣고 보니 제법 강해진 건 사실이었다.

-이제 더 올라간다면 남은 건 대장이나 원수, 황제가 되는 것뿐인데.

‘황제는 무슨.’

진의 말에 나는 잠시 앞으로의 여정을 그려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제 내가 꿈꾸는 미래는 카린과 함께 남부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더 높은 직위나 명예에 대해선 그리 고픈 생각이 없었다.

이미 한 명의 인간으로선 충분히 많은 것들을 이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지금 생활에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어.’

-그래?

‘이번 일을 잘 마무리하고 그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서 좀 여유롭게 지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걸 보면 말이야.’

-카린이 듣는다면 무척 좋아할 이야기군.

고갤 끄덕이는 진에게, 나는 지금껏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질문을 하게 되었다.

‘나도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정령은 왜 계약자를 찾는 거지? 생각해보면···나는 네게 도움만 받았는데 말이야.’

마법의 정령 진.

나는 그에게 무척 큰 도움을 받았다.

그가 아니었으면 이 세상에 적응하는 데 훨씬 어려움을 겪었을 테고 어쩌면 평범한 장교로 이미 융족과의 전선에서 관짝에 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나는 그에게 어떤 보답을 해준 적이 없었다.

정령인 진이 내게 원하는 건 대체 뭘까.

왜 정령이 계약을 하는지를 묻자 그는 이 모든 게 수행의 일종이라고 답했다.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정령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수행을 거듭한다. 나의 수행은 계약자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는 것이지.

‘그랬군···. 어쩐지 계약자한테만 되게 좋은 일 같네.’

-운 좋은 줄 알라고. 나와 같은 정령과 계약하는 행운은 좀처럼 없으니까.

네 말이 맞다며 피식 웃은 나는 또 다른 궁금증을 떠올렸다.

‘그럼 내가 더 이상 원하는 게 없으면 너는 떠나게 되는 거야?’

-글쎄. 이번 계약 같은 경우엔 네가 죽기 전까진 그럴 일이 없을 것 같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제 곧 이세계 생활도 5년 차에 접어든다.

갑자기 진이 사라진다면 그 허탈감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가장 오랫동안 어려움을 함께한 친구였으니 말이다.

‘원하는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나도 네 부탁이라면 힘닿는 데까진 도와줄게.’

-내가 원하는 건 딱히 없어.

‘진짜 없어?’

-누군가를 구하고, 누군가를 원하는 그런 평범한 마음을 잃지 말고, 인간인 채로 살아라. 존. 그게 내가 네게 원하는 전부다.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들린 말.

나는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질문해도 진이 답해줄 것 같지 않았기에 알겠다며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

오전, 여느 때처럼 서류를 검토하고 있을 때였다.

한가로웠던 카린이 다과를 챙겨 집무실을 찾아왔다.

“그럼 저는 예정대로 순찰하러 다녀오겠습니다.”

“음?”

매티스 중령은 내게 경례하며 약속이나 한 듯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순찰이라니, 엔터프라이즈호의 부함장이며 동시에 내 전속부관인 매티스는 당연히 순찰 따윌 할 이유가 없었다.

그저 카린이 찾아왔으니 자릴 비켜주려고 했던 모양이다.

내가 머릴 긁적이고 있을 때, 싱긋 웃은 카린이 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차를 건넸다.

“따뜻할 때 드세요.”

“고마워.”

카린은 우리 부대의 유일한 그라프 파일럿이었고 평소 업무는 훈련이지만 애초에 그녀의 실력은 이미 정점에 이르러 있어 사실상 훈련이 무의미한 경지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일과 중 땡땡이를 치는 건 안 될 일이지만 함내에서 그녀에게 훈련을 빼먹으시면 어떡합니까 라고 일침을 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음? 이건 평소에 마시던 차가 아닌데? 뭐야? 느낌이 굉장히 좋은 것 같아.”

“알아봐 주셨네요!”

그녀는 자신의 고향 행성에서 직수입한 특급 찻잎이라며 나를 위해 특별히 주문했다는 말을 곁들였다.

-거 나도 어떻게 한 모금 마실 수 없나?

내 미각을 공유하고 싶다는 뜻밖의 요청을 진이 꺼낼 즈음,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씩씩거리는 손님이 또 한 명 늘었다.

“존···메이어!”

연구소 폭발 사고 이후 좀처럼 얼굴을 마주치기 힘들었던 세리스 공녀였다.

그녀의 방문에 카린은 눈썹을 찌푸렸고 나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느냐고 공손히 물었다.

“화폐개혁을 건의한 게 너라며! 사실이야!”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런 젠장!”

머리를 쥐어뜯는 공녀.

그녀는 이번 개혁으로 레하반 가문이 얼마나 큰 피해를 본 줄 아느냐며 분통을 터트렸다.

-드래곤도 탈세를 하나?

‘보물전 규모를 생각하면 하고도 남겠다.’

중앙 최고의 가문이라는 레하반이라면 그 피해액이 정말로 상상을 초월할 수도 있었다.

“그런 건의를 할 거면 나한테 미리 귀띔을 해줬어야지!”

“제가요?”

“그래!”

“다른 가문도 아니고 제국 최고의 가문이라는 레하반이 탈세와 연루되어 있을 줄 제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이이익! 개인 사업도 한다는 인간이 말이야! 그렇게 세상 물정을 몰라서 어떻게 할 거야!”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 그쪽이고.

재산을 털린 게 어지간히 분했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딸칵- 하고 찻잔을 내려놓은 카린이 눈매를 좁혔다.

“공녀님. 방금 그 발언은 간과할 수 없군요.”

“하! 넌 또 뭔데?”

“저는 특무함 소속 준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폐하를 모시는 근위기사입니다. 부정한 일을 저질렀다고 대놓고 밝히시는데 그냥 두고 볼 수 없지요.”

“그래서 뭐? 황제한테 이르기라도 할래?”

“존칭을 지켜주시죠. 공녀님. 황제 폐하입니다.”

“응~ 아니야. 나는 내 맘대로 불러도 돼~.”

점차 카린의 몸에서 뿜어지는 기운이 살벌해지는 것을 느낀 나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공녀에게 물었다.

“그 얘길 하려고 이렇게 다급히 찾아오신 겁니까? 피해를 보신 건 안타깝지만 저도 별 뾰족한 수는 없습니다.”

“누가 너한테 돈 달래?”

-나는 돈 달라고 온 줄 알았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정말 손해 본 돈을 달라는 목적으로 찾아왔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공녀는 의자를 끌고 와 앉더니 다릴 꼬며 말했다.

“지금 귀족들 사이에 빠르게 소문이 퍼지고 있어.”

“무슨 소문 말입니까.”

“이번 화폐개혁. 네가 주도했다고.”

“예?”

아니 내가 의견을 제시하긴 했는데···.

그렇게 말하면 좀 억울한 감이 분명 있었다.

실제로 제국의 화폐개혁은 이미 처음도 아니었다.

좀 오래되긴 했지만, 지금으로부터 3천 년 전쯤에도 화폐개혁을 한 차례 단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었으니까.

나는 그저 실마리를 제공했을뿐 개혁을 주도했다는 말을 듣기엔 그럴 능력도, 권한도 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미 그런 소문이 중앙으로부터 퍼져 제국 전역으로 돌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존 메이어. 정신 똑바로 차려. 이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무슨 말입니까?”

“귀족들 말이야. 안 그래도 잔뜩 돈 잃어서 화가 났을 텐데 분풀이할 상대를 준 거라고.”

공녀는 앞으로 여러 위험이 닥칠 거라며 안전에 신경 쓰라는 당부를 했다.

“대체 그 소문을 흘린 사람이 누굽니까?”

그녀는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며 코웃음 쳤다.

“누구긴 누구야. 황제지. 너는 총알받이 된 거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