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부관이 가져다준 자료들.
대체 공녀가 무엇을 연구하려 했는지, 연구단지 한복판에서 왜 그런 사고가 났는지를, 나는 보고서를 읽으며 파악할 수 있었다.
-아이디어는 좋은데?
‘무인기를 도중에 탈취한 다라.’
단순히 기술적으로만 해킹을 시도하려 하면 매우 어려운 일이 될 테지만 공녀에겐 상당한 수준의 마법적 지식이 있었다.
고도의 과학기술은 마치 마법과 같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그만큼 마법의 신비는 그 끝을 알 수 없으며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가능케 하는 힘이었다.
‘제 딴엔 나름 전쟁위기 극복에 도움을 주려 했던 것 같은데···.’
자료를 살피던 나는 문득 이것을 그대로 포기하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고 연구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진은 이번 연구에 관한 건 가능하다면 공녀가 계속하게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생각해 봐. 이건 현재 기술만으론 불가능한 프로젝트야. 마법을 잔뜩 적용해야 하는데 그럼 또 중앙에서 난리를 피겠지. 기술 격차가 어쩌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앞세워 시선을 돌리자는 거네.’
-그 대상으로 공녀보다 적합한 인물은 없을 테니까.
천년공의 유일한 자식인 세리스는 중앙의 기술 전수 제약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운 입장이었다.
황제가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그녀를 쉽게 벌주거나 하진 못할 테니 말이다.
‘계속 연구를 진행해달라고 부탁해야 하나?’
이 연구만 성공한다면 앞으로 있을 대규모 전투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가 될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도 이번과 같은 사고가 다시 일어나선 곤란했다.
나는 시간이 날 때 어비스데몬의 생체전투함을 생포라도 해보자고 생각하며 자료를 한쪽으로 정리했다.
*
새로 합류한 부대까지 합하여 본격적인 성계 탈환 작전을 준비하던 시기는 새해를 불과 일주일 앞둔 때였다.
비록 전쟁 중이지만 세르톤에서 피어나는 희망, 그리고 무사히 새해를 맞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은 병사들의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더 훈훈하게 하는 데 일조했다.
그리하여 12월 25일.
본격적인 탈환 작전이 시작됐다.
존이 되어 눈을 뜬 지도 이제는 제법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이날이 휴일처럼 느껴졌다.
거리로 나가면 왠지 캐럴이 흐를 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제국에서 12월 25일은 그저 여느 때와 같은 평일에 불과했다.
“징글벨. 징글벨. 징글 올 더 웨이~.”
이날은 익숙한 캐럴을 흥얼거렸더니 대체 그게 무슨 노래냐며 궁금해하는 카린을 볼 수 있었다.
고향에선 유명한 노래라고 하니 그녀는 멜로디가 마음에 든다는 평을 남겨주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출격을 앞둔 카린의 뺨에 키스해주었다.
내가 뜨거운 인사를 건넬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그녀는 얼굴이 빨개져 입술을 앙다물었다.
“다, 다 보잖아요···.”
“보면 좀 어때. 어차피 파티도 함께 간 사이인데.”
-하아. 네가 이렇게까지 행복해지길 바란 건 아니었는데···.
격납고에서 일어난 일이었기에 주변에 있던 정비병들이 흠칫 놀라며 고갤 돌렸고 우연히 이 모습을 본 동기들은 에잇! 세상이 왜 이래! 라며 인상을 팍 썼다.
물론 전부 그런 건 아니고 마음이 여유로운 지크는 희미한 미소를 보여주었지만 말이다.
정찰 결과 탈환 작전을 치를 성계 주변에선 소수의 적만 보고되었으나 나는 전투가 무사히 끝날 때까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는 사령관의 입장이었다.
그렇게 격납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함교로 돌아온 나는 본격적인 전투를 준비했다.
“지금부터 행성 아그니Ⅲ 탈환을 시작한다.”
아그니Ⅲ는 이시오 백작이 관리하는 자치령.
현재 이곳은 소수의 어비스데몬이 지표로 내려가 침식(侵蝕) 과정을 진행 중이라는 보고가 있었다.
죽음의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행성 대기에 독을 퍼트리는 초입 단계.
이 과정을 내버려 두면 지표는 까맣게 물들어 죽음의 땅이 되고 행성 지하엔 플랜트 시설이 지어져 크고 작은 어비스데몬의 전투함을 생산하는 전선 기지가 되는 셈이었다.
세르톤을 거점으로 삼은 나로선 영주들이 거액의 대가를 약속하지 않았더라도 손을 봤어야 할 일이었다.
“전방에 구축함급 적 열 척 확인됩니다!”
“문제없군. 이대로 돌파한다.”
세르톤에 긴급 상황을 대비해 수비 병력을 남겨두고 왔지만 이쪽은 전함이 포함된 전력이었다.
전함의 화력에 실피드까지 보유한 상황에서 겨우 구축함을 잡지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손쉬운 전투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진은 지금이야말로 적 생체전투함을 붙잡을 절호의 기회가 아니냐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전투만 우선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아직 항성풍이 본격적으로 폭발할 시기가 제법 남은 탓이었다.
‘전투함이 멀쩡한 상태로 잡혔다는 사실을 적이 알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다.’
어비스데몬의 전투함은 살아있는 생물.
놈들에게 동족이란 개념이 있는지 어떠한지는 모르나 만약 구출을 위해 대규모 병력을 끌고 성계 안쪽으로 진입하면 우리로선 그보다 더 곤란한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연구를 위한 전투함 탈취는 최대한 마지막, 항성풍이 터져 양쪽 병력이 모두 묶이는 시기 바로 직전을 노리기로 생각했다.
그렇게 시작된 전투.
전투기가 출격하고 구축함을 에워싼 아군이 몇 배가 넘는 화력으로 가볍게 구축함들을 해치웠다.
“정말 대단하오! 과연 명불허전이군.”
구축함이 녹아내리고 뾰족한 적 전투기가 우수수 터지는 광경을 보며 이시오 백작은 흥분한 듯 외쳤다.
이제 곧 다시 행성을 탈환할 수 있겠단 생각에 들뜬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대기권을 강하해 대륙의 그림자를 엿보았을 때, 백작은 충격을 받은 듯 함교의 테이블 손잡이를 붙잡았다.
검게 물든 도시와 토지.
먹물을 뿌린 듯 오염된 땅은 그 면적이 아무리 작게 잡아도 이미 수백 킬로미터에 이르렀다.
‘오염 속도가 말이 안 되는데···.’
우리가 카일론 성계에서 첫 전투를 치르고, 북부 주민을 무사히 세르톤으로 탈출시킨 게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벌써 이 정도로 침식이 진행됐을 줄이야.
만약 항성풍 이후에 행성을 탈환하려 했다면 우린 지하에서 생산되어 올라오는 따끈따끈한 어비스데몬의 전투함과 마주쳤을지도 몰랐다.
“지상 정화를 시작하라.”
“예!”
어비스데몬은 생물 군집체.
이로 인해 오염기반시설이나 포자도 전부 화염에 취약한 특징이 있었다.
상공을 지나던 아군함이 일제히 미사일을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평소 전투에서 사용하던 미사일이 아닌 화염계 특화 전술 무기인 소이탄이었다.
한번 불이 붙으면 잘 꺼지지도 않는 소이탄은 연소 온도가 수만 도에 이르는 효율 좋은 화염 병기였다.
물론 이런 무기를 쓰면 당연히 도시는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맛이 갈 테지만 이미 침식이 시작된 도시를 되살려 쓴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기에 차라리 이렇게 초고온의 불로 싹 쓸어버리고 재건을 시작하는 것이 훨씬 더 이로운 형편이었다.
펑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불타기 시작한 대지.
이시오 백작은 지난 긴 시간 동안 관리했던 대도시가 활활 타는 걸 보며 착잡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도시가 불타며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자 괴성과 함께 여기저기서 괴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 튀어나온 건 몸에 불을 붙이고 뛰쳐나온 거대 괴물이었다.
크기는 약 50미터쯤 됐을까.
거미처럼 뾰족한 다리로 땅을 헤집는 괴물이 화염에 괴로워하며 도시 바깥으로 탈출하고 있었다.
그 숫자가 무려 수백, 놈들의 다리에 사람의 것으로 추정되는 붉은 피가 덕지덕지 말라붙은 것을 본 함장들은 즉시 공격 명령을 내렸다.
<각 함 전투기는 도주하는 괴물을 타격하라!>
<라저!>
전투함도 박살 내는 미사일이 괴물 위로 쏟아지자 파편과 체액이 이리저리 나뒹구는 고약한 광경이 연출됐다.
탱크나 장갑병을 앞세운 지상군이었다면 저 거대 괴물을 상대하느라 애를 먹었을 테지만 우주전을 전문으로 하는 전투기에겐 손쉬운 임무였다.
다만 모든 행성을 이런 식으로 화력을 앞세워 정리할 순 없었다.
아직 침식이 덜 된 행성이라면 분명 일부 지역에선 건축물을 살려볼 여지가 있었다.
앞으로 북방에선 이런 전투가 수천 번 이상 더 일어날 것을 생각하면 지상 전투 병력의 추가 육성을 고려해야 했다.
어느 순간 연방군에선 육군의 규모가 확 줄어버린 탓이다.
이는 지난 수백 년간, 어지간한 전투는 전부 우주전에서 정리되었기에 벌어진 결과였고 실제로 훈련소에서도 보병 특기는 조종 특기를 갈 수 없는 훈련생들이 나중에나 선택하는 한직쯤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었다.
“사령관님. 도시 중앙에서 거대한 구멍을 발견했다는 보고입니다.”
“플랜트 시설을 건설하던 모양이군.”
거대 괴물을 이용해 땅을 파고, 그 자리에 생체전투함 생산 공장을 지으려던 게 틀림없었다.
“전술핵 사용을 허가한다.”
대기 밀도가 높은 행성 지표면에선 핵무기가 뛰어난 위력을 발휘했다.
그렇게 뿌려진 다발의 전술핵.
핵융합을 이용한 수소폭탄이 다량으로 뿌려지자 곧 가공할 위력의 충격이 일대를 강타했다.
잠시 뒤 생명체 반응이 탐지되지 않는다며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한 함장들이 앞다투어 보고를 전해왔다.
“사령관, 이제 행성은 안전해진 건가?”
다소 긴장한 듯한 이시오 백작.
그러나 나는 고갤 저었다.
대형 플랜트 건설 지점은 완전히 끝장을 냈지만 나머지 구역을 아직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어비스데몬의 개체 중 가장 크기가 작은놈은 5미터 정도 된다고 했다.
그만한 크기라면 숲이나, 호수, 아직 다른 도시에 충분히 몸을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도시의 안전을 확인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합니다. 어차피 곧 항성풍 기간 아닙니까. 다시 도시로 이주하는 일은 그 이후가 될 것 같습니다.”
“그렇군···.”
백작은 아직 고향에서 머무를 수 없다는 사실을 크게 아쉬워했다.
이미 이곳 행성계는 어비스데몬의 영역이 된 거나 마찬가지인데도 말이다.
목숨이 걱정된다면 이제 막 토벌을 시작한 행성으로 다시 돌아오고 싶단 생각을 하긴 쉽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백작이 아쉬워하는 이유는 뻔했다.
주민들이 세르톤에서 머무는 동안엔 주머니를 불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한결같이 재물 욕심을 내는 것도 어찌 보면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선심성 위로를 그에게 건넸다.
“일단은 행성 상당수는 지키지 않았습니까. 다시 고향을 되찾을 수 있을 테니 마음 놓으셔도 될 겁니다.”
“알겠네. 생각해보니 내가 마음이 앞섰군.”
백작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며 오늘 탈환 작전을 위해 힘써준 장교들에게 통신을 통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세르톤으로 돌아가면 부족하지만 그대들의 노고를 위로할 겸 작은 파티를 열 생각이네.”
-또 파티를 연다고? 정말 어지간히 돈이 많은 모양이군.
이제는 연방군 생활에 익숙해진 결과, 공짜 술 싫어하는 장교는 상당히 드물었다.
하물며 그 자리가 상관 눈치 볼 필요도 없는 자유 파티라면 더더욱 말이다.
사재를 털어 아군 사기를 높여주겠다는데 나도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백작에게 간단한 감사의 뜻을 밝히며 그렇게 다음 작전을 위한 이동에 나섰다.
*
새해가 다가왔다.
희망의 해가 될지 아니면 피비린내가 나는 해가 될지···.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5526년의 1월 1일 새벽.
본래라면 조용히 카린과 차와 함께 새해 덕담을 나누고 복을 빌어줄 요량이었는데 애석하게도 나는 지금 화상 통신을 위해 함교에 붙들려 있는 형편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진 알겠습니다만 저희 역량 밖인 거 같습니다. 후작님.”
<제발 다시 한번 고려해주시오. 사령관. 부탁할 곳이 특무 부대뿐이오.>
통신 상대는 북부 전선에서 자치령을 관리하는 네트론 후작.
세르톤과는 멀리 떨어진 지역을 관리하는 그가 내게 연락한 이유는 다름 아닌 행성 탈환을 위해서였다.
지난 며칠 동안, 아군 부대는 아그니Ⅲ뿐만 아니라 크레딧을 보조하겠다고 밝힌 영주들의 행성을 차례로 돌며 탈환 작전을 펼쳤다.
결과는 성공적.
도시 몇 개가 송두리째 날아가긴 했지만, 행성 전체가 죽음의 별로 전락하는 것보단 백 배 나은 결말이었다.
이 같은 승전보에 관심을 보인 건 전선 지역에 자치령을 두고 있는 대귀족들이었다.
그간 연패만을 거듭하던 북부군과는 다르게 신무기로 무장한 세르톤 주둔군의 실력은 차원이 다르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사정은 다 들었소. 맨입으로 도와달란 이야기가 아니오. 물자도 주문하고, 사례도 따로 하겠소. 그쪽 영주들이 낸 금액보다 더 큰 금액을 약속하오.>
자치령을 구해달라며 사정하는 영주들은 이미 이쪽에서 내가 어느 정도나 되는 돈을 받았는지 다들 아는 눈치였다.
하나같이 거액의 크레딧을 제시하며 작전을 부탁하는 상황.
돈에 욕심이 나는 장성이라면 이러한 대귀족의 요구를 마땅히 받아들이겠지만 나는 저들의 요청을 깔끔하게 거절했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지역이 너무 멀어 출정했을 때 세르톤을 중심으로 한 주변 성계에 방어 공백이 생기는 것을 우려한 것이고 다른 이유는···.
-정말로 네 예상대로 진행됐는데?
‘황제가 충분히 수용할만한 의견이었으니까.’
5526년 첫날.
나는 아직 올해가 어떻게 흘러갈지 알지 못했으나 적어도 영주들에겐 최악의 새해 첫날이 될 모양이었다.
황제의 명을 받들어 발언을 정리한 재무상이 단상에 올랐고 모든 제국 시민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을 예의주시했다.
그리고 이내 충격적인 발표가 시작됐다.
<새해를 맞이하여 제국은 그동안의 낡은 관행을 혁파하고자 대대적인 개혁을 실행하고자 한다. 지금 시간부로 제국은 총괄적 화폐개혁에 돌입한다. 구 크레딧은 전면 사용이 중지되며 모든 화폐는 천분의 일로 대비되는 신권으로 교체하도록 한다. 이는 제국 중앙은행을 통해 우선 실행되며 공정하게 신고하지 않은 수익에 대해서는 조사 및 처벌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알리는 바이다. 또한···.>
화폐 단위를 천분의 일로 내리는 긴급 화폐 개역.
기간 내에 교환하지 못한 금액은 모두 휴짓조각이 되어버리고 마는, 전제군주제인 제국이 아니면 감히 실행 엄두도 못 낼 대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