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약 석 달 전, 건국기념일 행사 당일.
존 메이어가 군공에 따른 훈장 수여식을 위해 황제 앞에 나섰을 때, 세리스는 황제와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삼촌, 나 저 사람이랑 일을 좀 같이해야겠는데.’
마력으로 오직 둘만이 나누는 대화.
황제는 공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답했다.
‘이 자에겐 따로 시킬 일이 있다.’
‘위험한 일이야?’
‘어쩌면.’
그리 답한 황제는 이윽고 존에게 선택지를 주었다.
남부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이 내린 임무를 수행하여 근위기사를 데려갈지를 말이다.
“남부의 위기는 한 차례 지나갔으나 제국 외곽은 여전히 혼란한 상황이다. 만약 제국의 안정을 위해 헌신하겠다면 짐은 그대를 특무함 함장으로 임명하겠다. 이는 기존에 없던 신형함이며 아주 위험한 작전을 맡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들은 공녀가 투덜거렸다.
황제가 보장하는 위험한 작전은 일개 인간이 버티기 힘들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근위기사를 데려가겠다 했으니 그만한 책임은 져야지. 그런데 네가 이 자를 데려가려고 하는 이유는 아직 모르겠구나.’
이유를 알려주지 않으면 이 자는 중앙 땅을 벗어날 수도 없을 것이고 당분간 성에 잡아 가두겠단 이야기에 공녀는 폭하고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의 병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천년공의 병을? 안타깝지만 이 자의 마법적 소양은 그리 높지 않아.’
이미 한 차례 존을 마법으로 시험한 적 있는 황제는 존 메이어가 군인으로서는 뛰어난 편이나 마법적 재능은 썩 높지 않다고 평했다.
하지만 공녀의 생각은 달랐다.
‘그에겐 제법 괜찮은 재능이 있어. 작은 실마리라도 찾아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해.’
그녀의 답변을 들은 황제는 잠시 고민하더니 일이 끝난 뒤엔 그를 데려다 써도 좋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 일이라는 게 앞으로 5년간 존 메이어를 특무함 사령관으로 굴리는 것이었다.
5년이나 기다리라니.
불만스러웠던 공녀가 항의하자 황제가 답했다.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천년공은 움직이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적들이 우릴 향해 칼을 겨누고 있다.’
황제는 지금 하는 모든 일이 제때 이루어져야 하는 것들이며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까지 말하면 뭐···.’
세리스는 황제의 뜻에 수긍했지만 앞으로 5년이나 되는 시간을 허비할 순 없으니 그의 여정에 따라나서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라. 단, 그에게 너무 많은 지식을 전해주는 건 자제하도록 하고.’
황제는 이미 레하반 타워에서 존 메이어가 보고 들은 자료가 무엇인지를 아는 눈치였다.
중앙에서만 돌아야 할 정보를 외인에게 건네는 것은 오랜 시간 제국의 금기였다는 이야길 꺼낸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공녀는 애초에 변방에 기술 공유를 좀 더 풀어주었다면 제국이 외세의 침략에 이리 휘둘리지도 않았을 거라고 반박했다.
‘이건 다 삼촌이 변방까지 영향력을 깊게 행사하지 않는 탓이잖아. 나머지 경계도 전부 중앙을 관리하듯 하면 되는 거 아냐?’
‘네가 이 자리에 하루라도 앉아보면 그게 쉽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될 거다.’
이후 헬리오스 황제는 그녀에게 차기 황위에 관심이 있느냐고 물었고 공녀는 끔찍한 소리 말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튼, 연구를 끝내고 나면 존은 고향으로 돌아갈 거래. 그러니 삼촌도 그것 가지곤 나중에 딴소리하면 안 돼.’
‘그를 놓아주는 건 지금껏 유지해온 제국 정서를 위반하는 일이다.’
황제의 목소리에선 다소 언짢은 기색이 느껴졌다.
존 메이어가 남부로 돌아가 기술 격차를 좁힐 것을 염려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드래곤은 도움을 잊지 않는걸. 어쨌든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단 말이야.’
‘사고뭉치 같으니.’
황제는 그 말을 끝으로 공녀와의 대화를 끝냈다.
조용한 침묵.
하지만 이는 자신의 부탁을 어느 정도는 용인해주겠다는 뜻이란 걸 알았기에 공녀도 더는 황제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
‘하아. 피곤하네···.’
오늘도 연구소에 틀어박혀 마법진 개조 고민에 몰두하던 세리스는 몰려오는 피로감에 잠시 펜을 내려놓았다.
북부로 건너온 지도 어언 한 달여.
여전히 마법 개발에 대한 뚜렷한 실마리는 찾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 주위로는 집안 서재에서 들고나온 마법 관련 고서적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아버지인 천년공, 그리고 그 선조대에 이르러 우주 전역을 돌며 모은 마법 자료가 정리된 문헌들이었다.
이중엔 보기만 하는 것으로 정신이 오염되는 위험한 서적도 있었고 단 한 권으로 대형 광산을 사들이고도 남을 가치를 지닌 서적도 있었다.
혼자서 정리하기엔 너무나도 방대한 자료들.
이 자료를 혼자 처리할 게 아니라 분담해서 정리할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테지만 애석하게도 그것은 공녀의 희망사항에 가까웠다.
일단 서적에 쓰인 고어를 읽을 수 있는 뛰어난 마법사를 찾는 일이 쉽지 않았고 간신히 그러한 인재를 찾았다 해도 정작 마법진 완성엔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지난 몇 년간 세리스는 외부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이용해보려 했으나 별 뚜렷한 성과가 없었고 오늘날에 와서는 반쯤 포기한 채로 혼자 연구를 진행하는 형편이었다.
그래도 희망의 끈을 완전히 놓진 못하고 좀 괜찮은 마법사가 나타났단 소문이 들리면 마법진을 보여주며 상대가 작은 실마리라도 들려주길 반복하던 어느 날.
마침내 그녀는 관심을 확 끌어당기는 존재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남부에서 기술 개발과 반란 진압의 공을 세우고 중앙으로 불려온 전투 장교, 존 메이어였다.
그는 자신이 수년 동안 연구한 마법진의 용도를 하루 만에 깨달을 정도로 예리한 식견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집을 떠나 예정에도 없던 이 북방까지 존을 따라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마법에 관한 연구 진척은 거의 없었다.
어쩌면 좋은 돌파구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존 메이어는 해야할 일이 너무 많았다.
당장 수천만 명에 이르는 제국 시민의 생명을 구하고 어비스데몬과 연전을 펼치는 판국이었으니 말이다.
전투에만 신경을 쓰고 연구는 뒷전인 존에게 공녀는 조금 불만을 품기도 했지만 어비스데몬과의 전쟁은 그녀에게도 남 일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 제국의 일원으로 이번 전쟁이 조속히 승리로 끝나길 바라고 있었다.
‘이게 다 저 못생긴 놈들 때문이지.’
존이 연구에 시간을 쏟을 수 없는 이유는 어비스데몬 때문이라고 판단한 그녀는 자신도 전쟁을 거들기로 마음먹었다.
전쟁만 끝나면 북부도 평화로워질 테고, 이후엔 존과 같이 마법 연구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의 장점인 기술 개발을 이용해 어비스데몬에 효과적인 신무기를 개발하고자 했다.
황제는 중앙의 기술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으나 세리스는 자신이 직접 실력 행사에 나서면 황제도 이를 어찌하지 못할 거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어디 보자. 이 럭비공 놈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꼬리를 흔들며 신무기 개발의 아이디어를 고민하던 어느 날, 공녀는 적이 생체전투함에서 쏟아내는 전투기들이 모함의 뇌파에 의해 조종된다는 사실을 눈여겨봤다.
“이거 분명 어디서 봤는데···.”
중앙은 동서남북을 통틀어 각 방면에서 진행되는 기술 개발에 관한 모든 자료가 올라오는 곳.
세리스는 지난날 어디선가 이와 비슷한 자료를 보았던 것을 떠올려 문서를 찾기 시작했고 마침내 원하던 정보를 뽑아냈다.
그 정체는 약 500년 전, 서방 경계에서 진행되었던 무인 공격기 프로젝트였다.
“이거 맞네.”
무인 공격기 개발 프로젝트.
제국에선 AI의 사용이 금지되었고 이로 인해 무인전투기 개발도 사실상 중단된 형편이었다.
하지만 옛 서부 과학자들은 전투함 근처라면 통신으로도 충분히 전투기를 운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 드론 형태의 전투기 개발에 착수했었다.
거리가 멀면 효율이 떨어지겠지만 근접 거리에선 조종 장교의 희생 없이 격납고에 앉아 전투기를 조종하는 것으로 원격 전투를 치르겠단 계획이었다.
취지는 참 좋았다.
조종사들의 희생을 줄이고 더 과감한 전투를 펼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었으니 말이다.
AI개발 금지에도 걸릴 일이 없고 모든 전투기는 일대일로 조종사들의 원격 조종을 받도록 고안된 무인 공격기.
약 10년에 걸친 연구 끝에 마침내 실전 배치된 무인 공격기는 서부군의 전력을 크게 강화시켜줄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모두의 기대를 담아 전선에 출격한 무인 공격기는 이내 연방군에게 악몽이 되어 돌아왔다.
무선 통신을 이용해 컨트롤해야 하는 기체 특성상 무인 공격기는 해킹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었는데 적은 바로 이 점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당시 서부 전선에서 연방군을 괴롭혔던 상대는 엘다란.
스스로를 신성 수호자라 부른 이들은 우주 엘프의 먼 조상으로 알려져 있으며 초기 인류만큼이나 오래전에 우주 시대를 맞이한 종족이었다.
엘다란은 우주의 평화를 위한단 명목하에 서방 경계의 확장을 적극 견제하며 제국의 발전을 압박했다.
특히 신을 믿지 않는 제국을 대화할 가치가 없는 존재라며 비난하곤 했다.
인간보다 월등한 신체와 마력 자질을 지닌 엘다란은 마법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서부의 무인기 제어권을 가로챘고 역으로 연방군 전투함에 공격을 퍼붓게 했다.
통상의 전투기보다 더 많은 권한을 통신으로 전해야 하다 보니 발생한 비극이었다.
군단이 궤멸할 정도의 피해를 입은 서부군은 10년에 걸친 프로젝트를 완전히 폐기 처분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제국에선 더는 무인기 프로젝트를 입에 담지 않게 되었다.
통신 개입을 통한 적 전투기 권한 해킹.
과거 사례에서 영감을 얻은 세리스는 즉시 어비스데몬의 생체전투함 뇌파 분석에 착수했다.
하지만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난관에 부딪혔다.
연구소로 가져온 생체전투함 표본은 전부 죽은 것들이라 어떤 식으로 뇌파 신호를 보내는지, 그 파장은 어떠한지 정확한 분석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마법을 이용해 생체전투함의 기능 일부를 잠시 생전의 것으로 복원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는 죽었던 생물을 살리는 금단의 비술과는 거리가 멀었고 전기 자극을 통해 생체 신호를 주어 멈췄던 기능을 잠시 재생하는 개념에 가까웠다.
그렇게 잠시 뒤, 생체전투함의 신호 중계기로 짐작되는 곳에 전력을 충전하던 그녀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전력을 많이 먹을 리가 없는데···.’
전투함을 기동하는 것도 아니고 시스템 일부를 살리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고 있었다.
‘운반 과정에서 어디가 상했나?’
생체전투함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 그녀가 호두껍데기 뚜껑에 둘러싸인 중계기를 주먹으로 콩콩 두드릴 때였다.
파직- 하는 불꽃과 함께 죽었던 전투함의 촉수 다발이 우수수 일어나더니 땅을 짚었고 그 거대한 전투함이 애벌레처럼 기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공녀는 생체전투함에서 후다닥 뛰쳐나왔는데 이미 전투함은 연구소 벽을 들이받고 뛰쳐나간 뒤였다.
“맙소사···.”
북부군 전투함을 녹여버린 산성탄.
촉수에 장전되어 있던 마지막 탄이 연구단지 한복판에서 쏟아지자 곧 거대한 불기둥이 피어올랐다.
난데없는 봉변에 연구원들은 비명을 지르고, 하늘까지 솟구친 화력이 다시 지상을 향해 소나기처럼 떨어지는 지옥.
이것이 존 메이어가 집무실에서 보았던 대폭발의 경위였다.
*
“중앙에서 기술고문까지 맡고 계시다는 분이, 위험한 실험을 할 땐 인적이 없는 곳에서 진행해야 한다는 기초적인 사항을 잊으신 겁니까?”
“······.”
“대체 일을 어떻게 하면···.”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있느냐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움푹 팬 구덩이.
유황 냄새를 연상케 하는 고약한 냄새까지.
지붕에 숭숭 구멍이 뚫린 연구소 건물을 보며 나는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무도 안 죽었잖아.”
“천만다행이죠.”
“내가 막은 거야.”
-자기가 싼 똥 치운 걸 자랑하는 건가?
수백미터급 전투함이 움직인 데다 남아있는 무기를 쏟아낸 대형 사고.
그럼에도 인명피해가 나지 않은 건 공녀가 마법으로 하늘에 커다란 우산을 씌운 덕분이었다.
그 덕에 연구원들은 불벼락이 땅으로 떨어지기 전에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고 힘을 다한 전투함은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도로 한복판에 축 늘어져 있었다.
“그래서, 대체 무슨 연구를 진행하시던 겁니까.”
“몰라. 됐어. 어차피 관심도 없잖아.”
팔짱을 낀 그녀는 피곤하다며 쉬러 가겠다고 했는데 일을 이 지경으로 해놓고 그냥 가겠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살짝 어지러워짐을 느꼈다.
“그냥 가신다고요?”
-주변이 활활 타고 있는데?
“뒤처리는 다른 사람 시키면 되잖아! 돈은 낼 테니까!”
-허. 저저 인성 보소.
진이 그녀의 가정교육을 운운하는 사이, 공녀는 휙 하니 자리를 떴고 나는 잔불이 타는 도로에 덩그러니 남아 부관에게 연락을 취했다.
일단은 사고 현장을 수습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하나 더 해야 할 일이 있다.”
<말씀하십쇼.>
“공녀의 붉은 연구선 말이다.”
<예.>
“당장 가서 최근까지 무슨 연구를 진행했는지 자료를 뽑아오도록.”
<그···쉽게 내어줄지 모르겠습니다만.>
“공녀는 엔터프라이즈호로 갔고 연구선은 빈집이다. 사령관 명령이라고 하면 내줄 거다. 뒷일은 내가 책임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