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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군벌가 망나니-91화 (91/134)

< 91화 >

영주에게서 제안을 들은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뭐 이런 놈들이 다 있지? 하는 거였다.

2500조 크레딧, 남부에서도 쉬이 만져볼 수 없는 큰 금액이었다.

구축함급 함선을 2천 척 이상 제조할 수 있으며 신형 전함도 스무 척 이상 만들 수 있는 돈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지긋이 영주들의 얼굴을 살폈다.

나이는 예순을 넘어 일흔을 바라보는 이들.

분명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자치령을 관리했을 테지만 고작해야 인구 천만도 안 되는 행성에서 모을 수 있는 수준의 여유 자금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번에 구출 작전을 진행한 행성들은 북부 전역을 기준으로 했을 때, 그리 규모가 큰 곳도 아니었다.

후방 지역도 아니고 변두리 행성에 쌓인 여윳돈이 이렇게나 많다면 북방이 가난하단 이야기가 나올 리가 없었다.

오랜 전쟁으로 황폐해진 북부.

이 돈을 모으기 위해 얼마나 주민들을 쥐어짜고, 부정한 짓을 일삼았을지.

그 과정이 벌써 눈에 훤히 보이는듯했다.

‘어쩌면 해적들을 뒤에서 조종한 게 영주일지도 모르겠군.’

-뭐라고? 영주가 해적을 조종해서 얻는 이득이 뭔데?

해적을 부림으로써 영주는 중앙에 신고하지 않고 더 많은 사유재산을 쌓는 게 가능해진다.

이단심문관에게 걸렸을 때 어떻게 될지 생각하면 도저히 맨정신으론 할 수 없는 일이나 이미 북부의 도덕성은 바닥에 처박힌 지 오래였다.

게다가 전선과 가까운 행성은 어비스데몬에게 언제 쓸려나갈지 모르는 운명.

자치령을 잃기 전에 잔뜩 벌어야지 하는 한탕주의가 판을 치는 모양이었다.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지? 제퍼슨에게 뒷조사를 시켜볼까?’

세르톤에 모인 주민들 상당수는 배가 고프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영주들은 달랐다.

잘 먹어서 얼굴에 기름기가 흘렀고 막대한 양의 자금을 의뢰비라며 덜컥 내놓는 자신감을 보였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행성을 지키는 데 전재산을 내놓을 리 만무하니 아마 저들의 비자금은 상상 이상의 규모일 게 틀림없었다.

영주민의 피와 목숨으로 받침대를 만들고 배를 불린 귀족들.

결코 가까이 두고 싶지 않은 부류였으나 나는 본심을 숨기고 여유로운 미소를 유지했다.

“그럼 좀 더 뜻깊은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

가면을 쓰고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이들은 내 예상대로 상당한 양의 돈을 쥐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물론 이들이 전부 솔직하게 답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마법의 힘으로 지금 하는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정도는 분간할 수 있었다.

게다가 더 충격적인 사실은 이곳뿐만이 아니라 북방 귀족 상당수가 이런 부정한 방법으로 막대한 재산을 형성했단 사실이었다.

북방 귀족들은 중앙의 눈을 피해 재산을 긁어모았다.

자치령을 맡아 관리하고, 발전시키고, 주민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본연의 임무를 잊어버린 채로 말이다.

-이런 부패가 수십 년 동안 누적이 됐으니 북부가 맛이 갈 만도 하군.

더 나쁜 건 쌓인 돈의 흐름이었다.

제국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대귀족이 사병을 거느리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제국에 보고하지 않고 탈세하는 것도 중죄이긴 하지만 전투함이나 용병을 이용해 사병을 거느리는 일은 발각 즉시 목이 날아가는 수준이었다.

그러니 영주들이 돈을 어디에 쓸 수 있겠는가.

매일 호화 식단을 누리거나 사치품을 사들이는 것에도 엄연히 한계가 있다.

수입보다 더 많은 비자금이 조성되었고 검은돈은 지난 세월 동안 대귀족의 금고에 잠들어 있었다.

본래 화폐는 흐름이 있어야 그 가치가 활성화되는 법인데 누군가의 개인 금고에서 수십 년 동안 자는 돈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전쟁이 지속 되며 감시의 눈길이 제대로 닿지 않는 악조건 속에, 자신의 잇속부터 생각했던 귀족들의 타락이 북부의 쇠락을 불러온 거나 다름없었다.

“사정은 알겠습니다. 힘이 닿는 선에서 최선을 다할 테니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오오! 고맙소. 사령관!”

“역시 중앙의 영웅은 다르구만!”

정확히는 중앙의 영웅이 아니라 남부의 영웅이었지만 굳이 반박하진 않았다.

난 최선을 다해 행성을 방어해주기로 하고 이들에게서 500조 크레딧에 달하는 선금을 즉시 건네받았다.

내가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돈에 욕심이 나서가 아니었다.

어비스데몬과의 전쟁은 이제 막 시작이었다.

단순히 돈에 휘둘려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간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해질 터였다.

‘받아서는 안 될 돈이지만 일단 급한 불부터 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많았다.

행성 방어를 해주겠다고 한 건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나는 영주들과 자릴 마치고 다시 1층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대화가 길었기에 혼자 놔두고 온 카린이 마음에 걸렸다.

단련된 투기로 쉽게 사람들과 어울릴 수도 없는 그녀.

하지만 내 예상과 다르게 그녀는 웃고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혼자 있었을 카린을 달래준 건 크릭들이었다.

소위로 임관한 진저와 친구들이 테이블에 앉아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충성!]

의자 위에 두발로 서서 경례하는 진저.

나는 가볍게 답해주며 그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후 파티장을 빠져나와 전함으로 향했다.

카린은 나와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은 눈치였지만 나는 미안하다며 그녀를 방으로 돌려보내야만 했다.

진이 고자새끼라며 화를 내긴 했어도 당장 시급한 일이 따로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곧장 집무실로 제퍼슨을 호출했다.

“야심한 시각에 저를 찾으셨군요.”

“미안하네. 귀관에게 질문할 것이 있어 찾았네.”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뭐든 질문하시지요.”

“자치령에서 걷히는 수익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고 영주가 착복했을 땐 어떤 처벌이 내려지는가.”

“단순히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황제 폐하께 드려야 할 자치세를 빼돌렸을 경우입니까?”

“그렇네.”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소액이라면 착복한 금약의 일곱 배 정도를 헌납하면 경고나 벌금형으로 끝날 것입니다.”

“규모가 크다면?”

“영주 권한을 박탈당하게 되겠지요. 왜 그러십니까. 북방 영주들이 뒷돈을 챙겼다고 합니까?”

제퍼슨의 질문에 나는 고갤 끄덕였다.

“내게 대가를 약속하면서 인근 자치령 보호를 요청하더군. 아무리 봐도 그 규모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모은 돈은 아니었어.”

2500조 크레딧이란 대목에선 제퍼슨도 눈살을 찌푸렸다.

북방은 워낙 환경이 척박하고 인구도 그리 많지 않았다.

당장 내게 행성 보호를 요청한 자치령의 주민을 합해도 5천만이 채 되지 않았으니까.

단순히 쪼갠다면 각 행성당 천만 명.

군수 기업을 운영하는 것도 아니고, 광산을 가진 것도 아닌 행성들.

이런 영세한 규모의 자치령에서 나올 수입이래 봐야 그 견적이 뻔한 일이었다.

“엄청나게 해 먹었군요.”

조사를 원하냐고 묻는 제퍼슨에게 나는 고갤 저었다.

이건 단순히 이들만 조사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었다.

영주들과 나눈 대화가 모두 사실이라면 북부의 대귀족 상당수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태였다.

“북부 전역에 쓸데없이 많은 돈이 잠들어 있네. 이 돈을 식량이든, 자원이든, 필요한 곳에 썼더라면 설령 북부가 전쟁에 이기진 못할지언정 지금보단 훨씬 상황이 좋았을 테지.”

나는 폐하께 편지를 써야겠으니 그것을 전해달라 말했다.

주 내용은 북부의 전황, 그리고 귀족들의 타락을 소상히 알리고 그에 대한 해결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해결을 위한 방법으론 짧지만 정중하게 개인 의견을 첨부해 넣었다.

“영주들에게 받은 선납금만 500조 크레딧이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돈을 받았으니 일단 방어에 나설 것이다. 이 돈으로 북부군을 좀 움직여볼까 하는데 폐하께 누가 되진 않겠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몇 시간 뒤, 세르톤 기지에선 두 가지 명령이 실행됐다.

첫 번째는 인근 행성과 화물 선단에 요청해 연방군과 북부 주민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추가로 들여오는 일이었다.

남부에서 이미 한 차례 화물이 도착해 여유가 있었지만 항성풍으로 발이 묶일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두 번째는 병력 지원 요청이었다.

3군단장 안톤 슈피겔을 시작으로 더 나아가 칼 빌헬름 북방 원수에 이르기까지.

나는 세르톤을 중심으로 전선 방어 기지를 운영할 생각이며 5천만 명에 달하는 시민을 보호해야 하니 더 많은 병력을 보내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이는 황제의 명을 받고 움직이는 특무함 사령관의 정당한 요구에 속했다.

물론 군생활에 익숙해진 지금은 연방군이 정당한 요구만으로 굴러가는 곳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아마 입 싹 닫고 병력만 요청했어도 들어주긴 했을 것이다.

어디서 굴러먹었을지 모를 노후화된 함선이 잔뜩 온다거나 대체 어떻게 장기심사를 통과했는지 의심스러운 멍청한 장교들이 주를 이룰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나는 괜히 대립각을 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즉시 돈을 풀어 지원에 필요한 기름칠에 들어갔다.

어차피 이 돈은 전부 영주들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낄 필요도 없었고 북방에서의 임무 완수를 위해서면 오히려 돈을 더 풀어야 했다.

기름칠 명목으로 돈을 건네받은 안톤 대장과 칼 원수는 무척 흡족해하며 곧장 지원을 약속했다.

혹시 몰라 살짝 성의를 보인 북부평의회 쪽에서도 아주 반응이 좋았다.

의원들은 나 같은 영웅을 북방이 기다리고 있었다며 내게 5천만 명의 시민을 구한 데 따른 공로를 치하하며 3급 녹색 훈장을 수여했다.

녹색 명예 훈장은 남부에서도 이미 받았던 것이지만 또 받아서 나쁠 건 전혀 없었다.

이 훈장은 장교로서, 또 제국 귀족으로서 나의 가치를 한껏 높여주는 증거였다.

그렇게 24시간 뒤, 북부군 수뇌부로부터 세르톤으로 전함 열다섯 척에 대한 추가 배치 명령이 떨어졌다.

엔터프라이즈호를 포함해 총 전함 숫자가 서른여섯 척.

전투함과 화물선, 특수보급함을 포함해 총 650척 규모의 대단위 선단이 구성되었다.

남부의 전쟁을 생각하면 이게 뭐 대단한 규모인가 싶지만, 이는 현재 북부군 총 전력의 1퍼센트를 훌쩍 넘는 규모였다.

세르톤과 인근 행성이 북방 전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고작 0.1퍼센트도 안 된다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전력이었다.

이 무렵, 내겐 남부에서 보내온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북부와 남부는 거리가 너무 멀어 은하간 통신망을 열기가 무척 어려웠고 이 때문에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편지를 통한 옛 교류 방식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내게 편지를 쓴 사람은 무사히 돌아오길 바란다는 군 수뇌부 사람들과 가중되는 업무량에 비명을 지르는 라이언 코멧, 그리고 윌리엄 백작 등등이 있었다.

‘백작님 편지를 먼저 읽어볼까.’

트럭에 치이고 이 세계에 온 지도 어언 4년째.

솔직히 그와는 혈육의 정이라든지 하는 그런 끈끈한 감정은 없었으나 그래도 가주가 나를 아낀다는 마음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우리 손주로 시작된 편지엔 원수의 반란 이후 남부가 정상화되는 과정, 그리고 이후 반란에 가담한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관한 내용이 간단히 적혀 있었다.

먼저 장손이었던 하비 트라카 메이어.

내가 망나니 존으로 깨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트라카를 물려받을 인재로 평가받던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중죄인들만 들어간다는 우주 감옥에 수감 되었다고 했다.

전투함을 움직여 반란을 도왔으며 남부군 장교 상당수를 살해한 혐의를 지닌 그는 원래라면 사형이었을 터.

그러나 평의회에선 그래도 남부를 구하는데 혁혁한 공을 올린 내 입장을 어느 정도 헤아려준 것으로 보였다.

사실 즉결 처형을 했어도 난 전혀 상관없었지만 말이다.

다음으로는 마르크 트라카 메이어.

라이언 코멧을 붙잡아 내가 트라카에 세웠던 모든 것들을 송두리째 파괴하려 했던 이 쥐새끼 같은 놈은 조기 석방 없는 50년 형을 선고받고 트라카 교도소에 수감 되었다.

무기징역을 면한 건 직접 전투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 후방 근무로 반란군에서도 낮은 지위만을 유지했던 것이 선고 결과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50년···.

이번 반란 사건의 뒤처리를 하며 귀족 가문마다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하니 얼마나 평의회가 신경 써서 죄인들을 처벌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아무튼, 이로써 메이어 가문의 후계 구도는 완전히 나로 결정이 나게 됐고 이제 백작은 내가 몸 성히, 건강히 고향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본래 망나니가 되기 전엔 백작의 가장 큰 사랑을 받았던 존 메이어였다.

그런 그가 지금은 남부의 영웅에 황제의 신임을 받아 특무함 사령관까지 됐으니.

할아버지로선 얼마나 손주가 기특하고 사랑스럽겠는가.

「중임을 맡아 전선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너를 결코 난처하게 할 생각은 없지만 이 할아버지에게 작은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네가 좋은 짝을 만나 가족을 꾸리는 것을 보는 것이다.」

-뭐요? 혼처?

편지 끝부분엔 윌리엄 백작이 동봉한 사진도 몇 장 있었는데 하나 같이 남부 귀족가 여성들로 혼기가 차 배필을 찾는 이들이었다.

-이거 카린이 보면 큰일 날 일이군!

‘이것도 엄청 고민해서 보내신 것 같은데.’

사진은 세 장.

하지만 하나 같이 메이어 가문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크고 명망 있는 곳들이었다.

남방 경계에서 손가락에 꼽을 만큼 대단한 가문들에서 앞다투어 연락을 해왔다는 점.

이는 내가 남부 최고의 신랑감 중 하나가 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늦기 전에 답장을 드려야겠군.’

편지를 이용하면 아무리 빨리 답장을 보내도 한참이 지나서야 도착할 테니 나는 부지런히 글씨를 쓰기로 했다.

이곳에서의 활약을 짧게 적고, 몸 건강히 지내고 있다는 말을 적어 내려갈 때였다.

건물의 진동과 함께 찾아온 강렬한 충격.

창 바깥에선 폭음과 함께 거대한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보통 일이 아니란 생각에 나는 다급히 상황파악에 나섰다.

“무슨 일인가!”

<사고입니다! 연구소 쪽에서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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