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
공장 행성 세르톤을 중심으로 처음 북부를 재건해야겠단 계획을 세웠을 때.
나는 자금을 어디서 조달해야 하는지를 두고 상당한 고민을 거듭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중앙의 도움을 받는 것이었다.
황제가 나를 이곳으로 보냈고 일단은 특무함 함장 아닌가.
군단급 병력을 내어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자원이나, 자금 지원을 요청하는 건 중앙에서도 충분히 수용 가능한 이야기이지 않을까 하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황제라면 나를 특무함 사령관으로 임명하며 분명 더 기대했던 바가 있을 거라고 말이다.
지난 융족과의 전쟁 동안 나는 수많은 군공을 세운 것은 물론 동시에 탄탄한 군수 기업 ‘아크팩토리’를 운영하며 젊은 회장으로선 쉽게 손에 쥐기 힘든 거대한 자금줄을 손에 넣었다.
이런 상황을 중앙이 뻔히 알고 있다면, 내가 중앙에 손을 벌리는 일은 오히려 악수로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흐음. 최악의 경우 돈만 밝히는 녀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군.
‘그렇지. 자기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느니 해놓고선 입만 번지르르한 놈이란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단 말이야.’
황제는 드넓은 제국 전역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자다.
나 같은 인간 하나하나 자세히 신경 쓸지 의문이긴 하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게다가 황제는 내게 마법이 통한 줄 알고 있지 않은가.
내가 그에게 맹세한 충성이 지금 당장은 진실로 보일 테니 내가 사비를 털어 북부 재건을 도우면 좀 더 나를 좋게 봐주지 않을까 하는 계산도 어느 정도는 깔려있었다.
‘어차피 남부는 전쟁 복구를 해야 하고 공장은 잘 돌아가고 있으니까.’
남는 돈을 써서 절대자의 환심을 살 수 있다면 이건 결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
500미터가 넘는 초대형 화물선이 요슈아 대령의 호위 아래 세르톤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언제든 세르톤으로 적의 대공습이 시작될 수 있는 상황에서 순양함 함장인 요슈아 대령을 보낸 것은 북부의 치안이 워낙 허술하기 때문이었다.
블루 코어와 미카엘스톤, 각종 식량과 작전에 필요한 물품을 실은 화물선을 해적 따위에게 잃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번에 적지 않은 공적을 세웠기에 칼 원수에게 부탁해 북부군의 호위를 요청해도 될 일이었지만 북부군도 원체 내부가 썩어 있어 믿고 일을 맡긴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화물선이 도착하자 나는 제일 먼저 피난민들에게 식량 보급을 우선했다.
인근 행성에서 소개 작전으로 끌어모은 시민의 숫자만 무려 5천만 명이 넘었다.
화물선이 도착하기 전까지 멀건 죽과 수프로 연명했던 이들이기에 나는 폭동이 일어나는 건 아닌지 걱정했지만, 북부인들은 배고픔을 견디는 동안 그 어떤 불평도 제기하지 않았다.
이들은 그저 죽음의 위기 속에 살아남은 것을 감사했고, 끝까지 자신들을 포기하지 않은 내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렇게 세르톤 공장마다 임시 거처를 만들어주고, 남아도는 인력과 자원으로 공장 재가동을 준비할 무렵.
화물 선단의 임금을 치르고, 각종 서류를 처리하던 내게 제퍼슨이 불쑥 찾아왔다.
“해적들이 감사를 표하더군요.”
“일감을 줘서 좋다던가?”
“이런 일이라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돕겠다고 했습니다.”
해적과 협상을 진행하며 제퍼슨이 쓴 돈은 대략 2500억 크레딧.
수천만 명의 시민을 무사히 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걸 생각하면 싸게 막았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경도 수고했네. 이만 가봐도 좋아.”
침묵으로 내 감사 인사를 받은 제퍼슨은 할 말이 있는지 집무실을 나서지 않고 가만히 제 자리에 서 있었다.
“할 말이 있나?”
“구호 물품을 이번에 대거 들여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을 구한 의미가 없으니까.”
“개인이 처리하기엔 상당히 부담되는 액수였을 것 같습니다.”
“확실히 그렇지.”
시민 수송을 위해 해적에게 들인 돈은 본격적인 물자 수송을 위해 들인 자본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남부 자원 산지에서 중앙을 거쳐 북부로 끌어오기까지.
메인게이트를 여러 번 넘어야 하는 항해에 운송비가 크게 치솟았고 나는 1차 거래에만 무려 470조 크레딧이란 거금을 사용해야 했다.
남부에서 활동하며 모았던 거금이 단숨에 반 토막 난 셈.
하지만 덕분에 놀고 있던 세르톤의 공장 상당수를 돌릴 수 있게 됐고 무엇보다 피난민들이 공장 재가동에 적극 힘을 보태고 있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뿔뿔이 갈라져 제 살길 찾기 바빴던 북부인들이 서로 힘을 합쳐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셈이었다.
“중앙에 지원을 요청하시지 그러셨습니까.”
무슨 의미로 물어보는 거지?
착한 척 연기 그만하라는 건가?
속내를 알 수 없는 제퍼슨의 질문에 나는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보고 힘이 부치면 그때 중앙에 지원을 요청할 거란 원론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폐하께선 나를 믿고 이번 일을 맡겨주셨네. 이까짓 일로 도움을 요청해서야 되겠는가. 안 그래도 신경 쓸 일이 한둘이 아니실 텐데 나라도 걱정을 덜어드려야지.”
-이야. 이번 건 제대로 먹힌 것 같은데?
나는 계속 서류를 검토하는 척해서 보지 못했지만, 진은 제퍼슨의 입꼬리가 살짝 펴졌다며 연기가 제대로 통했음을 알렸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면 이단심문소를 통해 손을 빌려드리겠습니다.”
이단심문소에서 도와줄 수 있다는 이야기엔 나도 잠시 서류를 내려놓고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단심문소의 영향력은 비단 제국 중앙뿐 아니라 각 방면 전역에 퍼져 있습니다. 자원이나 식량 조달이라면 굳이 가장 먼 남부에서 도움을 받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여러 가지 있을 겁니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사사건건 나를 잡아먹으려 안달이었던 제퍼슨이 먼저 도움을 주겠다고 선뜻 제안했으니 말이다.
진은 갑자기 저놈이 착하게 구니까 수상하다며 그냥 기존에 하던 대로 일을 추진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나는 제퍼슨이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이단심문소에 도움을 요청해도 괜찮겠냐고 물으며 마법을 썼을 때 진실의 빛을 띠기도 했고 말이다.
“이 모든 게 폐하를 위한 일이라면 마땅히 거들지 않을 수 없지요.”
이단심문관, 오직 제국 황제를 위해 궂은일을 마다치 않는 충신들.
비록 지금은 제퍼슨 한 명이지만 어찌 됐건 이들의 신뢰를 얻기 시작했다는 건 나로서는 무척 잘된 일이었다.
“그럼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세르톤 운영에 필요한 물품을 남부가 아닌 중앙에서 끌어올 수 있기만 해도 운송에 드는 비용이 크게 줄어들 것은 분명했다.
“아, 참 그리고 이건 해적들이 전해달라더군요.”
“해적들이 나한테?”
접힌 종이쪽지를 받아들고 그것을 확인한 나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그것은 조악한 그림 솜씨로 연출한···.
별이 펑! 하고 충격파를 자아내는 그림이었다.
*
북부 발전에 큰 해가 되는 존재를 딱 세 개만 꼽으라면 첫째는 어비스데몬이고 두 번째는 북부군의 타락, 그리고 세 번째는 항성풍이었다.
이 항성풍은 항성의 이온 입자가 고속 방출되는 것으로 별이 뜨거울수록 그 파워가 강해진다.
대체 왜 북부가 다른 지역에 비해 항성풍의 위력이 강한지는 여전히 그 이유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확실한 건 항성풍이 활성화되는 시기엔 북부의 모든 유통 시스템이 강제 다운된다는 점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부 항성풍은 한번 터지면 인근 자치령의 지각 표면을 불바다로 만들 뿐 아니라 문명의 잔재를 모조리 쓸어버릴 만큼 강한 위력을 자아내기도 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지옥 같은 땅은 자치령으로 삼지 않아야 할 테지만 북부 주민 일부는 지하에 도시를 건설, 이 열악한 환경에서도 생존을 도모했다.
한 번은 이런 사정을 모르고 지표를 포자로 뒤덮으려던 어비스데몬의 주력군이 열기에 바싹 구워져 전멸한 사례도 있을 정도였다.
세르톤에 모인 5천만 명의 시민 중엔 해적 못지않게 날씨에 정통한 사람들이 있었고 나는 베테랑 장교들과 대책위를 조직해 앞으로 일어날 항성풍에 대한 회의를 열었다.
“항성풍은 최악의 재난 중 하나입니다.”
“지표면에서 맞아도 타죽고 우주에서 맞아도 곱게 죽지 못하죠.”
사람들은 플라즈마화 된 이온 입자를 얻어맞으면 EMP효과가 발생하는 것은 물론 그 열기에 함선 장갑이 순식간에 녹아내릴 것이란 이야기를 전했다.
“그래도 좋은 점이 두 가지 있습니다. 사령관님.”
“말해보게.”
“이곳 세르톤은 항성풍 영향을 그리 강하게 받지 않는단 점이고···. 이 기간엔 적들도 쉽게 움직이지 못할 거란 겁니다.”
북동 지역의 항성풍 주간은 수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데 한 번 시작되면 단계적으로 그 위력이 격상하고 중간 단계만 되어도 꼼짝없이 별에 갇히게 될 거란 이야기를 했다.
“몇 개월이나 지속될 것 같은가.”
“석 달입니다. 앞서 한 달은 어느 정도 몸을 움직일 수 있다고 하면 중간 달과 마지막 달은 전함급 함선도 작전을 멈추어야 합니다.”
꼼짝없이 이곳에 갇히게 된단 소리에 사람들은 크게 걱정했지만 나는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한 달만 더 버티면 최소 두 달의 시간을 이곳에서 버티며 물자를 뽑아낼 시간을 번 셈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 달을 버티는 작전이 시작되자 엔터프라이즈호는 어느 때보다 바삐 움직여야 했다.
첫 전투 날, 커다란 일격을 얻어맞은 어비스데몬은 카일론 성계를 중심으로 더 많은 적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천여 척이 넘는 적함이 등장했단 소식에는 나도 상당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일대일로 비교하면 확실히 제국 함선이 어비스데몬에 우위를 점하지만 지금은 적 숫자가 우리의 세 배를 넘어가는 상황이었다.
북부군의 지원을 받아 세르톤에 모인 군인의 숫자만 해도 이미 30만 명.
잘못된 판단을 내리면 까마득한 숫자의 젊은이들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처음으로 생명의 무게에 관한 스트레스를 겪었다.
-이봐. 너무 스트레스 받을 필요 없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야.
‘나도 아는데 그게 내 맘대로 잘 안 되네.’
차라리 신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는 마음이 편했다.
적어도 기술 개발은 실패한다고 해서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거나 하진 않았으니까.
내가 고민하는 걸 신경 썼는지 이따금 진은 마법으로 내 기분을 전환해 주었다.
‘이게 무슨 마법이지?’
-정신 안정화와 머리에 신경안정 물질이 솟도록 만드는 주문이지.
‘뭐라고?’
지금 내 머리에 약을 때려 부었다는 말로 들리는데?
다소 우려스러운 반응에 진은 마법의 효과 자체엔 그 어떤 중독성도 없으니 안심해도 좋다고 했다.
다만 마법으로 간편하게 얻을 수 있는 심신안정에 기대게 되면 정신적 의존이 나타날 수 있으니 그것은 마법사로서 주의해야 할 점이라는 말을 건넸다.
*
대규모 적이 등장했단 소식 이후, 다행스럽게도 어비스데몬은 적극적인 움직임 대신 소개 작전이 진행된 빈 행성을 우선하는 모습을 보였다.
놈들이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하나둘 자치령을 집어삼켜 죽음의 별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죽음의 안개와 독기, 포자로 뒤덮인 행성은 어비스데몬만이 살 수 있는 곳이 되고 놈들을 다시 밀어내도 사람이 살 수 있게 되기까진 족히 수백 년에 달하는 테라포밍 시간이 걸렸다.
한 번 자릴 내주면 이겨도 이긴 게 아닌 셈, 지금은 연구원을 신형 미사일과 그라프 개선에 역량을 집중시켰지만 어비스데몬이 삼킨 행성을 살릴 방법도 연구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부관인 매티스 중령이 오늘 저녁에 파티가 열릴 예정임을 알려왔다.
“파티라고?”
“지난번 사령관님께서 참석에 응하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그랬나?”
“너무 과로하신 모양입니다.”
매티스는 걱정스러운 반응을 보이며 이번에 피난 온 시민 중 영주들이 끼어 있어 그들이 직접 자릴 만들었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아아, 그랬었지. 기억나는군.”
각 자치령의 주인들.
지역 유지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기에 나도 이들과 얼굴 한 번은 봐야겠다는 생각에 초대에 응했던 것이 기억났다.
“승전 기념인가···.”
시민을 무사히 구출했을 뿐, 결국 행성은 어비스데몬의 손에 떨어졌으니 이걸 온전한 승리라고 봐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석하도록 하지. 자네도 가는가?”
“엔터프라이즈호의 웬만한 장교는 전부 초대를 받았습니다. 북부군에도 초대장이 갔을 겁니다.”“사정이 여의치 않을 텐데 무리하는군.”
1차 화물 선단이 도착했어도 수송로 단절을 우려해 지금도 배식을 조절하는 형편이었다.
그 수많은 장교를 불러놓고 물 한 잔만 대접할 리도 없으니 축하연에 만만찮은 돈이 들었을 게 분명했다.
-그만큼 기뻤나 보지. 주민들을 다 살렸잖아.
‘과연 그럴까?’
대귀족이라는 작자들이 그렇게 인심 좋은 사람들은 아닐 텐데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격납고에 있을 카린으로부터 연락이 들어왔다.
“사령관이다. 무슨 일이지?”
<옆에 누구 있어요?>
“그래.”
매티스 부관은 자기 이야길 하는 줄도 모르고 남은 서류를 검토하느라 다시 전자 패널을 뒤적이고 있었다.
<아쉬워라. 다름이 아니고 오늘 기념 파티가 있다고 들었어요.>
“오늘 저녁이라더군.”
<그래서 말인데 제가 같이 가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