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아군 전투기를 이끌고 치고 나가는 실피드.
빛을 뿌리며 돌격하는 그녀를 향해 어비스데몬의 전투함들이 반격을 개시했다.
럭비공처럼 생긴 어비스데몬의 생체전투함은 그 표면이 거칠었고 촉수 같은 것이 빼곡히 달려 있었는데 그 촉수가 순간 위를 향하더니 불꽃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푸른빛의 불꽃은 그저 평범한 불이 아니라 금속을 빠르게 녹이는 산성 효과가 있어 지난 수십 년간 북부군을 괴롭힌 공격 중 하나였다.
적 전투함 하나당 촉수가 수십 개에서 수백 개.
무수한 푸른 불꽃이 비처럼 쏟아지는 상황.
그러나 그러한 견제도, 제국 최강의 기사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단숨에 포화를 뚫고 들어가 검격을 꽂는 실피드.
그와 함께 섬광이 번쩍이더니 상대 전투함의 실드가 터지며 방어에 빈틈이 생겼다.
<실드가 풀린 전투함을 집중 타격하라!>
지크 셉타누스의 지시에 전투기들이 전투기동을 펼치며 이클립스 미사일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효과는 발군, 걸쭉한 액체를 흩뿌린 적함은 검은 연기를 토하더니 제자리에 멈추고 말았다.
-실피드의 공격이 이 정도로 강했던가?
‘구축함급 규모는 충분히 상대할 만하지.’
이번에 실드를 찢은 적함의 크기는 전장 500미터가 채 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제국에서는 구축함급으로 분류되는 크기.
생체 전투함답게 어비스데몬의 함선은 그 크기가 전부 미묘하게 달랐는데 카린은 크기가 작은 구축급 함선을 집중적으로 노리고 있었다.
순양함이나 전함급 실드를 찢기엔 아무래도 실피드의 출력 한계가 부담되기 때문이었다.
<더 접근하지 말고 거리를 유지해라!>
<뒤로 물러나!>
<접근하는 적 전투기들이 있다. 방심하지마라!>
편대장들이 아군 전투기의 라인을 잡기 위해 바삐 외치고 있었다.
간혹 카린이 지나치게 공격이 뛰어나 그 기세에 휩쓸리는 아군을 제어하는 역할이었다.
베테랑 장교들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었다.
전투는 기세.
가끔 자신의 역량을 망각하고 전투의 격렬한 흐름에 휩쓸리는 경우가 없지 않은데 이것을 잡아주자면 각지에 경험 있는 장교들의 배치가 필수였다.
그렇게 실피드를 필두로 특무부대 전투기들이 공적을 올리고 있을 때, 전장 전체를 관조하던 나는 좌현의 날개가 좀 더 앞으로 튀어나가는 것을 느꼈다.
“매티스! 아군에 속도를 조절하라 일러라!”
“예!”
아군의 득세에 저도 모르게 흥이 난 건지 아니면 군공을 세우고 싶어 몸이 달았든지, 그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자릴 벗어나 몸이 앞으로 쏠리는 건 대규모 전투에서 꼭 주의해야 할 점이었다.
‘이런!’
매티스가 오퍼레이터를 통해 좌현 날개를 맡은 북부군에 다시 전열을 가다듬으라고 지시할 때였다.
아군 밸런스가 조금 무너진 틈을 놓치지 않고 어비스데몬의 전투함이 좌현을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세상에···.”
함교에선 적의 공격에 놀란 반응이 다수 터져 나왔다.
우주전에서 전투함이 입을 벌리고 주포를 토하는 장면을 보게 될 줄이야.
네 갈래로 쩍 갈라져 주둥이를 연 적함은 붉은 광선을 뿜으며 아군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북부군 함선의 상당수는 노후화된 것들로 생산된 지 수십 년은 기본이고 장기간의 전투로 자원이 부족해져 백 년이 넘은 함선들도 당당히 전선을 지키는 형편이었다.
이런 함선들은 아무리 개보수를 거친다 해도 세월의 흔적을 감추기 어려웠고 이내 구축함과 순양함급 함선 상당수가 피해를 받고 지원 요청을 쏘기 시작했다.
“실피드로 아군을 지원케 하라!”
“알겠습니다!”
“우측을 끌어올려 화력전에 돌입할 것이다!”
좌측 날개를 꺾으며 적들이 순간 득점을 한 것은 사실이나 그로 인해 적들도 살짝 균형이 틀어진 상태.
나는 오른쪽 날개를 당기는 한편 본대가 위치한 중앙을 올려붙여 적들을 더욱 몰아붙이기로 했다.
“주포 사격전을 시작한다! 전방의 아군 전투기에게 알리도록!”
“예!”
노후화된 북부군 함선조차 주포 사거리에선 적을 웃돌았다.
그동안 전투에서 북부군이 연신 얻어터진 이유는 제공권 장악을 실패하거나, 물량에서 밀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군의 숫자가 더 많은 데다 제공권도 우리 손안에 있었다.
“에너지 융합로 충전 80퍼센트!”
“전 함대 발사 준비 완료입니다!”
“발사하라!”
명령을 내리기 무섭게 수백 척의 연방군 함선이 일제히 푸른 광선을 뿜으며 적 함대를 강타했다.
이클립스 미사일로 만들었던 붉은 폭죽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충격.
강력한 주포의 해일에 직격당한 적함은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질 수밖에 없었다.
“적함 다수 침묵!”
“적 전투기들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후 장기전이 될 연전을 대비해 남아있는 적을 모조리 해치우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미 일대엔 방어선을 깔며 미리 전파 차단을 준비했으니 놈들은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었다.
“남은 적들을 모조리 섬멸하라. 놈들을 해치우는 대로 지역을 이동하여 작전을 계속하겠다.”
“예!”
*
북부 첫 전투에서의 대승.
다른 때였으면 장교들과 악수라도 나누며 조촐한 덕담을 나누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적들이 지원을 부를까 봐 차단해둔 전파 방해를 풀자마자 인근 행성계에서 침공이 시작됐다며 구조 요청을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인근 행성의 주둔군은 싹다 엔터프라이즈호 휘하로 모인 상황.
행성을 방어할 병력은 당연히 없었고 아직 피하지 못한 시민들은 공포에 떨며 방위군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함장들에게 나는 일단 주공격을 한번 막았으니 여유가 있다며 시민들을 구출할 것을 명령했다.
전함 1척을 필두로 한 20여 척의 전투부대가 구조를 위해 급히 갈라져 지역을 벗어났다.
후방에선 교섭이 잘 되었는지 북부군 외에도 해적을 포함한 민간수송선이 바삐 시민들을 태우고 소개 작전을 진행 중이었다.
‘그래도 아직까진 순조롭군.’
미리 계산한 바에 따르면, 세르톤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선 오늘 하루 동안 지금 같은 전투를 몇 번은 더 반복해야 했다.
그렇게 되면 적이 입게 될 함선의 피해는 무려 수백 척 이상.
다소 북부군을 느슨하게 상대하던 어비스데몬이 경각심을 갖게 되겠지만 지금은 무너진 북부군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긴 전쟁에 지쳐 승리에 대한 의지를 잃은 북부군을 하나로 뭉치게 하려면 결국 남부에서처럼 새로운 성과를 보여주는 수밖에는 없었다.
“잘 돼 가나 보네?”
“아, 오셨습니까?”
전장 지도를 펼치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공간도약 준비를 하라 이르고 있을 때였다.
어느새 소리 없이 함교에 온 공녀가 뒷짐을 지고 서서 지도의 전황을 살피고 있었다.
“언제쯤 우리 함장이 일거리가 없어서 내 일을 도와줄 수 있을까 궁금해서.”
“······.”
세리스 공녀는 이런 전투나 군대 운영엔 통 관심이 없는지 그동안 객실에서만 조용히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녀가 이번 북부행에 따라온 목적은 내게 마법진의 완성을 돕게 하기 위함이었으나 지난 한 달 동안은 내가 워낙 바빴던지라 미처 공녀의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던 터였다.
‘공녀의 성격을 생각하면 많이 참아준 거겠지.’
-또 마법으로 찍어누르는 건 아니야?
진의 중얼거림에 깜짝 놀란 나는 이번 작전이 끝나는 대로 최선을 다해 마법진을 연구하겠다고 그녀를 달랬다.
함교에서 마법이라니.
드래곤의 마력에 꼼짝 못 하고 바닥에 눌리는 쪽팔리는 모습을 부하들에게 보여줄 순 없는 일이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고.”
팔짱을 끼고 눈썹을 찌푸리는 공녀.
하지만 그녀가 함교를 방문한 이유는 재촉 때문이 아닌 다른 이유에서였다.
“저거 말이야.”
그녀가 창밖을 보며 비행포드로 돌아오는 전투기들을 가리켰다.
“전투기 말입니까?”
“아니 그거 말고 뒤에.”
전투기 뒤엔 임무를 마치고 전투기들을 지키며 착륙을 준비하는 실피드가 있었다.
내가 그라프를 말하는 거냐고 했더니 저게 무슨 그라프냐며 공녀가 반박했다.
그녀가 볼 땐 실피드의 수준이 너무 낮았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저거 한 대 더 만들 수 있어?”
“실피드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어.”
마치 장난감 하나 달라는 듯 눈을 깜빡이는 공녀.
그녀의 주문에 나는 살짝 난처한 티를 냈다.
나라고 왜 그라프 생산을 하고 싶지 않겠는가.
다만 실피드의 후속기를 만들려면 그만한 마력핵을 구해야 하는데 남부에선 반란의 여파를 정리하느라 전방 지역에서의 전투 순찰이 완전히 중단된 상태였다.
중앙에선 이미 우주괴물이 전멸한 지 오래였고, 북부에서도 마력핵을 지닌 우주괴물을 찾아보기 어렵다 하니 당분간은 추가 기체를 생산할 방법이 없었다.
내가 사정을 설명하자 그녀는 마력핵만 있으면 되지? 하고선 알겠다며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대체 그라프를 만들어 어디에 쓰려고 하는 건지 그 이유를 물을 틈조차 없었다.
공녀 성격에 그라프를 타고 특무함 임무를 돕기 위해 기체를 만들려고 하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갑자기 그라프에 관심을 가진 이유가 뭘까?’
-보물전에 그라프 한 대 가져다 두고 싶어졌는지도 모르지.
설마하니 그런 이유로 이야기했을까 싶다가도 공녀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적함 격침 522척.
전투기 격추 숫자는 셀 수도 없었다.
불과 하루 동안 올린 공적이라기엔 그야말로 눈이 부셨는데 이 전투 동안 아군이 입은 피해는 겨우 전투함 25척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초반에 명령을 어기고 진형을 뭉개서 사고가 난 경우이고 점점 작전이 진행될수록 북부군의 경험도 빠르게 쌓여 막바지 전투에 이르러선 단 한 척의 피해도 없이 적을 완전히 격멸할 수 있었다.
<맙소사. 하루에 대체 전투를 몇 번이나 치렀단 말인가.>
“네 번입니다.”
총 네 번의 전투.
네 번째 전투를 마칠 시점에선 이미 뒤쪽 행성 대다수가 소개 작전을 마무리 지은 상태였다.
이후 나는 지원 병력을 보내준 안톤 대장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는 내가 올린 전과를 듣더니 크게 놀라했다.
단순히 시간을 번 것뿐만 아니라 수천만 명에 달하는 시민을 대피시키고 무려 500척이 넘는 적함을 격침시켰으니 말이다.
<정말 큰 일을 했네. 이번 일은 내 직접 의회와 수뇌부에 전하겠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신경은 무슨, 북부를 구한 영웅에게 이 정도는 당연한 일이지.>
한참을 내 공적에 대해 칭찬하던 그는 언제쯤 베르데V로 귀환할 거냐며 의중을 물어왔다.
본래 그의 구상에 내가 세르톤을 거점 삼아 새로운 방어선을 꾸리는 일은 없을 터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기껏 돌리기 시작한 북부의 생산 기반시설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럴 거였으면 처음부터 소개 작전에 응한 시민들의 거점을 이곳으로 잡지 않았을 테니까.
그리하여 나는 적당한 가짜 사건을 구성해 안톤 대장에게 적의 침공 가능성을 제기했다.
적이 이미 수백 척의 전투함을 잃었고 분명 새로운 주공격 함대가 이쪽으로 향할 것이다.
그 전에 미리 세르톤을 요새화하고 최전방 전선 기지로 삼아 적의 출현을 미리 탐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이다.
<자네가 직접 목숨을 걸고 전초기지 역할을 하겠다는 건가? 너무 위험한 일이네.>
“폐하가 저를 이곳으로 보내신 것은 북부의 재건을 위해 목숨을 바쳐 뛰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북동 방면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전초기지를 운영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현재 북동 방면에서 가장 생산력이 높은 행성이 바로 이곳입니다.”
<그 점은 나도 잘 알고 있네. 세르톤은 행성 전체가 공장 지대로 이루어져 있지. 하지만 지금 북부 전역이 원자재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해적이 돌아다닐 정도로 엉망이 된 북부.
게다가 쓸만한 대형 광산들은 이미 오래전에 어비스데몬의 손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어비스데몬은 행성 침식에만 욕심을 냈기에 광산 자체엔 손을 대지 않았지만 이미 적의 점령지 깊숙이 박힌 광산에서 자원을 빼낼 방도가 없는 상태였다.
안톤 대장은 어차피 자원이 없어 공장을 돌리지도 못할 텐데 뭐하러 세르톤을 전초기지로 삼느냐는 의견이었다.
<이곳은 이미 군단급 규모의 아군 전투함들이 모여 있고 요새화 작업도 거의 끝난 상태이네. 자네도 이곳으로 건너와 함께하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네.>
“대장님. 현재 베르데V에서 수성전을 시작하면 보급 없이 며칠이나 버틸 수 있겠습니까.”
<식량을 걱정하는 건가? 걱정 없네. 이곳은 농경지대가 제법 넓고 비축된 식량도 3개월 치가 넘게 있네.>
“제가 걱정하는 건 군수 물자 쪽입니다.”
<물자도 마찬가지네. 이런 상황을 대비해 퍼플옵테늄과 하이퍼에테르, 1500만 개에 달하는 미사일을 비축해 두었으니까.>
자신있다는 듯 으쓱해보이는 안톤 슈피겔 대장.
그러나 나는 그의 마지막 말에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1500만 개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네. 플루톤급 미사일만 무려 300만 개나 되네.>
“군단이 집결해 있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네.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나는 순간 안톤 대장의 전투 지휘 역량에 대해 심히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1만여 척의 전투함이 집결한 행성에 미사일 비축분이 고작 1500만 발.
플루톤급 미사일이 헬파이어 미사일만도 못한 화력을 지녔다는 건 둘째 치더라도 1500만 발이면 단순 계산으로 각 전투함에 돌아가는 미사일의 숫자가 고작 1500개에 불과하단 뜻이었다.
전투 한 번에 전투함과 전투기가 소모하는 미사일 숫자를 생각하면 이건 절대 많은 비축량이 아니었다.
오히려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대장 머리에 구멍이라도 뚫린 거냐?
‘군단급 규모끼리 부딪치면 전투 한 번에 비축 미사일이 바닥이 나겠군.’
북부의 체질이 약한 건 알고 있었어도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던 터라 나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대장님 고작 그 정도 비축분으론 속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전투함에 구멍이 뚫릴 겁니다- 라고 조언을 하고 싶었으나 나는 꾹 참아낸 뒤 반드시 세르톤을 수성해내겠노라고 그에게 답했다.
“대장님. 자원 문제는 제가 손을 써두었습니다. 오히려 베르데V의 군수물자 비축량을 생각하면 세르톤을 반드시 사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흐음. 어차피 어비스데몬과의 전투는 주로 주포전 양상인지라 그렇게 물자에 목맬 필요는 없는데 말이지. 그런데 미리 손을 써두었다니. 혹시···중앙에서 지원을 해주겠다는 언급이 있던가?>
안톤 대장은 자원 문제를 해결할 방도가 있다는 이야기에 눈을 반짝였다.
마침내 중앙의 지원 허가가 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를 도울 사람은 오직 나 자신뿐이었다.
“대장님. 곧 남부에서 출발한 자원과 물자가 중앙을 거쳐 북부로 올라올 예정입니다.”
<남부에서 말인가?>
세르톤을 북부 거점으로 삼았을 때부터 진행된 계획.
아크팩토리의 이름으로 구성된 대규모 화물선단이 곧 이곳에 도착할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