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방어선 구축을 위해 도약을 실시하기 전, 나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격납고로 향했다.
출전 준비 중인 파일럿들과 이야길 나누고 격려를 보태기 위함이었다.
내가 파일럿으로 한창 뛰던 작년엔 함장이 격납고에 오는 일은 거의 없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엔터프라이즈호는 이번 출정이 새로 조직된 이후 대규모로 치르는 첫 전투였다.
새로 편입된 조종사들을 세워두고 브리핑을 가지는 지크의 모습이 보였다.
이미 적의 전투방식에 대해 부대원들 모두가 확인할 수 있도록 자료를 공유한 상황.
지크 앞으론 각 편대장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중 상당수는 오딘에서 함께했던 훈련소 동기들로 전투 이후 그들의 보여줄 호흡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듯했다.
‘리카르도 중령도 상태가 나쁘지 않아보이네.’
-그를 신경 썼었어?
‘한참 후배를 상급자로 모시면 여러 가지 생각이 날 수 있으니까.’
우리가 처음 마이클 소장 밑으로 들어갔을 때 리카르도 중령은 이미 대위 신분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리카르도 중령 앞에 선 지크는 대령의 신분으로 엔터프라이즈호의 비행대대장을 맡고 있었다.
장교 중엔 제법 많은 이들이 귀족가문 출신이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뿌리 깊은 엘리트 의식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보통 그런 경우, 자신이 상급자를 맡고 있을 때는 상관없지만 그 관계가 역전되면 은연중에 괴로워하거나 의욕 저하로 고민하는 경우가 연방군에선 제법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브리핑을 듣는 리카르도 중령의 모습을 보니 그러한 걱정은 딱히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의 모습에선 시기나 질투, 허무 등의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고 그저 브리핑에 열중하는 한 명의 베테랑 장교만이 있을 뿐이었다.
-애초에 계급이 역전된다고 고민할 거 같으면 네 아래 있는 사람들이 더 문제 아닐까?
‘내가 왜?’
-지난 수백 년 동안 가장 빠른 진급을 하고 있으면서 왜라는 소리가 나오나?
‘천재의 인생이 남들과 같을 순 없잖아. 안 그래?’
-우욱···.
잠시 말을 잃은 진은 제발 나한테만 재수 없게 굴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좀 솔직해져 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다.
나는 믿을 만한 사람에게만 농담한다고 말한 뒤 파일럿들과 악수의 시간을 가졌다.
이제 막 임관한 이들에겐 자네들도 이 전쟁이 끝나면 훨씬 더 높은 자리에 있을 거라며 응원의 말을 건네기도 했다.
이후엔 정비병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는 그라프 고정대로 향했다.
“충성.”
저 표정이 의미하는 바는 뭘까.
다소 장난기 어린 얼굴로 다가온 카린이 출격준비를 모두 끝마쳤다고 알렸다.
“기체 상태는?”
“완벽합니다.”
나는 그녀에게 다른 하급자에게 대하듯 평범히 이야기했다.
중앙에서 재회했을 땐 서로 존대를 했지만 이후 북방에 오고, 함께 지내는 동안 카린이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며 못내 서운한 티를 냈기 때문이었다.
‘내가 무슨 약속을 했더라?’
기억을 더듬어보니 내가 다음에 만날 땐 그녀의 이름을 편하게 부를 수 있겠다고 이야기했던 걸 떠올렸고 그 이후로는 준장을 편히 대하는 중이었다.
이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로 카린도 주변에 보는 눈이 없을 땐 나를 편하게 대했지만, 지금처럼 일과 중이나 공식 석상에선 나를 깍듯이 사령관으로 존칭해주었다.
“기동시간을 좀 더 늘리지 못한 게 조금 아쉬운걸.”
평시 기동 30분, 최대 출력으로 10분.
이것이 현재 하이브리드형 배터리를 탑재한 실피드의 기동 한계였다.
게다가 순수하게 파워만 놓고 봐도 아직 중앙의 그라프와 비교할 정도의 레벨은 아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더욱 뛰어난 금속 합금을 개발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강력한 배터리팩을 제조할 수 있는 우주괴물의 원천, 마력핵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특무함 사령관으로 임명되며 당분간 기술개발에 있어 황제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실피드 개발에 큰 공로를 세운 베렐 대령은 이제 실피드가 구축함의 주포 정도는 견뎌낼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이는 내가 초중전함을 격침했을 때처럼 마법의 결함이나 파일럿의 역량과는 관계없이 오롯이 실피드의 순수 실드만으로 전투함의 주포를 견뎌낼 수 있게 됐다는 뜻이었다.
물론 이 경우, 실드유지에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기에 기동 한계 시간이 더욱 줄어드는 결과는 감수해야만 했다.
“실드 없이 직격당하면 어떻게 되지?”
“준장님 실력이면 직격당할 우려는 없겠습니다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질문에 베렐 대령은 잠시 고민하더니 외부 장갑이 녹아내려 배터리와 프레임 구조가 드러나게 될 테지만 비상 사출 시스템만큼은 최우선으로 신경 썼으니 파일럿의 목숨은 괜찮을 거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요점은 조금이라도 더 오래 기동하려면 주포에 안 맞는 게 최선이겠군.”
“그 점은 염려 마세요. 절대 안 맞을 테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카린이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실제로 세르톤에서 머무르는 동안 카린은 우리 전함 에이스 파일럿들을 상대로 전투 훈련을 진행해왔다.
결과는 굳이 가릴 것도 없이 압도적.
라다만을 뛰어넘는 정신과 육체를 보유한 카린은 인간은 감히 흉내 내기도 어려운 고기동으로 실피드의 성능을 한계까지 끌어냈다.
게다가 그녀는 전투 기동 후에도 그다지 지치지 않는 체력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에이스급 근위기사들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지녔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곧 워프할 거야. 이후엔 언제든 전투가 일어날 수 있는 점 염두에 두고.”
“알겠습니다.”
“카린.”
“네?”
“작전이 시작되면 생존을 우선시해. 우리 목표는 적을 다 쓸어버리는 게 아니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우리의 이번 목표는 교전 승리가 아닌, 자치령 주민이 안전히 소개할 시간을 버는 것.
굳이 무리해서 아군을 잃는 경우는 최대한 피해야 했다.
“참. 그리고 이거···.”
나는 연구원과 정비팀이 차트에 한눈을 파는 사이, 몰래 카린의 손에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손을 꼼지락거린 그녀는 이게 뭐지? 싶은 얼굴로 손을 펴보고선 작게 감탄했다.
그것은 지난번 디자인과 비슷하게 제작한 아티팩트, 그라프의 조종 충격을 분산시키는 마력 유도 장치였다.
“그 마음에 들진 모르겠지만···.”
“마음에 들어요! 정말로 마음에 들어요. 그런데 오늘은 왜···.”
오늘은 왜 직접 걸어주지 않느냐.
그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카린에게 나는 주변에 보는 눈이 많지 않으냐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이번엔 안 잃어버리도록 할게요.”
“다시 만들면 되니까 아껴 쓰거나 하진 마.”
블루코어를 이용한 아티팩트의 본래 목적은 파일럿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용도이기 때문에 귀중품을 대하듯 관리하면 오히려 본래 의미가 퇴색하는 바였다.
그리고 이번 아티팩트는 지난번 제조 경험으로 좀 더 튼튼하게 만들 수 있었고 애초에 실피드는 백기사에 비하면 조종석의 충격이 거의 없는 셈이나 마찬가지기에 작전 도중 아티팩트가 깨질 우려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카린의 말에 따르면 실피드의 조종석은 안락한 깃털 침대 같다- 라고 표현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고마워 존.”
“어?”
목걸이를 찬 카린은 잠시 후, 나를 꼭 안아주었는데 근처에 있던 연구원들이며 정비병들이 흠칫 놀라는 걸 볼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네가 그녀와 그렇고 그런 사이다라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오늘로 쐐기를 박았군.
이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실피드의 조종석을 향해 폴짝 뛰어오르는 카린.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왠지 뒤통수가 따가워 고개를 슬쩍 돌리니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띠고 이쪽을 바라보는 편대장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작전이 끝나면 내 방을 찾아오는 손님들로 제법 시끄러울 것 같은 예감이었다.
*
카일론 성계.
엔터프라이즈호를 포함한 전투함들이 적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찰 이상 무! 아직 이상 반응 없습니다.”
<전투기 정찰에서도 이상 징후 존재 없음. 보고합니다.>
2개 군단에 달하는 어비스데몬이 퍼진 북동 전선은 이미 한 시간 전을 기점으로 전함 간 통신이 뚝 끊긴 상태였다.
다들 전투에 돌입했거나 격침됐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다들 후방으로 도망치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예상대로라면 곧 적과 조우하게 된다. 다들 경계에 만전을 기하도록.”
<알겠습니다.>
예상되는 적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어비스데몬은 북부 전역에 무려 8개 군단에 달하는 병력을 밀어넣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중 2개 군단이 이쪽 북동 방면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8개 군단이면 전투함이 무려 8만 척.
그럼에도 적의 규모가 작을 것이라 예상하는 건 워낙 우주가 넓고 전선이 길게 늘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드디어 앞서 보낸 정찰기를 통해 적함의 존재를 포착했단 보고가 동시다발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적함 포착!>
<규모 수십 척 이상! 어비스데몬의 전투부대입니다!>
자치령을 사람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으로 만드는 어비스데몬, 그 악명 높은 제국의 적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조우 예상시간, 앞으로 5분!”
“각 함에 전파하라! 섣불리 공격하지 말고 적을 끌어들여 싸우라고 말이다.”
나는 함교 중앙 천장에 인근 성계지도를 띄워놓은 상태였고 초록 점이 카일론 성계 주변의 아군함의 위치를 반짝이고 있었다.
이윽고 레이더와 정찰기가 포착한 적함이 빨간 점으로 지도에 생성되기 시작했다.
그 숫자는 이미 100여 척을 넘어가고 있었다.
벌써 적이 100척 넘게 나타났단 사실에 북부군 전투함 상당수는 크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수십 년간 이렇다 할 승리를 해보지 못한 채 두들겨 맞기만 했으니 그 공포가 뼛속 깊이 새겨진 것이었다.
“숫자는 이쪽이 더 많다! 걱정하지 마라!”
처음에 집결한 병력 중 일부를 소개 작전으로 돌리고, 지금 일대에 모인 아군함의 숫자는 230여 척.
아직까진 아군 병력의 우세였고 정찰 결과, 적 전투함의 숫자가 132척임을 확인한 나는 즉시 좌우 날개를 펼쳐 협공을 제안했다.
아군 병력이 우세할 때 효과적인 포위진.
학익진을 펼쳐 적을 섬멸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 나는 아군을 향해 고함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제길. 뭣들 하는 거냐!”
간단한 진형 맞춤조차 제때 못하는 북부군을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설마하니 학익진을 펼치는 데도 호통을 쳐야 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매티스! 각 함에 좌표를 지정해 전파하라! 함장들은 명령대로 움직여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야말로 오합지졸.
이번 전투를 무사히 마치고 나면 단체 훈련을 빡빡하게 굴려야겠다고 생각할 때, 경고와 함께 적함에서 무수한 숫자의 전투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뾰족한 기둥형태의 몸통에 날개가 달린 것으로 절대 사람이 탈 것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기괴한 형태의 전투기였다.
‘예상했던 대로 나오는군.’
생체 전투함을 사용하는 어비스데몬은 주포 공격보단 전투기 위주의 우주전을 훨씬 더 선호했다.
놈들의 전투함에도 주포라는 개념이 존재하긴 하지만 사거리가 상당히 짧은 편이어서 맞사격을 시작하면 아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그림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자신들이 약한 부분은 과감히 배제하고 그나마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물량, 전투기의 숫자로 제공권을 확보하려는 심산이 틀림없었다.
“각 함대 전투기는 모두 발진하라!”
비행포드를 열며 전투기를 사출하는 아군 전투함들.
가장 먼저 미끄러져 나간 건 역시 중앙제 전투기였다.
남부군 최신 주력기종인 파이어플라이급의 스펙을 아득히 뛰어넘는 통칭 그리폰급 전투기.
검은 빛이 도는 무광택 도료로 코팅한 그리폰급 전투기들은 길이가 무려 30미터에 달했다.
나는 이 그리폰급 전투기를 처음 봤을 때 중앙이 그라프를 접어 전투기를 만들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기존 전투기에서는 느낄 수 없던 위압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지금껏 보아왔던 파이어플라이는 전장이 22미터였으니 대충 비교해도 그리폰급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게다가 큰 건 크기뿐만이 아니었다.
수납공간 확장 덕에 이 전투기들은 엄청난 무장을 실을 수 있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미사일 거치대의 확장이었다.
대함 미사일은 무려 열두 발.
그보다 작은 크기의 공대공미사일을 장착하면 최대 스물네 개에 달하는 미사일 무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는 남부 전투기와 비교하면 무려 세 배에 달하는 무장량이었다.
그만큼 더 오래 전투를 지속할 수 있고 보급을 줄여 장기전에 유리하게 기획된 기체란 뜻이었다.
그야말로 조종사들에게 있어선 꿈의 기체라고 할만했지만, 이 대단한 녀석에게도 단점은 있었다.
제 성능을 끌어내려면 조종사의 높은 기량을 요구한단 점이었다.
보통 처음 임관하는 조종 특기 소위들은 전선에서 활약하는 최신기종 적응에 엄청나게 애를 먹는다.
나와 동기들이 특이한 경우였지 보통 남부에선 신임 소위들이 현역 기체에 적응하는데 최소 수개월, 완벽히 기체의 퍼포먼스를 끌어내는 덴 약 1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파이어플라이급도 그 정도일진대 하물며 그보다 더 강력한 스펙을 지닌 그리폰급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 전장에 출격한 대원 중 그리폰급의 성능을 제대로 써먹는다 할만한 이들은 편대장급 인원 정도였고 나머지는 베테랑급이라 해도 간신히 걸음을 맞추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만큼 길들이기 힘든 야생마 같은 전투기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성능은 확실하다.’
이온 엔진의 푸른 불꽃과 함께 미끄러져 나간 그리폰급 전투기가 이클립스 미사일을 터트리기 시작하자 우주에 커다란 불꽃의 원이 수놓아졌다.
한 번 폭발할 때마다 반경 백여 미터가 넘는 영역이 폭발의 영향을 받았다.
그 거대한 불꽃의 파도에 어비스데몬의 전투기가 몸을 비틀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적을 순식간에 압도하자 말은 안 해도 북부군 사이에서 사기가 조금씩 치솟는 것이 느껴졌다.
단순히 승패를 가르는 스포츠 또한 기세의 흐름이 중요할진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쟁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이 흐름을 이용해 단숨에 적을 깨부수리라 마음먹고 엔터프라이즈호 휘하 특무부대 전투기들에게 명했다.
“특무부대는 지금부터 적함 격침에 나선다. 실피드가 길을 열 것이니 놓치지 말고 뒤를 받치도록!”
<라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