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
노크와 함께 찾은 레하반 타워의 최상층.
들어오라고 이야기한 공녀는 여전히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아무데나 앉으라며 손을 내저었다.
대체 무슨 서류일까.
내가 앉은 자리에서는 그녀가 무얼 살피는지 보이질 않았는데 진이 중앙에서 쓸 전략 무기 도면이라고 귀띔해주었다.
‘어떤 무기야?’
-화학탄이라고 적혀있는데. 미사일 탄두에 생물병기를 쓰는 건가?
생화학 무기라고?
그런 위험한 물건을 대체 누구한테 쓰려고 준비하는 건지 조금 걱정할 때였다.
여전히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공녀가 내게 질문했다.
“인선 준비는 잘 돼가?”
“이제 막 남부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호출했습니다. 폐하의 재가가 필요한 사항이라 다소 시간이 걸리더군요.”
“흠.”
이야기를 들은 공녀는 최대한 빨리 준비를 마치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
“특무함 함장을 괜히 맡긴 건 아닐 거야. 지금부터 하는 모든 일이 시험대에 올랐다고 봐야겠지.”
“시험대 말입니까?”
“그래. 만약 이번 인선을 꾸리는 데 시간이 차일피일 늦어지더니 한 달도 넘게 걸린다면 어떻게 되겠어. 임무를 맡기려고 사령관을 뽑아놨더니 정작 일을 제대로 안 한다는 프레임이 씌워질 수도 있는 문제라고.”
공녀는 자신이 아는 황제라면 이런 경우, 가죽을 벗기고도 남을 위인인데 나는 좀 쓸모가 있는 관계로 보직 변경과 함께 중앙 구석 연구소에서 드륵드륵 갈리는 신세가 될 확률이 높지 않겠냐고 했다.
“꾸물대다간 큰코다치는 수가 있다는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알아보니까 중앙 귀족들 사이에 네 소문이 별로 좋질 않더라.”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귀족들이 내 험담을 한다고?
자세한 내막을 들어보니 나에 대한 시기, 질투 등이 모여 안 좋은 흐름이 만들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솔직히 중앙은 다른 지역에 비하면 너무 안정적이야. 변화가 없다는 소리야. 이번 반란 같은 건 아주 특이한 경우고. 진급은 느리고 공을 쌓을 기회도 마땅치 않아. 그러니 대다수 귀족가 자제들은 가문이 쌓아 올린 부를 이용해 인맥을 만들지.”
공을 쌓고 싶어도 이렇다 할 기회가 없고 상위 영관 계급이라도 달아보려면 엄청난 재력을 쏟아붓고도 중년의 나이가 되고 마는 중앙 사람들이 봤을 때, 나는 변방의 수준 낮은 전쟁을 치르며 운 좋게 진급한 애송이로 여겨진 모양이었다.
스텔스 장치만 있었다면 그 정도는 자신도 할 수 있었을 거라나?
어이가 없어서 원.
전쟁도 해본 적 없을 인간들이 멋대로 떠드는 소리에 불과했다.
“특무함 승선 인원이 몇 명이지?”
“만이천 명입니다.”
“거기에 호위 순양함 다섯 척에 구축함 열 척, 급양함이나 화물선까지. 사람이 얼마나 필요할지 대충 감이 오지?”
내가 남부에서 끌고 온 인원은 기껏해야 천오백 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채워야 할 인원은 산더미.
여기에 중앙 귀족이 날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다는 건 분명 큰 문제였다.
남부와 달리 중앙군이 인력을 내어줄 수 없다고 버티면 시작부터 일이 꼬이는 셈이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최대한 빠르게 처리하겠습니다.”
*
한 척의 전함을 움직이기 위해선 수많은 함선이 보조를 맞추게 된다.
호위 순양함, 구축함, 화물선과 연구선 등등.
보통 전함 한 척 움직이면 선단 구성 함선은 약 스무 척.
이를 채우는 데 필요한 군인의 숫자는 2만 2천 명이 넘는 숫자가 된다.
문제는 남부에서 올라온 인원이 이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
중앙에도 훈련소는 있을 테니 황실에 요청하면 이제 막 임관을 준비하는 소위나 사병을 지원받을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당장 필요한 건 경험 많은 베테랑 인원이었다.
위험한 작전이 될 거라는 데 초짜들을 데리고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날 오후, 나는 동기들과 화상 통신으로 앞으로의 계획과 인원 수급에 관한 어려움을 의논했다.
<당장 필요한 정예 인력이 어떻게 되는 거야?>
<순양함 함장 다섯, 구축함 함장 열 명. 최소 그 정도에 각 함 부관하고 전투기 파일럿인가?>
<많기도 하군.>
“미안한 이야기지만 너희의 함장 취임은 조금만 더 뒤로 미뤄줘야겠어.”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어.>
<이젠 내가 전투기 파일럿이 아니게 된 모습을 생각하는 것조차 어색하다니까?>
대령과 중령이 된 동기들.
하지만 나는 이들을 계속해서 전투기 파일럿으로 데리고 있기로 했다.
이미 중앙과의 합동 작전에서도 이들의 역량은 충분히 증명된바, 특히 지크와 찰스의 비행 능력은 제국 최상위 실력을 자랑했다.
함대전의 승패는 함대 스펙도 중요하지만 역시 전투기 교전을 빼놓을 수 없었다.
제공권이 뚫리는 순간 미사일의 폭격을 받기 십상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전투기 파일럿으로 남는 것에 아무 불만이 없다고 했지만 나는 내심 이들이 서운하게 여길까 싶어 사비로 보너스를 두둑이 지급했다.
<잠깐. 이게 0이 몇 개야?>
<우리 사이에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그런 표정으로 말하면 설득력이 하나도 없는데.”
<부자 사령관님이 준 보너스니까 잘 쓰겠습니다.>
기존의 엔터프라이즈호 순양함은 구축함을 맡았던 미하일 워커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는 모리더스 대장이 내게 선물한 안타곤 구축함을 맡아 훌륭히 운영한 경험이 있었다.
순양함과 달리 구축함을 중앙으로 끌고 오지 않은 이유는 한계의 명확함 때문이었다.
안타곤급 구축함은 남부에서 만든 것으로 중앙제에 비해 성능 한계가 낮았다.
그 때문에 이번 기회에 구축함은 중앙제로 맞추어 새로 전력을 증강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기존의 구축함은 다시 모리더스 대장에게 잘 써달라고 넘겼는데 개조 함선임을 알고 있던 대장은 걱정하지 말라며 꼭 필요한 이에게 맡기겠다고 하였다.
“대장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설마 개조 함선이 부탁을 위한 선물이었나?>
“그것은 아닙니다만 대장님이 아니면 부탁드릴 분이 없어서 말입니다.”
<말해보게.>
“중앙 군인과 귀족은 여전히 남부를 무시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 때문에 인원을 맞추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베테랑이 많이 부족하겠군. 실력파 함장이라면 차출을 거부할 명분도 있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번 중앙에서의 작전은 많이 위험해서 다들 꺼릴 터인데···. 자네가 기름칠을 도맡겠다면 내 추진해보겠네.>
“물론입니다. 대장님. 그럼 그렇게 알고 추진하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별말을. 자네야말로 몸조심하게. 무운을 빌겠네.>
*
10월 15일.
본격적인 추가 이동이 시작됐다.
남부에서 베테랑을 끌어올리는 작업으로 이 역시 황실의 재가가 필요한 사안이었다.
VV5610에서 베렐 대령이 이끄는 연구팀이 합류하기로 했고 연방군이 될 자격이 있는지를 증명하기 위해 야쿠차가 이끄는 오크 전사 1천 명이 일반병 신분으로 합류했다.
리더인 야쿠차와 소수 오크는 이번 임무를 수행하며 장교 코스를 밟기로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바로 실력파 베테랑 장교의 합류였다.
“충성! 리카르도 솔론 중령입니다! 특무함 작전 수행을 명 받았습니다.”
“환영합니다. 중령.”
리카르도 솔론.
오딘 방위군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그가 마이클 소장을 떠나 우리에게 합류했다.
여기엔 마이클 소장 휘하에 남아있던 동기들도 있었다.
지크 셉타누스 대령.
찰스 포트 중령.
헨리 카를 중령.
로저 루스 중령.
미하일 워커 중령.
루이스 그레고리 소령.
척 힐만 소령.
오토 슈타우펜 소령.
니콜라이 주코프 소령.
오딘 훈련소부터 함께한 동기는 나를 포함해 모두 열 명.
훈련소 312기 인원이 다시 한 자리에 뭉치게 된 것이다.
훈련소 동기 넷과 리카르도 중령까지.
이들이 합류하며 이들 휘하에 있던 에이스급 파일럿들이 대거 부대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만한 정예 인력이면 마이클 소장이 엄청난 출혈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는데 모리더스 대장이 말한 기름칠이란 이 부분을 염두에 두고 꺼낸 이야기였다.
마이클 소장을 위로하는 한편 중앙으로 오겠다고 한 이들에게도 목돈을 쥐여주는 작업이었다.
“충성! 요슈아 대령입니다. 특무함 작전 수행을 명 받았습니다.”
“환영합니다.”
요슈아 대령은 모리더스 대장이 보낸 인물로 지난 융족 전쟁에서 적지 않은 공을 세웠으며 순양함 지휘엔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었다.
대령 역시 휘하 인재들을 대거 끌고 건너왔고 나는 동기들을 포함해 이들을 영입하기 위해 1조 크레딧이 넘는 금액을 지불해야 했다.
장교 좀 끌어오는 데 뭐 그런 거금이 필요하냐 싶을 테지만 이번 작전은 목숨을 걸고 치러야 하는 일이었다.
베테랑 장교만 수백 명.
내가 모리더스 대장의 라인이기도 하고 마이클 소장과 친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돈으로도 쉽지 않을 일이었다.
그렇게 각 함 지휘 인원 문제를 해결하고 중앙 훈련소로부터 신임 소위와 사병을 인계받을 무렵, 특무함엔 예상치 못했던 퍼즐 하나가 추가되었다.
붉은 법사 의복을 걸치고 나타난 세리스 공녀였다.
“공녀님도···같이 가시겠다고요?”
“당연한 거 아니야? 너만 보냈다가 그냥 죽으면, 나는 누구한테 일을 맡기지?”
-이게 뭔 소리래. 자기도 죽을 수 있다는 건 생각 안 하나?
내가 죽을 상황이면 공녀 역시 무사하긴 힘들 터였다.
진의 의견에 동의한 나는 공녀에게 자주 연락 하겠다며 중앙에 남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냈지만, 그녀는 자신의 목숨은 자신이 알아서 할 거라며 막무가내로 참가를 주장했다.
황제도 막을 수 없다는 공녀를 내가 제어할 수 있을 리는 만무했고 결국 공녀 또한 이번 작전에 함께하게 되었다.
“연구선 꼴이 이게 뭐야. 내다 버려. 내가 한 대 지원해줄 테니까.”
자신이 묵을 방을 정한 공녀는 인테리어 기술자를 부르는 한편, 레하반 가문에서 제조한 특수 연구선 한 대를 합류시켰다.
순양함보다 거대한 전장 1500미터급.
드래곤 마크를 새기고 붉은 도료로 외장을 칠했으며, 내부는 레하반 타워의 전략 연구실을 축소해 옮겨놓은 듯한 느낌을 주는 함선이었다.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흘러 11월 1일.
무사히 출정 준비를 마치고 새내기 장교들을 데리고 전투 훈련을 펼치던 때.
기다리던 출정 명령이 떨어졌다.
<특무함 사령관 존 메이어는 북방으로 향하라. 북부는 긴 내전과 외세의 침략으로 황폐해진바, 그대는 이를 해결할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카린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설마했는데 정말로 북방 경계로 떠나라는 황제의 명령이 떨어졌다.
천년이라는 긴 시간이 넘도록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이 내게 내려진 셈이었다.
*
<주변 경계 이상 없음.>
<곧 마지막 게이트를 통과합니다.>
북방 경계.
제국 영토에서 가장 가난하고 척박한 지역.
쉴 새 없이 터지는 항성풍과 전자 폭풍 같은 재해와 끊임없는 적대 종족의 침공.
여기에 각 자치령의 기후나 환경, 자원의 매장량이 인간이 번성하기에 그리 썩 좋은 환경이 아니라는 점도 북방이 쉬이 발전할 수 없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이만하면 북방을 아예 포기할 법도 하건만 중앙은 여전히 북방을 최소한도로 지원하며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 중이었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지만 사람들은 전쟁이나 불가피한 사고가 일어났을 경우, 중앙을 지키는 방패로 삼기 위함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했다.
황제에게 보내는 충성이 문제가 아니라 생존이 문제가 되는 땅.
이 정도면 현지 주민들도 타 경계로의 이주를 진지하게 검토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지만 사람은 한 번 뿌리를 내리면 그 땅을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법이었다.
특히 현재 북방에 터를 잡은 사람들의 뿌리는 제국 역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각 왕국이 전쟁을 벌이며 수많은 우주 유랑민이 희망을 찾아 끝없이 항해하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제국이 북방에 대한 완전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한 번의 메인게이트 통과로 중앙에 도착했던 남부와는 달리 북방은 도착하는 데만 메인게이트를 세 번이나 통과해야 했다.
이는 정말 까마득한 공간이 중앙과 북부 사이에 놓여있음을 의미했다.
참고로 거리가 멀어질수록 연락을 취하기도 쉽지 않았기에 황제는 북방에선 특무함 사령관인 내 판단을 우선하라는 명령을 내린 터였다.
본래 까마득한 거리의 실시간 통신을 위해선 은하간 통신망을 구축해야 하지만 중앙과 북부는 거리가 너무 멀어 아주 짧은 통신에도 천문학적인 퍼플옵테늄이 소모될 터였다.
-이걸 부술 생각을 하다니 원수는 완전 미친놈이었군.
수리 중인 세 번째 메인게이트를 통과하며 진은 죽은 오스카 원수를 두고 혀를 찼다.
중앙과는 정말로 까마득한 거리.
아마 또 몰래 다른 통로를 파두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게 없어지면 북부는 영원히 중앙과 고립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반란의 흔적이 남아있는 메인게이트는 그 성능이 아직 온전히 복구되지 않아 불안정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게이트 수비대를 지나친 우리는 드디어 척박한 북방에 입성하게 되었다.
일단 첫 번째 목적지는 네오아르곤이란 행성이었다.
네오아르곤은 북부의 몇 안 되는 중심지로 북부평의회가 자리 잡고 있으며 황제가 임명한 북방 원수가 거주하는 곳이기도 했다.
이곳을 방문하기로 한 건 내 의사가 아니라 작전을 내린 황제의 지시였다.
내가 북방에 온 이유를 원수에게 설명하고 그의 도움을 받아 북방 정세를 안정시키는 데 힘을 쓰라는 내용이었다.
게이트 근처는 모든 경계면의 후방지역.
네오아르곤까지의 거리는 앞으로 반나절이면 도착할 테니 당분간은 어려운 일이 없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주변을 경계하던 오퍼레이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내게 보고를 올렸다.
“사령관님. 전투가 일어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전투라고? 북방군 소속함대인가?”
“아닙니다. 공격당하는 측은 민간 화물선으로 추측되고 공격 측의 식별 신호도 없는 것으로 보아···.”
“똑바로 보고하라.”
오퍼레이터가 말끝을 흐리기에 나는 똑바로 말하라며 그를 다그쳤다.
그도 이게 맞는 판단인지 영 헷갈리는 기색이었다.
잘못된 보고를 올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긴장한 그가 허리를 쭉 펴고 외쳤다.
“···해적선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해적선?”
해적선이란 소리에 나는 물론이고 카린, 매티스 중령도, 함교의 모든 인원이 뜨악한 반응을 보였다.
해적선이라니.
중앙은 물론이고 남부에서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