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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군벌가 망나니-82화 (82/134)

< 82화 >

내가 다시 정신을 차린 건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뒤였다.

녹을 뻔했던 내 몸은 치료시설과 진의 도움으로 인해 간신히 무사할 수 있었다.

일정한 주기로 움직이는 생명 유지 장치의 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가 산소 호스를 물고 통속에 들어있음을 깨달았다.

녹색 치료 용액이 가득 찬 수조는 느낌이 그리 좋진 않았는데 보통 수조 안에 들어올 정도면 죽음의 문턱에 가까웠었단 뜻이기에 그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었다.

‘진···.’

-깨어났구나.

‘지하의 상황은 뭐 좀 알아냈어?’

아직 수조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에 나는 눈을 감은 채 일단 상황 파악에 나섰다.

그러나 나를 단숨에 쓰러트린 독기의 정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천년공이 지하에 있는 건 확실한데 대체 뭘 어떻게 하면 그런 맹독을 뿌리고 있는지 아직까진 밝혀진 게 없어.

‘아무 소득이 없었다는 거야?’

-소득이 없는 건 아니지. 일단 독이 엄청나게 강하다는 걸 알았고. 드래곤은 독을 뿜는 생물이 아니니까 모종의 공격이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지.

‘그럼 마법으로 치료를 하는 건 가능한 건가?’

-죽지 않았다면.

진은 아무리 대단한 마법을 쓴다 한들 대상이 죽었다면 그 노력이 모두 헛수고가 될 거라 말했다.

‘그럼 천년공이 살아있으면 우리가 해결할 순 있고?’

-가능하지만 그러자면 전제 조건이 몇 개 붙지.

진은 내가 저 독기를 버티고 4계층까지 들어갈 수 있는 강한 몸과 황제를 뛰어넘는 마력을 지니게 되면,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생길 것 같다고 했다.

한마디로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니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이었다.

‘공녀가 알면 슬퍼하겠는걸.’

이후 나는 치료에 전념하며 진에게 치유 마법에 관한 지식을 배우기 시작했다.

수조 속에서 잠만 자는 것보단 이 시간을 어떻게든 활용하는 게 유익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루가 지났을 땐 간단한 치료 마법을 직접 사용해볼 수 있었다.

진은 여전히 내게 갈 길이 멀다는 말 밖엔 안 했지만, 애초 인간은 마법을 접한 역사가 얼마 되지 않았고 이 정도면 나도 제국 마법사 중엔 실력이 썩 괜찮은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다시 하루를 통 속에서 보내고 총 닷새.

옷을 갈아입고 공녀와 대면하자 그녀는 이렇게 빨리 나을 줄은 몰랐다며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꼼짝없이 축제 이후까지 누워있을 줄 알았는데.”

“제가 좀 운이 좋습니다.”

“자격은 충분히 증명했으니까 네가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줄게. 대신, 이후엔 마법진 완성을 도와주는 거다?”

“물론입니다.”

“좋아. 축제는 내일이니까 푹 쉬도록 해.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하고. 아마 좀···피곤한 하루가 될 거야.”

*

건국기념일 축제.

전쟁이다 뭐다 남부에선 제대로 챙긴 기억이 없지만 본래 제국에서 가장 큰 행사 중의 하나였다.

평소라면 중앙 곳곳에서 찾아온 손님들로 황성이 북적였을 테지만 올해는 그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얼마 전 반란 사건이 있기도 했고 엄청난 피를 뿌린 터라 축제 규모가 축소됐기 때문이었다.

타워를 떠나 성으로 향하는 동안 거리로 나온 수많은 시민을 보았는데 이들 대부분은 차분한 분위기 속에 오늘 하루를 보내기로 한 것 같았다.

공녀와 함께 탄 차량이 성의 정문을 통과했을 때, 나는 조금 기대감이 드는 것을 느꼈다.

이곳을 곧 떠나게 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오늘은 아마 카린 대령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내가 기절해있는 동안, 진은 어떤 연락도 온 게 없다고 했다.

그녀가 이유 없이 연락하지 않을 사람은 아니니 분명 기사단, 혹은 별개의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내가 떠나기 전, 황제는 어떤 식으로든 내가 청한 부탁에 대한 답을 들려줄 테니 오늘은 어떤 식으로든 그 결판이 날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옷깃을 가다듬고 당당히 안으로 입장하자 시종과 병사들이 손님들을 연회장으로 안내하는 모습이 보였다.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장성급이거나 대귀족 출신들이었다.

이런 사람만 불러 모아도 성이 붐빌 수밖에 없기에 그 밖의 사람에겐 초대장을 보내지 않은 것이었다.

일부 귀족은 현역 시절에 받은 훈장을 예복 가슴에 달고 있었는데 이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가슴에 달린 청색과 녹색의 명예 훈장.

이 훈장의 가치를 알아본 일부 귀족들은 나를 바라보며 젊은 나이에 상당하군- 이란 말을 곁들이기도 했다.

실제로 복도를 지나치는 사람 중 나와 공녀처럼 젊은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귀족이 되려면 그에 걸맞은 군공을 쌓아야 하는데 나 같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선 대부분 나이가 많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젊은 귀족들은 작위를 물려받은 이들이지만 이 경우엔 은근히 귀족들로부터 무시를 받는 경우가 있었다.

자신의 노력으로 쟁취한 자리가 아니기에 인정을 해주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도 어디까지나 사람 나름이고···.

세리스 공녀 같은 경우엔 연회장까지 가는 동안 중앙 귀족의 엄청난 관심을 받게 되었다.

천년공은 제국에서 가장 오래 산 귀족이며 위대한 공작.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헤아릴 수 없는 부를 축적했으며 제국의 은밀한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있을 천년공이란 배경에 귀족들은 경외를 표하며 공녀와 인연을 맺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물론 공녀는 이런 관심이 처음이 아니었는지 그저 귀찮은 듯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귀족들을 쫓아내기 바빴지만 말이다.

“이래서 축제는 귀찮아. 알지도 못하는 데 다가와서 누구라느니, 어디 산다느니. 내가 그걸 알아야 해?”

“사람 사귀는 걸 별로 안 좋아하시는 모양이군요.”

“마법의 ‘마’자도 모르는 애들하고 얘기하는 건 관심 없거든.”

-오. 그건 나랑 생각이 비슷한데?

그렇게 연회장에 들어서기 전, 병사들이 문을 열어주며 공녀의 이름을 크게 외치며 입장을 알렸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오늘 저 병사들은 성대 혹사 좀 하겠구나 싶었다.

넓은 연회장엔 귀족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며 저마다 테이블에 자릴 잡고 있었다.

아무 데나 앉는 게 아니라 미리 지정된 좌석이 있는 형식이었는데 나는 공녀의 옆에 앉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연회장을 쭉 둘러봤지만 어디에서도 카린 대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무슨 일 있는 건가 싶던 그때, 공녀가 중얼거렸다.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힐끔거리는 거 기분 나쁘지 않아?”

“저는 익숙한 편입니다.”

“인간이란···.”

머리 위로 돋은 뿔과 커다란 꼬리.

여기에 붉은색 머리칼까지.

공녀는 지나치게 많은 귀족의 관심을 받고 있었고 이것이 상당히 불만스러운 기색이었다.

이후 그녀는 손가락을 튕겨 마법을 걸었는데 그것은 이 테이블을 사람들의 인식에서 지우는 일종의 은신 마법이었다.

신기하게도 마법이 걸리자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이곳에서 관심을 거뒀다.

마치 여기 테이블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모양이었다.

“인식 저해 마법입니까?”

“신기해? 가르쳐줄까?”

“잠시 기다려주시죠. 원리를 한 번 풀어보겠습니다.”

“그러든지.”

그렇게 공녀와 마법의 원리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을 때, 나팔 소리와 함께 황제가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황제가 앉을 상석은 다른 곳보다 조금 높아 모든 귀족이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다소 불퉁한 표정을 지은 황제는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긴 황금 망토를 입고 나타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선 연회장을 둘러보던 와중에 그의 시선이 우리 테이블에 잠시 머물렀다.

약 3초 정도.

그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하자 공녀가 중얼거렸다.

“오늘은 삼촌 기분이 별로 안 좋은 모양이네.”

“삼촌이요?”

황제가 드래곤이었나? 그래서 오래 살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공녀는 어렸을 때부터 삼촌이라고 불러서 단둘이 있을 땐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는 이야길 했다.

-인맥 쩌네···.

공녀 피셜로 기분이 안 좋다던 황제는 올해 여러 가지 일들이 있어 다사다난했다는 이야길 시작으로 말문을 열었다.

제법 지루할 수 있는 이야기였지만 참석자들은 다들 눈을 빛내며 황제의 말을 경청했는데 어떻게서든 눈도장을 찍어두려는 그들의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실제로 황제의 기분이 좋을 땐 가장 많은 돌발 수여식이 일어나는 날이 바로 오늘, 건국기념일 행사라는 말도 있었다.

이후 황제는 정해진 순서에 따라 귀족과 군인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한 번에 우르르 불러 대표자 한 명만 축하하고 끝내는 게 아닌, 한 명 한 명의 업적을 상세히 읊어주고(황제 대신 궁중백이) 그 공로를 치하하는 시간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늦게 올걸.”

한 시간이 넘도록 공적을 읊고 박수를 치는 시간이 계속되자 공녀는 노골적으로 지루한 티를 냈다.

애초 인식 저해 마법을 걸어뒀기에 그녀는 손뼉 한 번 친 적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루해하는 공녀와 달리 나는 박수를 치는 이 시간이 생각보다 재밌었다.

평범하게 공로를 치하했던 기존의 수여식과는 달리 이 자리는 예상치 못한 변수가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보통 수여식은 이미 어떤 보상을 줄지, 계급은 어떻게 올려줄지를 미리 정해두고 그것에 따라 발표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 자린 달랐다.

황제는 궁중백이 공적을 다 읊고 나면 참석자들에게 꼭 의견을 묻곤 했다.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그러면 귀족들이 자유롭게 타의 모범이 되는 훌륭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라던가 제 몫은 했다고 생각합니다. 라는 등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했다.

여기서 제 몫은 했다는 표현은 사실상 일 인분만 했다는 뜻으로 상을 주긴 좀 아쉽지 않습니까? 를 돌려 표현하는 완곡한 태클이었다.

그리고 이런 경우엔 보통 해당 수여자를 옹호하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이 갈려 가벼운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수여식 중에서 이곳이 가장 재미있는 자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박수를 치며 이 광경을 구경하고 있던 도중 드디어 내 차례가 돌아왔다.

“존 메이어 대령은 앞으로.”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향하자 주변 사람들이 엇! 하고 깜짝 놀랐다.

공녀가 펼친 마법 안쪽에서 튀어나왔으니 저들 눈엔 갑자기 내가 연회장에 뚝 떨어진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그렇게 당당히 앞에 서서 고갤 숙이자 궁중백이 내가 이 자리에 서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존 트라카 메이어 대령은 지난 남부에서의 반란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전선의 군단이 보급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으며, 반란군이 점거한 행성에 침투 작전을 펼쳐 수만 대에 이르는 적 전투함을 일거에 공략한 성과를 보이기도 했다. 또한 기술 개발에 공을 들여 신형 전략 무기를 개발, 적들이 탈취한 초중전함 공략에 혁혁한 공을 세운 바이다.”

남부라는 이야기에 시큰둥했던 귀족들이지만 초중전함을 공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대목에선 다들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초중전함은 중앙에서 만들어 각 방면 원수들에게 지급하는 제국 최고의 함선.

다른 건 몰라도 초중전함을 쓰러트리는 건 중앙군으로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에 존 메이어 대령에게 2급 명예 훈장인 자색 훈장을 수여할 것이며 2계급 특진을 시켜 소장으로 진급시킬 것이다. 이상.”

그 말과 함께 연회장엔 잔잔한 박수가 이어졌다.

이후 소리가 잦아들자 황제가 나를 불렀다.

본래라면 이후 자리에 모인 귀족들의 의견을 물었어야 했는데 내 차례엔 그러한 순서가 빠져 있었다.

“존 메이어.”

“예. 폐하.”

“일주일 동안 짐의 고민이 깊었다.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것이다.”

“심려 끼쳐서 죄송합니다. 폐하.”

“고민한 끝에 그대에게 선택지를 주기로 했다.”

“예. 폐하.”

“이대로 남부로 향한다면 앞서 말한 보상을 모두 내리겠다. 단, 그것뿐이다.”

-뭐야. 엘프는 못 데려간다는 거야?

진의 말대로였다.

황제는 기존의 보상을 선택하면 카린을 데려가진 못할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애초에 선택지를 주겠다고 했기에 나는 이어서 나올 또 다른 제안을 기다렸다.

처음엔 보상을 없애거나 내리고 카린을 데려갈 수 있게 해주는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황제가 내민 다른 선택지는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남부의 위기는 한 차례 지나갔으나 제국 외곽은 여전히 혼란한 상황이다. 만약 제국의 안정을 위해 헌신하겠다면 짐은 그대를 특무함 함장으로 임명하겠다. 이는 기존에 없던 신형함이며 아주 위험한 작전을 맡게 될 것이다.”

아주 위험한 작전.

다른 이도 아니고 황제가 위험을 입에 올리자 그 무게가 한층 짙었다.

“5년이다. 앞으로 5년간 특무함을 맡을 것인지, 이대로 떠날 것인지 선택하라.”

내가 몇 년을 연방군에 있었지?

기억을 더듬어보니 내가 아직 임관한 지가 일 년 반 정도밖에 안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 년 반이란 시간 동안에도 엄청나게 많은 일이 있었는데 황제가 보장하는 위험 작전 5년이라니···.

진짜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죽하면 카린을 좋아하는 진도 이때는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도 적용이 되는지는 좀 의문이었지만 지금 나는 근 수백 년 동안 누구도 걷지 못한 출세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즉시 무릎을 꿇은 나는 황제를 향해 답했다.

“제국을 위해 이 한목숨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좋다.”

내가 특무함 임무를 수행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손을 든 황제가 선언했다.

“존 메이어에게 자색 명예 훈장을 부여하고 소장으로 진급시켜 특무함 사령관을 맡기도록 하겠다. 축제가 끝나는 대로 작전을 수행할 인선을 준비하라. 근위기사도 함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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