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
나는 고민 끝에 공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물론 제안을 수락했다고 해서 모든 고민이 해결된 건 아니었다.
“제게 공녀님이 원하는 능력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기념일 축제까지 머무를 예정이라며? 그동안 증명해 보이면 그만이지.”
공녀는 남은 일주일 동안, 내가 마법진 완성에 도움이 될 자질을 지녔는지 그 가능성을 증명해 보라고 했다.
“마법을 완성하라는 게 아니야. 가능성만 보여달라는 거지. 작은 가능성만 있어도 약속한 대로 도와줄게.”
굳이 증명에 실패했을 때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그때는 아마 중앙을 온전히 벗어나는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길 거란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결과가 나오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거 안 가져가?”
내가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녀는 테이블 위의 설계도를 흔들었는데 나는 필요 없다며 검지로 머릴 콕콕 두드렸다.
“괜찮습니다. 이미 다 들어있습니다.”
*
방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누워 진과 함께 공녀가 보여준 마법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공녀가 치료를 위해 구상했다는 마법진은 그 크기도 무척 컸고 지나치게 복잡했다.
게다가 사용된 문자의 상당수는 내가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진과 지내며 그동안 마법에 관해 적지 않은 공부를 했다고 생각했더니 우물 안 개구리가 된 기분이었다.
진은 마법진을 들여다보더니 이건 외상을 치료할 목적으로 만든 게 아니라 어떤 정신적 문제에 접근할 용도로 만든 것 같다고 했다.
‘정신적 용도라고?’
-미쳤거나 뭐 그런 게 아닐까 싶은데. 아직 빈 공간이 많아서 장담은 못 하겠지만.
진은 오랜 시간 고생한 공녀에겐 미안하지만 솔직히 이 상태로는 백 년이 더 지나도 마법을 완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설계가 전체적으로 허술해. 가진 지식에 비해 원하는 마법의 효과가 너무 강한 탓일지도 모르지.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대상의 상태를 직접 확인하는 거다. 어떤 상태인지 파악하게 되면 정확한 설계가 가능하겠지. 맞춤식이라는 말이 있듯이 말이야.
우린 저녁에 공녀를 다시 한번 찾아가 보기로 하고 남는 시간 동안은 공녀가 사용한 룬문자를 공부했다.
진은 마법이 발달한 종족이면 저마다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어내 마법을 사용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며 인간은 평생을 걸려도 마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그래도 넌 지식의 자질이 나쁘지 않으니 천 년쯤 매진하면 제 몫은 할 수 있을 거다.
‘평범한 인간은 그렇게 오래 못 살아.’
-그럼 황제라도 도전해보면 어때. 그 번쩍이는 황금 옥좌에 앉아 나랑 같이 마법을 공부하는 거야.
‘언제는 나보고 오래 살라더니만···. 끔찍한 소린 관둬.’
낄낄거리는 진에게서 가르침을 받던 오후.
나는 혹시 카린 대령이 찾아올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녀를 기다렸지만 끝내 저녁이 다 되도록 날 찾는 사람은 없었다.
혹시나 해서 빌딩을 지키는 요원들에게 정말로 내가 여기에서 지내고 있다고 전해준 게 맞느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요원들은 내 요청을 제대로 들어준 게 분명했다.
몸에서 푸른빛이 반짝였기 때문이다.
아마 근위기사 일로 바쁜가 보다 생각한 나는 곧장 아침이 밝자 공녀를 찾아가 용건을 전했다.
“간밤에 편히 주무셨습니까?”
“아니. 아직 못 잤어. 요즘 밤낮이 바뀌었거든.”
공녀는 조금 있으면 잘 시간이라며 내가 딱 적당한 때에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래. 날 찾아온 용건은?”
“보여주신 마법진을 자세히 검토해봤습니다.”
“그거 인간은 잘 모르는 문자가 많았을 것 같은데.”
“그렇긴 하지만 마법도 맥락이란 게 있지 않습니까.”
“흐음. 계속해 봐.”
“제가 보기엔 이 마법은 어떤 대상의 정신적 문제를 치료하기 위해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확히 어떤 효과가 필요한지 그 부분을 파악하는 게 쉽지 않더군요. 허락해주시면 마법이 필요한 대상을 직접 보고 판단하고 싶습니다.”
마법을 써야 할 대상을 직접 보고 나면 더 정확한 설계가 가능할 것 같다.
그리 전했을 때였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공녀가 어? 소릴 내었다.
그리곤 잠시 뒤, 얼빠진 얼굴로 손뼉을 치는 게 아니겠는가.
“합격···.”
“합격이요?”
“지금까지 종족을 막론하고 수십 명이 넘는 마법사에게 같은 제안을 했는데 말이야. 그 결론에 하루 만에 도달한 사람은 대령이 처음이거든.”
공녀는 이번엔 정말로 괜찮은 사람을 뽑은 것 같다며 흡족해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에 있던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내주었다.
가죽으로 마감한 붉은 책을 건네받는 순간 나는 살짝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커버 질감이 내가 익히 알던 그것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이거 혹시 사람 가죽은 아니죠?”
“무슨 헛소리야.”
공녀는 꼬릴 흔들어 보이더니 드래곤 가죽으로 장정(裝幀)한 물품이라고 했다.
드래곤도 탈피를 하나?
정기적으로 가죽을 조금씩 벗거나, 죽은 드래곤의 가죽을 이용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건 썩 기분 좋은 물건은 아니었다.
책의 내용은 제국어로 된 마법 사전이었다.
마법진에 쓰인 드래곤족의 문자가 어떤 효과를 내는지, 기존의 문자와는 어떻게 대응하는지, 어제 진하고 공부한 내용이 아주 자세히 적혀 있었다.
‘줄 거면 이걸 어제 같이 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내 눈빛의 뜻을 알아차린 건지 그녀는 머쓱하게 말했다.
“테스트야. 테스트. 대령은 그 책 없이도 답에 도달했지만 말이지. 그리고 대상을 직접 보고 싶다고 한 거 말인데. 문제가 좀 있어.”
“어떤 문제입니까?”
“자세한 설명은···내일 할게. 오래 걸릴 거 같으니까. 나 피곤해.”
“아, 예···.”
-거 어차피 죽으면 평생 잘 텐데 잠 좀 줄이면 안 되나?
입을 쩍 벌리며 하품한 그녀는 잘 자라는 말을 한 뒤 나를 방에서 쫓아내다시피 했다.
나와서 시계를 보니 아직 오전 열 시도 채 안 된 시간이었다.
연구소에 들러 이종족 친구들이랑 담소를 좀 나누고, 점심을 먹기 전엔 통신 패널을 이용해 성으로 연락을 넣어보았다.
조금 웃기는 일이지만 패널엔 황성 곳곳의 연락처가 담겨 있었는데 그중엔 궁중백의 연락처도, 근위기사단의 연락처도 등록되어 있었다.
기사단 번호를 확인하는 순간 나는 그녀가 찾아오길 기다리는 것보다 통화로 사정을 묻는 게 더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패널을 붙잡고 먼저 궁중백에게 연락을 취했다.
일단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온 입장이지만 그래도 말없이 성을 떠난 데 대한 설명을 해둬야 할 것 같아서였다.
<아, 존 메이어 대령이었군. 대강 사정은 알고 있네. 세리스 공녀께서 호출을 했다고.>
“그렇습니다.”
궁중백은 이해한다면서 이 일로 내게 다른 문제가 생기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했다.
<여긴 걱정하지 말고 지내게. 어차피 건국기념일 행사 땐 다시 보게 될 것 같으니.>
“감사합니다.”
궁중백과의 통화 이후엔 근위기사단이었다.
한참 연결음이 흐르고 사무적인 투의 남자가 연락을 받았다.
<근위기사단 3급 기사 리로이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남부 연방군 소속 존 메이어 대령입니다.”
근위기사는 일반적으로 연방군 소속이 아니기에 내 계급과는 상관없이 상호존대가 원칙이었다.
카린처럼 외부 임무를 위해 대령 등의 임시 계급을 부여받지 않으면 오직 기사 계급으로만 남는 셈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전화를 받은 상대의 반응이 조금 떨떠름했다.
<아, 존 대령님이셨군요. 혹시 카린 기사님 때문에 전화 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죄송하지만 기사님이 무척 바쁘셔서 직접 통화 하시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가 기사단으로 찾아가도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무슨 일인지도 알 수 없습니까?”
<제가 설명해드릴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카린과 연결해줄 수 없다며 벽을 치는 기사에게 나는 세리스 공녀가 운영하는 빌딩에 머무르고 있다는 이야기만이라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해드리겠습니다.>
-퍽이나 전해주겠네.
‘대체 왜 이러는 건데?’
-우리가 엘프 데려가고 싶다고 해서 기사단이 뒤집히기라도 했나 보지. 자넨 근위기사의 수치다! 이런 거 있잖아.
‘설마.’
기사단의 수치니 뭐니,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카린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속에서 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물론 그녀가 지닌 힘을 생각하면 어디 가서 당하기만 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풀리지 않는 고민을 잠시 미루고 중앙의 연구를 관찰하며 하루를 다 보냈을 때, 밤과 함께 공녀가 날 찾아왔다.
“가자. 아침에 했던 이야기를 마저 하지.”
나는 군말 없이 공녀의 뒤를 따랐고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빌딩의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분명 지하로 향하는 버튼은 없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VV5610의 지하기지보다 한참이나 더 내려간 엘리베이터가 멈춰선 곳은 어느 식물원이었다.
놀라운 건 하늘에 거대한 태양이 떠 있단 점이었다.
까마득한 천장 위에 인공태양이 식물원 전체를 밝히고 있었다.
“여기가 레하반 타워의 지하 1계층이야.”
“엄청나군요.”
나는 솔직하게 감상을 표현했다.
형형색색의 꽃과 나무들.
하지만 내가 감탄한 이유는 단지 식물의 숫자가 많거나 생김새가 화려해서는 아니었다.
이곳이 대단한 건 이 식물들이 하나하나 마력을 머금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 보기 드문 식물들이로군.
‘전부 아는 것들이야?’
-그럴 리가. 나는 마법의 정령이지 식물학자는 아니라고. 그래도 느껴지는 기운으로 볼 때 좋은 것들이란 정돈 알 수 있지.
내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공녀는 묻지 않았던 것들에 관한 설명을 이어갔다.
반경 5킬로미터의 반구 형태로 지어진 1계층은 지표에 온갖 공격이 일어나도 어지간해선 무너지지 않게끔 대비가 되어있다고 했다.
“설령 제국이 망해도 이곳만 잘 지키면 다시 생태계를 꾸리는 덴 아무 문제 없을걸.”
“개인이 관리하기엔 너무 넓은 것 같은데 관리는 어떻게 합니까?”
“골렘으로.”
공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크고 작은 바위 인간들이 모여 줄을 섰다.
“살아있는 종족은 아니죠?”
“골렘을 몰라? 이건 전부 만들어서 쓰는 거야. 주기적으로 마력 충전도 해주지 않으면 활동을 멈추게 되어있지. 대충 봤으면 다음 계층으로 가자.”
“여길 보여주려고 오신 게 아니었군요.”
“당연히 아니지. 식물원이랑 마법진이 무슨 상관이라고.”
그럼 애초에 여길 왜 보여준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관두기로 했다.
계속 지하 깊이 들어가는 엘리베이터 속에서 흥흥거리며 꼬릴 흔드는 반응으로 볼 때, 공녀는 그저 내게 우리 빌딩이 이만큼이나 크다고 자랑하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그렇게 도착한 제2계층.
2계층은 식물원 정도 크기의 지하 공동이었는데 이렇게나 넓은데도 아무것도 텅 비워진 것이 어쩐지 이상했다.
쓸데없이 크고 넓은 삭막한 공간이었다.
“여긴 뭐라고 부릅니까?”
“음···안방?”
“안방이요?”
“열 살까진 나도 여기서 컸거든.”
가구도 몇 개 없는 이 넓은 공간에서 자랐다는 이야기에 놀라고 있을 때 그녀는 여긴 더 볼 게 없으니 다음 계층으로 가자고 했다.
그렇게 도착한 3계층.
이곳은 식물원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놀라운 곳이었다.
“여긴 말 안 하셔도 뭐 하는 덴지 알겠네요.”
이곳은 보물전이었다.
제국 전체의 보물을 모아둔 것 같은 공간.
금과 은, 각종 보석으로 만든 장신구와 조각상, 명화까지.
이 거대한 공동에 온갖 보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공동의 크기를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대체 그 누가 이만한 보물을 한자리에 모아봤겠는가.
설령 알렉산더 대왕 같은 이도 이만한 보물을 한자리에서 구경하진 못했으리라.
“드래곤은 다들 보물을 모으는 걸 좋아해. 난 그게 바보 같다고 생각하지만 여기 올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걸 보면 나도 같은 피가 흐르는 거지.”
“하나만 가져가면 안 됩니까?”
“일을 무사히 끝내면 하나가 아니라 두 개라도 줄 수 있어.”
-보통은 다 줄 수 있다고 하지 않나?
“어서 가자. 이제 거의 다 왔어.”
그렇게 나는 보물을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
이후에도 엘리베이터는 계속해서 지하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이 정도면 이미 지상의 빌딩 높이보다 한참 전에 깊게 내려온 셈이 되는데 대체 마법진의 비밀이 지하와 무슨 연관이 있나 싶었다.
그때였다.
공녀가 비상 정지 버튼을 이용해 엘리베이터의 이동을 정지시켰다.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그녀가 말했다.
“조금 어지럽지 않아?”
“괜찮은 것 같은데요?”
“이상한데서 뛰어난 능력을 갖췄네.”
그리 말한 공녀는 4계층에 관한 설명을 했다.
“이 아래엔 수련동이 있어. 드래곤이 마법을 수련하는 공간이야. 몇 년 전에 아버지가 바깥에 다녀오셨다가 수련동에 급히 들어가신 이후로 그곳은 더는 접근할 수 없는 공간이 됐지.”
“이유가 뭡니까?”
“엄청난 독이 뿜어져 나오고 있거든. 더 내려가면 나는 몰라도 너는 확실히 죽어. 그래도 직접 보러 갈래?”
“아니요.”
나는 즉답했다.
공녀가 확실히 보장할 정도면 저 아래 엄청난 독이 퍼진 건 확실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대상의 상태를 확인하지 않고선 마법진의 문제도 해결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었다.
-그냥 조금만 더 내려가 보자고 하자. 야금야금 내려가다 힘들면 도로 올라가는 거야.
진은 독의 종류라도 알아야 마법완성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며 조금씩 지하로 파고들어 보자는 제안을 했다.
나는 공녀에게 진의 제안을 그대로 전했고 그녀는 나를 미친놈 보듯 하더니 알겠다며 더 깊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100미터, 200미터···.
생각보다 괜찮은데? 하고 있을 때 진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으아악! 멈춰! 씨팔! 이러다 다 죽어!
왜 그러냐고 물으려는 데 나는 굉장히 생소한 기분을 느꼈다.
아마 태어나서 처음일 것이다.
뇌가 젤리가 돼서 굴러다니는 것 같은 감각.
나는 어어 소릴 내더니 엘리베이터 바닥에 흐느적 주저앉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새빨갛게 변한 엘리베이터 바닥과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라고 외치며 다급히 상승 버튼을 누르는 공녀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