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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군벌가 망나니-79화 (79/134)

< 79화 >

차를 타고 이동해 도착한 곳은 커다랗다는 말로도 모자란 거대한 고성(古城)이었다.

고성은 제국이 수도를 알파로 정하기 전부터 이곳에 있었다고 알려졌을 만큼 유서 깊은 곳이었다.

성에 도착한 이후엔 기사와 시종의 안내를 받아 움직였다.

허리춤에 칼을 차고, 갑옷을 걸치고 움직이는 기사들.

그들의 몸에서 묘한 마력이 느껴졌기에 나는 혹시 이들이 근위기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들의 표정이 워낙 굳어 있어 물어보진 못했지만 말이다.

햇빛이 들어오는 성의 통로.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를 지나 들른 곳은 재단실이었다.

줄자를 든 시종이 내 몸을 이리저리 돌며 치수를 재고 있을 때 외눈안경을 낀 귀족이 내게 다가와 인사했다.

“자네가 존 메이어 대령이로군. 로만 궁중백이라고 하네.”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나이는 50대 후반쯤 됐을까.

자신을 백작이라 밝힌 그는 시종들이 준비한 옷을 보며 끄덕이더니 내가 황제와 만나기 전 준비를 손수 점검했다.

궁중백은 궁중 살림을 도맡는 자로 황성에선 상당히 강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궁중을 관리하기에 자치령 관리는 따로 맡지 않지만, 왕의 측근에서 사무를 돕는 역할이기에 아무나 오를 수 있는 자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궁중백이 궁내 대소사를 관리한다고 해도 이런 일은 보통 시종장 정도선에서 처리될 텐데 이렇게 직접 온 걸 보면 이번 반란 사건에 대해 생각보다 궁중의 관심이 많이 쏠려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복 대신 귀족 예복으로 갈아입은 나를 보며 이 정도면 됐다고 끄덕인 궁중백은 제퍼슨이 내게 했던 경고를 훨씬 더 부드럽게 전해주었다.

“노파심에 하는 이야기지만 자네, 마법을 조금 익혔다고 들었네.”

“그렇···습니다.”

“어쩌면 폐하께서 자네의 힘을 시험해보고자 하실 수도 있네.”

“시험 말입니까?”

“그래. 그럴 땐 절대 거스르려 하지 말고 그저 순리대로 몸을 맡기게.”

궁중백은 자신이 궁궐에서 지낸 십수 년의 세월 동안, 여러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이곳에 오는 것을 보았고 종종 게거품을 물고 나섰다며 나를 은근히 겁주었다.

-호오. 황제가 마법을 좀 쓰나 보지?

궁중백의 말에 진은 호기심을 드러냈고 나는 조금 긴장한 채로 알현실로 향했다.

보통 알현실이라고 하면 기둥이 몇 개 서 있고 앞뒤로 쭉 늘어선 거대한 홀을 떠올리곤 할 텐데 이곳은 특이하게도 좌우에 많은 계단식 좌석이 있어 수많은 귀족이 앉을 수 있게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단순한 알현 이외에도 여러 일을 처리하는 듯싶었다.

-구경꾼이 몇 명 있군.

‘황족인가?’

황제 앞으로 다가서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사람들.

옷차림을 보면 황족이거나, 고위 귀족쯤 되는 이들로 보였다.

알현실 안으로 들어서며 가장 먼저 느낀 건 일단 분위기가 달라졌단 거였다.

몸을 찌를 듯한 투기가 사방에서 날아들었는데 그 원인을 살피니 그곳에 검을 찬 자들이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저들이 근위기사란 걸 알았다.

혹시 카린 대령은 없나 눈을 돌리고 싶었지만 제퍼슨에 이어 궁중백까지 주의를 시킨 터라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진 못하고 나는 묵묵히 앞으로 걸어가 정해진 위치에 무릎을 꿇었다.

“존 메이어가 위대한 제국의 황제를 뵙습니다.”

궁중백이 일러준 대로 으레 하는 인사를 건네자 일어나 고개를 들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제야 나는 옥좌에 앉은 황제의 얼굴을 처음으로 마주 볼 수 있었다.

황금을 녹여 만든 옥좌에 걸터앉은 그의 얼굴은 생각보다 무척 젊어 보였다.

머리는 백발로 새었으나 주름이 없는 피부나 형형한 눈빛은 그를 영락없는 중년 남성으로 보이게 했다.

그제야 나는 새삼 이 우주 시대에 황제라는 존재가 어떻게 버틸 수 있었는지를 다시 한번 실감했다.

헬리오스 황제는 초대 황제만큼은 아니라지만 이미 400년을 넘게 산 괴물이었다.

그런 그가 아직 저만한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황제를 마주하는 자마다 두려움과 경외심을 느꼈다는 게 충분히 이해가 됐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이 드넓은 제국을 통치하는 데 엄청난 부담을 느꼈을 테지만 상대는 이미 인간을 초월한 영역에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어. 카린이다.

진이 외칠 때 나도 마침 그녀를 찾았는데 그녀는 황제의 바로 왼편에 서서 검을 차고 차렷자세를 하고 있었다.

황제의 측근에서 검을 차고 무장 경호.

이것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황제의 신뢰를 받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녀는 웃진 못하고 입꼬리만 조금 씰룩였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뻔한지라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황제를 앞에 두고 갑자기 웃으면 미친놈처럼 보이지 않겠는가?

게다가 내가 이번에 큰 공적을 세운 건 사실이지만 꼬투리를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힐 수 있는 상황이라 황성을 빠져나가기 전까진 항상 조심하는 게 좋았다.

그런데 순간 엄청난 압력이 내 몸을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근위기사들이 나를 향해 쏘던 투기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공격이었다.

-호오, 이놈이?

갑작스런 공격에 진은 이것이 마법이라고 외치며 황제가 나를 마력 위에 올렸다는 말을 했다.

주변이 어두워지며 내 시야엔 황제만이 남게 되었다.

마법으로 마치 공간이 격리된 것처럼 보였는데 인간이 이 정도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내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간 마법을 수련해온 입장에서 이런 일을 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더 잘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존 메이어. 반란군과는 어떤 관계인가.”

황제의 목소리가 내 몸과 머리를 꿰뚫고 울렸다.

-마법으로 자백을 유도하고 있다. 제법 힘을 쓸 줄 아는군.

‘제법은 무슨! 말도 안 되는 힘이구만!’

이 순간, 만약 진이 내 몸을 보호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황제의 물음에 가족관계나 사소한 비밀은 물론이고 내가 이세계에서 전생한 인간이란 사실까지 술술 불어버렸을 터였다.

그만큼 지금 황제가 사용하는 마법은 강렬하고도 위험한 것이었다.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침묵을 오래 유지하고 있으면 의심을 살 것 같았기에 나는 황제의 힘에 제압된 것처럼 입을 열었다.

실제로 반란군과는 아무 관계도 없었지만 말이다.

“갑작스레 마법을 각성하게 되었다고 들었다. 그 이유를 설명해라.”

-별 게 다 궁금하네.

투덜거리는 진과 달리 나는 어떻게 답변해야 좋을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진의 존재에 대해 밝히는 건 영 껄끄러운 부분이 많기 때문이었다.

-지어내기 힘들면 별을 구경하다 마법을 깨우쳤다고 해. 옛날엔 실제로 그런 애들이 꽤 많았으니까.

나는 진의 조언에 따라 답했고 황제는 이후로도 날카로운 질문을 계속 던졌다.

“외계 세력과 접촉해 기술을 전수 받았다고 들었다. 그들은 누구인가.”

“시즈 일족입니다···.”

“놈들이 나에 대해선 뭐라고 했지.”

“황제는 위험한 존재이고 자신들은 함부로 정보를 누설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

답변이 맘에 들었던 걸까.

황제는 조금 흡족한 듯 보였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내 몸은 땀에 젖어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정신은 진이 지켜주고 있으나 강한 압박만은 어찌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버텨. 압박을 해소하면 마법이 먹히지 않았다는 걸 눈치챌 거다.

‘이런 씨팔.’

이러다 다리가 풀려 주저앉는 건 아닐까 염려하던 그때, 황제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제국과 내게 불순한 마음을 품었다면 모두 밝혀라.”

반란군이거나, 반란에 조금이라도 가담했다면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왜 황성에서 혈향이 돌았는지를 느끼며 자세를 바로 했다.

거짓으로 상대를 속일 때는 진실을 섞어야 효과가 있다고 했다.

나는 그간 생각해왔던 제국의 불편함을 솔직하게 드러내기로 했다.

설마하니 이걸로 목을 자르진 않을 거란 믿음도 있었다.

“중앙은···통치를 위해 타 경계의 발전을 너무 심하게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외부에서 오는 적을 효과적으로 물리칠 수 없으니 이는 제국 전체로 보면 명백한 손해라고 생각했습니다.”

“중앙의 통치나, 나에 대해 불만을 품은 적은 없더냐.”

“그런 적은 추호도 없습니다. 제 목숨은 오직 제국과 폐하를 위해 존재합니다!”

-연기가 아주 일품이구만···.

내 답변을 마지막으로 숨 막히던 시간이 끝났다.

검은 장막이 흩어지더니 몸을 조이던 압박감 또한 사라졌다.

다시 정상으로 돌아온 풍경에 나는 말 없이 눈을 깜빡였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몸 전체가 무겁게만 느껴졌다.

“존 메이어.”

“예. 폐하.”

“이번 반란에 적지 않은 공을 세웠다고 들었다.”

“아닙니다. 폐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겸손이 과하군. 외계 세력과 만나고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은 죄는 무거우나 공이 그 과를 덮을 만큼 크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들어주겠다. 말해 보아라.”

-어? 이건 변순데?

황제가 직접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이야기를 할 줄이야.

다른 이도 아닌 제국의 황제였다.

정말 어지간한 부탁은 다 들어줄 것이었기에 나는 순간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자치령을 달라고 할까? 아니지 이건 이미 평의회가 준다고 했고. 진급? 대장을 달아달라고 하는 건 좀 그런가? 초중전함을 타게 해달라고 하면?

진의 말을 들으며 최대한 열심히 머릴 굴릴 때였다.

근위기사들 외에 황제의 가장 앞쪽에 서 있던 인물이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며 황제에게 발언을 요청했다.

칙칙한 검은 제복을 걸치고 있는 것이 아마 이단심문소에 속한 인물이 분명했다.

“말하라.”

“폐하. 신 게오르그가 폐하께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존 메이어는 외계 세력과의 접촉을 숨긴 것 이외에도 다른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무엇인가.”

-저 새낀 또 뭐야. 고자질쟁이인가?

“대령은 남부의 전쟁을 이용해 백기사를 본떠 그라프를 제조한 죄가 있습니다.”

“흐음.”

“중앙의 기술을 몰래 훔쳐 자신의 사욕을 채우려 했을 가능성이 있으니 이는 엄히 처벌해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됩니다.”

망할놈의 이단심문관.

이단심문소와 얽힌 놈들은 죄다 맘에 안 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황제가 내게 물었다.

“존 메이어.”

“예, 폐하.”

“그대는 앞으로 중앙에서 활동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계속 기술 연구를 하고 싶다면 중앙에서 그 뜻을 펼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올 게 왔구만···.

인재란 인재는 모조리 빨아가 가둬버린다는 중앙의 소문이 사실로 드러났다.

평의회에서도 VV5610을 주겠다고 하는 마당에 이곳에 남고 싶진 않았다.

마법으로 사람의 정신을 쏙 빼놓는 황제와 걸핏하면 물고 늘어지는 이단심문관까지.

카린을 빼면 중앙은 별로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곳이었다.

“원한다면 자릴 만들어주겠다.”

“폐하···.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하라.”

“외람되오나 아직 남부에서 마치지 못한 일들이 있습니다. 일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무슨 일인지 말하라.”

“아직 남부는 융족과 전쟁이 진행 중이고 반란군과의 전쟁으로 내부 전력이 많이 상해 정세가 안정된 상태가 아닙니다. 또한 오크와 파이칼, 크릭을 새로이 남부의 일원으로 흡수하는 과정에서 군 수뇌부는 융족 영토 너머에 운카라라 불리는 대형 세력이 존재한다는 정보 또한 입수했습니다. 이들은 다른 종족에게 자신들의 화폐를 유통할 만큼 강한 세력으로 추측됩니다.”

나는 전쟁이 끝나면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알리며 안정된 중앙보단 불안정 요소가 남은 남부에서 일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함선을 타고 오며 살펴보니 중앙은 모든 게 안정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만약 이곳에서 기술 개발을 한다면 안전히 공을 세울 수 있겠으나···. 그보다는 전장에 나서 제국과 폐하를 위해 제 목숨을 바칠 수 있길 원합니다.”

내가 말을 마치자 이단심문관은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한다며 코웃음을 쳤지만 황제는 굳이 마음이 그렇다면 중앙에 붙잡아 두진 않겠다는 뜻을 비쳤다.

‘됐다!’

일단 중앙에 붙들리지 않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답변이 된 셈이었다.

실피드 제조 건도 딱히 문제 삼지 않으려는 분위기인 듯하고, 일이 잘 풀리는 것 같다고 생각할 때 황제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하지만 남부로 복귀하는 건 상이라고 할 수 없는 일이다. 공을 세운 자에게 아무것도 내리지 않는 것 또한 제국의 명성을 해치는 일, 원하는 것이 있다면 편히 말해도 좋다. 당장 생각나지 않는다면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

황제는 일주일 뒤, 황성에서 건국기념일 축하연이 있을 예정이라 시간의 여유가 충분하다는 말을 전했다.

-일주일 동안 뭐 부탁할지 생각해보면 되겠네.

그 순간, 나는 황제 뒤편에 꼿꼿이 서 있던 카린 대령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힐끔 나를 쳐다보는 그녀.

우연히 시선이 마주친 때에 나는 머릿속에 번뜩임을 느끼고선 공손히 입을 열었다.

“폐하. 그럼 청컨대 부탁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고민할 시간이 필요 없었던 모양이구나. 말하라.”

“사람을 한 명 내어주셨으면 합니다.”

사람을 내어달라.

그 이야기에 주변 분위기가 다소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다들 예상치 못한 발언임엔 분명했다.

“사람을 내어달라? 원하는 게 진급이나 자치령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좋다. 누군지 말하라.”

“예, 폐하. 제가 원하는 이는 근위기사이며 특무함 레기온호에 배속된 카린 대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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