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익스큐터급 초중전함.
전장 6700미터, 전고 1320미터.
승조원만 5만 명이 넘는 이 거대 함선은 제국에도 단 다섯 대밖에 없는 매우 귀한 자산이었다.
제국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초중전함을 운영하는 이들은 중앙과 각 방면의 원수들.
오직 황제의 허락을 받은 자들만이 이 거대한 함선을 지휘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당대 최고의 기술과 장갑으로 무장한, 신의 함선이라 불려도 부족함이 없는 초중전함은 황제를 대신해 움직이는 원수의 위엄을 드높이는 역할을 했으나 지금 남부에서는 그저 수뇌부의 골치를 썩이게 만드는 원인에 불과했다.
-엄청나게 단단하군.
‘역시 중앙제라 이건가?’
수뇌부로부터 기밀문서를 전해 받은 나는 오스카 원수의 초중전함 스펙을 살피고 있었다.
작전 개시까지는 24시간 남은 상황.
엔터프라이즈호는 전투가 시작되면 스텔스 기능을 이용해 지휘선을 직접 공략할 참이었는데 중앙에서 건조된 초중전함은 주포를 정통으로 맞더라도 무너지지 않는 견고함을 자랑했다.
문서를 검토한 결과 나는 기존의 정면 전투 방식으론 초중전함을 공략하기 힘들다는 판단을 내렸다.
일단 녀석도 전함이기에 주포를 맨 장갑에 퍼부으면 결국 무너지긴 하겠지만 그 크기에 걸맞게 실드의 총량이 상당했다.
장갑 타격을 논하기 전에 먼저 실드를 뚫어야 한다는 건데 지휘선을 지킬 반란군 전투함들을 다 격침하기 전까지 그것이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작전 당일이 되면 엄청난 숫자의 호위함이 초중전함을 둘러싸고 있을 터였다.
아군 전투기가 미사일을 퍼붓거나 주포를 맞출 수 있는 상황이 나오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후미는 그래도 실드가 약하니 엔터프라이즈호를 이용해 접근해 주포와 미사일을 사용하면 뚫리긴 할 거다.
‘그동안 우리가 벌집이 되지 않는다면 말이지.’
그렇게 진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머리를 싸매는 동안 어느새 우린 작전 개시의 때를 맞이했다.
*
니케아를 등 뒤에 두고 배수진을 편 반란군과 마주하게 된 연방군.
주포 바깥의 사거리를 유지한 채 일자진을 편 양쪽의 긴장감이 빠르게 고조되는 모양새였다.
서서히 양측의 거리가 가까워지며 곧 전투가 시작될 거란 걸 알 수 있었다.
엔터프라이즈호는 양쪽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스텔스 기능을 발동한 채로 옆으로 한걸음 빠져 지켜보고 있었다.
장갑과 실드가 두꺼운 전함이 머리를 내밀던 그때, 양쪽에서 마지막 통신을 시작했다.
처음 이야기를 시작한 건 오스카 원수였다.
<아직도 중앙 황실을 따른다고 외치며 무고한 피를 흘리려는 자들은 들으라! 숱한 위기를 함께하며 어려움을 견딘 형제끼리 무고한 희생을 치러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지금이라도 우리는 힘을 합쳐 남부의 평화를 도모해야 할 것이다.>
끝까지 항복과 회유를 권하는 내용이었다.
물론 각 군단 대장들의 명령으로 이 통신을 수신하는 전투함은 거의 없었다.
상대에게서 오는 어떤 통신도 들을 필요가 없으며 철저히 무시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우리도 들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안 되지.’
이는 휘하 병사들이 동요하거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인데 적어도 엔터프라이즈호는 이 문제에서 상당히 자유로운 편에 속했다.
연속된 작전 성공으로 부하들의 충성심이 매우 드높은 상태였던 것.
이들은 내가 하는 일이 결국 옳은 방향이라고 믿었고 만약 내가 반란에 가담하자고 해도 기꺼이 따를 정도로 나에 대한 신뢰가 대단한 친구들이었다.
그렇게 오스카 원수가 방송을 흘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연방군 측에서도 반격을 위한 메시지를 뿌리기 시작했다.
<제국 황실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수많은 시민을 볼모로 잡아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는 파렴치한 반란군은 들어라!>
연방군 대장들은 반란군을 탐욕과 권력욕에 눈이 멀어 저질러선 안 될 짓을 한 무리들이라고 매도했고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인도적으로 대할 것을 약속하며 반란군 회유에 나섰다.
물론 반란군 역시 우리의 통신을 수신하는 전투함은 거의 없었기에 별 소득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한창을 떠들고 나서야 양측은 거릴 좁히며 본격적인 전투에 돌입했다.
전투함 중 가장 사거리가 긴 건 전함.
일자진에서 머리를 앞으로 뺀 전함이 일제히 빛의 창을 발사하고 얼마 뒤, 양쪽 진형에서 대폭발이 일어나며 교전이 시작됐다.
장애물이 없는 우주 공간에서의 함대전이라는 건 생각보다 단순해서 전투함은 주포를 쏘고, 이후엔 전투기가 얽히는 양상으로 진행되는 게 대다수였다.
그러나 전투가 단순하다고 해서 이를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마저 단순해질 수는 없었다.
전함의 승조원은 7천 명 전후.
지금 일어나는 불꽃 하나마다 죄 없는 연방 군인의 생명이 꺼져가고 있었다.
“전속 전진! 본 함은 지금부터 오스카 원수가 타고 있을 지휘선의 뒤를 잡는다.”
“예!”
엔진의 푸른 불꽃과 함께 선회해 들어가는 엔터프라이즈호.
이미 얽히기 시작한 전투기 싸움에선 연방군이 다소 밀리는 양상이었다.
전투함의 숫자는 우리가 2만 척 정도가 더 많아 유리하게 시작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온 건 역시 AI 때문이었다.
AI의 조종 실력은 연방군 전투 장교의 평균 실력보다 훨씬 우위에 있었고 이 차이가 곧장 실전에서 드러난 것이었다.
이 와중에도 오스카 원수는 끊임없이 쓸데없는 피를 흘릴 필요가 있느냐며 계속 항복을 권유하고 있었다.
조금 전 전함간 주포 교환만 봐도 그랬다.
연방군 측은 전함이 하나 터질 때마다 수천 명의 목숨이 사라졌지만 반란군 측은 최소 인원만을 대동하고 나머진 인력은 모두 AI로 교체해 사상자의 수가 훨씬 적었다.
오죽하면 나도 이때만큼은 연방군도 AI를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AI가 없었다면 오스카 원수도 반란을 꿈꾸지 못했을 테고 이전에도 기계 병사 때문에 제국 전역이 피로 물들었던 걸 생각하면 황실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는 되었다.
-위선자 새끼들. 지금 누구 때문에 군인들이 죽어 나가고 있는데 저딴 소릴···.
나 역시 같은 의견이었다.
기계 병사로 아군을 죽이고 있는 오스카 원수가 할 소린 아니라고 생각한 나는 전속력으로 엔터프라이즈호를 몰아 초중전함에 접근했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아군 전투기들이 초중전함까지 접근해 다수의 미사일 타격으로 실드를 조금이라도 줄여주기로 계획이 되어있었지만 정작 전투가 시작되자 제공권 장악은 오히려 반란군이 우세에 있는 형편이었다.
접근은커녕 밀리기 시작한 아군을 보며 편대 원들은 답답했는지 출격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다.
<함장님. 저희가 직접 목표 타격에 나서겠습니다!>
엔터프라이즈호의 전투기 숫자는 110대.
이클립스 미사일을 장착하고 퍼부으면 당연히 도움이야 되겠지만 지금 목표는 반란군 한복판에 있었다.
적의 레이더망을 피할 수 있는 건 엔터프라이즈호만이었기에 이대로 전투기 출격 명령을 내리면 사실상 전투 장교들은 살아 돌아올 확률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안 된다. 지금 출격하면 1분도 버티지 못하고 격추당할 거다.”
<하지만 이대로 지켜본다고 해결되는 것도 없지 않습니까!>
이들이라고 출격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는 건 아닐 터였다.
지금 상황에서 나서면 누가 봐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거란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다만 이들은 아군 전투기가 무력하게 쓸리는 상황을 보고 있기 힘든 것뿐이었다.
이를 악무는 편대원에게 나는 조금만 더 기다릴 것을 명했다.
“곧 시간이 된다. 조금만 기다려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의문을 표하는 찰스 소령.
잠시 뒤, 기세에서 밀린 연방군이 서서히 함대를 뒤로 빼자 반란군 진형도 조금씩 몸이 앞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반란군과 니케아와의 거리는 멀어지게 되었는데 바로 이때, 빛이 번쩍이며 수백 척에 달하는 전투함이 니케아와 반란군 사이에 워프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대령. 놈들이 공간을 쉽게 내주지 않아서 말이지.>
“아닙니다. 제때 와주셨습니다. 소장님.”
수백 척의 별동대를 이끌고 나타난 건 바로 마이클 소장이었다.
50척의 전함을 필두로 독립 임무를 맡은 그의 역할은 후방으로 워프, 초중전함으로 가는 길을 여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지난 하루 동안 진과 머릴 싸매고 고민한 작전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중력 때문에 더 많은 함선을 대동하지 못한 게 아쉽군.
본래 공간 도약은 출발지와 도착지 모두 중력의 영향이 없는 공간에서 진행하는 게 원칙이었다.
중력이 도약 중인 함선에 영향을 끼치면 자칫 차원의 미아가 되거나 폭사하는 경우가 왕왕 일어나는 탓이었다.
괜히 반란군이 니케아를 뒤에 끼고 진을 펼친 게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워프를 했다는 건 마이클 소장을 필두로 한 별동대의 모든 인원이 이번 작전에 목숨을 걸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전 함대! 주포 발사!>
푸른 빛을 뿜으며 적의 후방을 거침없이 타격하기 시작한 마이클 소장의 선단.
갑작스레 후방을 점한 연방군에 이번만큼은 반란군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함대 후미는 실드가 약한 부분이기에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휘선이 공격에 노출되었다!>
<각 함대는 급한 대로 몸을 대고 막아라!>
이미 반란군 통신 채널은 오스카 원수를 지키라는 소리로 난리였다.
해킹으로 적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감청한 진은 때가 되었음을 알렸다.
-길이 열렸다.
“엔터프라이즈호의 모든 전투기는 아군의 움직임에 맞추어 초중전함 공략에 임한다.”
<라저!>
비행포드를 열며 전투기 출격을 준비하는 엔터프라이즈호.
그러나 가장 먼저 앞선 건 전투기가 아니었다.
캐터펄트를 밟고 미끄러진 실피드가 튀어나와 불을 뿜자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아군이었다.
<저거 설마 그라프인가?>
<존 대령이 그라프를 숨겨두고 있었다!>
급격히 치솟기 시작하는 주변 통신량.
그리고 곧이어 반란군 역시 실피드의 존재를 눈치채고는 호들갑을 떨며 대공포를 겨누기 시작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라프는 전부 중앙으로 돌아간 게 아니었나?!>
<막, 막아라! 전 함대! 최우선으로 그라프를 막아야 한다!>
그와 동시에 실피드는 등 뒤에서 금빛 쌍원을 퍼트리며 존재감을 과시했는데 이를 본 반란군은 혼란이 더욱 극대화되었다.
반란군 함대를 이끄는 이들 중 상당수는 이미 카린 대령의 그라프가 자아내는 위력을 잘 아는 이들이었다.
-이게 정말 되네?
‘내가 먹힐 거라고 했잖아.’
카린이 황금 원을 만들며 날 때마다 융족의 전투함이 두부처럼 썰렸으니 이들도 자연스레 그때의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터였다.
물론 실피드는 그만한 위력을 낼 수 없었고 쌍원 따위 아무 의미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내가 일부러 이런 연출을 한 건 적의 시선을 전부 내게 끌어오기 위함이었다.
‘내가 시선을 끄는 만큼 아군이 전투하기 훨씬 편할 것이다.’
실피드가 긴 꼬리를 그리며 초중전함을 향해 쇄도하자 반란군은 앞쪽에서 연방군 본대를 상대하다 말고 전투기를 불러들여 내게 쏟아붓기 시작했다.
AI가 컨트롤하는 전투기 수백 대가 레이저 기총을 쏘며 달려드는 무서운 광경.
그러나 지금 나는 전투기 조종사가 아닌 그라프 파일럿이었다.
아무리 시험기라고 해도 그라프는 그라프.
순간 전투기의 두 배에 달하는 속도로 솟구치며 추격을 떨쳐낸 나는 엔터프라이즈호에서 제조한 EMP탄을 사출하며 반란군 전투기를 무력화시켰다.
거대한 파장과 동시에 추력을 잃는 적 전투기들.
이는 보통의 EMP탄에 융족이 쓰던 것과 같은 원리의 마법을 가미한 특수탄으로 오랜만에 직접 마력 주입기를 잡고 만든 따끈따끈한 무기였다.
실피드가 이리저리 날뛰며 순식간에 천대가 넘는 전투기를 다운시키자 반란군은 더욱 겁을 먹고 주포를 쏘기 시작했다.
이는 전투기를 잡자고 주포를 쏘는 격이었는데 애초 주포는 선회 능력이 뛰어나고 몸집이 작은 전투기를 상대로는 맞추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물며 실피드는 전투기보다도 순간 속도가 더 빨랐으니 이런 공격에 당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쏟아지는 섬광을 누비며 적 본대에 도달한 실피드가 마침내 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상태는 완벽하다. 그대로 휘둘러라!
증폭기를 거치며 극대화한 마력이 검을 타고 흐름과 동시에 적 전투함의 장갑을 꿰뚫었다.
실피드의 첫 공격을 받아낸 건 반란군 전함.
그나마 승조원이 거의 없고 기계 병사가 그 자릴 대체한다는 것은 내게 망설임 없이 공격을 휘두를 수 있게 해주었다.
콰드드득-
불꽃과 함께 잘린 장갑.
목적한 바를 이룬 나는 그 틈새로 미사일을 한 발 던져 넣으며 다시 쌍원을 펼쳤다.
거대한 폭발.
내부에서부터 일어난 폭발에 전함은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휘기 시작했고 이내 추가 폭발을 일으키며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첫 출격이라고 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순조로운 활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