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
행성 하콘.
하콘은 남부 은하가 처음 개발되었던 제국 초기부터 남부의 심장 역할을 해왔다.
흔히 사람들은 심장이라 하면 평의회가 위치한 니케아를 떠올리지만 하콘은 니케아와는 그 성격이 매우 달랐다.
니케아가 남부의 대소사를 결정하기 위해 의원들이 머릴 맞대고 토론하는, 회의의 장이었다고 하면 하콘은 남부를 유지하기 위한 힘을 만드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오크의 쌍둥이 행성과 마찬가지로 하콘은 행성 전체가 공장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난 수천 년간 연방군에서 쓰인 각종 전투함, 미사일, 전략 무기의 상당수가 이곳에서 제조되었다.
제국이 발전함에 따라 더 많은 자치령이 생겨나고, 수많은 군수 기업이 태동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하콘이 남부에서 중요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변함이 없었다.
당장 하콘이 없어진다면 연방군 보급 일정에 엄청난 차질이 일어날 거란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에 오스카 원수는 반란 선포 당일, 자신이 직접 평의회를 점거하는 동안 하콘으로 베이몬드 대장을 파견해 양면 작전을 펼쳤다.
반란군이 소모하는 전략 무기 상당수를 하콘에서 끌어올 심산이었던 것이다.
베이몬드 대장은 오스카 원수의 오른팔 격인 인물로 원수파 내에선 그 입지가 무척이나 단단한 자였다.
그를 통해 작전을 진행한 것만 봐도 오스카 원수가 하콘 확보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란군은 하콘을 손에 넣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제국에 운이 따랐던 것인지 본래라면 그곳에 있을 리 없던 헥터 로메로가 이끄는 군단이 공간 도약 거리 내에 있었던 것.
헥터 대장은 제국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깊은 자로 오스카 원수의 반란 선언을 듣자마자 하콘을 지키기 위해 일말의 망설임 없이 공간 도약을 시도했다.
하콘에 도착했을 땐 이미 베이몬드 대장이 하콘에 대한 무력 점령을 마친 상태였으나 헥터 대장은 망설임 없이 전투를 시작했다.
하콘의 저항이 거세 반란군이 행성 방어 시스템을 제때 복구하지 못한 점은 헥터 대장에겐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만약 대비를 끝마쳤다면 아무리 헥터 대장이 용맹하다 한들 전투는 패배하고 말았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시작된 군단 전투에서 헥터 대장은 하콘을 다시 탈환, 반란군에게 뼈아픈 일격을 선사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전투가 이번 반란의 주요 분기점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었다.
만약 오스카 원수가 계획대로 하콘을 손에 넣었다면 지금쯤 남부 전역에 더 많은 AI와 기계 병사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
-그래서 존. 네 생각은 오스카 원수가 하콘을 칠 것이다?
‘내 생각은 그래.’
-지금껏 놔두다가 왜 이제 와서? 큰 피해를 예상해서 관망하던 것 아니었나?
베이몬드 대장의 패배 이후 오스카 원수는 하콘의 점령을 미루고 상황을 좀 더 지켜보는 쪽을 택했다.
오스카 원수가 패배 소식을 접했을 땐 이미 헥터 대장이 하콘의 방어 시스템 정비를 마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헥터 대장은 승리 이후 자신의 인맥을 총 동원해 연방군의 인근 남은 세력을 모조리 하콘으로 불러들였고 하콘을 철옹성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아무리 원수 휘하 경계군이 강하다 한들 하콘을 무력으로 점령하려면 엄청난 피해를 각오해야 했다.
전투의 상당 부분이야 AI에 맡기면 된다지만 부서진 전투함은 단기간에 복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오스카 원수는 하콘을 직접 공략하는 대신 주변 행성을 차근차근 점거해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하는 쪽으로 작전을 바꾸었다.
반란군이 좀 더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기 전까진 큰 전투를 피하는 움직임이었다.
진은 이 부분을 지적했다.
이제 곧 전선에서 돌아오는 연방군을 상대해야 할 오스카 원수가 지금 하콘으로 향해 전투를 시작하면 향후 전투에서 더욱 불리해질 거란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않겠느냐는 거였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하콘을 넘겨주고 싶지 않을 테니까.’
하콘은 남부의 심장이라 불릴 만큼 막대한 양의 보급품을 생산해내는 곳이다.
곧 전선의 대군이 들이닥칠 상황에서 오스카 원수에겐 보이지 않는 시간제한이 걸리게 된 셈.
수세에 몰린 상태에서 국면이 장기화하면 하콘을 차지한 연방군이 더욱 유리해질 거란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잠깐! 오스카 원수가 하콘을 치러 가는 거면 우리는 왜 따라가야 하는 거야!
진은 대군에 맞서 고작 순양함 한 대가 할 수 있는 일이 뭐 있겠느냐며 공간 도약을 극구 반대했다.
‘위험을 알려야 할 거 아니야.’
-아니! 지금까지 한 일만 해도 충분히 위험했어! 하콘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헥터 대장이 알아서 잘 지키겠지. 신경 쓰지 말자.
‘우리가 안가면 다 죽어.’
다 죽는다는 말에 진은 침묵을 지켰다.
진도 헥터 대장이 이길 거라곤 생각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무리 행성 방어 시스템을 끼고 있다 한들 하콘은 반란 이후로 쭉 고립된 상태였다.
주변 자치령을 장악해 통신과 식량 보급로를 막아버린 것이다.
‘하콘은 공장형 행성이야. 전략 자산 외의 사정은 그리 좋지 않겠지. 통신까지 단절되어서 바깥 상황도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모를 테고.’
그리고 앞으로 있을 반란군 잔당과의 전면전을 생각하면 헥터 대장의 군단을 무사히 전선의 연방군과 합류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게다가 전투가 시작되면 죽을 인명 피해는 가늠하기도 어려운 수준이었다.
일단 헥터 대장의 군단만 하더라도 군인이 수백만 명에 달했고 하콘이 고향인 자들과 이주 노동자들을 떠올리면 수억 명에 달하는 사람의 목숨이 위험했다.
내가 아무런 능력이 없다면 모르겠지만 엔터프라이즈호엔 이미 반란군의 포위망을 뚫고 들어가 위험을 알릴 능력이 충분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저들의 위험을 모른 척한다는 건 지성인으로서 못 할 짓이라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누가 말리겠어. 맘대로 해. 대신 전면전은 하지 말자. 그건 진짜 자살이라고.
‘나도 목숨 아까운 줄은 알아.’
스텔스 하나만 믿고 4개 군단에 이르는 반란군과 전투를 벌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랬다간 엔터프라이즈호는 우주의 먼지행 확정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 뒤, 대군을 움직이느라 엉덩이가 무거운 오스카 원수보다 우리가 먼저 하콘 인근으로 워프를 개시하게 되었다.
하콘으로 단번에 도약할 수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테지만 헥터 대장은 VV5610때와 마찬가지로 워프를 막기 위해 엄청난 양의 기뢰를 뿌려둔 터였다.
“스텔스 기능을 유지한 채 하콘으로 진입한다.”
“알겠습니다.”
이미 하콘은 고립된 지 오래.
수시로 돌아다니는 반란군 전투함을 어렵지 않게 마주칠 수 있었다.
이들은 하콘의 통신을 방해하는 한편 대군의 움직임을 감시하기 위한 일종의 정탐 역할을 겸하고 있었다.
만약 워프를 끝낸 함선이 엔터프라이즈호가 아니라 평범한 연방군 전투함이었더라면.
우리는 워프를 마치자마자 사방에서 몰려드는 반란군과 전투를 벌이다 장렬히 사망하는 결말을 맞이했으리라.
그렇게 언제 오스카 원수가 뒤에서 쫓아올지 노심초사하며 하콘에 가까워졌을 때, 우린 스텔스 기능을 유지한 채 통신을 요청했다.
갑자기 은신을 풀었다가 적으로 오인한 연방군이 우릴 잿더미로 만들까 염려돼서였다.
갑작스런 통신 요청에 하콘에 주둔한 연방군이 매우 놀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연방군의 대장급에게만 주어지는 최고등급의 보안코드를 무려 세 개나 받아왔으니 말이다.
모리더스 대장, 콜린 대장, 라함 대장이 공유한 인증 코드는 엔터프라이즈호의 확실한 신원을 보장했다.
다만 걱정되는 부분이 있다면 하콘은 통신 차단을 당한 지 오래라 전선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할 거란 점이었다.
만약 저쪽에서 모든 대장급 장성들이 이미 반란군에게 포섭됐다고 생각하면 이 코드는 무용지물이 되는 셈이다.
특히 헥터 대장의 의견이 중요했다.
그가 코드를 발급한 대장들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느냐가 이번 일의 성패를 가르게는 상황.
잠시 뒤, 오퍼레이터를 물리고 직접 통신을 연결한 헥터 대장이 화면에 나타났다.
<자네가···존 메이어 대령이라고?>
“충성. 예. 그렇습니다.”
<코드의 진위는 의심치 않네. 확실한 전선 군단장들의 것이로군. 그런데 대체 어디서 통신을 하는 건가. 이 주변은 이미 반란군이 쫙 깔려 전파 방해가 되고 있을 텐데?>
헥터 대장은 매우 의심스럽단 얼굴로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저 인간 저거 행성 방어 시스템으로 우리 조지는 거 아니야?
위치가 노출되면 버튼 하나로 미사일과 레이저 수만 발이 날아들 수 있는 상황.
나는 다급히 엔터프라이즈 호의 작전 안을 공유하며 스텔스 기능에 관해 설명했다.
<맙소사. 레이더에도 걸리지 않는 스텔스 기능이라고?>
“지금 은신을 해제하겠습니다.”
위장막이 걷히며 하콘 궤도 위에 나타난 엔터프라이즈호.
이때만큼은 헥터 대장도 정말 크게 놀란 것처럼 보였다.
얼마나 놀랐는지 대장의 주변에 있던 장성과 오퍼레이터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화면 너머로 생생하게 들렸다.
<전투함들을 올려보낼 테니 안내를 받아 착륙하게.>
“알겠습니다.”
이럴 시간이 없다고 하고 싶었지만 계속 반란군을 방어하느라 날이 선 이들이었기에 일단은 뜻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당장 하콘을 버리고 후퇴해야 한다고 하면 오스카 원수가 보낸 첩자로 여겨져 공격을 받고도 남을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전함 사이에 끼어 지표로 내려가게 된 우리는 활주로에 착륙하게 되었다.
수많은 군단 전투함이 줄을 맞추어 늘어선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존 메이어 대령. 영상으로 보던 것과 똑같이 생겼군.”
준장과 함께 나온 영관장교들.
그들은 엔터프라이즈호에서 내린 나를 관용차에 태웠다.
현재 헥터 대장은 하콘의 방어를 총괄하는 방어 기지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벙커에 입성해 회의실에 들어서자 헥터 장군 휘하 장성들이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정말로 내가 반란군은 아닌지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어서 오게. 존 메이어 대령. 남부의 심장에 온 것을 환영하지.”
“충성. 2군단 11사단 1연대···.”
“관등성명은 됐네. 이쪽으로 와서 앉게.”
헥터 로메로.
검은 피부에 오른쪽 눈과 팔을 의안과 의수로 교체한 그는 마치 맹수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자였다.
그는 장군들 틈바구니, 자신과 가까운 의자 하나를 비워두고 나를 앉히고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네가 이곳으로 오는 동안 공유한 작전안을 살펴봤네. 말도 안 되는 내용이 담겨있더군.”
처음 보는 자들은 다들 비슷한 반응이었다.
결국, 모리더스 대장도 그것 말고는 별 뾰족한 수가 없어 허락했지만 말이다.
“바깥에 있는 엔터프라이즈호가 그 완벽한 스텔스함인가?”
“그렇습니다.”
“작전은···어디까지 진행되었나.”
작전 단계는 크게 두 가지.
VV5610 점령과 니케아에서 원수의 거짓 성명을 내는 전반과 후반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재빨리 이미 모든 작전이 완료되었다고 답하자 헥터 대장의 눈동자가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정말로 니케아의 통신 센터를 장악해 반란군을 와해시켰단 말인가?”
“남부 상황은 어떠한가. 연방군이 다시 승기를 잡은 것인가?”
“평의회 상황은 어떤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사방에서 날아드는 질문들.
중장이고 소장이고 가릴 것 없이 다들 바깥의 정보에 목이 말라 있었다.
“외람되지만 제일 급한 용건부터 말씀 올리겠습니다.”
“어서 말하게.”
“니케아의 통신 센터 장악으로 앞으로 2시간 이상 반란군 전투함 상당수에 기능 문제가 생긴 상황입니다. 전선에 있던 군단은 전부 후방으로 도약해 반란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되었군! 되었어!”
헥터 대장이 테이블을 주먹으로 치며 환호하자 주변 장성들도 함께 환호했다.
연방군이 승기를 잡았다는 정보는 이들이 무엇보다 간절히 기다렸던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장님.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니케아에서 워프하기 전 정보로 미루어볼 때 반란군 경계함대가 하콘을 공략을 준비 중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달아오르던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단숨에 사그라들었다.
“그게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오스카 원수가···.”
“반란군이라고 하게.”
“반란군이 4개 군단에 이르는 함대에 대규모 워프를 지시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대장님. 지금 당장 전투함을 궤도로 올려보내 반격을 준비하시죠.”
“역적놈의 새끼들! 대장님! 이번 기회를 통해 다 쓸어버리는 게 좋겠습니다!”
-아니 이 사람들이···?
진은 사태 파악을 못 하는 장군들을 보며 혀를 찼다.
오스카 원수의 경계 함대는 남방군에서도 가장 강한 주력 군단이었다.
최신예 함대와 AI, 기계 병사로 무장한 4개 군단이면 아무리 하콘을 끼고 있어도 이곳 병력만으론 상대하기가 어려울 게 분명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전투태세를 발동해야 한다는 장성들.
그러나 헥터 대장만은 눈을 감은 채 고민에 잠겨 있었다.
“대령.”
“예. 대장님.”
“자네 생각을 듣고 싶군. 단순히 태세를 견고히 하라고 기뢰 밭을 뚫고 이곳까지 오진 않았을 것 같은데.”
“그럼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헥터 대장이 고갤 끄덕였다.
“지금도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신속히 군단을 추슬러 전선에서 복귀하는 군단과 합류하는 것이 유리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사방에서 날 선 목소리들이 튀어나왔다.
“자네,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겐가!”
“우리가 하콘을 지키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고생한 줄은 알고 그런 소릴 하는 게야!”
“대장님. 항전하시지요. 이대로 물러날 필요 없습니다. 하콘엔 아직 많은 전략 물자가 남아있고 충분히 반란군을 제압할 수 있을 겁니다.”
수십 명의 장군이 동조하며 항전 의지를 불태우는 상황.
헥터 대장은 옅은 신음을 흘리더니 내게 퇴각을 권한 이유를 물었다.
“후퇴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전선의 군단과 합쳐 세를 불리는 것이 앞으로 흘릴 피를 줄이며 반란군을 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하콘을···이대로 넘겨주자는 것인가?”
씁쓸한 헥터 대장의 말에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곳에 남은 전략 물자가 상당한 줄로 압니다.”
“그렇네.”
“모두 불태워 버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