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크라켄의 핵을 이용해 그라프를 만드는 것.
중심 부품의 질적 차이로 카린 대령의 그라프와 비교하면 상당히 열화된 것이 만들어질 테지만 첫술에 배부르길 기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 그라프 제작 프로젝트의 목적은 언젠가 더 좋은 재료를 구할 수 있을 때를 대비해 미리 기술을 확보하자는 취지가 강했다.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을 것을 안다고 해서 시작을 않는다면 정작 기술이 필요할 때 손가락만 빠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었다.
어떤 기술은 한순간에 탄생하는 것이 아닌, 꾸준한 시간과 공을 들여야만 완성할 수 있음을 나는 잘 알았다.
즉, 이번 작업은 앞으로 있을 미래를 내다보고 진행하는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함선은 어떻게 할까.’
연구단지 지하에서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사이, 나는 새로운 고민을 안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대령으로 진급하며 전함을 좀 더 일찍 끌어올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보통 연방군으로부터 전함을 보급받게 되는 시기는 장성 진급 이후다.
하지만 정작 진급을 하더라도 최신의 함선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고 누군가의 손을 탄 중고 전함이 오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전함은 한 척당 건조 비용이 100조 크레딧에 이르는 연방군 최고의 전략 자산.
조종 장교를 통틀어 장성 계급에 도달하는 인원이 적다곤 하나 그렇다고 덥석 안겨주기엔 연방군으로서도 확실히 부담스러운 규모였으니 돌려막기가 보편화 된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최신급 전함을 손에 넣길 원한다면 커다란 지출을 감수하고서라도 돈을 쓰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고민하는 이유는 단순히 금액적인 부분만은 아니었다.
-고민하는 이유는 역시 성능인가?
‘그렇지.’
현재 엔터프라이즈호는 순양함급.
하지만 이는 중앙에서 만들어진 함선이며 최신형의 함급이라고 카린 대령이 자랑한 바 있었다.
실제로 엔터프라이즈호는 그 크기만 좀 작을 뿐, 주포 사거리와 장갑의 내구성 면에선 오히려 남방군 전함과 비교해 우위에 있었다.
본래 처음부터 스펙이 그러했던데다 현재는 진과 내가 개조 작업을 마쳐서 그 격차는 더욱 벌어진 상황.
그러니 새로 100조 크레딧이나 써가며 전함을 끌고 와 개조를 마친다 한들 지금 성능보다 더 좋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현재 함급엔 시즈 일족의 스텔스 장치가 남아있었다.
적의 레이더에서 완전히 벗어나 은신할 수 있는 이 장치는 딱 순양함까지만 커버할 수 있었다.
전함급 함선을 운용하게 된다면 크기의 제약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되니 사실상 고민이 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전함을 타면 더 많은 전투기를 보유할 수 있고 완전한 단독 작전권까지 손에 쥘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생존 안정성은 오히려 떨어져···.’
들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다시 남방군이 전투함을 이끌고 이곳 VV5610에 집결 예정이란 소문이 파다했다.
이것은 EMP와 더불어 우주 괴물에 대한 대책이 마련됐으니 다시 공세를 재개하겠단 뜻이었다.
우주를 누비며 적과 끊임없이 싸우게 될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오히려 함의 방어력을 떨어트리는 것은 역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많았다.
결국, 나는 전함을 구매하는 일을 잠시 미루기로 했다.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 진행할 수 있는 일이기에 좀 더 신중히 처리하고자 함이었다.
*
5525년 7월 10일.
남부 연방군엔 드디어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총동원령이 발동됐다.
이는 중앙군이 황제의 건강 악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회군한 지 정확히 5개월 만의 일이었다.
곧 전쟁이 다시 시작될 것임을 알게 된 나는 계속 미뤄두었던 일을 처리하자고 생각했다.
바로 시즈 일족과의 거래였다.
시즈 일족은 자신들의 함선 출력을 높여주는 대가로 오크의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인 황금콩을 구해주기로 했었다.
이에 나는 엔터프라이즈호를 끌고 잠시 VV5610을 떠나 순찰 겸 전투 훈련에 들어갔다.
오크의 쌍둥이 행성 관리자라는 직함 덕에 순양함이 행성을 떠나는 걸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VV5610을 떠나 쌍둥이 행성계에 가까워지자 나는 오랜만에 격납고로 향했다.
바로 전투기에 탑승하기 위함이었다.
내가 쓸 전투기를 내어달라고 말하자 격납고의 인원 모두가 매우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번 격납고를 떠나 함교로, 그것도 함장이 되어 떠난 장교가 다시 전투기를 모는 건 분명 이례적인 일이었던 것.
하지만 은밀히 시즈 일족과 접선하려면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구축함을 끌던 시절과 달리 이제는 승조원의 숫자도 많아졌고 한번 이단심문관에게 찍히기까지.
시즈 일족과 만나는 일은 최대한 보는 눈이 없는 곳에서 처리할 예정이었고 전투기 탑승은 그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렇게 전투기에 오르자 장교들이 어찌나 눈을 반짝이던지.
이 중엔 내 명성만을 듣고 엔터프라이즈호에 지원한 친구들도 적지 않았다.
연구 장교 사이에선 내 명성이 알려진 지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조종사들 사이에선 그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불과 2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혁혁한 전공을 올리며 대령까지 진급한 나는 이들 사이에선 거의 전설 속 인물에 비견되는 분위기였다.
“충성! 함장님과 전투훈련을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배워가게.”
“예! 알겠습니다!”
기왕 전투기를 타게 됐으니 홀연히 사라지기도 아쉬운 노릇.
놀라운 기동을 선보이며 내가 본격적으로 전투 훈련에 가담하자 통신 채널로 혹시 몰래 전투기 타셨었냐고 혀를 내두르는 편대장들의 감탄이 연신 터졌다.
그들 중 상당수는 나와 고비를 수차례 넘겼던 베테랑들이었다.
전투 훈련을 시작하기 전만 해도 감이 떨어져 있을 테니 무리하지 마시라며 킬킬거렸던 녀석들.
그러나 과거의 대단했던 위용을 재현하자 녀석들은 어느새 휘하 편대원들을 닦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머저리 같은 새끼들!>
<함장님이 조종간을 손에 놓은 게 일 년이 다 돼간다!>
<네놈들이 그러고도 제국의 자랑스러운 파일럿이라고 할 수 있겠나!>
편대장들에게 탈탈 털리고 있는 편대원들이지만 사실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엔터프라이즈호의 조종 인력을 보강할 때 최대한 군공이 돋보이는 친구들을 뽑아 데려왔으니 조종 실력은 좋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우리 함에서 가장 경험이 부족한 친구도 당장 전장에 내보내면 융족 전투기 네다섯대는 너끈히 상대할 수 있는 엘리트였다.
하지만 그런 친구들도 내 진심을 다한 비행을 당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강화 마법을 두르고 한계를 뛰어넘는 기동을 펼치자 편대원들이 낙엽처럼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래서야 함선을 제대로 지킬 수 있을지 걱정되는군. 훈련을 더 열심히 해야겠는데?”
<죄, 죄송합니다!>
함장에게 잘못 찍혀서 좋을 건 없다.
출셋길이 단단히 틀어막힐 수 있으니 말이다.
내가 장난으로 건넨 말에 새로운 편대장들은 사색이 되어 더욱 강도 높은 훈련을 진행했다.
-살살해. 살살. 이러다 다 우리 조종사들 다 토쟁이 되겠다.
‘장난이 너무 과했나?’
그렇게 훈련을 마친 후엔 지크와 함께 페어를 이뤄 정찰 임무에 나섰다.
지난번 시즈 일족과 만나러 갔을 때도 내 곁엔 지크가 함께했었다.
지크에겐 이미 이번 정찰비행의 본 목적을 전해둔 상태였고 그렇게 우린 약속지점에서 조용히 미어캣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존 반가워!]
[기다리고 있었어!]
“친구들. 오랜만이군. 그럼 바로 작업을 시작할까?”
검은 순양함의 에너지 출력을 끌어올리는 작업은 하루 만에 끝낼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나는 부지런히 시즈 일족의 전투함으로 출근 도장을 찍어야 했다.
물론 시간이 조금 걸릴 뿐, 작업 자체가 어렵진 않았다.
진과 함께한 수련 덕분이었는지 확실히 마법을 쓰기가 한결 수월해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정확히 8일.
정말로 에너지 출력이 크게 오르자 미어캣 친구들은 폴짝 뛰며 크게 기뻐했다.
[존 대단해!]
“다시는 인간을 무시하지 마라.”
[알았어.]
[미안해 존!]
사실 시즈 일족 마음속에서 제국은 황제를 제외하면 별 볼 일 없는 곳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번 거래를 완료하며 녀석들은 제국에도 얼마든지 인재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됐지만 이번에 해낸 출력 향상 작업은 그만큼 어려운 작업이었던 것.
[받아! 황금콩이야!]
“오···.”
[전에도 말했지만 황금콩은 구하기 정말 어려워!]
[얼마나 싹을 틔울지는 존의 운에 달렸어!]
“이봐. 아무리 그래도 싹을 하나 정돈 틔워야 할 거 아니야.”
시즈 일족에게서 건네받은 씨앗은 총 열 개.
만에 하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전부 발아에 실패하면 다른 적절한 보상을 해주겠다는 확답을 받고 나서야 나는 콩이 담긴 주머니를 품 안에 넣었다.
“아 참.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었는데 말이야.”
[뭔데?]
“너희랑 처음 만났을 때 말이야. 기억해?”
[물론이지.]
내가 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 당시 시즈 일족은 크라켄의 추격을 피하고자 하이퍼 에테르를 모두 버리고 스텔스 장치에 의존하여 숨어있었다.
고작 크라켄 따위가 무서워서 숨다니.
당장 연방군은 D형 이클립스 미사일을 적재하기 시작해 크라켄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화력을 갖추기 시작한 터였다.
나는 넌지시 미사일을 팔아보고자 운을 떼었는데 이 녀석들···코웃음을 치는 게 아닌가.
예상 밖의 반응에 난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크라켄의 실드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미사일이라니까?”
[존 멍청해!]
[멍청해!]
[더 큰 크라켄 나타나면 미사일 계속 쏠 거야?]
[우린 인간처럼 숫자 많지 않아.]
[미사일은 우리하고는 안 맞아.]
-흠. 그런 문제가 있었나.
그러고 보니 우린 아직 시즈 일족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그들이 어느 행성에 사는지, 그 숫자는 얼마나 되는지 등등.
애초에 일족이란 표현이 국가 규모를 이룬 종족이 사용할만한 표현이 아니기도 했다.
아마 시즈 일족은 손이 귀하다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굉장히 수가 적은 모양이었다.
“확실히 수가 적다면 대규모 함선을 운용할 수 없을 테지.”
[맞아. 그렇게 많은 미사일 실을 수 없어.]
[그리고 존이 상대한 크라켄은 새끼에 불과해!]
“새끼라고? 3킬로미터짜리 오징어가?”
-융족은 대체 어떤 싸움을 하고 있던 거냐···.
새끼라는 표현은 좀 과했을지 모르나 더 큰 괴물이 도사리는 것만은 분명했다.
시즈 일족은 앞으로 융족과 전쟁을 재개함에 따라 연방군이 더 크고 강한 녀석들을 마주칠 수 있음을 경고했다.
[조심해 존.]
[건강해야 해!]
더욱 확실한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우린 그렇게 시즈 일족과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VV5610으로 복귀하기 전엔 쌍둥이 행성계에 들러 공장 전반을 둘러보기도 했다.
최근 오크 공장단지는 D형 이클립스 미사일의 보급으로 숨 가쁘게 돌아가는 실정이었다.
기본 미사일과 다르게 D형 미사일은 마력의 충전을 위해 제조에 블루 코어가 필요했는데 이 때문에 VV5610과 쌍둥이 행성을 잇는 노선엔 수많은 화물선이 블루 코어를 내리고 미사일을 싣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대규모 공장을 가동한 오크들은 다시 활력을 되찾았고, 식량 재배로 인해 풍족하진 않아도 굶어 죽을 위기에선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덕분이었을까.
오크들은 엔터프라이즈호의 행성 방문을 극진히 환영하며 우리가 가는 곳을 어디든지 뒤따랐다.
수만 명에 달하는 오크 행렬이 우리 뒤를 따르는 걸 보고 있노라면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모습을 이단심문관이 봤으면 분명 한소리 했겠군.
‘그러게나 말이야.’
일국의 왕이라느니, 존 메이어가 불순한 마음을 먹고 있다고 한소리 해도 딱히 할 말 없는 광경이긴 했다.
그 정도로 오크들이 내게 가지는 고마움이란 크고 깊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인기는 비단 쌍둥이 행성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VV5610에 돌아오자 수많은 장성이 앞다투어 내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존 대령. 듣자 하니 계속해서 순양함을 탈 계획이라고 들었네. 괜찮다면 우리와 함께하는 게 어떻겠나.>
순양함은 편성에 있어 전함의 호위를 맡게 된다.
그러니 함선을 바꾸지 않기로 한 이상 전함의 호위를 맡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는데 모리더스 대장 휘하에 있는 장성들이 앞다투어 함께 하고 싶다고 연락한 것이었다.
지난 2년 동안, 나와 함대원들은 끊임없이 전장에서의 능력을 증명하는 시간을 보냈다.
곧 전쟁이 재개될 시점에서 능력 있는 함장을 휘하에 두고 싶어하는 건 사령관이라면 누구나 같은 마음일 터였다.
하지만 끊임없는 합류 요청에 나는 난색을 보이며 에둘러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동원령이 확정되자 제일 먼저 마이클 소장이 내게 연락해 다시 함께하자는 뜻을 밝혔기 때문이었다.
<존 대령! 설마 다른 함대로 가려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마이더스호의 호위로 자네 말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네!>
비록 화상 통신이 아닌 메시지였지만 텍스트만으로도 마이클 소장이 얼마나 날 데려가고 싶어하는지는 잘 알 수 있었다.
일전에 함께 근무한 경험도 있고, 마이클 소장이면 무난한 성격에 편히 지낼 수 있겠다 싶었기에 나는 마이더스호의 호위로 배속을 지원했다.
이미 모리더스 대장까지 이곳에 모이기로 확정이 되어있었기에 내 신청이 반려될 이유는 없었다.
내가 아직 파벌을 정하지 못하고 그저 그런 장교로 휘둘리는 처지였다면 변수가 생겼을지도 모르나 이미 나는 모리더스 라인의 핵심 구성원으로 발돋움한 상태였다.
수많은 귀족 가문이 즐비한 남부에서도 손에 꼽는 프랑크 가문 출신에 대장 계급을 단 모리더스 대장의 파벌은 남방군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형 세력.
나는 이렇게 대형 군벌의 일원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권력의 중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