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애초 이번 투자는 생산력만을 보고 진행한 일이었지만 오크 행성은 예상 밖의 노다지였다.
공장마다 거의 빠짐없이 아론다이트가 들어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생산 라인에 아론다이트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는 공장이 생산할 수 있는 품목과 직결되기에 아론다이트는 군수 기업에겐 없어서는 안 될 자원 중 하나였다.
‘용케 이걸 아무도 몰랐군.’
아무래도 중앙에선 피해가 생기는 것을 염려해 오크 행성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방치한 것이 원인인 듯했다.
-이거 우리가 가져가면 안 되나?
‘그럴 순 없지.’
엄밀히 말하면 오크는 내게 뭔가를 내주거나 갚아야 할 의무가 없었다.
식량도 무상으로 베풀었고 전략 물자 생산도 정당한 거래를 통해 이루어질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식량을 돈 받고 팔지 그랬어. 그럼 아론다이트라도 잔뜩 챙길 수 있었을 텐데.
진은 공짜로 식량을 내준 것을 아쉬워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오크가 가장 어려울 때, 대가 없이 베풀어두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신뢰를 가장 쉽게 얻을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크와 인간은 이제 막 마주쳐서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 손익만을 따져 접근했다면 당장 배가 고픈 오크들이 일을 도왔을지는 모르나 저들이 진심으로 우리를 위해 일해주진 않았을 확률이 높았다.
-그럼 이제는 오크가 진심으로 도와줄 것이다?
‘그건 이제부터 확인해봐야지.’
공장을 몇 개 더 돌며 오크의 물자 생산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확실하게 검증을 마친 상황.
나는 야쿠차에게 융족이 했던 것처럼, 우리와도 물자 생산 거래를 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물론입니다. 함장님이 원하시는 일은 이곳에서 무엇이든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론다이트 달라고 하자! 아론다이트-!!!
오크의 아론다이트 광산은 말라버린 지 오래지만, 마력기계에 들어있는 아론다이트는 여전히 멀쩡했다.
야쿠차의 반응을 보면 아론다이트를 몇 개 달라고 해도 충분히 내줄 것 같았지만 내가 그들에게 한 부탁은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내용이었다.
다른 이들에겐 들리지 않게 야쿠차의 귓가에 속삭이자 눈을 동그랗게 뜬 그가 이내 알겠다며 고갤 끄덕였다.
“그럼 잘 부탁하지.”
*
길었던 재정비가 끝나자 본격적인 진격이 시작되었다.
중앙군과 남방군을 합친 전투함 숫자는 무려 15만 척, 대규모 부대는 다시 3개 군으로 나뉘어 각 방면을 향해 달려나갔다.
쉴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여 이 전쟁을 완전히 끝내버리겠단 각오가 묻어나는 진격이었다.
레기온호와 호위함대는 3개 군중 제1군에 속해 있었는데 이전과는 달리 몹시 한가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라프를 실은 레기온호의 목적은 아군이 불리한 상황에 놓일 경우, 연락을 받고 즉시 지원을 나서는 역할이었다.
항상 워프를 뛸 수 있도록 하이퍼에테르를 부어가며 공간도약 장치를 예열하고 24시간 대기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엔 레기온호에 그라프를 보내달라는 요청이 거의 들어오질 않고 있었다.
VV5610 전투 이후 융족의 기세는 완전히 꺾인 지 오래였고 곧 전쟁이 끝날 것을 직감한 장교들은 어떻게든 본인 손으로 전투를 마무리 짓고자 했다.
전쟁이 끝난다면, 당분간 전투로 군공을 쌓을 기회는 없어지는 셈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전투할 수 있을지 모르는 와중에 그라프까지 불러 레기온호와 공적을 나누고 싶진 않다는 심리가 전 부대에 작용하고 있었다.
-한가로워서 좋기는 한데 사기가 떨어질까 염려되는군.
‘음···.’
진은 승조원들의 사기를 우려했다.
사람 마음이 참으로 간사한 게 눈코 뜰 새 없이 전투를 치르며 죽음의 위기를 몇 번이고 넘길 땐 제발 좀 살려만 달라고 외치다가도 막상 군공을 세울 기회가 전혀 없으니 아쉬워하는 마음이 들곤 했다.
승조원들도 내 앞에선 쉬쉬했지만 다들 출격을 좀 했으면 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특히 엔터프라이즈호는 군공을 추가로 세우고 싶어서 귀환 대신 잔류를 선택한 인원이 많았기에 더욱 그러한 기류가 강했다.
한숨 자고 일어날 때마다 우주 전역에서 승리를 거뒀다는 소식이 속속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융족은 더는 연방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군은 파죽지세로 나아가 행성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전투에서 피해를 보았다는 소식이 들어올 확률은 백 번 중의 한 번이 될까 말까 한 수준이었다.
말 그대로 누워서 떡 먹기 수준의 군공 쌓기.
엔터프라이즈호에 묶여 잔치를 그저 지켜봐야 하는 승조원들에겐 조금 미안했지만, 그와 별개로 사업은 순풍을 타고 빠르게 성장 중이었다.
각지에서 연방군이 연전연승을 거두자 미사일과 같은 군수 물자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오크들은 연신 공장을 가동하며 미사일을 뽑아냈고 실드 기술을 적용한 미사일이 전군에 최초로 보급됐다.
크레딧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고 내가 큰돈을 만지고 있단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쌍둥이 행성에 관심을 가지는 세력도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앙 귀족은 오크의 봉기를 염려했는지 여전히 머뭇거리는 태도를 취했지만 기존 남부의 군수 업체들은 한 다리 걸쳐볼 수 없을까 싶어 급히 출장 인원을 이 먼 곳까지 보내오곤 했다.
그러나 나는 내 파이가 줄어들 걱정 따윈 하지 않았다.
작전을 떠나기 전, 야쿠차가 내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한 것이다.
내가 그에게 부탁한 건 바로 외부 세력에게 아론다이트의 비밀을 숨겨달란 것이었다.
“아론다이트는 제국에선 상당한 보물에 속하네. 혹시나 제국에서 누가 방문하거든 광석의 존재를 숨겨줄 수 없겠나?”
아론다이트를 장착한 공장이 여럿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내가 이 사업에서 손을 떼야 할수도 있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자 야쿠차는 걱정하지 말라며 가슴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보안을 지키겠노라고 말이다.
오크는 어려울 때 도와준 나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 했다.
아론다이트의 존재 여부를 알지 못하는 이상, 아크 팩토리외에 다른 세력이 사업에 끼어들기는 쉽지 않을 터였기에 나는 안심하고 레기온호의 호위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
그렇게 고요한 우주의 바다를 가로지르던 어느 날, 나는 카린 대령과 화상 통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아무리 지원 요청이 없다고 해도 레기온호는 항시 대비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했기에 나는 엔터프라이즈호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고 대령 역시 레기온호의 격납고에 항시 대기 중이었다.
얼굴을 마주 보고 차를 마실 수 있는 시간은 당연히 낼 수가 없었는데 갑작스레 그녀가 먼저 내게 연락을 해온 것이었다.
“충성! 무슨 일이십니까.”
<아, 지금은 쉬는 시간일 듯하여 연락을 해봤네. 요즘은 통 다과도 나누지 못했지 않은가.>
“아, 예.”
<방해했다면 미안하군···.>
“아닙니다. 저도 막 씻고 쉬려던 참이라 한가했습니다.”
<그런가? 잘됐군.>
대령은 살짝 기뻐하며 마치 준비해둔 것처럼 옆에 있던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참나, 이럴 거면 그냥 시원하게 고백을 해라! 엘프!
진은 대령의 태도에 툴툴거렸지만 그러든지 말든지, 그녀는 평소 나누던 다과 시간처럼 잡담을 늘어놓았다.
아무래도 상당히 심심했던 모양이었다.
대화는 주로 이번 융족과의 전쟁이 마무리되면 장차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를 다룰 때가 많았다.
“그럼 근위기사님들은 주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냅니까?”
<우리는 돌아가면서 폐하의 곁을 지키고, 그렇지 않은 기사들은 훈련장에서 실력을 갈고닦는 시간을 가지지.>
“이야기만 들으면 개인 시간을 가질 여유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만.”
<음. 확실히 근위기사는 개인 시간이 없는 편이긴 하군.>
“귀환하시면 심심하시겠습니다.”
<예전엔 지루하단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이제는 조금 그런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군.>
-아니이, 고백하라고!!!
귀 떨어지겠다며 진에게 핀잔을 주려던 그때, 함대 전체에 경고등이 울리며 비상음이 울려 퍼졌다.
그간 조용했던 지원 요청이 들어온 것이었다.
<호위함대에 알린다! 중앙군 전함 부대가 공격당했다! 전 함대는 지금 즉시 전달받은 좌표로 공간도약을 준비하라!>
자연스레 대령과의 통신이 종료됐고 나는 서둘러 군복으로 갈아입고 함교로 향했다.
다급한 베데리스 소장의 목소리에 나는 군공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기 보단 오늘은 또 어떤 거지 같은 전투가 펼쳐질지 걱정이 앞섰다.
어지간히 수세에 몰리지 않고서야 연방군이 살려달라고 지원 요청을 넣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함교에 도착해 착석하자 오퍼레이터들이 기다렸다는 듯 공간도약 준비가 되었음을 알려왔다.
“공간도약 준비 완료!”
“레기온호의 신호에 맞춰 동시 도약한다!”
“예!”
<전 호위함대! 도약 실시하라!>
“실시!”
베데리스 소장의 외침에 맞춰 지원 함대의 공간도약이 시작됐다.
분홍색 원이 전투함 장갑을 타고 퍼져나가더니 몸을 옥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압력은 잠시뿐, 어느덧 지정한 좌표에 도달한 우리는 전장 상황을 보고선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씨팔!’
구고고고고-!
괴성과 함께 묵빛의 촉수를 휘두르는 적.
전함이 단숨에 찌그러지더니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야 이 개새끼들아! 융족이 아니라 우주 괴물이라고 말을 해줬어야지!
좆됐음을 간파한 진이 깜짝 놀라 외쳤다.
중앙군 전투부대를 헤집으며 공격을 받아내고 있는 거대한 적의 정체.
그것은 바로 우주 크라켄이었다.
“모든 전투기는 즉시 출격하라!”
<라저.>
전투함의 주포도 통하지 않는 괴물에게 미사일이 소용이 있을까 싶지만 이대로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이미 레기온호와 호위함대는 워프드라이브를 사용했기 때문에 아무리 빨라도 한 시간은 이곳에 붙잡혀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크를 필두로 한 전투기들이 잽싸게 출격에 나섰다.
이미 상당한 잔치를 벌였는지 크라켄 주위로는 수십 척에 달하는 중앙 전투함들이 쪼개져 불꽃을 터트리고 있었다.
새로운 먹잇감이 나타났다고 생각했는지 크라켄의 노란 눈이 이쪽을 향하자 함교에선 히익-! 하는 비명과 함께 두려움이 번지기 시작했다.
“모두 정신 차려라!”
함교에 공포가 스미는 것을 막기 위해 나는 큰소리로 외치며 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진의 마력이 함교를 감쌌고 이내 안정화 마법이 발동되었다.
전투 관제를 해야 할 인원이 적을 두려워하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가 없고 반응이 늦어지게 된다.
단숨에 함교를 휘어잡은 나는 그대로 엔진출력을 올려 치고 나갈 것을 지시했다.
크라켄의 크기는 커다랬고 몰려있어봤자 공격당하기 더 좋은 목표가 될 뿐이었다.
앞서 출격한 전투기들이 크라켄을 향해 돌진하는 사이, 레기온호에서도 빛을 뿜으며 그라프가 작전에 나섰다.
<모두 조심하십시오! 주포 공격도 통하지 않는 괴물입니다!>
간신히 생존한 전투함들이 크라켄의 방어가 엄청나게 단단함을 알려왔다.
아니나다를까 이클립스 미사일이 연거푸 크라켄의 외피를 두들겼는데 마치 전함의 실드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파문이 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크라켄이 단단한 외피 말고도 자체적으로 실드를 생성할 수 있는 기관을 지니고 있다는 뜻과도 같았다.
심지어 놈의 크기는 전함보다도 훨씬 커다래 3킬로미터를 훌쩍 넘기까지 했다.
베데리스 소장은 모함을 상대하는 것으로 생각하라며 전 함대에 흩어질 것을 주문했다.
뭉쳐있을 게 아니라 놈을 포위한 채로 공격을 두들기기 위함이었다.
<거리를 내주지 마라! 놈의 사정거리 밖에서 싸워야 한다!>
소장은 멀리서 원거리 타격으로 놈의 힘을 빼놓을 것을 주문했지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우주 크라켄은 그 육중한 몸에 걸맞지 않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를 자랑했다.
다리를 모으며 몸을 웅크린 크라켄이 쭉- 하고 몸을 뻗자 선회하던 순양함이 단숨에 사정권 안에 들어가는 광경이 눈에 띄었다.
<아아···.>
해당 순양함의 함장은 죽음을 예상한 듯 신음을 흘렸고 이내 순양함을 움켜쥔 크라켄이 나무막대기 부러트리듯 순양함을 토막 냈다.
융합로가 붕괴하며 터져 나온 불꽃.
허무하게 가버린 아군을 보며 함장들은 분노에 차올랐고 다들 앞다투어 주포를 쏘기 시작했다.
<주포 발사!>
<발사!>
빛의 광선이 쏟아지며 순양함을 움켜쥔 크라켄을 강타했다.
그러나 녀석은 간지럽다는 듯 다리를 휘둘렀고 놈의 외피는 미사일을 막았을 때처럼 아무 데미지도 없는 듯 보였다.
오히려 고록고록- 하는 소릴 내는 것이 이게 다냐고 우리를 도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 광경을 침착하게 주시하던 나는 출력을 최대치로 뽑아내 주포 발사에 들어갔다.
“주포 최대 출력으로! 타격점은 내가 지시하겠다!”
“주포 최대 출력으로!”
“주포 발사!”
가공할 에너지가 순양함 심장부에서 뿜어져 전방에 모이기 시작했다.
구축함을 운용하던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출력.
중앙급 융합로에 진이 특별 개조를 마친 엔터프라이즈호는 지금 이 순간, 전함을 뛰어넘는 출력을 발휘해 주포를 쏘아냈다.
벼락이 터지며 발사된 푸른 광선이 다시 한번 크라켄의 외피를 때렸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처음으로 크라켄의 외피가 붉게 달아오른 것.
크륵 거리는 소리와 함께 놈이 다리를 움츠렸다.
“여기는 엔터프라이즈호. 크라켄의 외피는 무적이 아니다! 주포 사격을 중첩해 공격하면 타격 효과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나는 조금 전 공격에서 얻은 정보를 재빨리 아군과 공유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데미지를 주었다는 기쁨도 잠시, 크라켄이 또 한 번 몸을 웅크리자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조금 전에도 저렇게 튀어나간 크라켄이 순양함을 장난감처럼 부쉈던 모습이 머릿속에 스쳤던 것.
‘실드를 올린다고 버틸 수 있을까?’
어쩌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던 그때, 강렬한 황금빛이 크라켄을 스쳤다.
그와 동시에 떨어져 나가는 수백 미터짜리 다리.
강렬한 빛을 뿜으며 돌진한 그라프가 크라켄의 몸통에 대검을 꽂아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