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어떠한가. 마음에 드는가?”
“진심으로 마음에 듭니다.”
대령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불칸급 순양함.
전장 1050미터, 전고 150미터, 승조원 최대 1600명.
최대 전투기수는 110대에 이르며 플라즈마 레이저 16문, 팰렁스 12문, 다연장 미사일 발사기 4문이 달린 그야말로 소전함이라는 별명에 걸맞은 스펙을 자랑하는 함선이었다.
-옥에 티라면 도색이 금빛이라는 것 정도일까.
확실히···.
전투함 도색으로 황금색은 너무 화려한 게 아닌가 싶지만, 지금껏 봤던 중앙 함선의 대부분은 이렇듯 금색으로 되어 있었다.
이는 인류 제국의 위대함과 번영을 뜻하기도 했지만, 장갑의 방어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골드 코어를 사용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대령과 함께 함선에 올랐고 천천히 안을 둘러보았다.
이미 순양함엔 운용을 위한 최소한의 병력이 탑승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중앙의 병사들이었다.
중앙에서 만든 전투함인데다 본래 중앙군이 운용했던 함선이기에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나는 불현듯 이것이 날 잡아가기 위한 함정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설마 함선을 어떻게 개조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아직도 수수께끼인 이단심문관이 날 찾아왔던 이유.
그것이 만약 구축함답지 않은 엔터프라이즈호의 활약 때문이었다면 이 순양함을 개조하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었다.
-뭐야. 그럼 대령이 우릴 노렸다는 소리야?
‘그럴 리가. 내 짐작이 맞다 해도 대령은 전혀 몰랐겠지.’
대령은 거짓말까지 해가며 나를 위험해서 구해주었으니 그럴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흔쾌히 내게 전투함을 내주기로 한 중앙 상층부라면 충분히 이단심문소의 입김이 닿아있을 법도 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함선에 도청 장치 같은 공작이 되어 있진 않은지 확인해봐야겠어.’
-이해했다. 그럼 나는 마법적 장치가 숨겨져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지.
그렇게 의심을 하며 함선을 둘러보게 된 나였지만 내부를 살필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엔터프라이즈호도 남방 경계에선 최신의 함선이라 무척 훌륭하다고 생각했지만, 불칸급 순양함은 비교하는 게 실례일 정도로 뛰어난 함선이었다.
당장 무기만 해도 그랬다.
안타곤급 구축함이었던 엔터프라이즈호는 진과 내가 에너지 융합로를 개조한 끝에야 플라즈마 레이저포를 운용할 수 있었지만 불칸급 순양함은 개조 없이도 이미 플라즈마 레이저포가 16문이나 달려 있었다.
이는 융합로의 에너지 출력량이 엄청나게 높다는 뜻이었고 남방군과 중앙군의 기술 격차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를 실감케 하는 부분이었다.
함교와 식당, 승조원들이 머무를 방까지.
내 눈에 비치는 순양함은 모든 게 완벽했지만 대령의 생각은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격납고에 도착한 그녀는 턱을 괴고선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천장이 낮은 편이군···.”
“전투기만 탑재하는 격납고라면 위아래를 나누어 쓰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니까요.”
실제로 순양함은 격납고가 2층 구조로 설계되어 있어 100대가 넘는 전투기를 탑재하고 있음에도 좌우 비행포드를 이용해 신속히 전투기를 출격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격납고와 함선의 심장이라 불리는 엔진실까지.
머리부터 꼬리까지 쭉 둘러보는 데만 해도 족히 한 시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1㎞가 넘는 순양함을 구석구석 살피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 셈이었다.
“인력 충원에 대해서는 남방군에서도 도와줄 테지만 혹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내게도 말하게. 베데리스 소장님이라면 이럴 때 모른 척하진 않을 테니까.”
“조언 감사드립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꼭 그리하겠습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 중령은 출출하지 않나?”
시간을 살피니 어느덧 점심시간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점심을 대접하겠다 말했고 그녀는 내 제안에 흔쾌히 응하며 물었다.
“순양함은 아직 인원 조율이 덜 되어서 당장 식당을 쓰진 못할 텐데···. 어디로 갈 텐가?”
“병사들 말이 근처에 잘하는 밥집이 생겼다고 하더군요. 혹시 한식 좋아하십니까?”
나를 뒤따르던 대령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난 가리는 거 없네.”
*
중앙 순양함의 함장으로 남방군 장교인 내가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순식간에 VV5610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내게 인계해줄 함선을 준비하고 있던 모리더스 대장조차 이 같은 결정에 놀란 눈치였고 나는 아주 오랜만에 잊혔던 별명을 다시 듣게 되었다.
남방 경계의 소문난 망나니 존.
말만 무성했던 망나니의 중앙 배후설이 이번에야말로 실체로 드러냈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중앙 뒷배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영 틀린 이야기도 아니지 않나? 우리한텐 이제 대령이란 든든한 버팀목이 생겼다고. 그것도 자그마치 황제의 근위기사인 엘프가!
사람들은 이제 곧 내가 중앙으로 진출할 거라느니, 곧 남부를 떠날 것이니 하는 등의 소문을 두고 떠들기 바빴지만 나는 이러한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VV5610에 관한 조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행성 내에 어떤 자원이 있는지, 또 융족이 남기고 간 건물이나 기술은 무엇이 있는지 등등.
이렇게 조사를 진행하다 보면 행성 바깥, 인근 구역의 탐사에도 시선이 갈 테고 그렇게 되면 대형 미카엘 스톤 광산이 발견되는 건 사실상 시간문제였다.
광산이 발견되어 이 소식이 제국 전역으로 퍼지면 자원 가격이 출렁이게 될 것은 기정사실, 나는 서둘러 미사일에 적용할 실드 기술을 완성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크팩토리는 물론이고 트라카까지 군수 기업들로부터 몰매를 맞게 될 판이었으니 말이다.
미사일에 실드를 두르는 기술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이 기술을 구현하는 데 있어 가장 난관은 바로 융족이 처리한 마법이었는데 이 부분은 이미 진이 해석을 마친 상태였고 역설계를 위한 실물도 봐두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 기술을 뚝딱 만드는 것만큼은 조금 문제가 될 수 있는지라 나는 살짝 전략적인 움직임을 취하기로 했다.
바로 루바니 중령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오, 자네 왔나?”
연구선을 VV5610에 정박시키고 한창 연구에 몰두 중인 중령은 내 방문을 반기는 이들 중 하나였다.
사실 연구원 대부분이 나와 사이가 좋은 편에 속했는데 그 이유는 내가 한번 들를 때마다 쓸만한 아이디어를 내놓곤 했기 때문이었다.
중앙의 기술이 남방 경계에 비해 훨씬 뛰어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양측의 기본 재능 자체가 다른 것은 아니었다.
내가 볼 땐 중앙 연구원이나 남부 연구원이나 자질에 큰 차이는 없었고 지식 기반이 다를 뿐이었는데 그 기반의 차이를 어느 정도 좁힌 시점에선 오히려 내가 이들보다 날카로운 생각을 해낼 때가 많았다.
특히 마법적 분야는 진 덕분에 내 주특기가 되었는데 이런 내 조언은 연구팀의 고민거리를 말끔하게 해결해줄 때가 많았다.
“이쪽에 새겨진 마법 말이네. 융족의 모함 장갑판 밑에서 찾아낸 도식인데 도통 원리를 모르겠단 말이지.”
-룬문자의 상성과 조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해석이 되지 않으니 당연하지.
‘이거 3차원으로 룬의 조화를 확대시킨 거 아닌가?’
-눈썰미가 많이 좋아졌군. 곧 하산해도 되겠어.
‘그거 듣던 중에 반가운 소리군.’
진과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고민에 빠진 루바니 중령.
나는 큼큼하고 헛기침한 뒤 정답을 추측하는 척하며 정보를 공유했다.
“아마 올드 룬의 변종이 아닐까요?”
“올드 룬이라고? 아예 생김새가 다르지 않나.”
“융족 모함은 다중 실드가 워낙 두터웠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장갑판 아래엔 소규모 실드를 보조하는 증폭 장치가 있었으리라 추측하는 게 합당하다 생각합니다.”
“동의하네.”
“혹시 장갑판 전체 스캐닝 데이터도 있습니까?”
“물론이지.”
루바니 중령은 내가 연구원이 아니라는 것도 잊고선 냉큼 측정팀이 조사한 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여기 보시면 배열이 다 같지 않습니까. 각도만 다를 뿐. 만약 이 점들이 룬의 일부였으며 이렇게 중앙을 향해 투사된다고 생각하면···.”
내 손동작에 따라 데이터를 구성할 수 없었던 부분에 가상의 구조도가 새로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주변으로 모이기 시작한 연구원들.
가장 뒷줄에 서 있는 사람들은 내 설명을 보기 위해 발꿈치를 들어야만 했다.
“보시면 크기는 좀 크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룬어의 형태와 비슷한 문자가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개인적인 추측이라 좀 더 연구가 필요하긴 합니다만.”
“아닐세! 이게 정답이야! 이게 정답이었어!”
내 설명에 빠져 있던 루바니 중령이 물개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세상에, 어떻게 자료도 없는 안쪽에서의 투사점까지 추측해서 이런 생각을 해냈나. 자넨 천재야!”
“과찬이십니다.”
“아니야. 아니야. 우리 이럴 게 아니라 안쪽으로 가서 좀 쉬면서 얘기하게. 에드! 가서 마실 것 좀 내오게!”
“예!”
명령을 받은 보조연구원이 연구실 냉장고를 향해 튀어가는 사이, 중령은 나를 연구선 안쪽의 응접실로 안내했다.
“조금 전 자네 아이디어 말이네.”
“예.”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그···내 이름을 좀 같이 올려도 되겠나?”
-바로 숟가락을 얹으러 들어오는군.
연구 장교들이 하는 일은 이렇듯 매일 같이 연구에 매달리며 얻어낸 정보를 보고서로 올리는 것이었다.
직접 적과 싸워 군공을 쌓는 전투 병과와 달리, 연구원들은 이렇게 보고서로 작성한 내용이 장차 제국에 도움이 되는 내용이어야지만 진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 그래도 기술력이 뛰어난 중앙에서 연구로 실적을 올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연구 특기 자체가 진급이 어렵기도 했기에, 루바니 중령은 이번 데이터를 자신의 공적에 포함시키고 싶은 눈치였다.
나는 대답을 기다리는 중령에게 영업용 미소를 환하게 지으며 말했다.
“물론이죠. 중령님. 저는 그저 아이디어만 제공한 수준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보고서를 작성한다면 중령님의 이름이 ‘맨 앞’에 들어가야겠지요.”
“허허허. 이 사람···. 내 처음 봤을 때부터 자네가 훌륭한 인물인 줄은 익히 알고 있었네. 선한 인품이 얼굴에 드러나 보인다고나 할까. 자네 같은 인재는 중앙에서도 몹시 찾기 어렵다네. 마치 제국의 숨은 보석이 이제야 세상에 나온 느낌이랄까.”
-중령님, 거 헐겠수다.
노골적인 칭찬에 진이 핀잔을 주는데 루바니 중령이 덧붙였다.
“참, 자네도 이제 중령으로 진급하지 않았나.”
“예. 감사하게도 조금 일찍 진급하게 되었습니다.”
“중령님이라고 부를 거 없네. 내가 좀 일찍 임관한 것뿐이니 선배님이라고 해도 좋고, 아니지. 그냥 형이라고 하게.”
-형은 좀···.
‘이건 나도 부담스럽지.’
확실히, 형이라고 부르기엔 루바니 중령과 내 나이 차이가 상당했다.
못해도 20살 이상은 차이가 날 터였다.
차마 형이라곤 부를 수가 없어 선배님으로 호칭을 바꾸었는데 그는 몹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차를 들이켰다.
“그나저나 선배님. 이걸 한번 봐주시겠습니까?”
“이게 뭔가?”
“일전에 보여주셨던 융족의 대함미사일 있지 않습니까. 그 구조를 제가 한번 정리해본 것입니다.”
“어디 한번 보세나.”
이미 중앙에선 융족의 대함미사일에 대한 해석을 끝낸 상황.
루바니 중령이라면 이 보고서가 무얼 의미하는지 잘 알 수밖에 없었다.
EMP 부분을 제외한 실드 분야에선 거의 구조도가 완성된 상태.
보고서에 담긴 정보를 확인한 루바니 중령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이걸 언제부터 만들기 시작한 건가···.”
“선배님이 레기온호의 격납고에서 대함미사일 실물을 보여주셨을 때부터 생각했습니다.”
“그래 봐야 고작 한 달이 채 안 됐는데···.”
“죄송합니다. 사실 연구원들에게 조언을 좀 구했습니다.”
“커흠! 다음부턴 조심해주게.”
중령은 나를 타이르듯 말했다.
중앙의 기술 욕심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게 바로 이 연구원들이었다.
그런데 중앙의 기술이 자신들을 통해 다른 방면 경계로 유출이 된다?
이는 앞으로의 군생활에 충분히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부분이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미 다 해독된 기술이라 하신 데다 남부에서도 충분히 완성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하셔서 이 정도는 별문제가 되지 않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고개 숙여 사과하자 중령은 내 어깨를 툭 쳐주었다.
“됐네. 그리 말한 내 책임도 있는 것이지. 자네도 내게 도움을 주었으니 이번 일은 신경 쓰지 말게.”
“감사드립니다. 다시는 선배님께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아닌데, 앞으로도 계속 신세 져야 하는데···.
중령 찬스를 쓸 수 없게 될까 봐 아쉬워하는 진.
물론 나 역시도 루바니 중령과의 연결을 끊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합법적 기술 발전의 핑곗거리로 이보다 더 좋은 창구가 없는데 내가 왜 그런 일을 하겠는가.
나는 앞으로도 중앙 연구선을 제집 드나들 듯하며 무수한 기술을 완성시킬 참이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적당한 핑계가 필요한 법.
일관된 표정으로 죄송한 기색을 비치며 앞으로 연구선을 찾아오는 것은 자제하겠다고 하자 중령이 펄쩍 뛰며 말했다.
“무슨 소린가.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이 못난 후배, 선배님께 큰 폐를 끼친 것이 송구스럽습니다···.”
“어허, 이보게. 우리 사이가 고작 이런 것으로 흔들려선 안 될 것이야.”
“그럼···. 지금처럼 지내도 선배님께선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이네. 자네와 학술적 토론을 나누는 시간은 이 머나먼 타향에서 몇 안 되는 기쁨이니 말일세. 오히려 자네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면 내가 몹시 서운할 것이야.”
“선배님께서 그리 말해주시니 이 후배,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중령! 함께 제국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보세!”
“선배님···!”
-비록 내 계약자지만, 어쩔 땐 좀 무섭다···.
분위기가 괜찮다 싶었기에 나는 준비해두었던 선물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이렇게 좋은 날에 이게 빠질 수 있겠습니까?”
“자넨 정말 샘이 날 정도로 완벽하구만!”
오딘 컨페션즈.
그랑 베르체처럼 비싼 물건은 아니지만 이는 오딘의 옥토에서 재배된 최상품의 와인이었다.
본래 시세는 300만 크레딧 정도에 형성되어 있던 물건이지만 융족의 공습으로 오딘이 박살 나며 가치가 3배 이상 치솟은 상태였다.
훌륭하군을 연발하며 무르익어가는 자리.
그렇게 성공적인 자릴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방 경계엔 대형 뉴스가 전해졌다.
VV5610 인근에서 역대 최대 규모의 미카엘 스톤 광산지대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