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이제 다시 남방 경계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단 말인가?
자세한 상황을 더 묻고 싶었지만, 대령은 떠나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들 소령의 용기에 무척 감사했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었네. 참, 그리고 이 목걸이···정말로 고마웠네. 훨씬 수월하게 작전을 할 수 있었어. 그럼, 몸조리 잘 하게.”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쫓기듯 병실을 빠져나갔다.
내가 말을 붙일 틈을 주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내가 뭐 잘못한 건 아니지?’
-이렇게 헤어지려니 아쉬운 모양이지.
그냥 이번 기회에 중앙군에 몸담는 게 어떻겠냐는 진의 제안에 나는 헛소리 말라고 한 뒤, 현재 상황을 파악했다.
‘이번엔 몇 시간이나 기절했던 거야?’
-얼마 안 됐어. 반나절 정도.
매번 이렇게 기절하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하던 때, 의무실 문이 열리며 엔터프라이즈호 동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훈련소 동기들과 함교 인원이 내게 괜찮으냐며 많이도 안부를 물었다.
다들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느냐고 물으니 카린 대령이 의무실을 점거하고 있어서 들어오기 곤란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녀가 흘리는 특유의 기운에 못 이겨 다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대령보고 도움이 안 되니까 나가달라고 하지도 못 하고, 우린 그냥 밖에서 기다리고만 있었지.”
“잘 했어. 상급자에겐 그럼 안 되지.”
“그나저나 목숨 좀 아껴가면서 일해.”
“음?”
“일이 잘 풀렸으니 망정이지 이번엔 진짜 죽을 뻔했잖아!”
-옳소.
헨리가 툴툴거렸다.
레기온호를 구한 것까진 좋은데 너무 위험했다는 것이다.
헨리와 로저는 그냥 엔터프라이즈호를 끌고 도망쳤어야 한다며 무모했음을 피력했다.
“하지만 우리 함장님은 그 무모함 덕에 이번에 또 진급하게 될 거 같은데?”
찰스가 말했다.
최소 중령 진급은 따놓은 당상 아니겠느냐고 말이다.
“정말 진급시켜줄까?”
“존이라면 가능하지.”
“생각해봐. 레기온호 복구가 안 됐으면 1군은 엄청난 피해를 보았을걸? 어쩌면 전투에서 질 수도 있었겠지.”
“암, 목숨 걸고 전황을 뒤집는 데 큰 공을 세웠는데 그 정돈 해줘야지.”
나의 진급을 걸고 한동안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소령으로 진급한 것이 불과 한 달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또 한 번 진급하게 된다면 정말로 엄청나게 빠른 속도임은 틀림없었다.
“나는 확신해. 아까 베데리스 소장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는데 존의 칭찬을 엄청 많이 했거든.”
소장이 내 칭찬을 했다는 찰스의 발언은 진급 쪽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어쩌면 2계급 특진을 노려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진급을 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아 거기까지 노리기엔 어려울 듯했다.
게다가 내 나이는 아직 스물넷에 불과했다.
찾아보진 않았지만 같은 나이대에 나보다 계급이 높은 장교는 없지 않을까 싶을 정도.
이제는 내실도 챙겨야 할 때라고 생각한 나는 의무실을 빠져나와 트라카에 보낼 짧은 메시지를 작성했다.
<계획 실행하도록.>
*
5524년의 겨울은 여느 때보다 더 혹독했다.
이미 2년 이상 진행된 융족과의 전쟁.
경계선 근처에 있던 행성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덕분에 남방 경계의 경제 상황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혼돈을 틈타 움직이는 생소한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가름 상회’였다.
이들은 주로 군수 기업에서 쓰이는 원자재를 취급했고 신규 세력에 걸맞지 않은 탄탄한 자금력으로 대규모 선물 계약을 맺곤 했다.
선물 계약은 비단 군수 산업뿐만 아니라 규모가 큰 시장에선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시스템이다.
특히 가격 변동 없이 안정적인 원자재 수급을 필요로 하는 산업이 그러했는데 가름 상회는 옵테늄을 비롯해 다양한 함선 재료의 납품을 도맡았다.
전쟁의 결과와 상관없이 정해진 가격에 안정적인 물량을 공급해주겠단 계약.
비록 신규 상회지만 가름은 충분히 계약을 완수할 수 있으며 일이 틀어질 경우엔 충분한 자금으로 보상을 제시할 수 있음을 연방군 예비 장성과 귀족들이 보장해주었기에 그들은 별문제 없이 원자재 사업에 발을 걸칠 수 있었다.
보통 이런 경우는 뒷배로 대귀족이 버티는 경우이기에 군수 업체들은 안심하고 그들과 거래를 트게 되었다.
그리고 12월 5일.
중간급 거래만 도맡던 가름 상회의 매니저들이 한자리에 모여 남방 경계의 모든 군수업체에 새로운 제안을 넣기 시작했다.
바로 실드 생성에 필수 광물인 미카엘 스톤에 관한 선물 계약이었다.
팀은 두 개로 나뉘었고 그들은 각각 온라인 상시 선물 거래와 기업간 다이렉트 계약을 나누어 일을 시작했다.
<우리와 미카엘 스톤 계약을 체결하고 싶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린 이미 미카엘 스톤을 거래하는 주 상회가 따로 있습니다. 그쪽에서도 알고 계실 텐데요?>
“저희 가름 상회는 업계에 발을 들인지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이런 저희가 내세울 만한 장점은 가격 경쟁력밖에는 없으니까요.”
<가격 경쟁력이라···.>
“물량을 전부 받아가시길 원하는 게 아니라 그저 저희의 제안을 들어보시고 검토만 좀 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지요.”
<그럼 그 제안이라는 걸 한 번 들어봅시다.>
“톤당 32억 크레딧, 맥시멈 300톤. 서로에게 득이 되는 제안이라 생각합니다.”
<32억···입니까?>
제안을 받은 군수업체 측은 모니터를 두드려 오늘 자 미카엘 스톤의 시세를 확인했다.
톤당 36억, 무려 10퍼센트 이상 저렴한 가격이었다.
<제안은 잘 들었습니다. 상부에 보고해서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전달을···.>
군수업체가 평범한 답신으로 통신을 마치려던 그때, 상회가 예상치 못한 틈을 찌르며 들어왔다.
“지금 계약 해주시면 31억 4천만에 드리겠습니다. 저희가 가진 물량은 한정적이고 다른 곳에도 제안을 넣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물량인 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톤당 31억 4천만 크레딧.
단 한 푼을 깎기 위해 협상 테이블을 차리고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는 원자재 사업에서 보기 드문 화끈한 딜이었다.
잠시 뒤, 침묵을 지키던 군수업체 측이 다시 입을 열었다.
<···30억 8백만 크레딧.>
“31억 크레딧. 대신 400톤은 받아주셔야 합니다.”
<···좋소.>
간단한 통신만으로 1조 2천억이 넘는 원자재 거래가 성사되었다.
엄청난 액수지만 함선 제조를 다루는 군수 업체에겐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거래가 가름 상회 본사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빠르게 몰아붙여! 틈을 주지 말고 계약을 따내! 온라인 마켓 쪽도 신경 쓰고!”
플랜을 진두지휘 중인 라이언 코멧은 가격을 더 깎아도 좋으니 최대한 많은 물량을 팔 것을 지시했다.
그중엔 순위가 10위권 안에 드는 메탈렉시온이나, 카이오 코퍼레이션 같은 초대형 군수 기업들도 있었다.
이런 거대 기업은 애초에 가름 상회처럼 인지도 없는 신규 업체와 거래를 터주지 않는다.
때문에 라이언은 이들에게 물건을 팔기 위해 이들의 주 거래 업체를 우회 공략했다.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수백 년 이상 내려온 명문가 휘하의 자원 상회에 줄을 대 거래를 튼 것이다.
이를 위해 해당 상회 직원 개개인에게 상상도 못 할 수준의 거액이 소모되었지만, 라이언은 이를 아까워하지 않았다.
무슨 수를 쓰든 최대한 많은 물량을 팔라는 회장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났을 때, 가름 상회는 50개가 넘는 군수 업체와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고 이는 무려 550조 크레딧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최상위 군수 기업에서 많은 물량을 소화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라이언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작은 군수 업체까지 깡그리 발라먹겠단 심정으로 계속해서 매니저들을 채찍질했다.
한 시간이나 미카엘 스톤을 팔아댔으니 시장에서도 슬슬 찜찜한 소문이 퍼지던 시점이었다.
점점 계약 체결 속도가 느려지자 라이언은 매니저 한 명을 밀어내고 데스크를 차지해 직접 작전에 나섰다.
<이상한 소문이 들리던데. 당신네 상회에서 계속 미카엘 스톤을 판다고···. 어디 새로운 광산이라도 찾은 겁니까?>
“그럴 리가요. 군수업체라면 다들 연방군에 믿을만한 연줄은 갖고 계실 테니 한번 확인해 보시지요. 아마 미카엘 광산을 발견했다는 이야긴 어디에서도 들으실 수 없을 겁니다.”
<너무 싸니까 하는 이야기 아닙니까.>
“누차 말씀드렸지만, 저흰 신생 상회 아닙니까. 남들보다 가격 경쟁력으로라도 앞서는 수밖에요.”
<으음···.>
“지금 계약해주시면 톤당 26억 크레딧에 드리겠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선생님. 저희는 이미 카이오며 메탈렉시온, 피닉스와 같은 대기업들과도 계약을 맺었는데 이게 전부 사기면 저희가 살아남을 수나 있겠습니까? 한 번 믿어보시죠.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물량을 계약해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라이언은 현란한 말솜씨로 상대를 마구 흔들어댔고 기어이 계약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가리지 않고 팔아댄 결과, 가름 상회가 이날 하루 동안 체결한 거래 규모는 무려 900조 크레딧에 달했다.
윌리엄 백작의 전폭적인 지원.
그리고 회장의 용단에 따라 위험을 감수하고 시장을 쓸어 담으며 레버리지를 강하게 휘두른 결과물이었다.
*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얼마 뒤, VV5610에선 전투 승리를 기념하는 축하연이 열렸다.
이는 그동안 고생한 군인들의 귀환을 축하하는 의미도 함께였다.
당분간 연방군은 전투에 참여한 적 없는 후방 군인들을 올려보내 이곳을 수비하게 할 예정이라고 했다.
수만 척의 전함이 부드럽게 하늘을 가르며 대지에 착륙했다.
전투함 바깥으로 나선 수많은 병사가 대지에 발을 디뎠고 이내 환호성을 터트리며 기뻐했다.
VV5610은 축복의 땅이었다.
트라카의 수십 배에 달할 정도로 컸지만 중력은 거의 비슷했고 별다른 생존 장치의 도움 없이도 호흡이 가능한 대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여기에 비옥한 옥토와 충분한 물을 얻을 수 있는 해양까지.
어쩌면 VV5610은 이번 전쟁으로 연방군이 얻은 가장 값진 보물일는지도 몰랐다.
“호오. 융족의 생활 양식을 제대로 연구해볼 좋은 기회가 되겠군.”
중앙군 연구선 팀장 루바니 중령은 행성 곳곳에 세워진 첨탑 형태의 건물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전투에서 질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이곳엔 거주지, 생산 공장 등의 건물 상당수가 온전히 남아있었다.
신기한 것은 이렇게나 드넓은 별에 융족이 단 한 명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연방군이 대규모 부대를 소환하며 전투준비를 하는 동안 융족도 소개 작전을 열심히 펼친 모양이었다.
“그럼 소령님. 모시겠습니다.”
“으음. 그래. 가지.”
다들 풍요로운 자연경관을 구경하며 신이 난 가운데 나는 호위와 함께 총사령관이 머물렀을 지휘선으로 향했다.
누가 뭐래도 나는 이번 작전 승리에 큰 공을 세운 상황.
장성급을 비롯한 주요 인사가 모이는 자리에 내가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같은 축하연은 오딘 전투 이후 이번이 두 번째였지만 여전히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개인적으론 엔터프라이즈호의 승조원들과 편하게 맥주를 마시며 사담을 나누는 자리가 더 취향에 가까웠다.
‘또 시간만 때우다 가겠군.’
-대령이나 찾아보자.
그렇게 파티장을 슥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나를 발견한 모리더스 대장과 마이클 준장이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
“이게 누군가! 전쟁 영웅 아니신가.”
“영웅이라니요. 과찬이십니다.”
“과찬이라니! 중앙의 특무함을 구하고 제1군을 위기에서 구해낸 것이 자네 아닌가.”
“소령이 아니었으면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할 일이었지요. 아, 이젠 중령인가?”
마이클 준장의 이야기에 나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제 진급이 확정된 겁니까?”
“그야 당연한 일 아닌가. 이 정도 공훈을 세우고도 진급을 못 한다는 게 말이나 되겠나?”
“물론 중령으론 자네 성에 안 찰 수도 있겠지만 좀 참게나. 자네 실력이면 금방 더 올라갈 수 있을 테니까.”
“아닙니다. 대장님.”
모리더스 대장은 내 어깨를 두들기며 아쉬워하지 말라고 해주었다.
두 장군의 반응으로 볼 때 조만간 내가 중령으로 진급하게 되는 것은 기정사실인듯했다.
“2계급 특진은 어렵겠지만 새로 무공훈장을 받게 될 걸세.”
청색 명예 훈장에 이은 새로운 훈장.
훈장 자체엔 금전적 이득이 없지만 앞으로 진급 심사나 연방군 생활을 이어가는 데 있어 훈장은 다방면으로 도움이 될 터였다.
“자네가 더 잘 알겠지만 소령과 중령의 가장 큰 차이가 뭔가. 함선 지휘 자격 아니겠나?”
“그렇습니다.”
연방군 중령.
중령부턴 구축함을 벗어나 순양함을 지휘할 수 있게 된다.
작은 전함이라고도 불리는 순양함은 구축함에 비하면 몇 배는 뛰어난 전력을 갖춘 함선이었다.
오직 호위 임무에만 쓰이는 구축함과는 달리 순양함정도 되면 단기간의 단독 작전도 가능한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본래라면 상부에서 함선을 지급해주길 기다리거나, 사비로 기간을 단축해야 할 테지만 무공훈장을 수여 받는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모리더스 대장은 최대한 빨리, 내게 새 함선이 지급될 것이라며 미리 축하를 건넸다.
“오딘으로 돌아가기 전에 계급장을 바꿀 수 있을 것이네.”
“감사합니다.”
“내가 한 건 없네. 다 자네가 한 것이지. 허허. 그건 그렇고, 자네를 소개받고 싶다는 친구들이 제법 있었는데 오늘 한 번 만나보는 게 어떻겠나.”
“저야 영광입니다.”
그렇게 두 장군 사이에 끼어 걸음을 옮기던 그때였다.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에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미세한 진동이 일었다.
-라이언이 일을 제대로 처리한 모양이군.
‘고비는 넘겼어.’
예상보다 더 우수한 성과를 올린 라이언.
이제 남은 건 진실을 알았을 때, 이빨을 드러낼 거대 기업들을 어떻게 조련하느냐 하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