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적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엔진을 복구하는 건 불가능한 상황.
나는 엔터프라이즈호의 병력을 일부 엔진실로 보내는 한편 남은 병사들로 후방 통로를 지키기로 했다.
‘융족이 레기온호의 탈취를 노리고 있다면 지켜야 할 곳은 함교와 엔진실이다.’
잠시 뒤, 함교 쪽에 도착한 인원이 베데리스 소장과의 통신을 연결해 주었다.
<소령. 어떻게 된 일인가.>
베데리스 소장은 고작 구축함 급에 불과한 엔터프라이즈호가 어떻게 EMP 공격에서 버틸 수 있었는지를 궁금해했지만, 지금은 여유롭게 사정을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소장님, 레기온호에 오기 전 적의 대형함이 접근 중인 걸 확인했습니다. 주포 사격이 없는 것으로 보아 놈들의 목적은 아마도 특무함 확보로 생각됩니다.”
<그게 사실인가···!>
그라프까지 실려있는 레기온호가 탈취당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한 소장에게서 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저는 엔터프라이즈호의 병력과 주변 인원을 끌어모아 후미 쪽을 방어하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이쪽에 있는 인원으로는 함교를 방어하면 되겠군. 하지만 지원은 오는 건가?>
“아군도 혼란스러운 상황인지라 확신할 순 없지만, 상황이 진정된다면 분명 이쪽을 도우러 오지 않겠습니까. 최대한 버텨보는 수밖에요.”
<알겠네.>
나는 베데리스 소장에게 레기온호의 동력을 복구하는 작업도 진행 중임을 알렸다.
만약 사령부에서 우리를 돕지 못하더라도 엔진만 살아나면 그라프를 움직일 수 있게 될 테니 자력으로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엔터프라이즈호를 조금 뒤쪽으로 움직여 케이블을 잇는 사이, 진은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 상황을 전해주었다.
-중앙군 본대 일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적함에 주포를 발사했다. 하지만 적을 전부 견제하기엔 화력이 역부족이군.
결국, 융족 부대가 레기온호에 접근하는 건 피할 수 없는 상황.
나는 갈팡질팡하는 주변 병사들을 재빨리 끌어모았다.
“다들 총 가지고 있나?”
“있습니다.”
최대한 많은 병사가 필요했다.
레기온호에 승선 중인 병력은 약 5천여 명.
당장 후미쪽 통로만 해도 무얼 해야 할지 모르는 병사가 수두룩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병사가 격납고 쪽에 모이자 나는 단상 위로 올라섰다.
“엔터프라이즈호 함장 존 메이어 소령이라고 한다. 시간이 없으니 간단히 설명하겠다. 지금부터 우린 백병전 준비에 들어간다. 융족이 레기온호의 완전 장악을 노리고 있다.”
“···백병전 말씀입니까?”
백병전이라는 말에 병사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평생 전장을 떠돌며 군공을 쌓은 이들도 한 번 경험하기가 힘들 정도로 희귀한 상황이 바로 백병전이었다.
나는 당황하는 병사들을 안심시키며 개인화기로 무장해줄 것을 주문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지금 엔진실 인원이 동력 복구에 힘쓰고 있으며, 5분이면 융합로를 살려낼 수 있다고 했네.”
5분, 단 5분만 버티면 그라프를 재가동할 수 있다는 말에 병사들의 눈에 다시금 생기가 돌았다.
격납고 구석에 벽을 기대고 앉은 철의 거인.
이 녀석이라면 어떻게든 위기 상황을 타개해주리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격납고 안의 물품보관 케이스로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레이저 총을 든 병사들이 가장 앞쪽에 자리 잡아 자세를 취했다.
케이스 틈새로 총구를 내민 병사들.
긴장한 병사들을 바라보며 나는 주문을 외듯 그들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게. 함선을 탈취하려고 한다면 후미쪽보단 함교가 있는 쪽으로 먼저 향할 테니까.”
가만히 생각하면 베데리스 소장이 더 위험하니 비교적 안심해도 좋다는 말로도 들릴 수 있는 상황.
그러나 잔뜩 긴장한 병사들은 내 말에 대꾸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곧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융족 대형함이 레기온 호에 강제 도킹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놈들이 온다.
불 꺼진 통로 저편에서 발소리와 함께 미처 후방으로 빠지지 못한 병사들이 외치는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융족이다!”
“도망쳐!”
비명이 점차 가까워지고, 마침내 모퉁이를 돈 놈들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저게 융족인가.
옥수수처럼 뾰족 솟은 두상.
불을 뿜는 눈동자와 갈라진 피부.
무엇보다 위압적인 건 이놈들의 신장이 2미터를 훌쩍 넘는다는 거였다.
‘2미터 50은 되겠군.’
흡사 거인 같은 놈들.
놈들은 우리가 만든 바리케이드를 보더니 칼날을 겨누었다.
팔에 연결된 블레이드엔 이미 앞서 묻힌 피가 흥건했다.
“모흐굴!”
뜻 모를 말을 외치며 융족 놈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발사!”
자세를 취하고 있던 병사들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레이저 사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알 수 없는 힘이 놈들을 지켜낸 것이다.
마치 원형의 배리어를 두르고 있기라도 한 듯, 레이저는 융족의 몸을 맞추지 못했고 곧 놈들이 바리케이드를 걷어차며 격납고 안으로 진입했다.
「놈들을 모두 죽여라!」
순간 강렬한 사념이 융족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우리의 머릿속에 여과 없이 전달되었는데 아군 병사들은 이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기 일쑤였다.
“정신 차려라!”
다급한 외침에도 병사들은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격납고는 순식간에 핏빛 지옥으로 변했다.
융족이 칼날을 휘두를 때마다 병사들이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존! 엔진실로 도망치자!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치는 병사들.
그러나 융족이 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인간을 꼬챙이 꿰듯 비틀어버리는 괴력에 다들 저항할 의지를 잃어버린 듯했다.
“씨발!”
그때였다.
정비반의 누군가가 광선검을 들고 융족에게 덤벼들었다.
융족은 어림없다는 듯 검을 휘둘렀고 그 병사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벽에 부딪힌 뒤 쓰러져 꿈틀대는 병사.
결과만 보면 부질없는 발악이었으나 이 광경은 격납고에 남아있던 연방군 병사들에게 큰 깨달음을 불러일으켰다.
바로 광선검이라면 대응이 가능하단 사실이었다.
근접전에서 레이저 총은 융족의 공격에 무 썰리듯 잘려나갔지만 광선검은 예외였다.
최소한 놈들의 공격에 부러지거나 뚫리지는 않았던 것.
“모두 검을 뽑아라!”
대우주 시대에 검술 대결이 웬 말인가 싶지만 검술은 사병과 장교를 막론하고 훈련소 기본 과정에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유서 깊은 전투 기술이었다.
광선검의 칼날을 쭉 뽑아 올린 장교가 기합을 넣으며 달려들었고 병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공중제비를 돌며 현란한 움직임을 보여주진 못했지만 장교의 검술은 분명 고명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문제는 놈들의 근력이 너무나도 강하다는 데 있었다.
장교는 두어 번 공격을 받아내긴 했으나 결국 피를 토하며 나뒹굴었고 그 빈 자리를 병사들이 메꾸며 다시 한번 격납고에 피바람이 불었다.
“끄륵···.”
처절하게 싸우는 병사들.
하지만 적을 몰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이 융족 놈들은 날 때부터 강했던 것인지 너무나도 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
-존! 뒤를 조심해라!
나는 진이 보여주는 시야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상체를 숙였고 번개처럼 반격해 융족의 가슴을 꿰뚫었다.
피 분수를 뿜으며 믿기지 않는단 표정으로 벌렁 쓰러지는 융족 전사.
애초 병사들이 밀린 가장 큰 원인은 근력 차이였는데 나는 그 부족함을 진의 마법으로 보충하고 있었다.
잠시나마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힘으로 융족에게 맞서 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뒤로 물러나! 대열을 가다듬어라!”
나는 병사들이 후퇴할 시간을 벌기 위해 젖먹던 힘을 다했다.
하나둘 융족 놈들을 쓰러트리자 어느새 관심이 온통 내게 끌리고 있었다.
나는 지형의 이점을 노리고자 좁은 통로로 놈들을 끌어들였고 그야말로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내 기세에 당황한 것인지 융족도 쉽게 달려들지 못할 정도였다.
숨 막히는 사투.
하지만 이런 상황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각종 마법을 신체 능력을 끌어올리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나는 힘이 빠르게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고 다급히 남은 시간을 물었다.
하지만 빌어먹게도, 동력이 살아나기까진 2분 이상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내 몸으론 절대 버틸 수 없는 시간이었다.
이대로 죽어야 하는가?
살아남을 방법이 아직 남아 있지 않을까 고민하던 그때, 진이 외쳤다.
-버텨라. 존 메이어! 지원군이 도착했다!
지원군이라니.
바깥에서 싸우는 전투함을 말하는 것은 아닐 테고, 함교 쪽 인원을 말하는 건가?
어떻게 된 일인지 채 파악하기도 전에 반대편 통로에서 소란이 일었다.
당황한 융족 병사들이 내는 비명과 무기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마침내, 진이 말한 지원군이 격납고에 모습을 드러내자 나는 울컥하는 심정을 느꼈다.
네 개의 광선검이 어둠 속에서 나비처럼 움직이며 융족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명확했다.
오딘 훈련소 최강의 소드마스터가 우릴 구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다.
“존 메이어! 내가 왔다!”
고함을 치며 융족의 시선을 끈 지크는 현란한 검술로 융족을 베기 시작했고 그 뒤를 매티스 중위와 조종사들이 받치며 전세가 순간 역전됐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릴 붙들고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댔고 헥헥거리며 달려온 헨리가 이제 안심하라며 나를 부축했다.
“감히 함장의 말을 어겨···?”
나는 힘없는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본래 이들은 레기온호가 아니라 제1군 중앙 부대 쪽으로 합류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내 말을 들은 헨리는 이 새끼가 지금 제정신인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말은 이렇게 했지만 실은 눈물 나게 고마운 마음이었다.
만약 이들이 구하러 주지 않았더라면, 나도 다른 병사들처럼 꼬치 신세가 됐을 테니 말이다.
“매티스 중위한텐 너무 뭐라고 하지 마. 레기온호로 가지 않으면 셔틀 밖으로 던져버리겠다고 지크가 협박했으니까.”
“지크가 그럴 놈이 아닌데···.”
라다만이 어떤 종족인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냉철함을 잃지 않으며 항상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종족이었다.
이 때문에 브래들리 소장은 지크가 최우수 표창을 받는 걸 극도로 경계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날 구하러 와줬다는 건 정말로 고맙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고군분투하는 지원군.
그리고 마침내, 천둥소리가 울리며 레기온호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전투함의 심장이 되살아나는 소리였고 격납고에 불이 켜지기가 무섭게 잠들어 있던 강철의 거인이 깨어났다.
그라프가 고갤 들자 융족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는데 대령은 그걸 두고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에너지 파이프를 분리하며 일어난 그라프는 성큼 움직여 통로 쪽으로 향했고 도망치는 적들을 벌레 잡듯 쓸어버렸다.
<출격하겠다! 격납고 내 모든 인원은 비행포드 수동 개폐 작업을 도와주길 바란다!>
일대의 혼란을 순식간에 정리한 대령이 명령을 내리자 살아남은 정비반 인력이 튀어나와 그라프의 출격을 도왔다.
완전히 진이 빠져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던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천근만근인 눈꺼풀을 감았다.
죽음의 위기를 또 한 번 넘겼다고 생각하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몰려들었다.
*
이 세계에 온 뒤 몇 번인가 의료실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그 대부분은 내가 기억을 잃고 난 뒤였는데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명 기억 속에 있는 공간.
대령이 누워있던 의무실과 같은 곳이라는 걸 깨달은 내가 고갤 돌리며 부스럭거리자 꾸벅 졸던 엘프가 아차! 이럼 안 되지, 라는 느낌으로 눈을 깜빡이더니 날 바라봤다.
“아, 소령. 일어났나?”
“대령님 반응을 보니 전투는 무사히 끝난 모양이로군요.”
나는 끙 소릴 내며 몸을 일으키려 했는데 대령이 일어나지 말라며 내 가슴을 도로 눌러버렸다.
그 힘이 어찌나 센지 순간 몸이 시트에 파묻힐 정도였다.
“잘 끝났네. 다 자네 덕분이라고 할 수 있지.”
그녀는 안심하라는 투로 팔짱을 끼고선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VV5610의 점령 작전은 성공했다.
행성 뒤편을 급습한 남방군이 대승을 거뒀고 제1군이 시간을 끄는 사이 합류해 융족 전투함 상당수를 파괴할 수 있었다고 했다.
“아깝지만 전멸까지 시키진 못했네. 갑자기 웜홀 벌레가 중앙에 출현했지 뭔가.”
“웜홀···벌레요?”
웜홀 벌레.
마치 워프처럼 특정 공간과 공간 사이를 잇는 터널을 만드는 생물인데 이 통로가 적의 기습, 그밖에 불순한 목적으로 이용될 수 있어 제국에서는 일찍이 토벌로 인해 멸종당한 지 오래였다.
제국에서는 더는 볼 수 없게 된 녀석들이지만 아직도 우주 어딘가엔 수많은 멸종생물이 살아가고 있던 모양이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융족은 위험을 감수하고 웜홀 벌레를 따라 도망쳤고 연방군은 위험부담을 감수하며 적을 쫓진 않기로 했지.”
벌레가 만든 통로는 전혀 알 수 없는 공간으로 이어지니 연방군으로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판단이었다.
“그럼 이제 위험 요소는 없어진 겁니까?”
“그렇지. 웜홀도 사라졌고 아직 융족 잔당이 남아있다는 보고는 들어온 바가 없네.”
“잘 됐군요.”
그렇다며 고갤 끄덕이는 대령.
하지만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왠지 모를 슬픔을 느꼈다.
전투도 대승을 거두었고, 당분간은 푹 쉴 일만 남았는데 어째서 저런 표정을 짓는지 쉬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리고 잠시 뒤, 대령이 나를 보며 말했다.
“소령, 귀환을 축하하네.”
“귀환이요?”
“현 시간부로 융족의 워프 전술에 마땅한 대응책을 갖기 전까진 수비에 전념하기로 계획이 바뀌었네. 추가 소집령이 있기 전까지 작전에 참여한 인원은 모두 본래 근무지로 귀환해도 좋다는 사령부의 명령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