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융족 모함급 전투함, 이고리스호.
총사령관 베젤기우스는 눈에서 불꽃을 태우며 아군 구축함이 적의 급소를 찌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푸른 불꽃을 뿜는 두 눈은 마력에 의한 것이라 보기에 몹시 흉흉했는데 실제로 베젤기우스는 온몸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중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군의 죽음, EMP 공격이 성공할 때마다 무수한 아군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워프에 성공해 적을 찌르는 데 성공할 확률은 채 1할이 되지 못했다.
설령 공격이 성공하더라도 구축함의 인원이 모두 죽어 나가고 있으니 이 모든 것이 젊은 영혼들의 핏값이라고 생각하면 절로 치가 떨릴 수밖에 없었다.
“사령관님, 공격이 명중했습니다!”
“놈들의 특수함이 정지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부관들이 전하는 보고에 베젤기우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드디어, 아군을 그렇게도 괴롭히던 하얀 악마에게 일격을 선사했다.
맘 같아선 이대로 주포를 쏘아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고 싶었으나 그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베젤기우스는 잘 알았다.
인류 제국에 저 악마가 얼마나 더 있는지, 앞으로 얼마나 더 피를 흘려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 가장 효과적인 수는 저것을 포획하여 아군의 기술력으로 분석, 재창조하는 것뿐이었다.
이를 악문 베젤기우스가 손을 휘두르며 선언했다.
“가라! 가서 저 악마의 결정체를 회수하라!”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융족 전투함들이 멈춰선 레기온호를 향해 나아갔다.
산 채로 잡아 오라는 총사령관의 명령.
수천 척에 달하는 대형함이 일제히 목표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
하나, 둘, 셋.
꺼질 듯 깜빡거리던 불빛이 세 번 점멸하고 나서야 엔터프라이즈호의 전력이 다시 돌기 시작했다.
순간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지만 나는 침착하게 진을 찾아 현재 상황을 살폈다.
이전에도 진이 마법을 쓸 때마다 이랬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황은?’
-주변 대형함 300척 이상이 일시에 다운됐다.
‘레기온호도?’
-레기온호도 마찬가지다.
특무함 레기온호는 그라프를 지원하는 특수함으로 중앙에서도 신경을 많이 쓴 전투함이었다.
그런데도 EMP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니, 융족의 노림수가 제대로 먹힌 셈이었다.
‘빌어먹을, 내 머리는 왜 이렇게 아픈 거야.’
-전에 EMP 공격에 대해 보강작업 해두었던 것 기억하지?
‘그래.’
-그 정도로도 공격을 완전히 방어하는 게 불가능해 부득이하게 힘을 써야만 했다.
진은 이번 융족의 공격이 본래는 막아낼 수 없던 수준이라고 했다.
대함 미사일 규격에서 나오는 위력만으로도 순양함이 막기 버거워하던 지경이었는데 구축함을 통째로 미사일로 개조해 터트렸으니 전함의 출력으로도 막을 수 없던 것이다.
‘미친놈들이군···.’
구축함을 제물로 한 워프 공격.
초근접 워프의 성공률과 구축함에 타고 있었을 기존 승조원들의 목숨값을 생각하면 연방군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작전이었다.
‘아군함이 회복되는 데 걸리는 예상 시간은?’
-예측이 안 되는군. 치명상을 당한 꼴이야. 전함만 해도 600초 이상 걸릴 거 같은데···.
600초.
당장 융족이 주포 사격만 쏟아내도 실드가 없는 아군함은 전부 녹아내릴 터였다.
나는 어떻게 이 상황을 빠져나갈 것인지를 두 눈을 감고 고민했다.
완전히 가드가 풀린 상황에서 600초 동안 레기온호를 지키는 건 이미 전투불능인 엔터프라이즈호로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함선 상태는 어떤가?”
“간신히 움직일 수는 있습니다!”
“최대 속도의 1할 남짓 예상됩니다!”
“고물이 다 됐군.”
전함의 주포에 당했으니 움직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함장님! 주변에 엔진이 살아있는 함선이 우리뿐인 것 같습니다!”
진의 도움으로 상황을 즉시 확인한 나와는 달리 오퍼레이터들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곧 융족 전투함들의 주포가 이곳을 타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걸까.
함교는 순식간에 침묵과 공포로 물들었다.
불안함이 극에 달한 승조원들.
압박감에 짓눌려 손을 떠는 그들을 보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주목!”
“······?”
“현재 일대에서 움직일 수 있는 전투함은 우리뿐인 것으로 추측된다. 하여 우리는 호위함대의 임무를 계속 수행하고자 한다.”
“예?”
엔터프라이즈호를 비롯한 호위함대의 임무는 특무함 레기온호를 지켜내는 것.
고작 기어 다니는 게 전부인 상태로 임무를 속행하겠다고 하자 모두가 깜짝 놀랐다.
“하지만 함장님. 현 상태로는 저희가 살아남는 것도 벅찬···.”
“나를 믿어라. 이것이 우리 연방군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다. 매티스 중위!”
“예!”
“지금 당장 탈출용 셔틀을 끌고 가 전투기 조종사들을 구출하라. EMP 공격 때문에 통신도 못 하고 이쪽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을 것이다.”
아군 전투기 조종사를 구출할 것을 지시하자 중위의 두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함장님은 가지 않으십니까?”
“나는 레기온호를 구하러 갈 것이다. 만약 내가 임무에 실패하더라도 누군가는 살아남아야 할 게 아닌가.”
“함장님···.”
“지체할 시간이 없다. 중위. 속히 함교를 빠져나가 셔틀을 작동시켜라. 우측 장갑이 크게 훼손되어 격납고까지 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알겠습니다.”
나는 매티스 중위에게 조종사들을 구하는 즉시 엔터프라이즈호가 아닌 최대한 아군 전력이 두터운 쪽을 향하라고 조언했다.
“이쪽은 이쪽대로 탈출할 것이니 최대한 빠르게 조종사들을 챙기도록.”
“그럼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귀관도 조심하게.”
경례하고 함교를 떠나는 매티스 중위.
일부 오퍼레이터는 탈출 및 구출 임무를 맡은 중위의 뒷모습을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들에겐 지금 이 상황이, 아무 부질없는 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적들의 추가 공격이 늦어지고 있었다.
놈들도 전함급이라면 생각보다 빨리 시스템을 회복할 거라는 사실을 잘 알 터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늑장을 부린다는 건 노리는 바가 명확했다.
‘놈들은 레기온호의 탈취를 노리고 있다.’
그리고 곧 레이더로 적의 움직임이 확인되었다.
누가 봐도 파괴보단 확보를 목표로 하는 움직임이었다.
“목표는 레기온호. 엔진 점화하라.”
“엔진···점화.”
승조원들은 떨리는 손으로 명령을 이행했다.
그중엔 신을 찾으며 기도를 중얼거리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지금 공포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쪽에 아직 시스템이 멀쩡한 함선이 움직이는 걸 적들이 본다면 금세라도 주포 공격이 쏟아질까 두려웠던 것이다.
우리를 앞에서 지켜주던 베른 중령의 순양함을 빠져나가자 함교의 모든 인원이 마른침을 삼켰다.
개방공간으로 나가는 순간 쏟아지는 공격에 벌집이 되는 상상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도 믿을만한 구석이 있기에 작전을 속행한 것이었다.
이들이 걱정하던 적의 공격은 없었다.
엔터프라이즈호가 멈춰선 레기온호를 향해 유유히 미끄러져 나가자 다들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적, 적의 공격은 없습니다.”
“이대로 레기온호에 접근한다.”
아마 이들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이미 엔터프라이즈호는 순양함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때부터 스텔스 기술이 발동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60시간의 완벽한 스텔스 기능을 사용할 수 있는 엔터프라이즈호.
시즈 일족에게서 공유받은 기술이 처음으로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존, 정말로 레기온호를 구하러 갈 거냐?
‘그래.’
-어쩌면 제시간에 몸을 빼내지 못할 수도 있다. 융족이 다가오고 있어.
진은 250초 내로 적 전투함이 레기온호에 도달할 것이라 계산해주었다.
-엘프 친구를 놔두고 가자니 가슴이 아프지만 내겐 너의 안위가 제일 중요하다.
‘걱정해줘서 고맙다. 하지만 이건 우리에게도 무척 중요한 일이야. 오직 그라프만이 이 위기를 타개할 수 있다고.’
나는 거북이 같은 엔터프라이즈호의 속도에 인내심을 가지며 말했다.
갑작스레 앞뒤로 둘러싼 융족의 대군으로 제1군은 궁지에 몰려있었다.
이대로 홀로 도망친다 한들 무사히 제국 남부까지 도착할 거란 보장이 없었다.
게다가 이 이후에는 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4만여 척에 달하는 중앙군의 최신 함선이 무너지면 앞으로 남부가 겪을 혼돈은 감히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VV5610의 뒤편에서 남방군이 전투를 펼치고 있을 것이나 그들을 믿기엔 여전히 불안한 구석이 있었다.
결국, 최선의 수는 이 위기를 자력으로 극복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대령의 그라프가 움직여 줘야 했다.
‘아군함의 지원은?’
-다들 정신이 없어서 이쪽을 신경 쓰지 못하고 있다.
지휘관선이 있는 쪽도 상황이 녹록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중앙군이 시스템이 다운된 레기온호를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믿을 건 우리뿐이야.’
나는 격납고에서 정비 인원을 불러모으는 한편, 레기온호로 접근해 그나마 멀쩡한 좌현 쪽으로 도킹을 시도했다.
쿵- 하고 울리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함선간 연결이 완료됐다.
함교를 벗어난 나는 정비 장교들에게 문을 뚫을 것을 지시했다.
엔터프라이즈호에서 쓰이는 고성능 레이저 커팅기는 남방군이 기존에 쓰던 것과 비교해 훨씬 우수한 성능을 자랑했다.
평소 열심히 벌어두었던 돈이 이런 데서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파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뚫리기 시작하자 우린 즉시 돌입 준비를 했다.
“우리의 목표는 레기온호의 시스템 정상화를 돕는 것이다.”
“예!”
“소위, 자네는 함교 쪽으로 가 베데리스 소장님의 안전을 확보해라.”
“알겠습니다.”
“도킹할 때 소리가 들렸을 테니 어쩌면 우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먼 총에 맞지 않게 주의하도록.”
“예.”
“나는 격납고 쪽으로 가서 후미를 살피겠다.”
중앙에서 부하들과 흩어진 나는 인원을 둘로 나누어 격납고 쪽으로 향했다.
15초만 더 버텼더라면 그라프가 움직일 수 있었을 터, 나는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며 서둘러 움직였다.
레이저 총을 들고 우르르 복도를 달리자 랜턴을 들고 우왕좌왕하던 승조원들이 깜짝 놀라며 물러났다.
이 와중에 다른 아군함이 도킹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격납고에 도착하자 열심히 소화기를 들고 화재 진압중인 병사들이 보였다.
레기온호를 오가며 몇 번이고 얼굴을 본 적 있는 정비반 대위가 악을 쓰며 인원을 지휘하고 있었다.
“대위! 대위!”
“아니? 존 소령님?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얼굴에 묻은 검댕을 훔친 대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나. 그라프의 상태는?”
“충전 15초를 남기고 멈춰버렸습니다.”
“그럼 더 짧게나마 기동할 수 없단 말인가?”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 시스템이 짜여 있질 않습니다.”
-건전지만도 못하네.
진의 투정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충전이 불완전했으면 짧게나마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었어야 할 거 아닌가.
나는 진과 함께 그라프를 만든 중앙 과학자들을 탓하며 대위에게 해결책을 물었다.
“레기온호의 엔진이 재점화하기 전까진 도저히 방법이 없습니다.”
“엔진 복구 상황은?”
“엔진실도 지금 답답할 겁니다. 동력원부터 살려야 하는데 시스템이 죄다 타버려서···.”
“대령님은 저 안에 계신가?”
“예. 아마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실 겁니다.”
완벽히 바깥세상과 차단된 그라프의 조종석.
감옥 아닌 감옥에 갇힌 대령을 바라보던 나는 엔진실로 향하는 송·수신관을 잡아 상황을 파악했다.
EMP는 구조가 간단한 기계는 망가트릴 수 없다.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대상이 복잡한 전자 회로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엔진실에 연락을 넣겠다고 하자 병사들이 커다란 톱니를 열심히 돌리며 간이 동력을 일으켰다.
“엔진실, 내 목소리 들리나? 엔터프라이즈호, 존 메이어 소령이다!”
“엔터프라이즈호라고요?”
엔진실에선 나의 출현을 크게 반겼다.
“혹시 구축함을 타고 오셨습니까!”
“그렇네!”
“오 신이시여···.”
신에게 감사를 전한 그들은 곧장 엔터프라이즈호의 동력원을 빌려야 한다고 말했다.
“구축함의 동력을 레기온호의 융합로에 이어붙이면 엔진을 다시 살릴 수 있을 겁니다!”
“엔진만 살리면 그라프 충전도 재개되는가?”
“그렇습니다! 함교 시스템 정상화와 상관없이 충전을 완료할 수 있습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물었다.
“케이블을 연결하고 작업 완료하는 데 얼마나 걸리겠는가. 우리 쪽에서도 도울 수 있는 인원이 족히 백 명은 되네.”
“10분···. 아니 5분 내로 엔진을 살려보겠습니다.”
-오 분? 오오-분?
진이 버럭 소리쳤다.
적들의 함선이 어느새 레기온호의 코앞에 도달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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