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전자기 펄스, 통칭 EMP.
이 EMP를 당하면 전자기파에 집적회로가 망가져 첨단장비들이 순식간에 고물이 돼버리고 만다.
온갖 첨단 기술의 결정체인 전투함에겐 아주 치명적인 무기인 셈.
물론 전자기파 방호와 차폐 기술이 발전하며 대형함들은 어느 정도 EMP공격에 대한 내성을 갖추게 되었지만 이번엔 그 정도가 다른 듯했다.
단 한 번의 공격에 엔터프라이즈호가 다운돼버린 것이다.
완전히 어둠 속에 잠긴 함교.
순식간에 시스템이 마비되었고 오퍼레이터들의 당황한 목소리는 상황을 더욱 어지럽게 했다.
‘진, 어떻게 된 거야.’
-함선의 전자기파 방호가 무용지물이 됐다. 마력 파동을 미사일에 담을 줄이야.
진의 설명에 나는 우리 목숨이 바람 앞의 촛불 신세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시스템 복구까지 얼마나 걸리겠나.”
“회로를 교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최소 3분은 필요합니다!”
시스템 복구까지 빨라도 3분은 걸린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3분이라니···.
그 정도면 교전 상황에서 상대를 살코기만 발라 깔끔하게 분리수거까지 마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진은 적의 중순양함 포문이 우릴 겨냥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주요 시스템이 완전히 마비된 엔터프라이즈호로선 당해낼 재간이 없는 상황.
그나마 다행인 건 이 특수 EMP탄의 범위가 넓지 않았단 점이었다.
시스템이 다운된 건 엔터프라이즈호뿐이었고 주변에서 전투 중인 함선이나 전투기엔 영향을 끼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타개할 방법이 없겠어?’
-미안하다. 지금으로선 나도 방법이 없군···.
‘전투기 조종사가 아닌 함장으로 죽게 된다니. 조금 억울한걸.’
통상 우주 전장에서 교전시 가장 사망률이 높은 인원은 적 전투기와 싸우는 조종사들이다.
그 힘든 구간을 견디어 함장이 되었건만, 이번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와 동시에 적 중순양함이 주포를 발사했다.
쇄도하는 붉은 광선.
함교 창밖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두의 안색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과연 세 번째 인생도 있으려나?
또다시 누군가의 몸으로 깨어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스운 생각을 하던 그때,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나 함선의 정면을 가로막았다.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강렬한 진동.
함교 인원은 신음을 흘리며 진동을 견뎠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림자가 사라진 뒤였다.
-카린 대령이 우릴 도왔다.
방패를 세우고 주포를 방어해준 것은 흰색의 그라프.
이후 그녀는 곧장 상대를 향해 날아가 단숨에 적함을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다.
검으로 실드를 찢고 근접거리에서 미사일을 발사한 것.
이후에도 그녀는 좀 더 자리를 지키며 아군 전투기들이 주변 적들을 처리하는 것을 지원해주었다.
꼭 필요한 동작으로 핀포인트 타격을 입히던 평소와는 분명 다른 움직임이었다.
그것이 나를 염두에 두었던 것인지, 아니면 우연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진심으로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로써 목숨 한번을 빚진 셈이었다.
“시스템 복구됐습니다!”
“상황은?”
“관측 시스템 상당수 회복 불가, 통상 전투력의 30퍼센트 정도로 예상됩니다.”
“거의 기동만 할 수 있는 수준이군.”
나약한 장비들 같으니.
전투 명령을 수행하고 처리하는 CPU와 각 파트의 ECU가 손상돼 상당수 무장이 불량상태가 되고 말았다.
시스템의 보조가 없다면 모든 무기를 육안으로 수동 사격해야 하는데 이 같은 경우 공격 성공률이 크게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레기온 호 옆으로 이동한다.”
“예!”
본래라면 유사시에 대비해 서로 퍼져 전투하는 것이 유리하나 지금 같은 상황은 어쩔 수 없는지라 다들 합류를 이해해줄 터였다.
커다란 전함을 방패 삼아 싸우는 것.
그것이 기능이 완전히 떨어진 엔터프라이즈호가 이 전투를 끝까지 버텨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
실로 치열했던 전투.
전함 51척, 총 대형함 916척으로 시작한 전투가 끝났을 때, 중앙군의 전력은 715척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중앙의 함선이 남부와 비교하면 더 뛰어나단 점을 생각하면 이는 간과할 수 없는 큰 피해였다.
‘우린 운이 좋았군.’
특무함 레기온호 호위를 위해 남부에서 차출된 함선 중 무려 4할이 이번 전투에서 폐기 처분을 받았다.
다들 남부 연방군에서 한가락 했던 에이스급 함선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거의 집중포화를 받은 셈이었다.
그중에선 용케 목숨을 건진 함선이 있는가 하면 어떤 함선은 반으로 두 동강이 나 승조원 전원이 죽음을 맞이한 경우도 있었다.
타란튤라 봇을 이용해 외부 장갑을 수리하고, 시스템 복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중앙군 전체에 새 소식이 전해졌다.
기를 쓰고 감추려던 적의 중요 거점을 발견했다는 내용이었다.
임시 행성 명칭 ‘VV5610’.
골디락스 존(생명체가 살아가기 적합한 환경)에 있는 특급 행성으로 그 크기는 무려 트라카의 20배에 달한다고 했다.
단순히 비교하자면 저 행성 하나가 지구 20개 정도의 가치를 지닌 셈이었고 저런 특급 행성은 자치령을 거느릴 수 있는 대귀족이라면 누구나 탐을 낼 만한 보물이었다.
중앙군 총지휘관의 선언 이후 함대 전체엔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융족 영토 침투 이후 가장 격렬할 전투가 다가오고 있었다.
*
‘지금 찾아가는 건 좀 그림이 이상할까?’
-이상하긴 뭐가. 생명의 은인한테 감사 인사하러 찾아가겠다는데. 어서 가자!
전투 종료 16시간 후.
나는 군복을 갖춰 입고 레기온호를 방문했다.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 준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엔터프라이즈호의 인원은 모두 관에 들어갔을 터였다.
커다란 은혜를 입었으니 이 정도 방문은 괜찮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격납고엔 수리 중인 그라프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제국 최강의 병기에게도 격렬한 전투였는지 이곳저곳 손을 봐야 할 부분이 상당해 보였다.
나는 정비 인원을 붙잡고 카린 대령의 행방을 물었다.
“아마 지금 의무실에 계실 겁니다.”
“의무실? 많이 다치셨나?”
“음···전투 피로 때문에 그럴 겁니다. 자주 있는 일이니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로 대수롭지 않은 듯 답하는 소위.
대체 얼마나 자주 의무실 신세를 지면 저런 반응이 나오는 건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의무실 앞을 찾아갔는데 이게 웬걸.
환자를 치료해야 할 의무 장교가 복도 벤치에 앉아 다른 군인들과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내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대위인 그가 경례하며 어디가 아파서 오셨느냐고 물었다.
“카린 대령님이 여기 계시다고 들었는데.”
“예. 안에 계십니다.”
왜 환자를 돌보지 않고 바깥에 나와 있는 거냐고 묻진 않았다.
어차피 마력을 견디지 못해 도망 나왔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의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침상 여럿이 보였고 그 중 구석 한 자리를 차지한 여성이 조용히 누워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내가 다가갈 때까지만 해도 눈을 감고 있었고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고 나서야 천천히 눈을 떴다.
자신에게 손님이 찾아왔을 거라곤 예상치 못한 것인지 카린 대령은 나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령, 이렇게 빨리 보게 될 줄은 몰랐군.”
“좀 더 누워계셔도 됩니다.”
“아니네.”
베개를 뒤에 받치고 상체를 일으킨 그녀가 말했다.
“그래. 무슨 일로 찾아왔지?”
“저희 함을 대표로 대령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감사라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
“아닙니다. 대령님이 아니었으면 저흰 그날 다 귀신이 됐을 테니까요.”
아프다고 해서 크게 다친 것은 아닌지 우려했는데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닌 모양이었다.
대령은 대화를 나누며 살짝 웃는 여유를 보여주기까지 했던 것.
“의무실에 자주 오신다고 들었습니다만.”
“병사들이 그런 얘길 하던가? 음···틀린 이야긴 아니지. 그라프 조종이 상당한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거든.”
그녀는 제국에서 그라프를 다룰 수 있는 인원이 자신을 포함해 단 둘뿐이라는 말을 건넸다.
기체도 둘, 파일럿도 둘.
대체 얼마나 조종이 어렵기에 이 드넓은 제국에 조종사가 단둘뿐이라는 건지 쉽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표정만 봐도 귀관의 생각이 짐작되는군.”
“···그렇습니까?”
“그라프의 조종이 그렇게까지 어려운 이유가 궁금했을 테지. 그라프는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이가 아니면 기동 자체가 불가능하다네. 그리고 엄청난 부담이 몸에 걸리지.”
대령은 마력을 다룰 줄 아는 인원.
제국의 수많은 마법사와 기사가 그라프 조종사가 되기 위한 테스트를 받았으나 아직 더 성공한 사람이 없다고 했다.
“현존하는 그라프 파일럿은 모두 엘프일세. 육체의 강인함으로 따지면 라다만도 밀리지 않을 테지만 그들은 마력을 다룰 줄 모르거든.”
“그렇군요.”
“그나저나 자네 손에 든 건 뭔가?”
그녀가 내 손에 들려있던 상자를 보며 물었다.
“이건 대원들이 대령님께 드리고 싶다고 하여 가져온 선물입니다.”
그녀에게 주기 위해 가져온 선물은 주방 인원이 힘을 써 만든 쿠키였다.
애초에 보급도 원활하지 않은 전장에서 구할 수 있는 선물 이래 봐야 한계가 명확했던 것.
처음엔 쿠키 선물을 두고 이거 안 주느니만 못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대령은 선물이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고맙다고 전해주시게. 잘 먹겠다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아, 이럴 게 아니라 지금 차를 한 잔 대접하는 게 좋겠군.”
그녀는 몸은 충분히 회복됐으니 자신의 방에 들러 차를 가져오겠노라고 말했다.
“괜찮습니다. 차는 대령님 컨디션이 좋을 때 나누어도 되니 좀 더 쉬시지요.”
굳이 차 한 잔 마시자고 환자를 방까지 가게 하는 것이 거북했기에 손을 흔드는 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새하얀 시트에 우수수 떨어진 피.
코피를 쏟아낸 대령이 당황하며 고갤 치켜들었다.
-어어. 우리 엘프 죽는다!
적잖게 놀란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다가가 고개를 다시 앞으로 숙이게끔 하였다.
“소령?”
“코피가 났을 땐 고개를 뒤로 젖히기보다 앞으로 머리를 기울이는 게 좋습니다. 혈액이 폐나 위로 흘러 들어갈 수 있거든요.”
“하지만···자네 손이 더러워지지 않았나.”
“씻으면 됩니다. 별거 아닙니다.”
나는 한 손으로 그녀의 코피를 받는 한편 다른 손으로 티슈를 뽑아 그녀에게 건넸다.
“고맙네. 갑자기 나버리고 말았어.”
“격렬했던 전투 아닙니까. 이해합니다.”
그녀는 이런 모습을 보여준 것이 부끄러웠는지 한동안 코를 막고서 침묵을 지켰다.
나라면 이럴 때 휴지를 돌돌 말아 콧구멍에 끼웠을 테지만 차마 대령에게 그것까지 권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조만간 대규모 공습 작전이 실행될 거라고 들었습니다.”
“아, 새로운 적 거점에 대한 이야기 말인가?”
“예. 그런데···.”
“······?”
“그라프 조종은 계속 대령님이 하게 되는 겁니까?”
내 질문에 그녀가 씁쓸히 웃었다.
당분간은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대체자가 나오질 않으니 별수 없지 않겠나?”
“제국에 기체가 두 대 있다고 하셨는데 교대를 하는 방법도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돌아가기 전엔 불가능하네. 그라프는 잠시라도 황성(皇星)을 비울 수 없으니 말이네. 그리고 내가 빠진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 그라프 없이 주력군이 이틀이나 버틸 수 있을지 의심스럽지 않나.”
담담히 말하는 그녀에게서 나는 어떠한 각오를 엿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대령은 자신이 죽기 전까진 이 임무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별일 없을 거라고 말하는 그녀.
쿠키를 맛보고선 훌륭하다고 평하는 대령을 보며, 나는 전장을 떠도는 이들의 운명에 관한 연민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되었다.
*
그녀와 헤어지고 돌아 나오는 길.
셔틀로 향하던 도중 조금 전에 보았던 강철의 거인이 눈에 들어왔다.
‘진.’
-응?
‘저번에 그라프에 관해 해석해보겠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됐어?’
-아 그게, 제대로 뜯어보기 전엔 너무 단편적인 정보밖엔 알 수 없었어. 근데 왜?
나는 잠시 멈춰 서서 거인을 응시했다.
‘어쩌면 말이야. 저것도 전투기처럼 충격을 완화할 수 있지 않을까?’
-뭐?
결국은 사람이 만든 물건 아닌가.
아무리 복잡해도, 시간이 충분하다면 못할 이유는 없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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