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존 메이어 보직 변경 2일 전.
황실 특무함 레기온호의 함교에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함장이 쥐고 있던 전자 파일.
그것을 건네받은 그라프 조종사, 카린 아스트라드 대령이 물었다.
“레기온호의 호위를 좀 더 보강할 참이네. 서류에 있는 명단은 중앙군 외에 전과가 탁월한 함선들을 추린 것이고.”
“그렇군요.”
그녀는 천천히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허공에 떠오른 스크린엔 함선 종류와 함장의 프로필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우리 부대의 부담이 점차 심해지고 있어. 이러다간 폐하의 명령을 완수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
특무함 레기온호를 이끄는 베데리스 소장은 골치가 아픈 듯 손으로 이마를 쓸었다.
실제로 융족의 반격이 거세진 이후, 중앙군은 쉴 새 없이 많은 전투를 치르는 중이었다.
중앙군이 남부 연방군과 함께한 지도 어느덧 4개월 차.
이미 오딘이 함락당할 때부터 맛이 가 있던 탓일까.
중앙군과 남부 연방군의 전력은 차이가 너무나도 컸고 자연스레 중앙군은 더 위험한 지역과 작전을 커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남부의 피해가 극심하게 누적될 테고 결국 융족 영토를 정벌해야 하는 자신들의 부담이 더 가중될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안 그래도 연전으로 부담이 심한 중앙군에서도 가장 혹독한 환경에 놓인 함대가 있었으니 바로 레기온 호를 중심으로 한 특수 부대였다.
“남부의 구닥다리 함선을 타고도 성과를 낸 자들일세. 그들이라면 우리의 호흡을 어느 정도 따라올 수 있겠지.”
특무함 레기온호에 실려있는 제국의 결전 병기, 그라프.
이는 고작 2개 주력군이 융족 전체와 상대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었고 덕분에 레기온호 휘하 전투함들은 한계를 넘다 못해 퇴역함이 될 지경에 이르렀다.
중앙군이 위험하단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눈도 못 붙이고 출격을 해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결국, 대규모 정비를 위해 중앙으로 귀환하는 구축함과 순양함이 계속 발생하자 특무함 함장 베데리스 소장이 상부에 건의, 남부 연방군의 에이스급 함선을 임시 호위로 돌리는 플랜을 발동한 것이었다.
소장의 이야기에 프로필을 살피던 대령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공교롭게도 아는 인물이 있었던 것.
“함장님.”
“음?”
“이들은 본래 자리에서 임무를 계속하고 싶어하지 않을까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네. 파일에 있는 군인들은 전부 이번 임무에 자원한 이들이네.”
“자원···했다고요?”
대령은 쉬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중앙의 함선도 버티지 못하고 물러나는 것이 특무함 호위 역이었다.
쉴 새 없이 비상태세를 유지해야 하는 중앙군 중에서도 최악의 전장.
그런데도 스스로 돕겠다며 나섰다는 건 어쩐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대령은 두 번이나 더 확인했고 그제야 믿겠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대령이 소장의 명령을 믿지 못한다는 걸 대놓고 보여준 셈이나 소장은 이를 질책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카린 아스트라드.
표면상의 계급은 대령, 하지만 그녀는 동시에 황실 근위 기사단을 겸하고 있었다.
근위 기사들이 누구인가.
유일하게 무기를 소지하고 황제를 대면할 수 있는 자들이다.
기사단 인원의 대부분은 대물림하며 황실에 충성을 바쳤고 이들에 대한 황제의 신임 역시 아주 두터웠다.
하물며 종족 전체가 충성을 맹세한 엘프 기사라면, 그 위세는 결코 장성들보다 낮다고 할 수 없었다.
“어차피 파일에 있는 인원을 다 받을 것도 아니지 않나. 자네가 원하는 인원이 있거든 대충 추려보게. 뒷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지.”
“알겠습니다.”
“그럼 가보게···.”
그 순간 대령은 소장의 눈치를 살폈다.
갑자기 땀을 흘리는 것이 이 짧은 대화로도 상당히 진이 빠진 모양이었다.
대령은 고갤 꾸벅 숙이고 함교를 나섰다.
이제는 익숙해진 일이었다.
오랜 훈련을 거친 근위 기사들이 아니고선 은연중에 퍼지는 자신의 마력을 견디기 어려워했다.
파일을 들고 격납고로 향하던 대령은 다시금 후보들을 살펴보았다.
순서 중간, 그곳에 기억에 또렷한 인물이 있었다.
분명 전투기 조종사였는데 어느새 구축함의 함장이 된 모양이었다.
‘존 메이어···.’
상대방이 자신의 기운을 두려워하지 않고 편안하게 얘기했던 것이 대체 언제였던가.
연회장에서의 만남을 떠올린 그녀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
이틀 후.
보직이 변경된 전함, 순양함, 구축함 클래스의 함장들이 특무함 중앙홀에 모였다.
“황제 폐하의 위대한 명을 수행하기 위해 이렇게 나서준 자네들의 헌신에 먼저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네.”
환영 인사를 건네는 베데리스 소장.
그러나 군인들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난데없이 보직이 변경된 데다 하필 중앙군에서도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다는 특무함 호위를 맡게 되었으니 다들 인상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제야 카린은 자신이 소장에게 속았음을 깨달았다.
이들은 애초에 자원한 적도 없고, 특무함 호위를 원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소장이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한 분노인지, 아니면 자신이 괜한 이들에게 피해를 준 것에 대한 미안함인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반응은 하나로 귀결됐다.
환영 인사를 하던 베데리스 소장이 움찔하더니 급히 대령 쪽을 쳐다보았다.
“이, 이보게 대령.”
“예···.”
“몸이 불편하면 의무실을 가는 게 좋겠네.”
갑작스레 주변을 휘어잡은 마력.
소장은 숨이 막히는지 땀을 흘렸고 이는 새롭게 임무를 맡게 된 함장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저도 모르게 우르르 뒷걸음질 홀 외곽으로 달아났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마음을 추슬렀다.
초면부터 사고를 쳤으니 이번에도 저들과 친해지긴 어렵겠구나.
그리 생각할 때였다.
뒤로 물러선 사람들과 달리 본래 자릴 꼿꼿이 지키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대령님? 의무실로 가셔야 하면 부축을 돕겠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자신을 대해주는 그의 태도는 그녀에게 있어 적지 않은 위안이 되었다.
“아니네. 이제 괜찮아졌네.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하군.”
“···알겠습니다.”
상황이 진정 되자 소장은 대충 자리를 파했고 군인들은 무슨 환영식이 이러냐며 한마디씩 투덜거렸다.
보직 변경은 이미 무를 수 없는 상황.
남부 연방군에서 건너온 장교들은 같이 힘을 내보자고 위로를 나누고선 본함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상황은 명확해졌군. 저기 소장이란 인간이 우릴 방패 대용으로 쓰려고 데려왔다는 게 말이야.
‘아니 군공도 줄였는데 대체 나를 왜 찜한 거지?’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한 존이 고갤 흔들며 돌아가려 할 때였다.
그를 불러세우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이 대충 흩어졌을 때를 노린 시점이었다.
“존 메이어 소령.”
“예.”
“아깐 고마웠네.”
“아닙니다. 아프고 어려울 땐 서로 돕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저···그런데 하실 말씀이라도?”
-분위기가 이상한데? 혹시 고백을···.
잠시 머뭇거린 대령은 이내 존에게 사정을 털어놓았다.
실수로 특무함 호위로 불러들인 것과 자신이 강한 마력을 보유하고 있어 이것이 타인과의 대화를 어렵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말이다.
-뭐야. 그럼 이 녀석이 우릴 여기로 불렀다는 거 아냐.
‘그런가 봐.’
-나쁜 귀쟁이 같으니.
‘미안하다잖아.’
자신의 실수에 사과를 표한 대령이 말했다.
“소령은 괜찮나? 내 마력 말이네.”
“보시다시피 저는 괜찮습니다.”
“신기한 일이군. 혹시 친척 중에 마법을 잘 아시는 분이 있다거나?”
‘친척은 아닌데 잘 아는 친구가 한 명 있긴 하죠.’
-영혼의 동반자랄까.
그런 분은 없다고 대충 둘러대자 그녀는 신기한 일이라며 웃어 보였다.
-여기서 웃는다고?
“체질이 이래서 그동안 대화를 편히 나눌 상대도 없었지 뭔가. 그래도 자네는 괜찮다니 다행이야. 혹시 괜찮다면 가끔 들러주게. 그땐 자네에게 고향의 차를 한번 대접하겠네. 맛이 아주 좋거든.”
-이거이거···.
그녀의 말에 진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며 호들갑을 떨기 바빴다.
제발 조용히 해달라고 존은 짜증을 냈지만 조금 신기하게 여기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쩌면···정말 나한테 호감을?’
-보면 모르냐고! 답답하네!
괜한 설레발에 실수를 할까 염려됐던 존은 향후 다시 찾아뵙겠다며 경례를 했다.
그렇게 좋은 분위기로 헤어진 뒤, 엔터프라이즈호로 향하는 셔틀 안에서 진이 말했다.
-난 좋은 것 같아.
‘뭐가 또.’
-저 엘프 친구는 마법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마력사용자잖아. 위대한 이 몸의 계약자가 마력도 모르는 녀석이랑 이어지는 건 좀 그렇지.
‘이어지긴 뭘 이어져. 헛소리 좀 그만해.’
-언젠가 결혼할 거면 저 친구도 마음에 든다 이거지.
존은 쓸데없는 소리 말라며 팔짱을 끼고선 시트에 몸을 파묻었다.
‘결혼은 무슨.’
누군가와 가정을 이루고 살림을 꾸린다니.
전생에서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일뿐더러 지금 같이 살아남기만도 벅찬 상태에선 불필요한 고민이었다.
*
특무함 호위 임무 개시 이틀째, 전에 없던 격전이 우주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중앙군 소속의 전함 부대가 융족에게 포위되어 긴급 구조 신호를 보내왔고 레기온호는 곧장 지원을 위해 워프를 개시했다.
언제든 워프를 뛸 수 있도록 레기온 호는 워프 드라이브를 예열해두고 있었다.
작동에 평균 한 시간이 걸리는 워프 기관.
이에 막대한 하이퍼에테르가 소모되기에 만약 워프가 불발되면 그것만으로도 자원이 소모되는 꼴이었다.
귀한 하이퍼에테르를 가지고 그런 짓을 한다는 건 기존 전투 교리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레기온호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한 시간은커녕 삼십 분이 못 돼 구조 요청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전투에 전투, 그리고 또 전투.
엔터프라이즈호뿐만 아니라 레기온호를 호위하는 모든 인원이 피가 마른다는 게 무엇인지를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이러다 우리 계약자 죽어!
‘안 죽어···.’
나는 네 고함 때문에 더 죽을 거 같다고 하소연하며 명령을 전달했다.
“우현 회피! 실드를 50퍼센트로 맞추고 주포 예열을 시작하라!”
“알겠습니다!”
전함뿐 아니라 무수한 대형함이 한데 얽혀 싸우는 어지러운 상황.
우연찮게 적 구축함과 마주보게 된 상황에서 나는 실드를 50퍼센트만 두를 것을 명했다.
동급함끼리의 전투에서 실드량을 일부러 낮추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으나 나는 절반의 에너지로도 충분히 적의 공세를 받아낼 자신이 있었다.
파츠즈즈-!
벼락같은 섬광이 튀며 엔터프라이즈호의 실드를 적 구축함에서 쏘아진 광선이 긁어냈다.
커다란 충격.
그러나 실드는 예상대로 버텨주었고 오퍼레이터들이 외쳤다.
“주포 충전 완료됐습니다!”
“적 구축함에 반격 가능합니다!”
언제든 쏠 수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내 목표는 적 구축함이 아니었다.
나는 방향을 돌릴 것을 지시했고 머리를 돌린 엔터프라이즈호의 주포는 한창 아군과 교전을 펼치는 적 순양함에게로 향했다.
“주포 목표는 적 순양함이다! 지금 즉시 발사하라!”
융합로가 거세게 맥동하며 힘을 응축, 포강에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발사!”
그와 동시에 힘차게 뻗어 나가는 빛의 파동.
기존 주포 광선의 푸른색, 붉은색과는 다른 오색 빛깔의 파동이 순양함 실드를 강타했다.
교전 중이던 적 순양함의 실드가 대번에 깨졌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헨리와 로저가 주저 없이 이클립스 미사일을 발사했다.
실드가 벗겨진 적의 외부 장갑을 이클립스 미사일이 뚫고 들어갔다.
마치 처음부터 노리고 있던 것 같은 부드러운 연계.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던 건 실시간으로 진이 데이터를 시각화해 내 머릿속에 뿌려주는 덕분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다른 함장들보다 훨씬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었고 어디서 아군 전투기가 활약 중인지, 도움이 필요한지, 적의 약점은 어디인지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목표 순양함! 완전 침묵! 공격 성공입니다!”
구축함이 순양함을 잡아냈다는 것.
두말할 나위 없는 커다란 군공이었다.
기뻐하던 것도 잠시, 진의 다급한 외침이 울렸다.
-중순양함이 우릴 타겟으로 잡았다!
중순양함.
순양함의 크기를 더욱 키우고 장갑과 무장을 강화한 준전함급 함선이었다.
전함이 전장의 코끼리라면 코뿔소쯤은 되는 녀석.
그런 놈이 실드를 두른 채 전속력으로 엔터프라이즈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조그마한 구축함으로 대형함을 몇 척이나 잡아냈던 것이 놈들의 시선을 끈 모양이었다.
-속도가 빨라!
‘육탄 돌격이라고?’
무식한 짓거리에 혀를 내두른 내가 회피를 지시하던 그때 경고음과 함께 적 미사일이 레이더망에 포착됐다.
평소 전장에서 보던 것과 다른 훨씬 더 커다란 미사일.
느낌이 좋지 않았던 나는 아군 전투기에 미사일 요격을 주문하는 한편 레이저포와 팰렁스를 전부 가동해 공격 차단을 시도했다.
<명령 접수했다.>
엔터프라이즈호 주변에 있던 전투기들의 커버.
그리고 완성된 대공화망.
그러나 이후 벌어진 광경에 모두의 안색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게 무슨!’
-오 쉣!
미사일에 둘러진 두터운 실드.
방어 마법으로 중무장한 미사일이 끝내 엔터프라이즈호의 실드를 강타했다.
그와 동시에 일대가 암흑으로 물들었다.
장교 임관 이후, 처음으로 당한 전자기 펄스 공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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