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우주 군벌가 망나니-29화 (29/134)

29화 비상 착륙

금속으로 만든 거대한 팔과 다리.

두 개의 엔진에서 뿜어지는 힘으로 우주 공간을 가르며 나아가는 저것은.

‘완전 로봇이네···.’

만화에서나 본 적 있는 커다란 로봇이 가공할 속도로 적을 향해 날고 있었다.

그 속도는 향상된 마이더스호의 전투기들보다도 훨씬 빨라 마치 혜성이 날아가는 듯했다.

-로봇 따위가 아니다.

‘아니라고?’

-압도적인 마력 집합체지.

이쪽 계통에선 웬만해선 감탄하는 법이 없는 진이지만 저 로봇에 대한 감상만큼은 평소와 달랐다.

-제국 중앙에 저런 것들이 여러 대 존재한다면 반란 따윈 걱정하지 않아도 될 수준이야.

바로 그때, 진의 말을 증명하듯 적 전함을 향해 돌진한 로봇이 금빛을 두른 검을 휘둘렀다.

벼락과 함께 전함의 실드가 일거에 찢어졌고 로봇은 망설임 없이 장갑 안쪽을 향해 검신을 찔러넣었다.

로봇의 크기는 약 50미터 남짓.

저 거대한 전함을 검으로 찢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지 않나 싶었는데 단 한 번의 칼질로 적 전함은 수차례 폭발을 일으키더니 완벽하게 고철덩이가 되고 말았다.

저 커다란 검에 특이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 모양이었다.

다들 로봇의 활약에 관객이 되어 잠시 손을 멈춘 사이, 융족은 그야말로 비상상황이 됐다.

난데없이 등장한 로봇을 막기 위해 수백 대의 융족 전투기가 달려들어 미사일과 레이저포를 퍼부었다.

무수한 공세의 파도.

순양함은 물론이고 전함도 뒤흔들 법한 공격이었지만 로봇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형함에 비하면 한참이나 작은 50미터의 표적에 공격을 집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고 어쩌다 명중하는 공격마저도 거인이 내뿜는 실드에 모두 무효로 돌아갔다.

전투기의 포위망을 가볍게 뚫은 로봇은 더욱 속도를 올리며 적함의 실드를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본체 타격 없이 전함 사이를 누비며 오직 실드를 파괴하는 데만 집중한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워프를 마치고 튀어나온 중앙의 전투부대가 주포사격을 실시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대형함들이 열을 맞추고 늘어서 주포를 발사하는 광경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빼어난 구석이 있었다.

마치 우주에 파도가 치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하는 광경.

파도는 융족의 전투함들을 일거에 쓸어 담았고 그 공격 한 번으로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었다.

<이대로 몰아붙인다. 남은 적함 소탕을 시작하라.>

각 함의 사령관들이 혼란에 빠진 적에게 반격을 가하란 신호를 보내왔다.

<재보급을 하지 않아도 좋은 대원들은 나를 따르도록!>

대대장 리카르도 소령이 먼저 진격했고 그 뒤를 따라 마이더스호의 전투기들이 앞다투어 속도를 높였다.

수십 시간째 얻어맞았던 피의 분노를 갚아줄 시간이었다.

*

중앙에서 지원을 위해 나타난 함대 규모는 전함 1천 대를 포함해 대형함 총 2만여 대에 달했다.

이는 주력군 2개 부대에 해당하는 규모로 대장 계급이 최소 둘 이상 포진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더욱 발달한 기술력으로 무장한 중앙의 함대들.

그들의 개입으로 연방군은 순식간에 병력 격차를 뛰어넘어 열세를 극복할 수 있었지만 생각보다 전투를 종결짓긴 쉽지 않았다.

융족은 거대 모함을 중심으로 집결하여 반격을 꾀했다.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모함은 지금껏 제국에 없던 함종.

연방군은 우위를 점한 지금이 총공격의 적기라고 판단,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에서 모함을 격추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전투 57시간째.

중앙 주력군을 필두로 우리는 후퇴하는 융족 부대를 추격 중이었다.

전투기 조종사들의 체력이 한계에 다다른 시점이었다.

더는 버틸 수 없던 조종사들은 눈이라도 잠깐 붙이기 위해 각 함대로 돌아갔고 아직 여력이 있는 자들은 계속해서 추격에 나섰다.

물론 여력이 남은 파일럿들의 상태도 정상은 아니었다.

그냥 눈만 뜨고 있어도 쉽지 않은 장시간을 격전을 치르며 버텨냈으니 당연했다.

조종사들은 체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각성제를 사용했다.

약물의 힘으로 슈퍼 솔져가 되는 것이다.

이런 약물이 당연히 부작용이 없을 리 없지만 중앙군이 오기 전만 해도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던 조종사들이었다.

그렇게 적을 몰아내고, 이제는 좀 쉬어도 될 텐데 아직 정신력이 살아있는 자들은 계속해서 자신을 채찍질했다.

<적 부대가 흩어진다. 우린 왼편을 맡는다.>

“라저.”

이렇게까지 이를 악물고 적을 뒤쫓는 이유는 바로 군공 때문이었다.

후퇴하는 융족 대형함들은 개전 초기에 비해 반격하는 힘이 크게 떨어졌다.

작위를 위해 연방군에 입대한 장교들로선 군공을 쌓을 절호의 기회였던 것.

전투기는 말할 것도 없고 무수히 많은 대형함이 연방군 전투기에 의해 격침을 거듭했다.

다들 블랙박스에 공적을 쌓느라 분주한 가운데 나는 상당히 유리한 포지션을 잡고 있었다.

모리더스 대장의 치유 이후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지만 각성제까지 맞아가며 이틀 밤낮을 버틴 동료들에 비하면 나는 상태가 훨씬 좋은 편이었다.

나는 벌써 열 번이 넘는 재보급을 하며 재출격을 감행했고 조금 전 보급에선 순양함을 격침시키는 쾌거를 이뤘다.

아군 주포가 실드를 벗겨낸 틈을 이용해 엔진에 헬파이어 미사일을 타격, 적 순양함을 완전히 끝장낸 것이다.

대위로 진급한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이 기세라면 소령 진급이 코앞이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유례없는 진급 속도를 떠올리며 가슴이 두근거리던 찰나, 재빠른 속도로 내 양옆을 스쳐 지나가는 전투기들이 있었다.

블랙 베이스에 날렵한 동체.

중앙군의 전투기였다.

녀석들은 전투하는 우릴 비웃기라도 하듯 여유로운 속도로 앞질러 적을 격추하기 시작했다.

<젠장! 중앙 놈들이 우리 공적을 방해하는군!>

<남방 경계의 저력을 보여주자!>

갑작스레 끼어든 중앙전투기에 동료 조종사들의 경쟁심이 불타올랐다.

나는 주변 편대원들과 함께 가까운 적 전함을 향해 쇄도했다.

쏟아지는 대공포.

실드는 벗겨졌어도 여전히 전함의 대응 사격은 무시무시했다.

공적에 눈이 멀어 섣불리 다가갔다가 비명횡사하는 아군 조종사들도 눈에 띄었다.

“먼저 길을 뚫겠다.”

<라저.>

짧은 시간에 대위를 달아 편대장을 맡게 된 나지만 조종 실력은 다른 편대장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비처럼 쏟아지는 포격 사이를 날아 전함의 뒤를 잡은 나는 즉시 미사일을 발사했고 뒤따라온 동료들도 차례로 미사일을 꽂아 넣었다.

전함의 엔진은 순식간에 마비.

이대로 몇 발 더 꽂으면 전함을 터트리는 것도 가능하겠으나 우린 그대로 다음 목표를 향해 날았다.

마무리는 아군 대형함에 맡기고 우린 계속해서 엔진 정지를 노리는 것이 아군에 더욱 유리한 전략이었다.

-이 기세면 곧 대령도 달겠는데.

‘소령도 아니고 대령은 무슨.’

대령은 너무 나갔다고 생각하던 그때,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거리에 최종 목표물이 포착됐다.

융족의 거대 모함이었다.

오딘 공습을 촉발한 이번 전투의 원흉.

주포에 에너지를 재충전한 중앙의 전함들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융족 전함부대를 일거에 쓸어버린 가공할 위력의 집중 사격.

하지만 모함은 그 크기에 걸맞게 두터운 실드를 펼쳐 보였다.

게다가 남은 융족 대형함의 반격도 만만찮았다.

놈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모함은 지키겠단 각오를 드러내 보였다.

전투가 최종 국면을 향하여 절정으로 치닫던 그때, 일대에 천둥소리가 들리더니 알 수 없는 압력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피해야 해! 적 모함이 마력 폭풍을 전개할 모양이다!

진과 계약한 덕분이었을까.

나는 주변에서 조여드는 농밀한 마력의 존재를 실감할 수 있었고 진땀을 흘리며 탈출에 나섰다.

주변에 있던 편대원들이 재보급을 위해 일찍 물러난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때마침 미사일과 에너지팩을 재보급하러 상당수 전투기가 마이더스호로 귀환한 상황이었다.

-제길, 조금만 버텨라!

‘으윽-!’

최악의 상황이라고 판단했는지 진은 마력을 일으켜 전투기 엔진에 자신의 힘을 더했다.

순간 가공할 압력이 내 몸을 짓눌렀다.

계기판엔 29G라는 끔찍한 수치와 함께 무수한 경고등이 켜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풍의 반경은 너무나도 넓었다.

모함은 이 한 번의 공격으로 아군 부대를 모조리 쓸어버리려는 것만 같았다.

태풍 속 작은 새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한 전투기.

이대로 가다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던 그때, 눈앞에 금빛 전함이 보였다.

중앙에서 지원 나온 최신 전함이었다.

‘제길.’

난 뒷일은 생각지 않은 채 일단 비행포드를 향해 전투기를 구겨 넣었다.

허가를 구하지 않고 이런 강제 착륙을 시도했다간 대형사고가 터질 수 있기에 절대 해선 안 될 행위 중의 하나였지만 지금은 말 그대로 불가항력이었다.

물론 우주 정거장이 통째로 날아갔던 걸 떠올리면 전함이라고 무사하리란 보장은 없지만, 나는 중앙의 기술력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콰직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는 랜딩 기어.

부러졌나 싶던 그때 활주로에 미끄러지며 동체가 격한 진동에 휩싸였다.

‘이런 브레이크가 듣질 않는다···!’

-쉣!

의지와 상관없이 빠른 속도로 밀려 격납고를 향해 돌진하는 전투기.

이대로 다른 전투기와 충돌하면 큰 사고가 터질 수 있어 머리털이 쭈뼛 솟을 때, 거대한 손이 전투기를 감싸주었다.

마이더스호를 위기에서 구해주었던 그 거대 로봇이었다.

처음엔 금색인 줄 알았는데 그 빛은 엔진의 불꽃이나 전투시 발생하는 아우라였던 모양.

로봇의 베이스 컬러는 기본적으로 백색에 가까웠다.

도와줘서 고맙다고 감사 인사를 건네려는데 이런 일은 일상이었는지 로봇은 털털하게 손을 거두고선 다시 벽에 등을 기댔다.

로봇의 후면엔 굵은 라인들이 달려 있었는데 진은 그것으로 막대한 에너지가 로봇을 향해 들어가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충전 중이었던 모양이군.’

대형함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데도 전함의 실드를 종잇장처럼 찢고 다녔으니 주기적인 충전은 필수일 터였다.

그때였다.

강한 충격에 전함이 흔들렸고 격납고에 있던 전투기들이 지면에서 떠올라 이리저리 부딪치기 시작했다.

중력 발생기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중앙의 최신 전함이 이 정도 타격을 받았다면 바깥 상황은 어떨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살아있음에 감사하는데 작은 진동과 함께 로봇의 중단 프레임이 열렸다.

조종석에서 뛰쳐나온 것은 놀랍게도 인간이 아니었다.

‘엘프잖아?’

귀가 뾰족하며 요정족이라고도 불리는 엘프.

드래곤, 드워프와 더불어 제국의 기술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는 3대 이종족 중 하나였다.

놀라운 점은 또 있었다.

바로 로봇의 파일럿이 여성이었다는 것.

연방군엔 성별 제한이 없다지만 저 무식하게 빠른 로봇의 파워를 감당하려면 보통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엘프의 기본 근력이야 인간보다 월등할 테지만 말이다.

밖으로 나온 그녀가 패널을 조작하자 잠시 뒤, 격납고의 중력이 정상으로 돌아왔고 떠올랐던 물체들이 다시 제자릴 되찾았다.

그 사이, 주변에서 다가온 정비병들이 캐노피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조종석 밖으로 나서자 아무리 아군함이어도 함부로 착륙하면 안 되는 걸 모르느냐며 날 선 질책이 쏟아졌다.

“미안하게 됐네. 죽을뻔했던지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 뭔가.”

바깥이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던 건 이들도 잘 알기에 이쯤에서 정리하려는 기색이었다.

“일단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여기 계시면 안 됩니다.”

“여기 있으면 안 된다니?”

“본 함은 평범한 전함이 아니라 특무함입니다. 허가받은 인원이 아니면 승선 자체가 불가능하단 말입니다.”

어쩐지 층고가 너무 높더라니.

이 전함은 저 로봇을 수송하기 위해 만든 특수함인 모양이었다.

자세히 보니 전투기 숫자 자체도 기존 전함에 비해 훨씬 적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얌전히 정비병의 뒤를 따르려는데 진이 다급히 외쳤다.

-존! 시간을 끌어라!

‘무슨 일이야?’

-이곳 시스템을 좀 살펴보겠다. 잘만하면 저 거대한 녀석의 비밀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뭐라고?’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물론 그걸 전부 실전에 적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일단 베일에 감춰진 중앙의 정보를 얻을 수만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그리하여 나는 발을 우뚝 멈추고선 크게 외쳤다.

“정비병!”

“···무슨 일이십니까?”

“폭풍이 끝나는 즉시 재출격하고 싶은데 내 전투기를 좀 손봐줄 수 있나?”

“아쉽지만 중앙의 부품은 규격이 달라서 여유 부품이 맞는 게 없을 겁니다.”

“에너지팩 충전만이라도 부탁하지.”

“그 정돈 가능합니다.”

“혹시 미사일도 좀 내어줄 수 있겠나? 같은 연방군으로서 부탁 좀 하겠네.”

“······?”

뭔가 이상하다는 듯 나를 바라본 정비병은 내게 딴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팔짱을 끼고선 끌고 가기 시작했다.

시간을 더 끌만 한 게 뭐 없을까 생각하던 그때,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바로 저 거대 로봇의 파일럿이었다.

“이보게.”

그녀가 관심을 보이자 정비병은 황급히 내 팔을 놓고 차려자세를 취했다.

어지간히 군기가 바싹 든 모습이었다.

“대위, 소속과 성명이 어떻게 되는가.”

“오딘 방위사령군 45사단 예비 전투편대 소속 존 메이어라고 합니다.”

나는 그리 답하며 상대의 계급을 확인했다.

그녀는 놀랍게도 대령이었다.

나보다도 어려 보였는데 말이다.

“귀관의 비행솜씨는 잘 봤네. 남부에도 인재가 많은 모양이야.”

“···감사합니다.”

“전투는 걱정하지 말고 잠시 쉬다 가도록. 전투는 곧 끝날 테니까.”

그리 말하는 그녀는 가볍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미소를 보며 나는 정말로 곧 전투가 끝날 것이란 것을 직감했다.

치열했던 공방전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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