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레이더를 채우며 날아드는 적 전투기 숫자는 2천 대 이상.
최소 1개 전함 이상의 적 부대가 근처에 있다는 뜻이었기에 우린 긴장한 채로 적을 맞이했다.
<절대 뒤로 보내선 안 된다!>
현재 대형함들은 워프를 위해 모든 동력을 도약 준비에 집중한 상태였다.
실드도 쓸 수 없는 상태에선 미사일 한두 발도 치명타가 될 수 있기에 우린 사격 한 발 한 발에 온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전함, 순양함, 그리고 구축함.
아군 부대에서 출격한 전투기 숫자는 총 611대.
적 숫자가 제법 많았기에 우린 지체없이 헬파이어 미사일을 발사했다.
불꽃의 벽으로 우주 공간에 띠를 두르자 적의 진격이 주춤거렸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마이더스호의 전투기 편대가 적을 향해 쇄도했다.
단 한 대도 놓치지 않고 라인을 사수해야 하는 미션.
선봉은 기동성이 가장 뛰어난 우리가 맡았고 나머지 전투기들이 후방 라인을 커버하는 식으로 전투가 전개됐다.
교전 3분째.
아슬아슬했지만 그래도 아군 대형함에 적이 미사일을 날리는 꼴은 어떻게든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아직 남아 있었다.
저 많은 전투기를 사출해냈을 적 대형함의 존재였다.
구축함이나 순양함의 주포가 한 번이라도 아군 함에 꽂히면 그대로 폭사할 수 있는 상황.
위성의 표면을 타고 반대편으로 빠져나가자 접근 중인 적 함대가 눈에 띄었다.
전투기가 모두 꺾였으니 실드를 올리고 경계할 법도 하건만 놈들은 반드시 워프를 중지시키겠단 일념으로 거릴 좁혀왔다.
<우린 다시 보급할 여유가 없다. 최소한의 타격으로 적을 쓰러트려야 한다.>
구축함 급의 경우엔 헬파이어 미사일로도 충분히 잡아낼 수 있고 순양함의 경우에도 어느 정도 타격이 가능했다.
<타격 개시!>
<타격 개시!>
편대장의 지휘에 맞춰 미사일이 적 대형함의 장갑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앞서 전투기를 다 잡아낸 데다 전투기의 스펙 향상으로 에이스급 파일럿이 된 우리를 대공화망만으로 견제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적 구축과 순양함이 기괴한 소릴 내며 엔진이 멈추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대로 더 타격을 가하면 저 거대한 강철 덩어리를 융족의 공동묘지로 만들 수도 있겠지만 우리에겐 가장 중요한 목표가 따로 있었다.
<편대장님. 아무리 그래도 저건 못 막을 거 같은데요!>
육중한 덩치.
다중 장갑에 실드벽을 두르고 전진 중인 융족의 거대 전함.
리카르도 대위도 이것만큼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기색이었다.
헬파이어 미사일로도 전함 격침이 가능하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주포 지원을 받거나 재보급을 반복하며 연속 출격을 감행했을 때의 이야기.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후미로 접근한 일부 전투기가 엔진부를 향해 미사일을 퍼부으려 했지만 그마저도 전함의 반격에 가로막혀 방향을 돌려야 했다.
다른 함급과는 차원이 다른 전함의 대공사격.
훈련 때도 익히 경험했지만 전함의 대공망은 그 밀도가 두터워 어지간한 실력으론 뚫기가 쉽지 않았다.
심지어 저 전함은 모의훈련 때 보았던 것보다 더 많은 대공포가 달린 것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마이더스호로부터 통신이 들어왔다.
워프를 포기하고 방어 태세를 갖출 테니 모든 전투기는 즉시 귀환하라는 명령이었다.
마이클 준장의 명령을 듣는 순간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이대로 워프를 중단하면 당장 목숨을 부지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 융족의 대규모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말라 죽는 모습이 머릿속에 선했다.
게다가 워프 완료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5분여,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다시는 워프를 뛸 기회가 없을 거 같단 생각이 들었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던 그때였다.
새로운 통신이 들어오며 전투기들의 귀환이 중단되었다.
<아크리온 순양함 함장, 나딘 중령이다. 본 순양함으로 적의 실드를 벗겨낼 테니 작전을 계속해주길 바란다.>
<무슨 짓인가 중령!>
마이클 준장이 외쳤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나딘 중령은 망설임 없이 순양함의 워프를 중단했고 탈출포드를 가동해 민간인을 우선적으로 우주로 내보냈다.
창고까지 민간인을 가득 실어 이륙한 터라 그것만으론 당연히 생존자들을 전부 이함시킬 수 없었다.
기껏 구한 민간인들을 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자폭함에 몰아넣게 된 상황.
마이클 준장은 당장 그만두라며 분노를 터트렸으나 나딘 중령은 함교를 장악한 채 순양함의 엔진을 긴급 점화했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순양함에선 우주복만 입은 채 우주로 탈출하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그렇게 실드를 두른 순양함은 점차 속도를 높이며 빠르게 적 전함을 향해 돌진했다.
선체를 통째로 부딪쳐 적의 실드를 무력화시키려는 계산이었다.
순양함의 돌진을 육안으로 확인한 조종사들은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누가 나딘 중령을 욕할 수 있단 말인가.
순양함과 함께 영문도 모른 채 죽게 된 민간인이라면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중령은 누군가 해야 했을 희생을 자처한 것뿐이었다.
만약 그가 순양함을 이끌고 돌진하지 않았더라면 부대 전체가 워프를 중단했어야 할 테고 그 결말은 십중팔구 죽음으로 정해져 있었으니 말이다.
<귀관들과 함께하게 돼서 영광이었다. 뒷일은 맡기겠다.>
나딘 중령은 우리에게 마지막 말을 남긴 채 그대로 전함을 향해 달려들었다.
육탄 돌격에 깜짝 놀란 융족 전함은 황급히 주포 충전에 들어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리카르도 대위는 편대원들에게 명령, 일찌감치 전함의 뒤를 잡기 위해 속도를 높였다.
나딘 중령이 만들어준 그 한 번의 틈.
목숨값으로 만든 그 틈을 놓친다는 건 연방군 파일럿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함의 대공포 사격을 피해 후미 쪽을 점령한 그때, 순양함이 전함의 주포에 관통당하며 녹아내리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이어진 폭발.
주포 사격을 위해 전함의 실드가 약해진 순간을 우린 놓치지 않았다.
<전탄 발사!>
전투기 부대에 남아 있던 미사일이 모조리 전함 후미를 향해 날아갔고 이내 실드를 깨트리며 엔진부를 뚫고 들어갔다.
헬파이어 미사일의 불꽃이 자아내는 막강한 화력.
적 전함은 그르릉 소릴 내더니 움직임을 멈췄다.
이것만으론 격침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수복엔 시간이 걸릴 테고 발을 묶어두는 것이면 충분했기에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워프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다들 본 함으로 신속 귀환하도록.>
<라저···.>
순양함의 파편이 어지러이 흩날린 자리.
나는 마이더스호로 귀환하며 그 모습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언젠가 내게 이런 선택을 강요하는 상황이 온다면, 아무 망설임 없이 중령처럼 희생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차마 답을 내릴 수 없었다.
*
이블리온 성계로 첫 출정을 떠난 지도 어느덧 두 달여가 지났다.
워프 성공 이후 우린 무사히 모리더스 대장의 주력군에 합류할 수 있었고 한 달이 더 지난 뒤엔 정비를 위해 오딘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마이더스호를 비롯한 오딘 방위군엔 나이오비 생존자 구출에 대한 공을 인정받아 크고 작은 포상이 주어졌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이 또 있었다.
바로 내 계급장이 바뀌게 됐단 거였다.
“이젠 존 대위라고 불러야겠군.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격납고에 들른 마이클 준장은 내게 악수를 청하며 청색 명예 훈장을 가슴에 달아주었다.
무려 2계급 특진.
두 달 동안 전장을 누비며 에이스 오브 에이스의 활약을 펼친 나는 대위 계급장을 달게 되었다.
임관 약 5개월 만에 대위를 달게 된 셈인데 이는 좀처럼 전쟁이 없던 근래엔 찾아보기 힘든 진급 속도였다.
연방군은 진급 예정자란 개념이 없었는지 곧바로 계급장을 바꿔주었다.
동기들은 대위님 소리가 통 입에 붙지 않는 듯했지만 다들 내 진급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경사는 또 있었다.
우리 기수에서 진급한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었던 것.
나 말고도 지크 셉타누스도 같이 계급장을 바꿔 달게 되었다.
지크는 이번에 중위 진급을 하게 됐고 마이더스호 조종사 중엔 리카르도 대위가 소령 진급을 하게 돼 유일한 영관 계급 진급자가 되었다.
리카르도 소령은 우리의 새로운 비행대대장을 맡게 되었고 기존 대대장이었던 팔코 소령은 함교로 자릴 옮겼다.
안 그래도 진급이 빠른 조종 특기인데 군공이 더해지자 이곳저곳에서 진급자가 나온 것이다.
물론 다 좋은 일만 있던 건 아니었다.
“아니 진짜 전역하시려고요? 이제 곧 소령 진급이시잖습니까.”
“됐다. 생각 많이 하고 결정한 거야.”
휴게실에서 담배를 피우던 닉슨 대위는 미련 없다는 듯 시원스레 말을 꺼냈다.
그는 이번 일을 겪고 난 뒤 곧장 전역을 결정했다.
처음엔 소령 진급에 떨어져 마음이 상했나 생각했지만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몰랐지만 그는 결혼을 일찍 해 이미 애가 둘이나 있는 가장이었다.
“이번에 전쟁해보니 알겠더라. 전쟁은 내 적성이 아니야.”
“전쟁이 적성인 사람이 어딨다고 그러십니까.”
“없기는. 너 같은 놈도 있는데. 벌써 대위잖냐!”
그는 토끼 같은 마누라와 자식들 두고 전장에서 죽긴 싫다며 이렇게 먼저 떠나게 되어 미안하단 말을 전했다.
닉슨 대위도 이대로 전역하는 게 아쉽지 않을 리 없었다.
대위로 전역하면 남작 위를 받게 되지만 영관장교로 전역하면 자작 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신분 사회인 제국에서 자작과 남작은 불과 계단 하나 차이여도 그 영향력 차이가 상당했다.
두 달 동안의 임무로 소령 진급에 필요한 군공은 사실상 거의 다 모은 셈.
그럼에도 전역을 결정했다는 건 전쟁으로 비롯한 죽음에 대한 압박이 상당했음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마이더스호에선 닉슨 대위를 비롯해 스무 명에 가까운 조종사가 전역신청서를 제출했다.
리카르도 소령은 이대로 집에 가도 전황이 더 악화하면 중앙에서 소집령이 내려올 거다.
그럼 강제로 전선으로 향해야 하는데 차라리 군에 남아 있는 게 더 나을 거라며 재차 설득했지만 끝내 그들의 마음을 바꾸진 못했다.
그들은 전선으로 갈 때 가더라도 남은 시간을 가족과 보낼 수 있길 원했다.
그만큼 남방 경계의 운명은 점점 알 수 없는 수렁 속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수의 진급으로 사기가 올랐던 것도 잠시.
오랜 기간 알고 지냈던 동료들이 빠져나가자 격납고는 평소와 달리 음울한 기운이 감돌았다.
정비를 마치는 대로 다시 전선에 나가야 할 마이더스호로선 상당히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사기 저하를 우려했던 마이클 준장은 우리에게 특별 휴가를 붙여 쉬고 올 것을 지시했다.
본래는 정비하는 동안만, 2박 3일의 짧은 휴가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준장의 배려로 휴가 기간이 6박 7일로 늘어난 것이다.
“존! 너는 이제 뭐 할 거야.”
“다 같이 해변이나 갈래? 지금 휴가철이라 볼만할걸?”
“우리 정도면 인기 폭발이지.”
마이더스호를 나서자마자 동기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다들 쉴 생각에 기쁜 모양이었다.
나는 근엄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상급자에겐 예를 갖추라고 했다가 집단 구타를 당할 뻔했다.
장난 좀 쳤다가 휴가 첫날부터 일이 꼬일 뻔했던 것.
나는 간신히 녀석들 틈바구니에서 빠져나와 선약이 있다고 말했다.
“약속이 잡혀 있어서 가봐야 해.”
“뭐? 무슨 약속.”
“여자냐?”
“우리랑 같이 하루가 멀다고 조종간 잡았는데 여자를 언제 만나.”
“너 몰랐어? 우리 배에 저 녀석 좋아한다는 여군이 줄 섰어.”
“뭐? 이 부러운 새끼···.”
“흠흠···.”
조종 특기 장교가 여군에게 인기 있는 건 사실이었다.
실제로 식당에서 눈인사로 적당한 호감을 쌓은 여군도 몇 명 있긴 했다.
객관적으로 봐도 지금 내 외모는 나쁘지 않은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선약이 잡힌 상대는 미녀가 아닌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었다.
휴가 복귀 때 보자며 동기들과 헤어진 나는 택시를 잡아 수도 외곽의 고급 요정(料亭)으로 향했다.
고위 장교들 사이에선 제법 이름이 알려진 곳으로 오딘에서 쓸만한 줄을 잡았다면 한 번쯤은 꼭 들르게 되는 곳이라고 했다.
이곳에서 식사하게 되었다는 것.
그것은 내가 지금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알리는 증거이기도 했다.
“방문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예약을 확인해 드려도 괜찮을까요?”
안으로 들어서자 머리를 뒤로 단정히 묶은 종업원이 나를 맞이했다.
“존 메이어입니다. 아마 예약이···.”
“존 메이어님. 확인했습니다. 저를 따라와 주시겠어요?”
요정의 건물 양식은 동서양이 혼재된 양상을 띠었는데 내가 향한 곳은 동양풍으로 지어져 연못이 딸린 별채였다.
안내를 마친 종업원은 무릎을 꿇고 조심스레 문을 열어주었고 나는 그곳에서 기다리던 선객들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어서 와서 앉게! 오래간만에 보니 얼굴이 더 훤칠해졌구만.”
반갑게 나를 맞이하는 두 사람.
한 명은 평상시에도 자주 보는 마이클 준장이었고 다른 한 명은 오랜만에 보는 브래들리 소장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손님이 한 명 더 있었다.
모노클을 낀 정장 차림의 중년 남성이었다.
‘누구지?’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 보는 자였기에 고민하던 찰나 진이 궁금증에 대한 답을 해결해주었다.
-라말론 자작이야.
‘자작?’
-오딘 최대의 군수 기업, 브리하이트의 회장이기도 하고.
‘브리하이트···.’
거대 군수 기업의 회장.
정말로 생각지 못한 손님과의 점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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