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대규모 교전에서의 승리.
하지만 아직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전면전에서 큰 피해를 입은 융족은 정면승부는 불리하다고 판단했는지 병력을 나눠 게릴라 전을 시도했다.
이 주변은 본래 제국의 영토였던 곳.
놈들은 사방으로 부대를 펼쳐 행성 약탈, 파괴에 나섰고 우리도 그에 발맞춰 병력을 쪼갤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이했다.
“융족의 학살을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네.”
민간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주력군 총사령관인 모리더스 대장은 융족의 각개격파에 나설 것을 명했다.
융족이 블루옵테늄 광산에 폭탄을 터트려 주변이 온통 푸른빛으로 불타던 26일 밤.
마이더스호는 동급 전함 2척과 더불어 작전부대를 구성.
사방으로 흩어진 융족 병력 소탕 작전에 나서게 되었다.
언제 끝날지 기약 없는 작전의 시작이었다.
*
우주의 바다는 오늘도 고요했다.
장관을 이루던 수만 척의 함선도, 이 드넓은 우주에 퍼트리자 먼지만도 못한 존재감이 되었다.
마이더스호도 한동안 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물론 그렇다고 융족이 남부에서 물러나거나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부대와 통신을 나눌 때면 전황이 더욱 악화하고 있다는 소식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상부에선 융족의 병력이 더 늘어난 게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는데 게릴라 전에서만 유독 패퇴를 거듭할 이유가 없었다.
“이러다 우리도 위험해지는 거 아냐?”
함내에선 이러다 사방으로 포위되는 형국이 되는 것은 아닌지를 우려했다.
실제로 마이더스호는 이미 이블리온 성계로부터 한참이나 떨어진 곳, 융족 영토 방향으로 깊이 파고든 형국이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제국의 영토였던 곳이지만 융족이 침공을 개시한 이후 경계선은 하루가 멀다고 바뀌는 상황.
언제 어디서 공격이 시작될지 모른다는 압박감.
승조원들은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견뎌야만 했다.
그래도 함 내에서 근무하는 인원은 사정이 더 좀 더 나은 편이었다.
제일 고생하는 우리 조종사에 비하면 말이다.
<젠장. 제대로 잠을 자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납니다.>
<이든, 잡담하지 말고 주변 경계에 집중해라.>
<예예.>
리카르도 대위를 따라 편대비행을 하는 우리는 여느 때처럼 정찰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소행성이나 위성, 혹은 전자기 구름 같은 게 산란한 지역에선 아무래도 레이더의 성능에 제약이 걸리기에 전투기를 이용한 장거리 감시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속도를 줄이고, 소행성 지대를 따라 은밀기동을 펼치던 무렵이었다.
흐릿한 음성이 통신 채널에 잡히기 시작했다.
<■■■세■···.>
처음엔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이내 그것이 구조 신호라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분이 있다면 제발 도와주세요···.>
우리는 통신의 발신지를 추적했고 곧 인근 행성 나이오비에서 흘러들어온 전파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편대장님. 민간인 생존자인 거 같습니다.>
근래 융족은 우주와 지상을 가리지 않고 파괴를 일삼았기에 민간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항복 권고 따윈 찾아볼 수 없는 무차별적 살육.
나이오비 역시 궤멸적 피해를 당한 행성 중 하나였다.
<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리카르도 대위는 구출은 자신들의 소관이 아니라 말했다.
적들이 얼마나 있을지도 알 수 없고 애초에 전투기는 인명 구출용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기에 구출 작전을 펴는 데 한계가 있었다.
물론 이리 말하는 대위의 목소리도 좋진 않았다.
나이오비처럼 적의 공격에 완전히 노출된 행성들의 경우, 자치령의 군사력으로 방어가 불가능할 땐 소개(疏開)를 실행하게 된다.
적을 막을 수 없으니 일단 제국 후방으로 몸을 피하는 것이다.
하지만 강제 소개가 말처럼 쉬운 건 아니었다.
제국 자치령의 경우 인구 숫자는 그야말로 천차만별.
트라카 같은 대형 행성은 시민 숫자가 20억 명도 족히 넘었다.
나이오비의 경우엔 시민 수가 약 1억 안팎.
하지만 1억이라고 해도 엄청나게 많은 숫자임엔 분명했다.
피해야 하는 걸 알지만 함선 숫자가 부족했을 수도 있고 때를 놓쳐 남게 된 사람들도 있을 터였다.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하고 고립되어 버린 나이오비의 생존자들.
만약 제국이 융족을 빠르게 밀어내고 전선을 회복한다면 저들도 생존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을 테지만 현재 상황만 보면 전망은 그리 밝지 못했다.
연방군이 속출하는 피해를 막기 위해 일단 군을 뒤로 물린 뒤, 다시 재정비하기로 의견을 모았기 때문이다.
이블리온 성계의 블루옵테늄 행성이 대화재로 한동안 못 쓰게 된 것도 퇴각에 주원인이 되었다.
광맥이 연쇄 폭발을 일으키며 행성 전체가 용광로가 된 상황.
당분간 아군도 적도 손을 댈 수 없는 상황이 됐으니 광산의 전략적 가치는 떨어진 셈이었다.
리카르도 대위는 주변에 적이 숨어있진 않은지 꼼꼼히 정찰하고선 마이더스호로 귀환했다.
생존자들에 대한 보고는 곧장 사령관에게 전달되었고 회의가 이어졌다.
한 시간 뒤, 마이더스호에선 파이어플라이가 아닌 스텔스 전투기가 발진했다.
은밀한 기동으로 전투보단 첩보활동에 더욱 특화된 기종이었다.
사령관은 이곳에서 떠나기 전, 나이오비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파악해두고자 하는듯했다.
그리고 돌아온 스텔스기에 의해 나이오비의 끔찍한 참상이 우리에게 전해졌다.
“사령관님. 그곳은 지금 지옥이나 다름없습니다···.”
스텔스기에 의해 촬영된 영상.
도시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의 수는 최소 수백만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며 식량을 구하려다 융족에게 도륙당한 시민의 시체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카메라에 담긴 참상을 확인한 우리 모두는 다 같은 표정이 되었다.
속이 불편했는지 일부 조종사는 화장실로 향했고 각 전함의 사령관들은 긴급회의에 들어갔다.
그냥 못 본 척 떠나기엔 그 수가 너무 많았다.
수백만 제국 시민의 운명이 지금 회의 결과에 따라 갈리게 될 판이었다.
“그냥 가서 구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격납고에 모여 명령을 기다리던 조종사들.
에너지팩을 깔고 앉아있던 지크가 조용히 의견을 냈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야.”
지크의 선임 편대장이 그리 답하며 나를 바라봤다.
“구조 요청을 가장 처음 접한 게 자네 편대였다면서?”
“그렇습니다.”
“소행성 지대에 닿을 정도의 강한 전파가 아무렇게나 우주로 쏘아지고 있었단 상황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지금도 나이오비에선 융족의 병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생존자들을 찾아다니는 상황.
편대장은 우리가 들은 방송을 저들이 듣지 못할 리가 없다고 했다.
“설마 우릴 유인···하려는 계략일 수도 있단 말입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지. 물론 자네들이 꼼꼼히 정찰했겠지만 행성 구석구석까지 찾아본 건 아닐 거 아닌가.”
“그렇습니다.”
1억 명 이상의 시민이 거주할 정도로 커다란 행성.
만약 행성에 융족의 대규모 병력이 은신 중이라면 자칫 이쪽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우린 조용히 회의가 끝나길 기다렸다.
어느 쪽이 나오든 우린 그대로 결정을 따를 뿐이었다.
그리고 한 시간 뒤, 각 사령관들의 합의로 이루어진 새로운 계획이 우리에게 전해졌다.
명령을 전해받은 팔코 소령이 단상에 올랐다.
“현 시간부로 우리는 나이오비 생존자 구출작전에 들어간다.”
대대장의 말에 조종사들의 반응이 엇갈렸다.
응당 그리 해야 한다는 쪽과 적의 규모를 알 수 없어 무모하다는 쪽이었다.
또한 현재 함대 규모론 구할 수 있는 수에 한계가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마이더스호의 평시 승조원 규모는 7천 명 안팎.
이는 쾌적한 장기 항해를 위한 규모이기에 일단 선체 내부에 사람을 가득 실으면 수만 명을 태우는 것 자체는 가능했다.
하지만 순양함, 구축함, 보급함을 통틀어 사람을 가득 싣는다 한들 나이오비의 모든 생존자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인근 전함 부대 2개가 추가로 이번 작전을 동참하기로 했다.”
부대 규모가 더 늘어난다는 소식에 다들 잘 됐다는 기색이었다.
이렇게 되면 전함이 아홉 척.
총 함대 규모는 약 180여 척에 이르는 대규모 작전이 되었다.
아군 규모가 커질수록 무력 충돌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지니 이 정도면 그래도 해볼 만하단 판단이었다.
브리핑을 마친 대대장이 출격 준비를 명했다.
이렇게 모인 함대가 구출해낼 수 있는 생존자 수는 약 40만 명 이상.
성공 여부에 수많은 목숨이 달린 대형 구출 작전의 시작이었다.
*
각지에서 모인 함선이 줄을 맞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작전 개요는 간단했다.
나이오비 대기권에 진입할 때까진 함께 움직이고 이후엔 병력을 전함마다 쪼개어 대도시 아홉 곳의 생존자를 구출해 최대한 신속하게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물론 우리가 구출하러 왔다는 걸 모르는 시민들도 있을 테고, 산이나 사막 같은 곳에 숨은 이들은 시간에 맞출 수 없을 테지만 애초 모두를 구하는 건 불가능한 작전이었다.
<정찰 이상 무. 아직까지 적함의 움직임 감지되지 않습니다.>
먼저 정찰에 나선 전투기들이 재빨리 통신을 주고 받는다.
혹시나 인근에 잠복해있을 적함을 찾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우주 공간에선 적의 매복을 찾을 수 없었다.
스텔스기 정찰에 따르면 나이오비 지상에선 여전히 융족 지상군이 시민들을 찾아 학살 중이라고 했으니 분명 지상엔 일정 규모 이상의 함선이 배치되어 있을 게 틀림없었다.
<대기권 돌입을 시작한다. 오존층에 도달하는 즉시 전 전투기는 작전 지점을 향하여 출발, 제공권 장악에 주력한다.>
<라저.>
작전은 한낮에 진행되었다.
그래야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함대의 출현을 알 수 있을 터였다.
해가 중천에 뜬 시각, 제국 함대 수백 대가 나이오비 하늘에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뒤, 도시 전체를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생존자들이 낸 게 아니라 지상에 있던 융족 병사들이 우릴 발견하고 내는 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벌떼처럼 일어나 튀어오르기 시작한 은색 전투기들.
융족의 전투기가 우르르 하늘을 향해 솟구치자 리카르도 대위가 외쳤다.
<각 편대는 정해진 포메이션을 사수하라!>
이번 작전의 핵심은 대형함들을 최대한 많이 지상에 착륙시키는 것이었다.
전투기 싸움에서 이겨도 생존자들을 태울 대형함이 없으면 아무 의미 없는 작전이 되는 상황.
우리는 아군함을 지키면서 상대를 꺾어야 하는 어려운 전투에 돌입했다.
-온다!
‘평소보다 강한 놈으로 부탁하지.’
레이저를 뿜으며 달려드는 융족 전투기들.
진은 내게 집중 주문과 근력 강화, 심신 안정화 마법을 걸어주었다.
한계를 뛰어넘는 기동을 해도 버틸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자 페달을 밟는 발에 힘이 실렸다.
삽시간에 최고속을 돌파하며 미끄러지는 전투기.
나는 벼락같은 속도로 헬파이어 미사일을 발사했다.
-미사일 1, 2 전부 명중이다!
‘시작이 좋군.’
적기가 우수수 떨어졌지만 그걸 세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나는 곧장 회피기동을 펼치며 아군 함을 노리는 융족 전투기들을 상대했다.
마이더스호의 전투기는 의심할 여지 없는 남부 최고의 전투기지만 장갑이 약한 구축함은 단 한 번의 공격에도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융족 전투기들이 쏟아낸 미사일.
아군 대공화망을 뚫고 달려드는 미사일을 모두 격추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락 온!
‘파이어.’
진의 계산에 따라 꼭 터트려야 할 미사일만 핀포인트로 사격하는 묘기가 연달아 펼쳐졌고, 몇 발의 미사일이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터지며 아군함을 흔들었다.
<저런 미친놈을 봤나!>
<명사수가 따로 없구만!>
<저 정도는 해야 장성님들 눈에 드는 건가?>
<존 메이어! 뒤를 봐주겠다!>
비속어로 감탄을 대신한 닉슨 대위가 놀라움을 표했고 선임 조종사들이 내 백업을 자처하며 대열을 유지했다.
워낙 실력 격차가 났기 때문일까.
일대의 적을 순식간에 정리하자 대대장으로부터 추가 명령이 하달됐다.
<주변 적은 완벽히 제압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부터 편대를 나누어 주변 도시로 향한 아군 전함의 백업을 시작한다.>
비행대대장은 타 도시로 향한 아군 지원을 명령했다.
전투기 성능이 뛰어난 마이더스호는 비교적 쉽게 대형함을 지상에 착륙시킬 수 있었지만 다른 쪽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라저.>
엔진의 푸른 불꽃이 거세게 타오르며 도시의 하늘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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