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우리가 엄청 대단한 공식을 적었던가?’
-원시인한테 불 피우는 거 처음 보여주면 저런 반응일 거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원시인 비유는 좀···.’
아이스 중위에게 새로운 마법 공정을 제안한 그 날 오후, 연구소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부품 개량 연구가 벽에 막힌 듯 지지부진했던 가운데 아직 임관도 안 한 신입이 새 공식을 들고 왔는데 그게 누가 봐도 신기해 보였던 것.
연구소는 내 제안을 테스트 해보기 위한 준비로 분주했고 베렐 연구소장은 ‘그것 보라고! 자넨 연구원이 딱이야!’를 외치며 시시덕거렸다.
“왜 조종사를 했어요?”
“예?”
“나 같으면 그 머리로 조종사 안 했겠다.”
연구소장이 신나서 프로그래밍을 하는 걸 뒤에서 지켜보던 아이스 중위가 내게 말했다.
“아까 공식 작성하는 거 보니까 외워서 쓰는 건지, 아니면 이해를 하고 쓰는 건지 딱 알겠더라고.”
중위는 내가 중앙과 진짜 관계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연구에 소질이 뛰어나단 것 정도는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진짜 조종 특기로 임관할 거예요?”
“이제는 무르기도 곤란해졌습니다.”
아마 브래들리 소장은 내 이름을 집어넣은 표창까지 준비해놨을 터였다.
그러자 중위는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지금 전쟁 심각해졌다는 이야긴 들었죠?”
“예.”
“이제 한동안 후배 보기 힘들지도 몰라요.”
“그게 무슨···?”
“생각해 봐요. 조종사 좋다는 게 뭔데. 전쟁 없을 때 조종사 타이틀 달고 남들보다 빠르게 진급하는 거거든. 그런데 전쟁이 심해진다? 아마 다음 기수부터 지원율이 바닥을 칠걸요?”
중위는 눈 딱 감고 특기 변경해달라고 이야기해보면 어떻겠냐는 식으로 나를 설득했다.
만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전장에서 허무하게 가기엔 내 재능이 너무 아깝다는 거였다.
“안 죽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게 어디 맘대로 되나. 소위도 어지간히 출세욕이 강한가 보군요. 인간 대부분이 그렇긴 하지만.”
모든 특기 중에 가장 진급이 빠른 조종 장교.
안 그래도 빠른 진급 속도는 전쟁이 일어났을시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된다.
목숨이 위험해지는 만큼 엄청난 군공을 쌓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특기 간 진급 속도 차이는 당장 아이스 중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연구 특기로 임관을 한 지 벌써 6년 차라고 했다.
과거 한국군을 떠올리자면 사고만 안 치면 대위를 다는데 3년이면 충분했지만, 연방군은 진급 기준이 아예 달랐다.
연구 특기면 연구원으로 성과를 내야 했고 뭐든 군공이 없으면 진급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특히 대위부턴 전역시 남작위를 받을 수 있기에 더 엄격한 판단 기준을 적용받았다.
임관 6년째 중위라니···.
만약 전장에서 6년을 보냈으면 최소 영관장교는 되었을 터였다.
모의 훈련에서 선보였던 것처럼 적 전함이라도 잡아내는 날엔 초고속 특진도 기대할 만했다.
예전엔 몰랐지만 연방군에 들어와 현실을 마주하자 점점 더 조종 특기가 마음에 들었다.
계급이 곧 절대권력인 제국.
힘없이 머리만 좋아봤자 타인에게 부려지는 삶을 살 뿐이었다.
신기술과 특허로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들인 한들 그것을 지킬 힘이 없으면 한순간에 빼앗길 수도 있는 게 이 제국이란 곳이었다.
내가 내 것을 지킬 힘을 갖출 방법은 오직 하나.
당당히 백작의 후계자로 인정받고, 더 나아가 별들을 아우르는 권력을 손에 쥐어야 했다.
나는 어느덧, 과거엔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절대자’의 모습을 꿈꾸고 있었다.
*
“자네! 이쪽으로 와서 좀 도와주게!”
조언이 필요했던 연구소장이 날 옆에 딱 붙여놓고 이것저것 물으며 닦달해댔다.
그는 한동안 풀리지 않았던 과제가 말끔히 해결된 것에 몹시 기쁜 기색이었다.
“여기 이 구간. 대체 어떤 작용으로 효과가 일어나는지 잘 이해가 되질 않는데 설명좀 해줄 수 있겠나?”
불쌍한 표정으로 부탁하는 베렐 연구소장.
공적이 곧 진급의 밑천인 연방군에선 아무리 상관의 명이라도 자신의 아이디어를 쉽게 공유하지 않았다.
상관을 밀어주고, 상관이 당겨주고, 서로 상부상조하는 그림이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겠지만 나 같은 경우엔 연구소에 오래 있을 사람도 아니지 않은가.
딱 잘라서 원리는 설명해드릴 수 없다고 해도 상관없을 테지만 나는 연구소장과 진의 가르침을 나누었다.
내가 호구라서가 아니라 연구소장에게도 얻을 것이 따로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3차원 룬문자 각인이 회로에 끼치는 영향부터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내 호기심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사람은 역시 자네밖에 없구만! 자넨 천재야!”
아주 잠깐, 연구소 사람들이 나를 못 미더워하던 시간이 있었다.
대체 뭘 믿고 임관도 안 한 애송이에게 자신들의 명줄이 달린 프로젝트를 맡기냐는 것.
그러나 나는 연구소장 곁에서 나의 가치를 직접 증명했다.
내 머릿속엔 눈앞의 문제를 해결할 꿈의 코드가 들어있고, 그것의 출처가 중앙이건 어디건 간에 너희는 닥치고 나만 따라오면 된다는 포스를 보여준 것.
진과 쌓기 시작한 무한한 정보의 일부를 나눠줌으로써 나는 이들의 신뢰를 얻었고, 추가이익도 챙길 수 있었다.
바로 오딘 연구소에서 진행하던 국책사업이었다.
순양함 ECU 프로젝트는 철저히 연방군의 이름으로 진행될 것이기에 이윤을 남기기 어려웠지만 그 외 사업은 달랐다.
나는 연구소장의 푸쉬로 아직 공고도 안 올린 사업에 먼저 수저를 올릴 수 있었고 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 윌리엄 백작에게 전해졌다.
“그럼 지금은 오딘 연구소에 있단 말이냐?”
“예. 오딘 방위사령관이 직접 찾아와 부탁한 일이었습니다.”
“허허. 사령관이라니? 자세히 얘기해 보거라.”
임관이 눈앞이라 바쁘단 핑계로 연락을 자주 하지 못 했더니 몹시 내가 보고 싶었던 모양.
백작은 통화 내내 웃음기를 머금고서 내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 구축함에 들어갈 방열판이랑 레이저 팰렁스 사업을 진행해볼까 합니다.”
“녀석···장하다!”
이미 최우수 표창 확정에 오딘의 주력사업까지 참여하게 되었다고 하니 백작은 더할 나위 없이 흐뭇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제가 할아버지께 꼭 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뭐든 좋으니 편하게 얘기하거라.”
“아시겠지만 아크 팩토리의 신공장 완성까진 기간이 좀 남았고 설령 완성이 된다한들 당분간은 이클립스 엔진의 수요를 맞추는 데 모든 라인을 쓸 수밖에 없는 상탭니다.”
“그렇지.”
“하지만 방열판과 팰렁스도 적지 않은 이문을 남길 수 있는 사업이니 이대로 남주긴 아까운 게 사실입니다.”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로얄 머신을 임대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 순간 밝던 백작의 얼굴이 살짝 굳고 말았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치열한 후계 경쟁을 통해 백작령을 물려받은 가주가 모를 리 없던 것.
“다른 방법은 안 되겠느냐? 생산 설비 확보 때문에 그런 것이라면 이 할애비가 다른 행성에 알아봐 줄 수도 있다.”
백작의 권유에 나는 다른 곳은 필요없으며 꼭 로얄 머신의 라인을 가지고 싶단 뜻을 확고히 했다.
임대라는 완곡한 표현을 썼으나 결국 로얄 머신을 아크 팩토리에 흡수하겠단 선언이나 다름없는 상황.
이 말을 마르크 메이어가 옆에서 듣고 있었다면 이성을 잃고 내게 달려들었을 게 뻔할 정도로 노골적인 이야기였다.
안 그래도 로얄 머신은 신공장 부지를 아크 팩토리에 넘겨주며 일격을 당한 상황, 여기에 남은 라인까지 모두 넘긴다는 것은 곧 마르크 메이어의 후계 구도 축출을 의미했다.
결정을 망설이는 백작.
나는 그의 결정을 돕기 위해 몇 마디를 더 보태야만 했다.
“할아버지께서 군공을 기준으로 후계 구도를 만드신 건 가장 뛰어난 사람에게 가문의 미래를 맡기기 위함인 줄로 압니다. 지금 당장은 하비 형이 가장 앞서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기회를 주시면 예상보다 더 빨리 형을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나는 백작이 돕지 않더라도 결국 자력으로 하비 메이어를 따라잡을 수 있음을 강조했다.
하비 메이어, 나이는 서른하나.
전쟁이 없던 평화로운 시기에 소령까지 진급한 것은 분명 그의 능력이 상당하다는 증명이지만 그래도 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임관하기도 전에 이미 최우수 신임 장교 임관을 확정 지었으며 벌써 장성급과 인맥을 쌓아가는 중인 내 자질은 이미 그를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백작이 내 연락을 기다리며 나를 밀어주는 것 또한 그런 이유에서였다.
비록 후발 주자지만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치고 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게 눈에 보이기 때문이었다.
잠시 뒤, 백작은 무언가를 결정한 듯 책상을 손바닥으로 두들겼다.
“좋다! 네가 필요하다면 로얄 머신뿐 아니라 레플리칸트와 콜로서스의 라인까지 쓸 수 있도록 해주겠다.”
“······!”
-우리 백작님 화끈하시네!
로얄 머신에 이어 이름이 불린 두 회사는 트라카 3위, 4위의 군수사업체였다.
메이어 가문의 핏줄이 운영하는 곳은 아니라지만 그쪽도 자작가 혹은 남작가와 같은 귀족자제들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이런 경우 아무리 백작이 행성의 주인이고 대귀족이라 한들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 결정은 백작이 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나를 밀어주겠노라고 선언한 것과 다름없었다.
“단! 이 결정을 받아들이면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실수 한 번에 빌린 것은 물론이고 본래 네가 가지고 있던 것까지 내놓아야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예.”
“그래도 도전하겠다는 것이지?”
“반드시 성공해 보이겠습니다.”
고갤 숙이는 것으로 감사함을 표한 뒤 머릴 들자 백작의 진중한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백작은 내게 확실한 기회를 주었다.
혈육의 정을 제하고 가문의 수백 년 역사를 지켜낼 수 있는 이를 가리는 후계 경쟁.
이제 이 기회를 어떻게 살리느냐에 대한 건 전적으로 내게 달려있었다.
*
전자구름 지대.
전자가 산란하는 이곳은 마치 채프를 뿌린 듯 기계의 눈이 어두워지는 골치 아픈 지역이었다.
우주엔 내가 몰랐던 신비한 구역이 이 밖에도 수없이 많았다.
비유가 아닌 진짜 우주의 바다라든가.
어떤 지역에선 전투함 창밖으로 눈이 내리는 광경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오늘 나는 이곳에 관찰요원의 자격으로 참석해 있었다.
관찰함의 브릿지엔 나 말고도 베렐 연구소장과 브래들리 훈련소장, 마이클 방위사령관 외에도 오딘에서 한 끗발 한다는 중진이 대거 참석해 있었다.
<관찰대에 보고, 현재 목표 지점에 도착 완료.>
“테스트 시작.”
<테스트 시작.>
“조종간 자동. 지금부터 순양함의 1급 권한을 AI 오퍼레이터에 이양한다. 함내의 모든 요원은 즉시 정해둔 좌표로 빠져나갈 것.”
<라저.>
저 멀리, 전자구름 한가운데를 날고 있는 녹색 순양함 한 대.
도색을 새로 했음에도 지울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은 순양함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전투를 치렀는지를 알려주었다.
순양함 내에 남아있던 서포트요원이 셔틀을 타고 빠져나오자 본격적인 테스트 준비가 끝이 났다.
“지금부터 오딘 연구소의 신형 ECU 실전 테스트를 시작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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