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훈련이 끝난 후, 동기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고 있을 때 커다란 그림자가 내게 성큼 다가왔다.
팔이 넷 달린 회색 외계인, 지크 셉타누스였다.
나는 녀석이 조금 전 당한 격추로 화가 난 줄만 알았다.
그래서 몸이 살짝 굳고 말았다.
저 녀석들은 맨몸 그 자체만으로도 흉기나 다름없는 존재였으니까.
갑자기 주먹 네 개를 소나기처럼 퍼부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녀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조금 전 있었던 연계플레이. 혹시 의도한 거였나?”
제국어를 쓰는 지크 셉타누스의 목소린 조금 걸걸할 뿐 성인 남성과 별다를 게 없었다.
나는 그렇다고 답했고 그는 내게 어떻게 하면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물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그는 고급과정을 받으며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일에 한계를 느끼는듯했다.
나에겐 로저, 헨리, 찰스 그리고 그 외에 나를 따르는 많은 친구들이 있지만 지크 셉타누스에겐 등을 맡길 사람이 없었다.
이것은 정말 크나큰 차이였다.
전투란 원래 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지크의 말을 듣던 주변 훈련생들이 친하게 지내는 동기가 없냐고 묻자 그가 고갤 저었다.
“저런···.”
아무래도 이 회색 친구는 자발적 아싸였던 모양.
나는 그에게 이후 시간이 되느냐며 훈련을 잘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지크. 혹시 빵 좋아하나?”
*
고급과정의 후반기.
부드러운 회유로 지크를 문제없이 우리쪽 울타리로 끌어들였을 무렵, 제국 남방경계의 전쟁은 더욱 격화되는 중이었다.
가장 큰 원인은 전력자산 부족이었다.
제국은 기술력 면에서 융족에게 밀리지 않았지만 문제는 물량이었다.
전방으로 물자를 보내기 위해 각 행성의 군수공장을 풀로 가동해도 물량이 모자랐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전쟁에서 연방군은 주력함선의 노후화 문제를 마주하게 됐다.
현재 연방군엔 멀쩡히 돌아다니는, 생산한 지 수십 년 된 함선들이 즐비했다.
전투함이 한두 푼 하는 물건도 아니고 일이 년 쓰고 갈아치운다는 건 어불성설.
주기적으로 정비도 받고 쓰다 보면 몇십 년은 아무 문제 없이 쓰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을 하고 생산한 지 백 년이 다 돼가는 전투함은 아무리 관리를 잘했어도 신형함에 밀리는 것이 사실이었다.
반면 융족은 이번 기습 작전에서 갓 생산한 최신예 전투함을 대동해 전투를 걸었다.
결과적으로 이번 충돌에서 더 큰 피해를 본 쪽은 연방군이었고 벌써 행성계 몇 개가 융족에게 넘어가 박살 났다는 흉흉한 소식이 돌았다.
-이러다 여기까지 터지는 거 아냐?
‘오딘은 그래도 전선에서 꽤 거리가 있다고 들었는데···.’
오딘이 뚫리면 사실상 융족과의 전쟁은 남방경계 전역으로 확대되는 셈.
그렇게 되면 트라카는 물론이고 제국의 남쪽 어디서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이러다 진짜 모의 훈련마냥 말도 안 되는 전장에 끌려나갈까 걱정하던 그때, 여느 때처럼 훈련소장의 호출이 있었다.
“들어오게.”
노크를 하고 들어가자 예상치 못한 얼굴들이 있었다.
한 명은 베렐 연구소장.
또 한 명은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충성.”
나는 경례를 하며 이 미지의 인물을 곁눈질로 스캔했다.
제복에 달린 반짝이는 별이 하나.
이곳 훈련소엔 브래들리 소장 말고 장성 계급이 없다고 들었는데 의아한 일이었다.
“인사하게. 이쪽은 오딘 방위사령관 마이클 준장이야.”
“소문은 익히 들었네. 훈련소 창설 이래 최고의 조종사가 될 재목이라지?”
아무래도 높으신 분들끼리 사담을 나누던 모양.
이런 자리에 내가 끼어도 되는지 머쓱하게 서 있던 그때, 브래들리 소장이 말했다.
“앉아서 듣게. 사령관이 자네에게 할 말이 있어 찾아왔다고 하니 말일세.”
“제게···말입니까?”
방위사령관이 날 찾을 이유가 무엇일까.
-에이스급 조종사가 필요했나?
‘그건 아닐 거야. 지크가 없잖아.’
전쟁이 격화 중이라고 하니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지만 그럴 거면 지크도 이 자리에 있었어야 했다.
순수 조종 실력으론 나보다 뛰어난 녀석이니 말이다.
찻잔을 내려놓은 방위사령관이 신중한 얼굴로 질문을 했다.
“최근 융족과의 전쟁이 심해진 건 알고 있나?”
“예. 소식은 들었습니다.”
“놈들이 아주 작정하고 전쟁을 준비했더군. 그래서 이쪽의 피해가 만만치 않아.”
단기간에 계획된 것이 아닌, 최소한 10년 전부터 준비했다는 융족의 힘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기습을 당한 처지라 피해가 더 클 뻔했는데 자네의 회사에서 개발한 신형엔진이 큰 도움이 됐다더군. 여러 방위군을 대표해 감사하단 말을 하고 싶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음. 내가 이렇게 자넬 찾아온 건 다름이 아니라 혹시 다른 부품도 제작할 수 있는지를 물어보기 위해서네.”
“다른 부품이라 하시면···?”
방위사령관은 내게 순양함 전용의 ECU개발이 가능한지를 물어왔다.
ECU(Electronic Control Unit), 전자제어 유닛이라 부르는 물건으로 전투기는 물론이고 대형함까지 안 들어가는 곳이 없는 부품이었다.
“자네 덕에 구축함끼리의 힘 싸움은 어느 정도 우위를 점하게 됐다고 해. 문제는 순양함이야.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전선에서 활약하는 전투함 대부분은 연식이 제법 오래됐다는 문제가 있네.”
오래된 함선 그리고 부품들.
현재 연방군이 쓰는 주력함 상당수는 융족 순양함에게 스펙이 밀리는 상황이었다.
특히 ECU성능이 낮은 건 교전에서 심각한 문제가 됐다.
적이 전자전과 교란, 대규모 공격을 펼칠 때 전투에 빈틈이 생기기 때문이다.
전투함의 순간 처리능력을 좌우하는 것은 CPU(중앙처리장치)의 영역이 가장 크지만 타격을 받는 긴급 상황시, 함선의 각 구획을 제어하고 무기 예열을 관리하는 ECU또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맘 같아선 순양함을 위한 엔진 개발을 의뢰하고 싶지만 현재 군수공장을 가진 행성 대다수는 이미 구축함 물량을 맞추는 것으로도 벅찬 상황이야.”
현재 이클립스 엔진은 트라카뿐만 아니라 제국 남쪽 곳곳에서 생산 중이었다.
라이센스를 공유해 로열티를 받고 라인을 확장시킨 것.
물론 내가 모든 공장을 직접 소유하고 생산할 때보단 이익이 줄어들게 되지만 아크 팩토리의 명성을 드높이는 가장 빠른 방법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ECU라면 라인을 그리 많이 잡아먹지 않더라도 물량 확보가 용이하지.”
전자제어유닛은 엔진에 비하면 훨씬 작고 자원 소모가 덜하니 시간 대비 더 많은 물량을 생산하는 게 가능했다.
-이거 한다고 할 거야?
‘그러는 게 좋지 않을까?’
-엔진에 비하면 남는 이익은 적을 거 같은데.
ECU를 개발해 생산함으로서 얻는 이익은 엔진보다는 떨어진다.
하지만 개발 난이도는 오히려 엔진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는 작업.
방위사령관이 날 찾아온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아무리 휘하 부하들과 연구소를 닦달해봐도 당장 쓸만한 물건이 나오질 않았기 때문.
제일 좋은 해결책은 중앙에서 신형 물량을 공급받는 것인데 엉덩이가 무거운 중앙 특성상 남방경계가 아주 쑥대밭이 되기 전까진 이를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한번 맡아보겠는가?”
사령관의 물음에 나는 훈련소장의 눈치를 살폈다.
최우수 표창을 받고 조종사로 임관하기 직전인데 이번 임무를 맡았다가 내 특기가 도로 바뀌는 건 아닌지가 염려됐다.
그건 안 될 말이었다.
기껏 조종사 인맥도 많이 만들어놨는데, 거기에 표창까지 다른 녀석에게 넘긴다?
완전 죽 쒀서 개 주는 꼴이었다.
이런 우려를 알아차린 것일까.
소장은 내가 앞으로도 계속 조종사로 근무하게 될 것이고 이번 일만 성공한다면 오히려 진급에 큰 혜택이 주어질 거라고 말했다.
“전선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전우들을 살리는 일일세. 능력이 된다면 꼭 맡아주었으면 좋겠군.”
훈련소장의 확답.
나는 한번 해보겠다고 말했고 방위사령관은 안심이 된다는 듯 악수를 청해왔다.
“흔쾌히 나서줘서 고맙네!”
뭔가 깊은 뜻이 담긴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방위사령관.
그 순간 나는 준장이 속으로 깔아둔 계산을 얼핏 알아챌 수 있었다.
지금껏 순양함 계열, 그것도 ECU 품목에 관해선 전혀 손을 대본 적이 없는 아크 팩토리.
그런데도 그가 이렇게 나를 찾아왔다는 건 아크팩토리를 둘러싼, 중앙과 나의 관계에 대한 소문을 어느 정도 믿고 있기 때문인 듯했다.
-실제로는 중앙이랑 우리가 아무 연관도 없다는 게 문제겠지만.
‘괜찮아. 오히려 이쪽은 더 해볼만 해.’
다른 것도 아닌 전자제어유닛이다.
강도 테스트보다 알고리즘을 어떻게 짜는지가 중요하기에 오히려 내 전공에 더 가까웠다.
“저 소장님. 그런데 제가 고급과정 기간이 좀 남았는데···.”
“아, 그건 걱정하지 말게. 자넨 오늘부로 교육 열외야. 최우수 표창은 확정됐고 지금부턴 보직을 받기 전까지 연구소로 출근하게.”
남은 기간을 연구에 매진하게 해주겠다는 소장의 말에 나는 감사를 표했다.
사실상 남들보다 일찍 임관을 마친데다 흔치 않은 기회까지 잡은 셈이었다.
이번 기회만 잘 살린다면, 아크 팩토리는 물론 내 가치를 한층 더 끌어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될 터였다.
*
“연구소장님에게 올 거란 연락 받았어요. 오늘부터 출근인가요?”
“예. 중위님.”
아이스 히페리온 중위.
연구소에서 지내는 동안 전반적인 사항들을 가르쳐줄 선임 장교였다.
재빠른 속도로 내게 필요한 서류를 건네는 중위.
이 동작에 쓰인 팔은 모두 네 개.
히페리온 중위는 인간이 아닌 라다만 종족, 그리고 여성이었다.
훈련은 남녀가 따로 받지만 연방군 입대는 남녀 모두에게 열려있기에 배치를 받은 이후엔 여군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종이 서류 처음 보는 건 아니죠?”
“아닙니다.”
“여기서 지내는 동안은 익숙해지는 게 좋아요.”
기밀 정보를 다루는 군 연구소에서 전자 문서보다 실물을 이용하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어색한 건 중위의 존댓말이었다.
과거 내가 근무했던 군대를 떠올리면 영 익숙하지 않은 그림이었다.
연방군에서 같은 관급 장교끼리 존대를 하거나 반말을 하는 것은 전적으로 상급자의 자유였다.
즉, 아이스 중위가 내게 존대를 하는 것은 자유이나 내가 반말을 했다간 그대로 군법위원회 직행 감이란 뜻이다.
물론 나는 군법위원회가 아니더라도 그녀에게 말을 놓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외견만 보자면 가슴이 좀 튀어나온 것 말고는 지크와 크게 다를 것 없는 그녀였다.
괜히 어디 부러지기 전에 알아서 잘 사리는 것이 여러모로 이로울 듯했다.
“이건 현재 전장에서 활약하는 순양함들의 ECU설계도, 이쪽은 연구소에서 개발중인 ECU설계도예요. ECU쪽 개발은 한 번도 손대본 적이 없다고 들었어요. 기본 구조 설명을 내가 해줄 순 없고 저쪽 컴퓨터를 이용하면 베이스는 다 찾아볼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내가 이쪽 분야에 대한 경험이 없다는 것을 배려해 따로 공부할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괜찮다고 답했다.
“괜찮다고요?”
“방위사령관께서 임무를 주셨을 때부터 따로 공부를 좀 했습니다.”
모처럼 내 전공을 살려볼 기회를 잡았는데 어찌 시간을 낭비하겠나.
나는 밤을 새워가며 진과 함께 이 세계의 전자제어유닛에 관한 공부를 했고 이제는 충분히 설계도를 이해할 수 있을 수준에 올라 있었다.
마법과 전자공학의 결합.
엔진 개발 때도 느꼈지만 연구하는 재미가 탁월한 분야였다.
“우려돼서 하는 말인데 나중에 버벅거리면 일하는데 더 힘드니까 좀 더 보충하는 시간을 가져도 괜찮아요.”
“정말 괜찮습니다.”
내가 준비되었다고 답하자 그녀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그럼 한번 물어보죠. 연구소에서 최근 개발 중인 모델과 현역 모델의 가장 큰 차이가 뭐인 거 같아요?”
내 손에 들린 두 장의 설계도.
나는 그것을 번갈아 확인해가며 차이를 비교했다.
잠시간의 침묵.
아이스 중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역시 어렵죠?”
그녀는 내가 대답 못 할 줄 알고 있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내 대답이 조금 늦은 것은 정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잠시 다른 쪽에 관심이 팔려있어서였다.
‘이 조그마한 장치에 제타플롭스급 처리능력이라니. 우주 시대 만세···!’
실리콘 밸리에서 일할 적엔 상상할 수 없던 신문물.
그 감동을 잠시 옆으로 미뤄놓은 나는 중위와 시선을 마주했다.
더 미뤘다간 주제도 모르고 날뛴 망둥이가 될 판이었기에 나는 서둘러 답을 내놓았다.
설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설계도를 보는 순간 어떤 것들이 문제인지 감이 잡혔거든.
“답변이 늦어 죄송합니다. 가장 큰 차이는 통합입니다. 각 역할을 담당하는 ECU를 통합하게 되면 경량화에도 도움이 되고 각 ECU가 반복하는 상호 호환성 검증을 패스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내구도입니다. 너무 많이 집약하려다 보니 발열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소재 개선을 통한 자체 내구도 강화, 그리고 연산 효율을 꾀해 발열을 줄이는 방안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연산 효율 개선 쪽을 추천드리며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서류를 뒤집었고 그곳에 진과 의논한 마법 공식의 일부를 작성해 보였다.
막힘없는 필기에 공식이 한줄 한줄 늘어날 때마다 중위의 입에선 어? 어? 하는 소리가 반복됐다.
“대략 개요는 이렇습니다. 이에 따른 새로운 마법 공정을 추진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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