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 그 나물에 그 밥(48) >
인생 리셋 오 소위! 2부 261화
04. 그 나물에 그 밥(48)
그렇다 보니 오히려 불편했던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졌다. 손자를 위해 무리한 부탁을 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그러면서 진정한 군인을 본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아니 임규태 중령이 말했던 것보다 훨씬 더 바른 군인이었다.
그리고 군대에는 이런 군인들이 꼭 필요했다. 더 위로 올라가서 자리를 잡아주고 그래야 대한민국 군대가 바로 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퇴역한 자신은 조용히 물러나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괜찮군. 괜찮아. 그래도 이런 바른 군인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하군.’
신봉규 예비역 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앉아 있어봤자 무의미했다.
“아이고 내가 괜히 자네의 시간을 빼앗았네. 미안하네.”
“아닙니다. 윤 소위 불러 드립니까?”
“아니야. 아니야. 오늘은 자네를 보러 온 것이네. 아무튼 좋은 차 잘 마셨네.”
신봉규 예비역 준장이 환한 얼굴로 말을 한 후 중대장실을 나갔다.
중대장실을 나와 복도를 걸어가는데 뒤에서 윤태민 소위의 목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신봉규 예비역 준장이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윤태민 소위가 달려왔다. 그런 윤태민 소위를 본 신봉규 예비역 준장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방금 전까지 오상진을 봐서일까? 윤태민 소위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녀석이 철없이 느껴졌다.
“뛰지 마라. 뛰지 마! 너 아직 장교다. 밑에 병사들이 지켜봐!”
신봉규 예비역 준장이 그런 윤태민 소위를 작게 나무랐다.
“할아버지는······. 연락도 없이 어떻게 오셨어요?”
“내가 못 올 데 왔니?”
“그건 아니지만······.”
윤태민 소위가 힐끔 중대장실을 봤다.
“혹시 중대장님 만났어요?”
“그래.”
“중대장님이 뭐래요?”
“뭘 뭐래?”
“저 봐달라고 부탁하러 오신 거 아니에요?”
“이놈아. 내가 왜 그런 부탁을 해.”
“네?”
윤태민 소위가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신봉규 예비역 준장은 잠시 주위를 확인하고는 말했다.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자.”
“아, 네에······.”
윤태민 소위는 곧장 휴게실로 신봉규 예비역 준장을 데리고 갔다.
“할아버지······.”
윤태민 소위가 쭈뼛쭈뼛 서 있다. 그 모습을 한심스럽게 바라보던 신봉규 예비역 준장이 한마디 했다.
“너는 이 녀석아. 군대를 왜 들어왔니?”
“네?”
“오로지 이 할애비 때문에 들어온 것이니?”
“할아버지 무슨 말이에요?”
신봉규 예비역 준장이 묻는 것을 그만두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다 할애비 잘못이다. 내 잘못이야.”
신봉규 예비역 준장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윤태민 소위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말했다.
“할애비 간다.”
“네? 가신다고요?”
“그래.”
신봉규 예비역 준장은 그 말을 하고는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런 신봉규 예비역 준장을 보는 윤태민 소위는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뭐야. 여기까지 와서는······. 설마 이상한 소리를 하신 것은 아니지?”
자신을 외면하고 저만치 걸어가는 신봉규 예비역 준장을 보며 윤태민 소위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윤태민 소위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울리고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어. 이 시간에 웬일이니?
엄마의 피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바빠요?”
-바쁘지. 한창 장사 준비 중이지. 그런데 무슨 일이니?
“다른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께서 부대에 다녀가셨어.”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왜? 너 또 무슨 사고 쳤니?
“그게······. 별거는 아니고······.”
-별거가 아닌데 또 뭔데? 뭐야.
“그냥 여자 부사관하고 뭔가 좀 일이 있었어요.”
-뭐? 너 설마······.
“아니! 심각한 것은 아니고 좋게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인데 일이 커져 버려서 내가 징계받게 생겼어.”
-아이고, 이놈의 자식아. 너 할아버지 그런 거 싫어하는 거 몰라?
“엄마. 나 이번에는 진짜 억울하다니까.”
윤태민 소위는 엄마에게 하소연을 했다. 누구보다 아들을 잘 알고 있는 엄마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할아버지께서 뭐라고 하시는데?
“할아버지가 오긴 오셨는데. 중대장님을 보고는 그냥 가버리셨는데.”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걸 내가 모르겠다고. 할아버지가 무슨 생각이신지. 엄마가 전화해서 할아버지가 무슨 얘기를 하셨는지 좀 알아봐.”
-야, 이놈아. 내가 묻는다고 할아버지가 대답을 해주시니?
“그럼 어떻게 해. 나한테는 별 얘기 없이 가셨는데.”
-정말 다른 말은 없었어?
“그냥 다 할아버지 잘못이라고 말씀을 하긴 했는데······.”
-뭐?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씀을 했다고?
“응.”
엄마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아들. 너 군 생활 재미있니?
“군 생활을 무슨 재미로 해요.”
-너 팔자에도 없는 군 생활 한다고 고생했다. 만에 하나 그만둘 일 생겨도 눈치 보지 말고 편안하게 그만둬.
“엄마는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다가 할아버지가 가게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해.”
-그건 엄마와 아빠가 할 일이야. 너 억지로 육사 보내놓고 엄마랑 아빠도 마음이 편치 않았어.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너도 마음의 짐 내려놓아도 돼. 그냥 너 하고 싶은 것을 해도 돼.
“아, 몰라요. 끊어요.”
윤태민 소위는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 전화기를 바라보며 인상 썼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윤태민 소위가 짜증을 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솔직한 심정으로 마음 같아서는 유선영 하사를 찾아가고 싶었다.
“아니지.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윤태민 소위는 마지막으로 유선영 하사를 보기로 했다. 그래서 행정반에 들어갔다.
그런데 다들 경계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특히 김호동 하사가 유선영 하사 곁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 저 자식은 계속 붙어 있는 거야. 짜증 나게.’
그렇게 계속해서 상태를 확인하던 윤태민 소위는 자리에서 일어나 행정실을 나왔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되겠어. 일단 징계부터 풀어야겠어.’
윤태민 소위는 결심을 한 후 재빨리 어딘가로 이동했다.
송일중 중령도 홍민우 소령에게 전반적인 보고를 받았다.
“뭐? 신봉규 준장님께서 왔다 갔다고?”
“네. 4중대장만 보고 가셨습니다.”
“여기에는 안 오시고?”
“네. 그렇습니다.”
“도대체 왜? 무슨 일로 오신 거야?”
“스읍······. 아무래도 윤 소위 때문에 찾아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아······. 그 양반도 참 고생이야. 전역까지 한 양반인데 외손자 한 명 때문에 무슨 고생이신지.”
그렇게 있는데 홍민우 소령이 조용히 물었다.
“윤 소위는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십니까?”
“뭘 어떻게 처리를 해. 결과 나오는 그대로 넘겨야지. 지금 돌아가는 분위기로 봐서는 윤 소위 옷을 벗게 될지도 모르는데······.”
“괜찮겠습니까?”
홍민우 소령이 슬쩍 눈치를 봤다. 송일중 중령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됐어. 이제 와 점수 딸 것도 없고. 본전만 찾으면 돼. 그렇지 않아도 연대장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라고 그랬어. 나는 그냥 원칙대로 처리할 거야.”
“네. 알겠습니다.”
송일중 중령의 뜻을 확인한 홍민우 소령은 내심 안도했다. 신봉규 예비역 준장이 왔다 갔다는 소식에 송일중 중령이 일을 키울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송일중 중령은 말없이 손을 휙휙 저었다. 홍민우 소령이 경례를 한 후 사무실을 나갔다. 그가 나가고 송일중 중령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저 녀석 뭔가 많이 유해졌나? 예전에는 이런 일 없도록 알아서 척척 일 처리를 하더니······. 나도 참 부하 복이 없어.”
송일중 중령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있는 난을 손질했다.
“참자, 참자.”
이렇게 혼잣말을 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난의 잎사귀 하나가 뚝 하고 끊어졌다.
“아이씨. 이건 또 왜 이래.”
송일중 중령이 짜증을 내고 있는데 사무실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이 윤태민 소위였다. 나타난 그를 보며 송일중 중령은 의외라는 듯 바라봤다. 그러곤 곧바로 시선을 난으로 돌리며 말했다.
“윤 소위가 어쩐 일이야.”
윤태민 소위가 재빨리 송일중 중령 근처로 갔다. 그는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대대장님. 이번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뭐라고 하는 거야. 내가 왜 자네를 죽이기라도 하는가?”
“대대장님!”
윤태민 소위는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송일중 중령은 난을 손질하다가 무릎 꿇는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자네 지금 뭐 하는 건가? 어서 일어나지 못해.”
송일중 중령은 윤태민 소위가 언젠가 한 번은 찾아올 것이라 예상은 했다. 하지만 이렇게 늦게 찾아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솔직히 자신이 보직 해임시켰을 때 그때 찾아와 말을 하고 그러면 송일중 중령도 좀 안쓰러운 마음에 보듬어줬을 것이다. 그런데 보직 해임당한 지 며칠이나 지났는데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찾아왔다는 것은 하다 하다가 안 되니까. 마지막으로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송일중 중령은 이제 와 도와줄 수는 없었다.
“돌아가! 난 자네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대대장님. 한번 살려주십시오.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게 평소에 열심히 하지 그랬어. 그러게 뭐 하러 여자 부사관은 건드려서는······.”
“진짜 저는 억울합니다.”
송일중 중령이 콧방귀를 꼈다.
“흥. 억울해? 윤 소위······.”
“네. 대대장님.”
“내가 널 몰라? 정말 억울한 거야? 진짜 억울해? 너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그런 거야? 그럼 나랑 함께 헌병대에 찾아가자. 만에 하나 네가 잘못한 것이 나오면 어떻게 할래? 아니면 내가 너 덮어준 것을 지금 다 꺼내나 봐? 그러길 원해?”
송일중 중령은 윤태민 소위를 완전 몰아붙였다. 윤태민 소위가 당황했다.
“대, 대대장님······. 그것이······.”
“가 인마! 꺼져 새끼야. 내가 지금까지 너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살았던 자체가 짜증 나니까. 어디 새끼가 한두 번 덮어주면 고마운 줄 알고 쥐 죽은 듯이 생활하지. 어디 기고만장해서는 싸가지 없는 새끼가. 빨리 나가!”
송일중 중령이 얼굴이 붉어지며 버럭 화를 냈다. 그러자 윤태민 소위가 본전도 찾지 못하고 대대장실에서 쫓겨났다. 그는 밖으로 나온 후 복도에서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뭐야? 갑자기 왜 저러시지. 그리고 어디 내가 부탁했나? 자기가 외할아버지를 봐서 봐준다고 해놓고. 이씨, 뭐야.”
윤태민 소위가 투덜투덜거리다가 고개를 돌려 작전과를 바라봤다. 잠깐 생각을 하다가 그곳으로 들어갔다.
작전과에는 홍민우 소령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가 윤태민 소위가 들어온 것을 보고 와락 표정을 굳혔다.
“윤 소위가 여긴 무슨 일이야?”
“저어······ 잠깐 시간 좀 내주십시오.”
홍민우 소령이 가볍게 한 숨을 내쉬었다.
“윤 소위.”
“네.”
“혹시 대대장님 만나고 왔어?”
“······네.”
“대대장님께서 뭐라고 하셔?”
“그게······.”
홍민우 소령은 대답을 하는 윤태민 소위의 표정만 봐도 바로 느낌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