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 잘 좀 하지 그랬어?(49) >
인생 리셋 오 소위! 2부 200화
03. 잘 좀 하지 그랬어?(49)
“거기까지는 좀······.”
“그러니까. 헛소리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나도 걸릴 만한 것은 다 뒤져보고 이러고 있는 거니까.”
“그래도 그냥 저대로 둡니까? 한번 밟아주고 싶은데 말입니다.”
“억울하면 자식아, 네가 빨리 진급해서 헌병과장인 내 자리까지 와. 그다음 오 대위를 밟든 말든 해봐.”
“에이. 제가 어떻게 과장님 자리를 노립니까.”
“어쭈. 너 나 없을 때 내 자리에서 놀고 그러잖아.”
박태진 중위가 헌병대를 등에 업고 깝치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박태진 중위는 자신의 말을 잘 듣고 일도 잘하기 때문에 못 본 척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아무튼 다른 것 신경 쓰지 말고. 유 하사만 신경 써!”
“네. 그런데 유선영 하사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뭘 어떻게 해! 원칙대로 해야지.”
“원칙대로 말입니까?”
“그래. 유 하사 자대배치 받은 지 얼마나 되었지?”
“얼마 안 된 것으로 압니다.”
“얼마 안 되었지. 그런데 벌써부터 장교 하나 붙잡고 성추행을 했느니 어쩌느니······. 어디서 많이 본 시나리오 아니냐.”
“아······. 또 그런 겁니까?”
“그런 건지 아닌지는 모르지. 하지만 냄새가 난다고, 냄새가! 그리고 윤태민 소위 외조부가 누군지 얘기해 줬지.”
“네. 신범규 예비역 준장님이십니다.”
“그분에 대해서 알아봤어?”
“군 생활을 열심히 하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범규 준장에 대해서 군에서는 안 좋은 얘기를 듣기가 힘든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범규 준장이 완벽하게 사리사욕 없이 국가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열심히 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군인치고는 깨끗한 편이고 베풀 줄도 알던 사람이었기에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니까. 신범규 준장의 외손자야. 신범규 준장의 뒤를 잇겠다고 군에 들어왔고.”
“그런데 윤태민 소위는 이런저런 소문이 그다지 좋지 않던데 말입니다.”
“야! 생각을 해봐라. 외조부 신범규 준장인데 주위에서 이런저런 소리가 안 들어오겠냐.”
“하긴 그렇지 말입니다.”
“그러니! 별거 아닌 거 가지고 구설에 오르는 거지. 아까 봐서 알겠지만 얼굴 반반하잖아. 그러니 여자도 꼬이고 그러는 것이겠지.”
최영도 헌병과장의 말에 박태진 중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최영도 헌병과장이 정확하게 뭘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을 해준 것은 아니었다.
최영도 헌병과장의 얘기를 듣다 보니 대충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방향을 잡았다.
“그럼 제가 조사를 합니까?”
“알지? 책잡힐 소리는 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만 믿으십시오.”
“오랜만에 박 중위 실력 한번 볼까?”
그 말에 박태진 중위가 씨익 웃었다.
담배를 다 태운 두 사람은 다시 면담실로 들어갔다. 그 자리에는 유선영 하사가 여전히 긴장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유 하사. 4중대장하고는 얘기 잘 했어요?”
“네.”
“4중대장이 뭐래요?”
“떨지 말고 조사 잘 받으라고 했습니다.”
“좋은 중대장이네.”
유선영 하사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최영도 헌병과장은 오상진을 칭찬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유선영 하사가 저런 식으로 반응을 보이자 피식 웃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구먼. 좋은 중대장이라면 헌병대까지 끌어들이지는 않지. 헌병대 무서운 줄을 모르네, 이 아가씨.’
최영도 헌병과장이 속으로 생각한 후 자리를 바로잡으며 말했다.
“자! 다시 내 소개를 할게요. 나는 헌병대 과장 최영도 소령이라고 합니다. 이 친구는 헌병대 소대장 박태진 중위입니다. 오늘은 저 말고 박태진 중위가 조사를 할 겁니다.”
“네.”
유선영 하사는 바짝 긴장한 채 대답했다.
“조사 과정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기록으로 남길 겁니다. 그러니 대답할 때 신중하게 말하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시작하지.”
최영도 헌병과장이 박태진 중위에게 말했다. 박태진 중위는 고개를 끄덕인 후 노트북을 열었다.
“자, 그럼 조사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언행은 자제하겠습니다. 말이 좀 짧더라도 이해해 주시고. 먼저 관등성명.”
“17보병연대 3대대 4중대 2소대 부소대장 하사 유선영입니다.”
“군번.”
“00-0000000입니다.”
“자대배치 받은 지는 얼마나 되었죠?”
“자대배치 받은 지 2주 차입니다.”
“2주 차······.”
박태진 중위는 열심히 타이핑을 쳤다. 그러면서 다음 질문을 던졌다.
“곧바로 조사 들어가겠어요. 유 하사가 성추행을 당했다고 했는데······. 그걸 신고한 거죠?”
“네. 그렇습니다.”
“성추행 상대가 누구입니까?”
“4중대 2소대장 윤태민 소위입니다.”
“같은 2소대죠?”
“네!”
박태진 중위의 질문에 유선영 하사는 바로바로 대답을 했다.
“윤태민 소위하고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예?”
“2주 동안 윤태민 소위랑 어떻게 지냈는지 말해보라는 말이에요. 우리도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뭔가 알아야 조사를 하죠. 그냥 누군가에게 성추행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하면 우리가 알겠습니다. 하고 넘어갈 줄 알았습니까? 저 헌병대에서 나왔습니다.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안 넘어갑니다.”
박태진 중위는 일단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며 압박을 했다. 유선영 하사는 살짝 표정이 굳어졌다.
“윤태민 소위하고는······.”
유선영 하사는 윤태민 소위하고 2주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서 더듬더듬 설명을 했다.
솔직히 윤태민 소위하고는 살갑게 지내지는 않았다. 업무적인 것 외에는 딱히 얘기도 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윤태민 소위는 조만간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갈 것이라고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윤태민 소위를 우습게 생각한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고스란히 얘기해 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데면데면하게 지냈습니다.”
“음! 2주나 되었는데 별로 안 친한 것 같습니다.”
“네. 그게······.”
“왜요? 처음부터 유 하사에게 추근대고 그랬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건 아니다. 그럼 혹시 유 하사가 윤태민 소위에게 사심 같은 것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유선영 하사의 언성이 좀 올라갔다. 그러자 박태진 중위가 바로 얘기를 했다.
“바로 발끈하면 어떻게 해요. 나는 조사관으로서 이런저런 얘기를 물어봐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기분 나쁜 투로 말을 하면 제대로 조사가 안 되지 않아요. 아니면 나도 기분 나쁘게 얘기를 해요?”
“죄송합니다.”
“감정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 말을 해요. 헌병대 조사 처음 받아봐요?”
“네······.”
유선영 하사는 저절로 위축이 되었다.
“물론 헌병대 조사를 받아봐야 좋을 것도 없지만 우리도 피차 힘듭니다. 이런 일 조사하고 일일이 하나하나 물어보고 말이에요. 우리도 좋아서 하는 줄 알아요. 우리는 일하고 있는데 감정적으로 나오면 안 되죠. 그래도 내가 중위인데······.”
“죄송합니다.”
유선영 하사는 잔뜩 기가 죽은 채로 대답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최영도 헌병과장이 씨익 웃었다.
“아까 어디까지 했죠?”
“사심······.”
“아, 그래요. 사심 없다고 했죠. 그러면 두 사람은 친하지도 않으면서 같이 있었을까요? 이해가 안 되어서 그래요. 막말로 부대에 전입 왔어요. 소대장이 있고, 본인은 부소대장입니다. 그러면 부소대장 입장에서는 소대장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서 소대를 이끌어야 하잖아요. 그 과정에서 많은 조언도 얻고, 신뢰도 얻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그럼 뭐가 문제였을까요? 누가 문제였을까요? 아니면 이 관계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요?”
박태진 중위는 숨도 못 쉬게끔 유선영 하사를 몰아붙이며 유도 질문을 던졌다.
거기다 대고 유선영 하사는 진실을 얘기할 수 없었다. 진실을 말하는 순간 오히려 유선영 하사 본인이 쓰레기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박태진 중위도 유선영 하사가 왜 그랬는지 얼추 짐작은 하고 있었다.
“혹시 말이에요. 윤태민 소위 내년에 다른 부대로 전출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까?”
“네?”
유선영 하사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눈빛을 본 박태진 중위가 피식 웃었다.
“알고 있었나 보네. 그것 때문에 일부러 거리를 두고 그랬습니까? 어차피 새로운 소대장이 오니까.”
“어······ 그것이 아니라······.”
“그게 아니면?”
유선영 하사는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사실대로 말하는 순간 자신이 엄청 불리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제가 윤태민 소위에 대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들은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뭘 들었습니까?”
“지난번 사건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이런저런 사건에 의해 문제가 많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소대장이지만 가까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판단해서 먼저 거리를 뒀다는 말씀입니까?”
“······.”
유선영 하사는 그 말에 가타부타 답을 하지 않았다.
“으음······. 그랬단 말이죠. 그렇게 거리를 뒀는데 윤태민 소위가 갑자기 추행을 했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데······.”
박태진 중위가 슬쩍 옆에 있는 최영도 헌병과장을 봤다.
“과장님.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알아서 하지 뭘 나한테 물어봐.”
“조언을 구하는 것 아닙니까. 이런 사례를 많이 접해보셨지 않습니까.”
“뭐, 접해봤지.”
“보통 어땠습니까?”
“보통 뭐······ 치정 관계였어. 추행이니 뭐니 해도 둘이 어느 정도 뭔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서로 감정이 상해서 신고를 하고 그랬던 거지. 일방적으로 막 그러지는 않지. 그건 완전 미친놈 아니냐. 여긴 대한민국 군대인데······. 대한민국 군대에서 가능한 일이야? 뜬금없이 정신병자처럼 추행하고 그러는 일이?”
“저도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박태진 중위가 중얼거리며 유선영 하사를 바라봤다. 유선영 하사는 몸을 부르르 떨며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은 마치 사담을 얘기하듯 했지만 당사자인 유선영 하사 앞에서 조롱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박태진 중위는 그 모습을 보면서 뻔뻔하게 굴었다.
“유 하사 왜 그래요? 방금 한 얘기 유 하사에게 한 얘기 아닌데.”
유선영 하사가 애써 눈물을 참아냈다. 박태진 중위가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아. 울면 조사가 늦어집니다. 울지 마요.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요. 전혀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자! 간단히 얘기를 해봅시다. 사회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해봐요. 어떤 여자가 직장 상사를 성추행으로 고소를 해서 경찰이 조사를 해. 경찰이 무조건 여자 말만 믿고 그렇게 하겠습니까? 이거 판단은 누가 내려요. 검찰로 넘어가면 검사가 보겠죠. 그럼 검사는 뭘 가지고 판단해요. 지금까지 수많은 사례들을 보고 맞춰보고 좀 더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걸 가지고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뭐 신입니까? 딱 보면 알게? 막말로 내가 여기서 윤태민 소위 잘못 없다. 이렇게 얘기를 하면 유 하사는 내 말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어요? 아니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 말에 유선영 하사는 참았던 눈물이 뚝 떨어졌다. 솔직히 헌병대 조사가 쉽지 않다고는 얘기 들었다. 그런데 이렇듯 농락당할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