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 대대로 가겠습니다(33) >
인생 리셋 오 소위! 2부 033화
01. 대대로 가겠습니다(33)
미팅이냐 자존심이냐.
김호동 하사는 그 갈림길에서 잠깐 고민을 했다. 그러다 묘안을 떠올리고는 바로 말했다.
“미팅 저도 하겠습니다.”
“뭐? 여자 친구 있다며?”
“그게······ 여자 친구랑 헤어진 것 같습니다.”
“뭐? 헤어진 것 같다니? 그게 뭔 소리야. 헤어진 거야? 헤어지는 중인 거야?”
“헤어지는 중입니다.”
“에라이, 이 자식아!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자존심을 세우고 그래! 네가 자꾸 그러니까 장교들이 널 싫어하잖아.”
김태호 상사의 핀잔에 김호동 하사가 시무룩해졌다.
“아니, 왜 얘기가 또 그렇게 빠집니까.”
김호동 하사는 자존심이 좀 센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젊은 장교들하고 사이가 썩 좋지는 않았다.
젊은 장교들이 김호동 하사보다 나이는 한두 살 어리지만 그래도 장교 출신이고 계급이 깡패다 보니 부사관들이 알아서 져주고 그런 맛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김호동 하사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게다가 몸도 좋고 운동도 잘해서 신입 장교들을 기죽이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김호동 하사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오상진 라인을 타기로 맘을 먹은 이상 다른 장교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김호동 하사의 짐을 챙겨주던 김태호 상사가 물었다.
“야, 그건 그렇고. 이제 퇴원했으니까 술 마셔도 되는 거지?”
“지난번에도 마셨지 않습니까.”
“자랑이다. 아무튼 나가서 포장마차에서 우동에 소주 한잔하자.”
“고작 우동에 말입니까? 고갈비나 골뱅이는 안 됩니까?”
“왜? 싫어? 그럼 네가 쏘든가.”
“아, 형님이 쏘시는 거였습니까?”
“그럼 이 녀석아, 내가 너에게 얻어먹을까?”
“그럼 저야 뭐든 좋습니다.”
“어후, 이 녀석아. 뺀질뺀질해 가지고는······.”
그러고 있는데 병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김태호 상사와 김호동 하사의 시선이 동시에 입구 쪽으로 돌아갔다.
한동안 혼자 썼지만 다인실이라 새 환자가 들어왔나 싶었는데 홍민우 작전과장이 나타났다.
김호동 하사가 깜짝 놀랐다.
“어?”
김태호 상사도 홍민우 작전과장을 발견하고는 살짝 표정을 굳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숭일중 대대장의 오른팔이라 알려진 홍민우 작전과장이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홍민우 작전과장은 그런 김태호 상사를 발견하고는 가볍게 미소를 보였다.
“행보관님도 여기 계셨네요.”
“네. 그런데 과장님께서는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설마 김 하사 퇴원한다고 해서 찾아오신 겁니까?”
“어? 퇴원이었습니까? 아이구, 이거 제가 조금만 늦었어도 못 볼 뻔했습니다.”
홍민우 작전과장의 너스레에 김호동 하사가 슬쩍 물었다.
“절 보러 오신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럼 김 하사. 잠깐 밖에서 잠깐 나 좀 보죠.”
그러자 김태호 상사가 말했다.
“아닙니다. 여기서 두 분 대화 나누세요. 전 밖에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있겠습니다.”
“그리해 주시겠습니까?”
김태호 상사는 김호동 하사를 바라보며 고개를 한번 끄덕인 후 병실을 나갔다. 홍민우 작전과장이 왜 왔는지는 훤히 보였지만 김호동 하사도 여간내기가 아니니 쉽게 휘둘리지는 않을 거라 믿었다.
그러면서도 김태호 상사는 홍민우 작전과장의 태연한 모습이 신경 쓰였다. 분명 다 알고 온 게 확실할 텐데 홍민우 작전과장은 조금도 다급한 모습이 아니었다.
‘뭔가 거절하지 못할 확실한 뭔가를 가지고 온 게 틀림없는 거 같은데.’
그렇게 김태호 상사가 나가자 홍민우 작전과장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입원했다는 소식을 너무 늦게 전해 들었습니다. 미리 찾아오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그것보다 몸은 좀 괜찮습니까?”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습니까? 어디 좀 봅시다.”
홍민우 작전과장이 세심히 챙기는 척 김호동 하사의 뒷머리를 살폈다. 퇴원을 해도 좋다고 허락을 받긴 했지만 아직도 김호동 하사의 뒤통수에는 붕대가 덧대어져 있었다.
“어이구. 이거 상처가 꽤나 크게 난 거 같은데 몇 바늘이나 꿰맸습니까?”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습니다. 간호사 말로는 20바늘 정도 꿰맸다고 하던데요.”
“20바늘이면 상처가 제법 크네요.”
물론 붕대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지만 솔직히 20바늘이나 꿰맬 만큼의 상처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엄살을 부리는 김호동 하사를 보며 홍민우 작전과장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정도로 입원했던 거야? 아후, 덩치가 아깝다. 덩치가 아까워.’
하지만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던 홍민우 작전과장은 걱정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상처 부위는 아직도 많이 아프십니까?”
“아뇨, 지금은 괜찮습니다.”
“다른 곳은 어떻습니까?”
“여기서 며칠 쉬었더니 괜찮습니다.”
김호동 하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질문에 답을 해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홍민우 작전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대대장님께서 걱정이 많으십니다.”
“대대장님께서 말입니까?”
“그럼요. 설마 대대장님께서 모르셨을 거라 생각합니까? 다 알고 계십니다.”
“아, 그렇습니까?”
김호동 하사가 살짝 착각을 했다.
‘뭐지? 중대장님께서 벌써 대대장님께 보고를 하신 거야?’
그러면서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다.
‘대대장님께서도 알게 되었다면 이 일을 제대로 파헤치고 엄벌백계 하겠지.’
김호동 하사가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홍민우 작전과장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김호동 하사.”
“네.”
“혹시 다른 부대로 갈 생각이 없어요?”
“네?”
김호동 하사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갑작스러운 물음에 잠시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
“아니, 다른 뜻으로 한 말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요. 김 하사가 이번 일로 많이 힘들지 않았습니까. 대대장님께서 걱정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혹여 부대 생활에 적응을 못 할까 봐 말입니다. 그래서 편안한 곳으로 전출을 시켜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김 하사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홍민우 작전과장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김호동 하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아, 그럼 그렇지. 이 인간들이 달라질 리가 없지.’
김호동 하사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하자 홍민우 작전과장이 빠르게 말을 했다.
“김 하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압니다. 퇴원할 때가 되어서야 얼굴 내비쳐놓고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서운하겠죠. 하지만 김 하사. 잘 생각을 해봐야 해요. 군대가 폐쇄적이라는 건 다른 누구보다 김 하사가 잘 알지 않습니까? 소문 역시 빠릅니다.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더라고요.”
“······.”
“물론 김 하사가 주변을 의식하는 성격이 아닌 거 압니다. 그래도 이번 일로 상심이 클 거라고 생각해요. 병원까지 입원했는데 뭔가 제대로 된 보상을 받아야 할 거 아닙니까? 그렇다고 이번 일 이렇게 키워서 부대를 시끄럽게 만들어서야 되겠습니까? 안 그래요?”
“······.”
홍민우 작전과장의 뻔뻔한 태도에 김호동 하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울컥해서 따져 묻고 싶은 게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진짜 옷을 벗을 것도 아닌데 대대 작전과장을 상대로 하극상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잠깐 있다가 김호동 하사가 홍민우 작전과장을 바라봤다.
“그럼 과장님께서는 이번 일을 그냥 이대로 덮자는 말씀입니까?”
“그게 김 하사 입장에서도 좋지 않아요? 지금까지의 소문은 소문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이 정말 커져서 모두가 다 알아보세요. 김 하사 앞으로 군 생활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막말로 쪽팔리잖아요.”
솔직히 다른 것도 아니고 병사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기절했다는 소문이 나 봐야 김호동 하사에게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은 맞았다. 사실 그래서 김호동 하사도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폭행 피해 사실을 숨기고 사는 게 김호동 하사의 입장에서는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엄밀히 말해서 하극상인데 그걸 제대로 처분하지 않는다면 다시 군 생활에 회의가 들 것 같았다.
게다가 홍민우 작전 과장의 말처럼 이 일을 숨기고 다른 곳으로 전출을 간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터였다. 설사 주변 사람들이 모르더라도 약간의 트라우마는 남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소문이 나든 말든, 여기서 이 일을 말끔히 해결하는 것이 속 편할 것이라 생각했다.
가해자인 조인범 상병이 끝내 처벌을 받지 않는다면 소문이 더 와전될 수도 있는 문제였고 말이다.
‘지금 당장 편안하려면 홍민우 작전과장 말처럼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가서 생활하는 것이 맞겠지만······.’
오상진을 만난 김호동 하사는 이제 더 이상 피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모든 속내를 다 드러낼 김호동 하사도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생각을 좀 해보겠습니다.”
김호동 하사는 일단 홍민우 작전과장에게 안심을 하게끔 말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홍민우 작전과장도 김호동 하사의 말을 듣곤 승낙의 의미라 생각했다.
“그래요. 맘이 정해지면 언제든지 말해요. 준비해 놓을 테니까.”
“네.”
홍민우 작전과장은 할 말이 끝났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가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몸을 돌렸다.
“아, 참. 조인범 상병 말이에요. 그쪽에서 김호동 하사에게 사과의 의미로 위로금을 전달하겠다고 하는데 말이에요.”
“위로금 말입니까?”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그 집안 잘삽니다. 김호동 하사가 이렇듯 피해를 입었는데 그래도 어느 정도 보상은 받으셔야죠.”
“그런 거라면 됐습니다.”
“그러지 말고 받아요. 잘사는 사람들은 그게 사과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맙시다.”
홍민우 작전과장이 가볍게 어깨를 툭툭 치고 나갔다. 김호동 하사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하아, 시발······. 엿 같네!”
잠시 후 병실 문이 열리고 김태호 상사가 들어왔다.
“작전과장님은 가셨어?”
“네.”
“뭐라고 하셔?”
“형님 일단 담배 피우러 다녀오죠.”
“야! 나 방금 피우고 왔어.”
“한 대 더 피우십시오.”
“이 자식이······.”
김호동 하사가 병실을 나가 흡연실로 갔다. 그곳에서 담배를 입에 물고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다가 김태호 상사를 보며 말했다.
“형님. 라이터 좀.”
“야, 라이터 맡겨놨냐.”
“지금 라이터가 없어서 말입니다.”
“알았다.”
김태호 상사가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줬다. 김호도 하사가 담배를 몇 번 피웠다. 그 모습을 찬찬히 지켜보던 김태호 상사가 물었다.
“그래서 뭐래? 왜 온 거래?”
“후우······. 뻔한 거 아닙니까. 덮잡니다.”
“하아, 미친······. 그럴 줄 알았다. 설마 잠깐 기대를 한 내가 병신이지. 그런데 고작 그 얘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거래?”
“뭐, 원하면 다른 부대로 전출 보내주겠다고 하고. 위로금도 주겠다고 합니다.”
“위로금?”
“조인범 그 새끼 집안 잘산다고 하던데 말입니다.”
“아마 그럴 걸. 조인범 엄마가 큰 술집을 운영한다고 들었어.”
“그렇습니까? 에효, 시발······. 군대가 어쩌다가 이리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야, 김호동!”
“네?”
“네가 뭘 모르나 본데 군대는 원래 이랬어, 인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