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 대대로 가겠습니다(20) >
인생 리셋 오 소위! 2부 020화
01. 대대로 가겠습니다(20)
김태호 상사는 자세하게 말을 하진 않았지만 그 말속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알력이 있었고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었으며 그래서 이렇게 좌천되어 내려오게 되었다는 내용 속에 군대 특유의 부조리함이 다 담겨 있었다.
말을 마친 김태호 상사가 슬쩍 오상진을 봤다. 보통 이런 얘기를 하면 열에 아홉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약간 거리감을 두려고 했다.
하지만 정작 오상진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행보관님. 혹시 저에 대해서 아시는 게 있습니까?”
“음, 대충 얘기는 들었습니다.”
“혹시 어떤 얘기를 들으셨습니까?”
“제가 듣기로는 사단에서 잘나가셨다고 들었는데······.”
“에이. 잘나가긴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잘나갔으면 여기로 내려왔겠습니까?”
오상진이 멋쩍게 웃었다.
“아······.”
“그렇다고 여기 내려온 게 싫은 것은 아닙니다. 나라 지키는 군인이 항상 좋은 보직만 쫓아다닐 수야 있나요. 이왕 이렇게 내려온 거 열심히 할 생각입니다.”
김태호 상사가 얼마 남지 않은 커피를 홀짝거리며 오상진을 바라봤다. 분명 자신이 듣기로는 사단장의 총애를 받고, 위에서 끌어주려고 한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런데 직접 본 오상진은 제 잘난 맛에 사는 그런 성격은 아닌 것 같았다.
오상진이 물었다.
“참! 제가 부대에 관해서 알아야 할 일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처음 왔는데 뭐라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이고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행보관님. 예전에는 어떻게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앞으로의 일을 행보관님과 함께 의견을 나누고 싶습니다. 행보관님은 우리 중대의 엄마 같은 분이 아니십니까. 저는 이제 막 처음 여기에 왔고,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행보관님께서 저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시고 해야 중대를 제대로 통솔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김태호 상사는 말없이 오상진을 바라봤다. 오상진의 눈빛을 바라보는데 그 눈에 진정성이 느껴졌다.
‘진짜인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김태호 상사는 한번 의심을 가졌다. 그렇지만 눈빛에서 느껴지는 것은 진정성이었다.
‘아니야, 또 속을 수는 없지. 시험을 해봐야겠다.’
김태호 상사가 마음을 먹고 슬쩍 얘기를 꺼냈다.
“으음, 어디서부터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중대에 일이 하나 있긴 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김호동 하사라고······.”
김태호 상사가 얼마 전 중대에 있었던 폭행 사건에 대해서 슬쩍 운을 뗐다. 그 얘기를 듣는 오상진은 묵묵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시각 3소대 내무실.
“조 상병님, 조 상병님.”
“왜? 뭐야?”
내무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조인범 상병이 짜증 난 얼굴로 대답했다.
“얘기 들었습니까?”
“뭔 얘기?”
“저희 중대에 새로 중대장이 왔습니다.”
“그래? 뭐, 온다는 얘기는 있었잖아. 와 봤자 별것도 없는 것을······.”
조인범 상병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은 했다.
“새로운 중대장 어디 있는데?”
“오자마자 바로 행보관님을 만나러 갔답니다.”
“행보관? 행보관을 왜 찾아? 우리 중대에 행보관은 아무것도 아닌데.”
그러자 옆에 있던 임상기 일병이 바로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중대장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 말입니다.”
조인범 상병이 입을 열었다.
“막말로 중대장이라고 해봤자 계급이 대위잖아. 이제 갓 처음 온 중대장이면 대략 4, 5년쯤 되었나? 그 사람이 뭘 알겠냐. 지난번 중대장도 뭘 알디?”
“하긴 말만 중대장이지 소대장들이랑 다를 것이 없지 말입니다.”
그러다가 추영호 일병이 슬쩍 말했다.
“조 상병님.”
“왜?”
“혹시 말입니다. 그 일 가지고 뭐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일?”
조인범 상병이 바로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야이씨! 왜 그 얘기를 꺼내고 있어.”
“아니,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며칠이나 지났는데 징계를 하든지 뭐든 한다고 말이 나와야 하는데 너무 조용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임상기 일병이 눈을 부릅떴다.
“야! 추영호. 너는 꼭 조 상병님이 징계받기를 바라는 것 같다.”
“에이. 임 일병님 그런 말씀 하시면 서운합니다. 제가 조 상병님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말입니다.”
조인범 상병이 띠꺼운 표정을 지었다.
“야, 인마. 날 좋아한다는 자식이 그런 소리를 해!”
“걱정되어서 그럽니다. 걱정되어서. 그리고 새로운 중대장이 오면 막 뭐라도 하고 싶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괜히 이 일로 트집 잡아 시끄럽게 만들지는 않을지 걱정되어서 그럽니다.”
조인범 상병은 살짝 굳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진짜 뭔 일이 있으려나? 아니겠지?”
“에이. 별일 없을 겁니다.”
“그렇겠지?”
“네. 걱정 마십시오. 솔직히 말해서 뭐라고 할 겁니까. 우리 소대장 아무 말도 못 합니다. 새로운 중대장에게 우리 소대 개판이라고 소문낼 일 있습니까?”
“하긴.”
“그리고 우리 소대장 여자이지 않습니까. 여자라서 무시당하고 만날 질질 짜는데 그 얘기를 중대장에게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도 그렇지.”
그렇게 얘기를 하고 있는데 나재민 일병이 쓰윽 지나갔다. 그러자 조인범 상병이 기다렸다는 듯이 불러 세웠다.
“야, 나재민.”
“일병 나재민.”
“어디 가냐?”
“화장실 갑니다.”
“갔다 오면서 뭐 좀 사 와라.”
“지금 말입니까?”
“이 새끼가 빠져 가지고. 빨리 가서 안 사 와?”
조인범 상병이 버럭 화를 내자 나재민 일병이 움찔했다. 그러면서 슬쩍 입을 열었다.
“저······ 돈은······.”
“갔다 와! 갔다 오면 내가 줄 테니까. 냉동으로 사 와.”
“어어······.”
나재민 일병이 우물 쭈물거렸다. 이런 식으로 심부름을 시켜 놓고서 떼먹은 부식비가 한두 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자 조인범 상병이 다시 소리쳤다.
“이 새끼가 빨리 안 갔다 와?!”
“아, 알겠습니다.”
나재민 일병이 후다닥 뛰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조인범 상병이 인상을 썼다.
“아, 저 새끼 진짜······. 나재민 저 녀석 언제 사람 되냐. 진짜 병신 같은 새끼가 와가지고.”
“이해하십시오. 그래도 짬 좀 찼지 말입니다.”
“짬이 찼으니까 문제지. 언제까지 신병처럼 저럴 거야? 고참이 시키면 재깍재깍 움직여야지.”
“하긴. 그건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 녀석은 4중대에 왜 온 겁니까?”
“야! 4중대는 만날 사고 치는 애들만 오는 곳인 줄 알아? 그렇게 되면 중대가 어떻게 운영되겠냐. 저런 X밥 녀석도 와야지.”
“아, 그런 겁니까?”
임상기 일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4중대는 꼴통들만 모아놓는 곳인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조인범 상병은 일진 출신이었다. 본인의 말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도 건달 생활을 좀 했다고 했다.
다행히 운이 좋아서 경찰서를 들락거리지는 않았지만 술을 과하게 좋아하는 데다가 술만 먹으면 인성이 변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실제로 대대에서 휴가를 갔다가 복귀할 때마다 몰래 술을 반입해 들어왔는데 그 과정에서 크게 사고를 치고 4중대로 쫓겨 온 것이다.
임상기 일병은 도벽이 좀 있었다. 게다가 소매치기 경력도 가지고 있었다.
임상기 일병도 전 부대에서 소대장의 물건을 훔치다 걸려서 이곳 4중대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추영호 일병은 조인범 상병과 비슷하게 폭력 사건으로 이곳으로 보내졌다.
전 부대에서 추영호 일병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고참이 있었는데 그 고참과 계급장을 떼고 한 판 붙었다가 고참을 기절시켜 버렸다.
여차하면 군사재판에 회부되어서 재판을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전 부대에서 잘 마무리를 지어서 이곳 17연대로 왔다.
그리고 연대에서 추영호 일병의 전력을 확인하고 4중대로 보내버린 것이었다.
이들 말고도 3소대 사고뭉치들은 더 있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3소대 인원이 전부 다 사고를 치고 온 것이 아니었다.
부대적응을 하지 못해서 밀려왔거나 인성검사에서 문제점이 발견된 이들도 4중대로 배치를 받았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신병 민호수 이병이었다.
“야, 민호수!”
따분하다는 얼굴로 천정을 바라보던 추영호 일병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구석에 앉아 있던 민호수 이병을 바라봤다.
“이병 민호수.”
“너 이리 와봐.”
“네?”
“새끼가 귀에 못을 박았나. 왜 한번 말할 때 못 알아듣고 지랄이야.”
추영호 일병이 버럭 했다. 민호수 이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추영호 일병에게 갔다.
“야 인마. 너 남자 새끼 맞냐?”
“네. 맞습니다.”
“하긴 맞으니까 군대 왔겠지. 그런데 남자 새끼가 왜 그렇게 예쁘장하게 생겼냐.”
“네?”
“아니, 남자가 왜 그렇게 여자처럼 생겼냐고.”
“죄송합니다.”
민호수 이병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추영호 일병이 피식 웃었다.
“이 새끼는 뭐 걸핏하면 죄송하다네.”
그러자 옆에 있던 임상기 일병이 입을 열었다.
“야! 영호야. 너는 왜 또 호수에게 뭐라고 하냐.”
“아니, 이 자식 생긴 것부터 맘에 안 듭니다. 군인은 군인답게 생겨야지 않겠습니까.”
“훗! 너같이?”
“네. 저같이 말입니다.”
“어휴······.”
임상기 일병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누가 봐도 자신보다 잘생긴 민호수 이병을 질투하는 건데 헛소리를 늘어놓는 추영호 일병이 어이없기만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추영호 일병이 다시 민호수 이병을 봤다.
“민호수.”
“이병 민호수.”
“춤이나 춰봐.”
“잘 못 들었습니다?”
“시발! 뭘 잘 못 들어! 춤춰보라고! 걸그룹 춤 말이야. 몰라?”
“······어, 그것이······.”
민호수 이병은 당황한 듯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추영호 일병이 어이없다는 듯 바라봤다.
“안 춰? 시발! 고참이 시키는데 안 하네. 너 지금 개기는 거냐?”
“아, 아닙니다.”
“그럼 뭔데? 고참이 시키는데 하지도 않는 것은 개기는 거지. 한번 뒤져볼래?”
“아닙니다. 지금 추겠습니다.”
민호수 일병이 큰 소리로 대답한 후 주춤주춤거리더니 아무 춤이나 추기 시작했다. 그러자 추영호 일병이 짜증을 냈다.
“X발 너 뭐하냐?”
“네?”
“노래 안 불러?”
“추, 춤을 추라고 하셔서······.”
“내가 춤추라고 했지 춤만 추라고 했어? 진짜 오늘 한번 죽어볼래?”
“아, 아닙니다.”
“똑바로 해라. 마지막 기회다.”
“네. 알겠습니다.”
하얗게 질린 민호수 일병이 노래를 불러가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임상기 일병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우, 잘 추는데. 야, 좀 더 골반을 흔들고. 더 힘차게 흔들어봐!”
“넵!”
민호수 이병은 좀 당황했지만 혼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럴수록 임상기 일병, 추호영 일병은 좋다며 박수를 쳤다.
하지만 조인범 상병은 사내놈이 여자 아이돌 춤추는 것이 싫었다.
“에이씨. 저게 뭐가 좋다고 지랄들이야. 나 장실 간다.”
조인범 상병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무실을 나갔다. 곧장 화장실로 가서 볼일을 본 후 나왔는데 저만치서 윤태민 소위가 걸어오고 있었다.
조인범 상병이 윤태민 소위에게 뛰어갔다.